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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연동 포레스트

by 은도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속 주인공 혜원은 임용고시에 낙방한 후 고향 집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자연이 주는 제철 식재료로 소담한 음식을 해 먹으며 사계절을 보낸다. 겨울에는 꽁꽁 언 배추를 캐어 뜨끈한 배춧국을 끓이고, 봄에는 향긋한 봄나물 파스타를, 여름에는 시원한 오이 콩국수를, 가을엔 달큼한 밤 조림을 만들어 먹는다. 식재료를 구하고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쩐지 마음이 평온해진다.


제주에 내려온 후 나는 매일 요리를 한다. 도처에 맛집이 넘쳐나지만 제주는 ‘살인 물가’로 악명 높은 곳이다. 매일같이 삼시 세끼를 다 사 먹다가는 소박한 내 통장은 금세 바닥을 드러낼 것이 분명하다. 대신 축 늘어진 뱃살은 얻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편의점 김밥이나 라면 따위로 끼니를 때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요리를 시작했다.


영화처럼 식재료를 자급자족하지는 못해도 나에게는 하나로마트가 있다. 그곳에 가면 제주의 자연에서 나는 신선한 식재료를 비교적 저렴한 값에 구할 수 있다. 제주산 당근, 감자, 고사리부터 신선한 해산물과 흑돼지 생고기까지, 마음만 먹으면 식당에 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훌륭한 요리를 해낼 수 있다. 다만 내 요리 실력이 복병이기는 하다.


[008] 숲(절물).jpg 절물 자연휴양림


제주에 내려온 직후인 4월 중순에는 고사리가 제철이었다. 하나로마트에서는 무려 생고사리를 팔고 있었다. 지금까지 육지에서 봐온 고사리는 짙은 갈색에 빼빼 마른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마트에서 만난 생고사리는 옅은 갈색과 초록색이 섞여 있었다. 심지어 촉촉하고 오동통해서 무척 먹음직스러웠다. 그 자태에 홀려 한 봉지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사리는 찬물에 담가 두었다가 한 번 삶아냈다. 고사리의 독성과 아린 맛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물기를 살짝 짜낸 고사리와 다진 마늘 한 스푼을 넣었다. 거기에 간장과 소금을 더해 심심하게 간을 맞췄다. 젓가락으로 살살 뒤적이며 볶다가 들기름을 두르고 깨소금을 뿌린 후 접시에 담아냈다. 고사리만으로는 서운하니 시금치 무침과 시금치 된장국도 만들었다. 오이고추와 김치까지 곁들여 한 끼 밥상을 차렸다.


경건한 마음으로 식탁에 앉아 밥을 크게 한술 떠서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시금치와 고사리를 조금씩 집어 밥과 함께 씹었다. 시금치의 아삭함과 고사리의 야들야들한 부드러움, 들기름의 고소한 향이 밥의 단맛과 함께 입 안 가득 퍼졌다. 음식이 목구멍을 모두 통과하기 전에 구수한 된장국 한 입, 상큼한 오이고추 한 입을 더했다. 다양한 맛과 식감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그릇은 바닥을 보이고 배는 두둑하게 불러왔다. 곧 만족스러운 포만감과 기분 좋은 나른함이 느껴졌다. 배달 음식이나 편의점 음식으로는 느낄 수 없는 만족감이었다. 식당에서 맛있게 식사를 끝낸 후의 만족감과도 조금 달랐다. 어머니의 집밥에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어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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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은 왜 내려왔냐고 묻는 고향 친구에게 ‘배가 고파서 왔다’고 말한다. 도시에서 그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런 그녀가 고향 집으로 돌아와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지친 마음을 회복해 간다. 타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시 생활을 했으니, 혜원은 정말 배가 고프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고팠던 것은 밥 한 끼에 담긴 온기가 아니었을까.


간단해 보이는 음식이라도 만드는 과정은 꽤나 번거롭다. 무엇을 만들지 고민하고,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볶거나 끓이거나 무치고, 간을 맞추고, 식기에 담아내고, 먹은 후 뒷정리까지 해야 하니 말이다. 그런 번거로움을 감수해 가며 나를 위한 요리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 정성을 쏟는다는 의미이다. 나를 돌본다는 의미이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내가 못마땅할 때, 미울 때, 꼴도 보기 싫을 만큼 싫어질 때. 그리고 그런 때도 있다. 마음이 공허할 때, 헛헛할 때, 외로울 때, 아무도 나를 위해주지 않는 것 같을 때. 바로 그럴 때가 나를 돌볼 때이다. 바쁜 일상에 치여 평소 대충 끼니를 때웠더라도 그때만큼은 나만을 위한 밥상을 차려보는 것은 어떨까. 서툴러도 정성을 담은 요리와 함께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어떨까. 간단한 안주를 준비하고 술잔에 술을 따라 주며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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