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게 내비치는

포에 산문집 中 단편소설 겨울 1편

by 포에

*이 이야기는 가상의 설정으로 창작된 픽션입니다.



한 사람의 손을 잡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건 그 손이 거머쥐고 있는 온도였다.

나는 다문 입에서 달싹거리는 언어가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바란다는 건, 과분하게 내가 뭔가를 원하고 있다는 거다. 평안한 자태로 눈 감고 있는 꿈 안이 더욱 평온할지도 몰라. 나는 그에게 자꾸 말을 건다.

우리는 모두 걱정하고 있어요, 깨어나서 보실 세상이 두려우신가요. 삭막한 공간이 내 말을 다 삼켜 버린다. 발화를 하고 있는데도 청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잇새에 매달린 말들이 쏟아지려는 것을 묵언으로 참아내면서 밤이 갔다.

아까 내게 드리우는 암담함을 빨리 떨쳐내고 싶었는데. 떨쳐내고 싶어서 나는 밖으로 나왔다.

볕이 비쳐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빛과 걷고 있었다.

밝은 것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잘 내딛던 발을 멈췄다. 늘 찾던 사람과 맞닥뜨렸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지금 겪는 시련이 시간이 지나 좀 아물면 찾아들 삶도 눈부실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을 빛이 감싸고도는 것을 느끼다가 한 바퀴를 돌았다. 점이 6개 박힌 주사위를 던지면 여러 칸을 거쳐 주사위가 다시 시작점에 다다르고 종착하는 것처럼. 내가 갈 수 있는 범위는 주사위처럼 정해진 길을 반복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나라 전도에 작은 점찍어둔 곳보다 반의 반은 더 작을 듯한 규모에서 나는 맴돌고 있었다. 그간의 일이 다 끝나면 여길 떠나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차오른다.

오늘도 떠날 수가 없다. 더 나아갈 수 있게 길 위에 햇빛을, 내 걸음 몫만큼의 햇빛을 펼쳐둔 것만 같았는데.


떠날 수 있는 날이 오고 있을까.

멀리, 흰 거품이 밀려오는 바다까지.


검은 반점이 박혀있는 섬돌을 딛고 나는 올라선다. 마루에 새겨진 무늬를 밟다가 중문을 열고 들어섰다.

누워있는 이는 없었고 빈자리에 들어온 그림자가 사람처럼 이불을 덮고 있었다.

다른 이가 남겨놓은 쪽지를 보았다. 퍼뜩 기억나지 않아 쪽지 활자를 몇 번 들여다보고 나서야 인식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림자는 간 사람이 남겨두고 간 무언가 같았다.




병원 가는 일자가 되어서 나는 익숙한 장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바깥에 세탁한 손수건을 빨랫줄에 걸어둔 것을 봤다. 옆에는 원단이 너무 얇아서 뒷 배경이 전부 비치는 커다란 천.

풍경에 스미는 바람이 너무 한들거려서 천의 연약한 자태가 휘날렸다. 천에 비치는 풍경도 비틀거렸다. 그때 생각했다. 한 폭 가려진 것 뒤에도 무언가가 있었구나. 뒤에서도 살아 있었구나.


보고 나서는, 잠에 들려고 눈을 감아도 그 광경이 떠올랐다. 천에 가려 희뿌옇게 보였지만 분명 그것을 기억한다. 그걸 보고 그를 생각했다는 것도. 내가 왜 그런 것에서 마음을 떼지 못하는 거였을까. 천의 색상이 배경을 가릴 정도로 진한 흰색이라 무심코 뒤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바람에 천이 날리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인데.


천에 가려져 드러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 흐릿하게나마 보인다는 것에 안도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었던 내 생각을 되짚었다. 상관없는 것을 보면서 그가 왜 떠올랐을까. 천에 희게 내비치던 건, 가려도 계속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것 같고.. 그가 간혹 힘겹게 내쉬던 숨결도 그런 거였을까.

병증이 삶을 암담하게 가리고 있지만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살고 싶다는 소망.


올봄.


그가 살아내기를 바라며 닿지 않는 말을 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봄이에요, 같이 보고 싶지 않나요.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난 문안 인사를 한다. 그에게 했던 말들이 뭉친 가닥으로 가고 있을까.

말의 가닥이 끊어지면 꿈속에라도 인사를 드릴게요.


그러니, 부디 회복해 주세요.

얼굴 보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계속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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