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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o Nov 28. 2023

어떤 약속 II

어김없이 봄은 다시 온다

1편에 이어집니다




지나간 청춘의 시간처럼 아득하고도 풋풋한 매화향. 그 향을 힘껏 들이마셨다. 그날 밤, 나를 둘러싼 밤공기에 진하게 머물고 있던 매화향은 나를 툭 깨워주는 주술사의 향료 같았고, 꽃등을 밝히고 피어있던 매화는 불이 켜진 마법 같았다. 선오야, (나의 이름을 부르며) 괜찮아, 약속처럼 다시 내가 왔어.

정지된 시공간에 있는 듯 나는 위로를 받았다.


다시 1년을 기약할 매화향. 그거면 됐다.

우린 서로 약속한 적 없지만, 너는 반드시 오는구나. 다시 매화가 필 때까지 나는 힘을 조금씩 내볼 수 있겠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마음속에서 꿈틀 피어 올라왔다. 희망이 없는 시간은 징벌과도 같다. 누구에게나 희망은 씨앗처럼 있어야 했다. 희망을 품지 않은 사람은 고통의 시간을 견디기 어려우므로.

 그제야 감았던 눈이 뜨인 사람처럼 온 세상에 봄이 오고 있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땅에서 깨어나고 있는 여린 초록의 풀들도 처음 보듯 한참을 바라보게 되고, 나뭇가지 끝에 오르고 있는 연한 새순도, 약속한 듯 하나둘 피어나는 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갇혀있다고 생각한 터널 저 멀리에서 빛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꽃보다 더 어여쁜 새순도 마른 가지에서 다시 피어났고, 이름을 아는 꽃들과 이름을 모르는 꽃들까지도 숭고하게 피어났다. 어쩌면, 누군가는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어김없이’ 봄이 온다는 이 섭리가, 해가 갈수록 엄청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해마다 새봄을 맞는 축복을 받는다.

 인생곡선을 다시 그려본다. 작년의 인생곡선에서 지금의 내 그래프는 반등했다. 별다른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희망을 품는 일이 가능해졌다. 꾸준히 작은 희망을 찾아내는 것에 힘을 쏟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구체적이고 가능한 것들을 찾아내고 있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 주는 것은 마음에 평화를 준다. ‘변함없다’라는 말이 어떤 이의 어리숙함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되어버린 세상이지만,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들 덕분에 세상은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나에겐 ‘어김없이’ 봄이 온다는 사실이 그렇다.

 나에겐 1년의 시간을 돌아와서 다시 피어날 매화향을 맡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수줍게 내민 손톱만 한 연둣빛 새순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그 생각을 하면 고통에 잠식되지 않는다.

나는 괜찮다고 달래 본다. 내년에도 내 후년에도 약속처럼 봄은 반드시 올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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