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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할미꽃밭의 약속

바람을 듣는 아이, 진

by 이다연


봄의 끝자락,

진은 할머니 집으로 가던 길에 사고를 당했어요.
엄마 아빠는 마지막 순간까지

진을 감싸 안아 아이를 살리고 떠나셨죠.


짧은 사이렌, 번쩍이는 불빛, 멈춘 시간…

어린 진의 마음엔 그 장면이 깊게 남았어요.


할머니는 병원 앞에서

진의 손을 꼬옥 잡아 주셨어요.

“우리 집에 가자.”


바람이 먼저 도착하는 언덕의 대문을 지나자,

장독대 옆 보랏빛 할미꽃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죠.

“저건 할미꽃이란다.
슬퍼서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라,
바람 소리를 더 잘 들으려고 그러는 거야.”

진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소리를 들으며 위로받는 꽃'

그 말이 가슴 어딘가에 살포시 내려앉았지요.


그날 밤, 잠은 오지 않았어요.
눈을 감으면 물빛과 불빛이 번갈아 떠올랐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죠.
할머니는 진을 눕히고 배를 만져주시며 창밖을 가리켰어요.

“저 산,들. 바다에도,
같은 밤이 어둠을 덮고 있단다.
우리는 지금,
밤의 이불을 덮고 있는 거야.”

아이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등을 꼭 잡았어요.

그 온기가 떨리는 마음을 덮어 주었어요.


다음 날부터 둘은 언덕밭을 돌보기로 했어요.
진은 물뿌리개를 들고 할미꽃 사이를 조심조심 걸었고, 바람이 거칠어지면 꽃들 곁에,

할머니가 짚으로 작은 울타리를 둘러주셨어요.

“가을이면 씨앗이
은빛 머리칼처럼 길어져서 제 집을 찾아가지.”

할머니는 씨앗 봉투를 흔들며 말씀하셨어요.

“사람 마음도 그래.
마음의 집을 찾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단다.”


**********▪︎

하늘이 비를 퍼붓던 어느 날,

진은 우비를 입고 마당으로 뛰어 나갔어요.
굵은 빗줄기 속에서도 할미꽃은

낮게 몸을 웅크린 채 버티고 있었죠.

“할머니, 꽃이 젖어요!”

할머니가 우산을 들고 달려와 둘이서 꽃 위를 가려 주었지요.

우산살에 비가 탁탁— 떨어질 때,

진의 눈에서 또르르 울음이 흘렀어요.

“할머니…
나..., 잘... 못하겠어요.”
“울어도 돼. 아가야.
울음은 비처럼 땅을 적셔
씨앗을 깨워 준단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따뜻했어요.


그날 밤, 할머니는 작은 상자를 꺼내 주셨죠.
낡은 단추, 오래된 편지 뭉치, 한 올의 은빛 실.
할머니는 은빛 실로 진이 외투의 떨어진 단추를

한 땀 한 땀 달아 주며 말씀하셨어요.

“단추는 떨어질 수 있어.
아무렴. 다시 달면 되지.
사람들 사이 마음도 그럴 수 있단다.”

조용한 저녁,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엔

소란스러웠던 비 오는 낮의 일들이 잠잠해졌고,
엄마 아빠의 그리운 미소가 떠올랐어요.

진은 천천히 바람을 듣는 법을 배웠죠.


시간은 서서히 흘러, 진은 자랐어요.
할머니의 바늘귀는 차츰 흐릿해졌지만,

밤이면 여전히 노란 쪽지에 씨앗을 넣어서

창문에 놓아주셨죠.

“할미꽃처럼
슬퍼서가 아니라,
듣기 위해 고개를 숙일 것.”


그리고 어느 조용한 아침,

할머니의 숨은 오래된 길을 다 걸어

바람 쪽으로 흘러갔어요.
진은 문턱에 앉아 한참 울었지요.


해 질 녘 언덕에서,

진의 서러운 메아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흘러갔어요.
바람메아리는 할미꽃에 닿았고,

가느다란 빛이 내려앉았지요.


햇살을 머금은 노란 날개,

맑은 물빛 눈— 요정 리아가 나타났고,
그 옆엔 스케치북을 든 소녀,

아직 요정은 아니지만 숲이 인정한

마음을 듣는 아이 마렌이 서 있었어요.


리아가 허공을 부드럽게 쓸자,

공기 속 반짝임이 씨앗이 되어

언덕 위로 사르르— 흩어졌어요.

“진, 네 울음을 우리가 들었어.
바람도, 꽃도 들었단다.”
‘마음이 아플 땐,
바람에게 먼저 말하렴.’

'정말, 누군가 듣고 있었구나.'

바람메아리는 요정들에게 닿았고,
울음이 잦아들자 바람이 창틀을 스치며 말했어요.

“여기야.
네가 서 있을 자리.”


슬픔의 며칠 뒤,

진은 언덕으로 올랐어요.

“할머니…
보고 싶어요.”

그 한마디가 바람을 타자,

할미꽃 사이에 노란 빛비가 내렸어요.
리아와 마렌이 다시 나타났지요.


리아는 두 손을 맞잡고 속삭였어요.

“이 언덕에...
할머니를 닮은 꽃밭을 선물할게.”

은빛 가루가 빙글 돌며 땅으로 내려앉자,
보랏빛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나

은빛 씨앗 머리를 흔들었어요.


꽃잎 끝엔 할머니가 즐겨 쓰시던

은빛 실이 빛처럼 반짝였어요.


마렌은 주머니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진의 손에 쥐여 주었지요.

봉투 겉에는 분명히 할머니의 글씨가 또렷했어요.

“그리움이 마를 때,
여기에 네 말을 심거라.”

진은 봉투를 가슴에 꼭 안았어요.

그리고 흙을 살살 다져

씨앗을 한 알, 한 알 심고 울먹이며 말했어요.

“할머니, 저는 여기 있어요.
바람을 듣고, 원하신다면 오늘도,
누군가의 떨어진 단추를 다시 달아 줄게요.”

할미꽃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끄덕였고,

바람이 잔잔히 대답했어요.
그 모습은 멀리서 많은 할머니들이 동시에 손주에게

“참, 잘했구나.”

하고 인사하는 것과 닮아 있었어요.


**********▪︎

그날 이후,

진은 가끔 언덕에 올라 씨앗을 심었어요.
슬픔이 갈라질 듯 마를 때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요.

“돌아와 줘서 고마워.”

그러면 바람은 대답했어요.

"세상은 변해도—
듣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면,
사랑은 언제든 너의 곁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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