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바다에 그림처럼 노상 떠있던 군함들이 북진을 시작하자 아버지들이 돌아왔다.
아버지 말로는 미국 군함이라고 했다. 용옥이 보기에는 매양 그 자리가 그 자리인 것 같았는데 말을 들으니 그제야 한 뼘쯤 움직인 것도 같았다.
용옥의 부친은 오자마자 서둘러 짐을 싸게 했다. 미군함이 북진을 시작한 것은 서울이 수복됐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단 것이다.
계절을 세 번이 지나도록 함께 지냈건만 서로 작별인사를 할 틈도 없었다.
사지를 같이 넘나들던 아버지들끼리도 데면데면한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완장을 찬 사람들이 다시 들이닥치기 전에 떠나야 했다.
아기를 놔둔 채 용옥의 모친이 외가로 달려가 할머니를 모셔오고자 했으나 할머니를 완강했다. 할머니는 큰 외숙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다른 얘기지만 용옥의 식구가 떠난 후 아주 나중에 국군으로 나갔던 둘째 외숙이 진짜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데리고 본가로 갔던 둘째 숙모도 다시 돌아와서 용옥의 외가는 태안에서 다시 일가를 일으켜 오래 살았다.
식구는 아기가 하나 늘었을 뿐인데 짐은 올 때보다 두 배는 됐다. 피난 살림도 살림이라고 많이도 모아놨다고 용옥의 모친이 말했다. 엄마들은 살림살이를 서로 의논해서 나눴다.
그때는 눈물을 훔쳐가며 가면 잘 살라는 덕담도 나눴지만 피난살이에서 만난 인연은 인연이 아니라고 용옥은 속으로 생각했다. 애틋한 정도 뭣도 없이 그저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용옥도 같이 지냈던 아이들에게 정이 없었다. 아마 한 솥밥을 먹은 식구가 아니라 참혹했던 전란의 일부분인 사람들로 인식됐던 게 아닌가 싶다.
지긋지긋한 전쟁처럼 지긋지긋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어서 빨리 벗어나고만 싶은.
용옥으로서는 천리포를 벗어나 경동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 있을 것만 같았다. 집도 학교도 교회며 동인천역 번화가까지도 모든 게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다.
집을 떠나온 일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집이 주저앉은 일이며, 부친의 당숙 집이 불탄 일이며, 괭이부리말의 물도 안 나오던 하꼬방이며, 오줌똥이 둥둥 떠다니던 바다며, 화평동을 지나올 때 봤던 아이들의 시신들은 다 아닌 것 같고 전쟁은 여기 천리포의 일인 것처럼 생각됐다.
여기만 벗어나면.
피난을 나설 때 쓸데없는 짐을 챙긴다고 호령하던 아버지는 이번에는 엄마가 사발 종지 하나까지 꾸리는데도 못 본 척했다. 아이들을 매질하던 부지깽이도 엄마가 챙겼다. 알고 보면 본래 집주인인 술이아제네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들은 원래 자기들 물건이었던 것처럼 제비까지 뽑아가며 싸그리 챙겼다.
집에 가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게 뻔했다. 도둑질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을 안 하고 누가 우리 살림을 들고 간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모두 선량하게 살아온 사람들이건만 전쟁식 계산법이었다.
언니가 아기를 업고 아기 짐을 이었다. 부친은 큰 살림을 외가에서 끌어 온 수레에 얹고 아우들을 태웠다. 엄마와 용옥이 남은 짐을 이고 지고 수레를 따랐다. 가끔 아버지가 용옥을 수레에 바꿔 태웠다. 한 번씩 엄마와 언니가 아기를 바꿔 업었다.
그렇게 짐을 이고 지고 끌고 용옥 일가는 오던 길을 되짚어 수복되었다고 믿는 경동의 본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