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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마음은 붉었다

늦가을, 내장산에서

by 다소느림

평일의 내장산, 주말보다 붐비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주말의 혼잡을 피하고 싶어

일부러 평일을 골랐다.
“이 정도면 한적하겠지”라는

안일한 기대와 함께.


하지만 내장산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그 기대는 무너졌다.
정읍 시내로 들어서는 길목부터

이미 차량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산 초입에 가까워질수록 버스,

승용차, 관광객이 서로 얽히며
가을의 끝을 붙잡으려는 사람들로

도로가 숨을 쉬지 못했다.


우리는 아침 일찍 도착해서

다행히 주차를 가깝고 편한곳에 하였지만

끝나고 내려올때쯤에는 주차할 곳도 없이

사람들로 붐볐다.


단풍보다 먼저 맞이한 건,

사람의 물결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모두가 같은 이유로,

같은 산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고,

누군가는 연인의 손을 잡고,
또 어떤 노부부는 천천히

서로의 발맞추며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붐빔 속에서도,

그 안에 담긴 이유들은 따뜻했다.


덜 물든 산, 그러나 계절은 분명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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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의 단풍은 늘

‘대한민국 단풍의 대명사’로 불린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기대했던 붉은 터널 대신,

초록과 노랑,

갈색이 뒤섞인 숲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지난주가 절정이라더니,
정작 눈앞의 내장산은 아직 ‘물드는 중’이었다.
붉게 타올라야 할 잎들이 아직 덜 익었고,
그마저도 강풍에 떨어져

바닥에 먼저 누워 있었다.

“올해는 이상하게 덜 물들었네.”

곁에서 흘리듯 말하던 이의 한마디가,
묘하게 현실적으로 들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유는 명확했다.
올가을은 유난히 따뜻했다.
밤낮의 일교차가 크지 않았고,
단풍이 가장 예쁘게 물드는 시기인

‘급격한 기온 차’가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내장산의 색은

전처럼 강렬하진 않았지만,
대신 부드러웠다.


노랗게 번지는 은행잎과

붉은빛이 살짝 번진 단풍잎,
그 사이로 불어오는 산바람이
잔잔하게 계절의 숨결을 전하고 있었다.


단풍보다 더 진하게 남은 것


단풍이 덜 물들었다는 아쉬움은 잠시였다.
산을 오르며 마주한 건,

오히려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셀카를 찍는 젊은 커플,
가게에 도란도란 앉아

음식을 먹고있는 가족들,
그리고 산길 중간에서

커피를 팔며 인사하던 상인의 얼굴.


그들 모두가 이 계절을 즐기고 있었다.
단풍은 배경일 뿐,
사람들 속에서 계절이 완성되고 있었다.


내장사 경내로 들어서니

풍경은 한층 더 고요했다.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들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앉고,
그 위를 밟을 때마다

‘사각’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마음에 닿았다.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걸,
그 소리가 말해주는 듯했다.


돌아오는 길, 느림의 미학


점심 무렵,

우리는 산을 내려왔다.
하산하는 사람들과

오르는 사람들이 엇갈리며
도로는 다시 혼잡해졌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반대편으로

또다시 긴 행렬이 이어졌다.
5km 넘게 이어진 정체 구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답답하지 않았다.


창문을 살짝 열자,
바람 속에 단풍 냄새와

흙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엔진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묘하게 어울렸다.

가을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하루였다.


덜 물들어도, 충분히 아름다웠던 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가을은 언제나,

지나간 뒤에야 더 선명해진다.


오늘의 내장산은
절정의 색 대신,

여유와 느림을 남겼다.


단풍은 덜 물들었지만,
그날의 마음은 분명 붉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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