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어릴 때는 팥을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다. 팥빵보다는 소보루 빵이나 크림빵을 더 좋아했고, 팥빙수보다는 과일빙수를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팥이 좋아졌다. 팥죽도 좋아지고, 팥밥도 좋아하고, 팥칼국수, 팥빵, 팥시루떡, 팥양갱, 팥붕어빵도 좋아졌다. 팥을 설탕과 소금 넣고 삶아 냉장고에 넣어 놓고 한 숟가락씩 퍼먹기도 한다. 이렇게 입맛이 바뀌는 이유는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겠지.
한국 사람들은 팥을 좋아한다. 팥이 들어가는 음식이 진짜 많다. 휴게소에만 가도 호두과자, 겨울에는 붕어빵, 호빵, 여름에는 팥빙수. 계절마다 다르게 먹기도 한다. 팥은 액운을 쫓는다고 하여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끓여 먹고, 이사를 하게 되면 시루떡을 나눠 먹는다. 팥은 부기를 빼주고, 혈압상승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피부도 맑아지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경상도 지역 특색 빵은 팥이 들어 있는 것이 많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빵 3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3가지는 어쩔 수 없이 내 근처에 있는 빵이거나 내가 많이 접한 빵일 수밖에 없다.
1. 진주찐빵(수복빵집)
진주 중앙시장 근처에 가면 "수복빵집"이라는 파란색 바탕에 네 글자만 진하게 박힌 간판을 찾을 수 있다. 세련되지도 않고, 가게에 테이블도 많지 않으며, 추억과 연륜이 묻어 있는 것 같은, 요즘말로 아주 힙한 가게가 있다. 빵집이라고 하지만 파는 빵은 딱 두 가지. 찐빵과 꿀빵만을 팔며 팥죽과 팥빙수를 판다. 진주에서 먹는 찐빵은 조금 특이하다. 원래 찐빵크기의 반정도 되는 찐빵 위에 계피가 들어간 달달한 팥죽을 부어 준다. 그러면 그 작은 찐빵을 팥죽에 푹 담가서 최대한 빵이 팥죽을 머금게 해야 한다. 그냥은 머금지 못하고 반으로 동강내서 안쪽에 있는 폭신한빵 쪽으로 팥죽을 머금게 한다. 팥죽이 흐르지 않게 잘 준비한 다음 한입에 넣으면 내가 팥죽을 먹고 있는 건지 찐빵을 먹고 있는 건지 헷갈리는 느낌을 음미한다. 그냥 단맛이 나는 팥죽과 찐빵을 같이 먹는 것인데, 가게 근처를 지나갈 때면 들릴 수밖에 없는 맛이다. 내가 아마 제일 처음 진주 찐빵을 먹은 것은 남편이 나의 대학원 동기들이 놀러 왔을 때, 수복빵집이 유명하다며 거기에서 찐빵을 사서 손님들에게 대접을 했던 때였던 것 같다. 지금도 수복빵집은 오픈런을 해야 하는 곳이다. 12시에 문을 열지만 3~4시만 되어도 빵이 다 떨어져서 먹지 못한다. 주말에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데, 줄을 서는 사람들은 현지인 관광객이 섞여 있다. 진주사람들에게도 이것은 추억의 맛이다. 어릴 때 엄마손을 잡고 진주 중앙시장에 갔을 때 획득할 수 있는 그런 추억이 있다고들 한다. 진주 맛집이라고 검색하면 진주 냉면, 진주비빔밥과 함께 뜨는 것이 이 수복빵집이다. 수복 빵집만 이렇게 찐빵을 파는 줄 알았는데, 진주에서 꽤 오래된 만두가게(여기도 진주사람들의 추억의가게다)에서찐빵을 시킨 적이 있었다, 찐빵과 함께 팥죽이 나왔다. (포장을 해서 빵과 팥죽을 따로 주셨다. ) 알고 보니 예전에 진주에서 찐빵이라고 하면 팥죽을 올려주는 집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다 사라지고 수복빵집만 살아남은 것 같다.
여름에 수복빵집에는 팥빙수도 많이 먹는다. 2명이 오면 꼭 팥빙수 하나와 찐빵하나를 시켜서 같이 먹는다. 이 팥빙수도 너무나 단순하다. 거친 얼음 위에 수정과 같은 계피맛이 나는 단물 같은 것(수정과 느낌) 팥 듬뿍이 올라간다. 그 흔한 팥빙수 젤리, 떡, 과일후르츠 등은 어디에도 없다. 단순한 맛이지만 이것도 별미다. 진짜 옛날 옛날 팥빙수 맛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팥빙수 맛. 항상 그렇듯 가장 클래식한 것이 오래가는 것 같다. 화려한 토핑과 살살 녹는 얼음으로 유혹하는 빙수들 사이에서도 이 팥빙수는 빛을 내며 사람들이 찾고 있다. 나도 아이들을 데리고 수복빵집을 찾는데, 또 이렇게 누군가의 추억의 맛집이 되는 것이겠지.
진주에서도 꿀빵을 파는데, 이것은 통영의 꿀빵과 다르다. 생긴 것은 비슷하게 생겼지만, 맛은 아예 다른 맛이다. 진주 꿀빵은 꿀빵에 설탕코팅을 입힌 것 같다. 마치 꿀빵탕후루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겉이 바삭하다. 설탕의 농도가 중요한데 설탕을 통영 꿀빵보다 더 많이 졸여서 이런 바삭한 식감을 내는 것 같다. 하지만 단맛을 좋아하는 나도 2개가 최대치였다.
빙수와 찐빵을 시키면 이렇게 무심한듯 포크와 수저를 꼽아주신다. 빵 말고 팥쥭을 퍼먹으면 계피맛이나는 팥죽맛을 느낄 수 있다
왼: 진주 꿀빵. 그날은 금방나온 따끈따끈한 꿀빵을 먹을 수 있었다. 띠뜻해도 탕후루처럼 바삭하다. 오:포크로 잘라 찐빵의 단면적을 넓혀 최대한 골고루 팥죽을 빵에 스며들게 한다
2. 통영 꿀빵
통영에는 꿀빵이 유명하다. 통영에 가면 충무김밥집과 꿀빵집이 엄청 많다. 통영을 가장 대표하는 음식들이기도 하다. 실제로 충무김밥은 통영에서 먹는 것과 다른 지역에서 먹는 것이 맛이 다르다. 충무김밥이 비싸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통영에서 거주를 할 때도 자주 사 먹던 음식이었다. 나는 결혼하고 한 10년 정도 통영에 살았다. 보통 그 지역사람들은 그지역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먹는 음식이나 식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통영 사람들은 꿀빵을 좋아한다. 물론 사람들 마다 다르겠지만(꿀빵을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통영사람들에게도 대체로 천대받지 않고 사랑받고 있다. 나도 통영에 살 때도 꿀빵을 자주 사 먹었다. 요즘은 고구마, 유자, 크림치즈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속을 넣어서 화려한 꿀빵을 많이 팔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팥이 든 꿀빵(기본)이다. 가게마다 약간씩 맛이 다르다. 통영 사람들도 자신이 선호하는 꿀빵집이 있다. 나도 몇 군데가 있다. 다들 자신들이 원조라고 말한다. 그 말도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아주 오래전에는 통영에 꿀빵집이 몇 군데 있었다고 한다. 통영 사람들의 간식으로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꿀빵집들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었던 곳이 오미사 꿀빵집이다. 오미사 꿀빵은 원래상호가 없었었고, 오미사라는 수선집 옆에 있었다고 해서 사람들이 오미사 꿀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오미사 꿀빵집이 갑자기 유명해지면서(tv에 나온 것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없어졌던 꿀빵집들이 부활한 것 같다. 그래서 다들 자신들이 원조라고 이야기한다. 각자 꿀빵집마다 약간씩의 비법과 맛이 다르니 그 매력을 찾는 것도 재미있는 것 같다.
몇 년 전에 학생들과 함께 꿀빵을 만드는 체험을 하러 오미사꿀빵집에 간 적이 있었다. 내가 먹어본 꿀빵 중에 가장 맛있었던 꿀빵은 팥소를 넣은 도넛을 금방 튀겨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것을 그대로 먹은 것(엄밀하게 따지만 꿀빵은 아니다.)이었다. 그 꿀빵은 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먹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게 너무 맛있어서 잊히지가 않는다. 뜨겁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고, 기름의 고소함과 팥소의 달달함이 만나 너무 맛있었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솔직히 진주 꿀빵보다는 통영꿀빵을 훨씬 좋아한다. 진주 꿀빵과 통영꿀빵 중 어느 것이 더 맛있을까라는 주제로 토론대회를 한다면 나는 통영 꿀빵이 이길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어휘와 논리를 다 쓸 것이다. 통영 꿀빵은 겉에 코팅된 달달한 시럽과 부드러운 빵, 많이 달지 않은 팥소의 조합은 한 개 먹으면 섭섭한 맛이기도 하다. 아니 앉은자리에서 한 박스(10개)는 쉽게 먹을 것 같다.(하지만 살찌는 게 겁이 나서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이 꿀빵과의 최고의 조합은 흰 우유다. 나는 이 조합을 통영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배웠다. 학교 갔다 와서 꿀빵이랑 찬우유를 간식으로 먹었다고 했다. 통영에서 태어나고 초등학교 2학년까지 자란 우리 아이들도 꿀빵을 좋아한다. 우리 가족에게 한통은 너무 부족하다. 우리가 식구가 많은 게 아니다. 엄마(나), 아빠(남편), 딸, 아들 네 식구지만 아빠는 빵보다는 술을 좋아해서 별로 꿀빵에 관심이 없고 결국 세 명이 경쟁을 하는데도 나는 10개 중 두 개먹기가 힘들다.먹는 걸로 자식들과 눈치를 보며 경쟁하는 것은 엄마로서의 직업윤리가 찔리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살찌니까 한 개만 먹어! 내일 아침에 먹어!"라고 말하는 걱정으로 위장한 무기가 있다)
쫀득한 느낌의 통영꿀빵. 여러가지 맛있지만 할미입맛인 저는 팥이 제일 좋습니다.
3. 경주빵
경주에도 경주 빵집이 많다. 경주도 관광지인만큼 경주에 가면 가장 흔하게 경주빵을 많이 산다. 경주에도 여러 가지 경주빵집이 있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가장 많이 먹었던 집은 황남빵이었다. 아빠가 경주에 출장 가실 때마다 황남빵을 사서 오셨다. 그러면 엄마는 그 황남빵을 김치냉장고(왜 김치냉장고에 넣었는지는 잘 모르겠다.)에 넣어두셨다. 나는 그 황남빵을 하나씩 빼먹었다. 팥빵을 별로 안 좋아하던 시절부터 황남빵은 좋아했는데, 그렇게 하나씩 빼먹는 재미가 좋았을 수도 있다. 차가운 경주빵을 앞니로 깨물면 마치 한천이 들어가지 않은 양갱을 먹는 기분이 든다. 속을 싸고 있는 빵맛도 중요하지만 팥소가 많이 달지 않은 것이 맛있는 것 같다. 입안은 팥으로 도배되고 그 어금니로 씹으면서 응집된 팥소의 부드러움을 음미하면 된다. 혀가 맛을 느낀다고 하지만 나는 제일 처음 깨물 때 앞니에 닿는 차갑고 부드러운 맛(약간의 온기를 가진 차가움. 이가 시린 것과 다른 기분 좋은 시원함)을 좋아한다. 모든 빵은 냉장고에 들어가면 맛이 없지만 황남빵은 냉장고에서 막 꺼낸 것이 맛있다. 이 경주빵도 흰 우유랑 가장 찰떡궁합을 자랑한다. 경주빵은 팥이 많이 들어가 있다. 겉에 코팅된 것처럼 얇은 빵은 거들 뿐인 것 같지만 또 막상 집집마다 이 빵의 식감이 다르다. 만두피처럼 얇고 쫀득한 경주빵이 있는가 하면 약간 두껍고 폭신한 맛의 경주 빵이 있다. 뭐가 좋냐고 물어본다면 "둘 다!"
초콜릿 상자에서 초콜릿을 하나씩 빼먹듯 냉장고에서 경주빵 상자를 꺼내어 차곡차곡 세워져 있는 빵을 하나씩 꺼내먹던 기억 때문인지 가끔 너무 그립고 먹고 싶다.그래서 경주만 가면 나는 경주빵을 산다. 어릴 때는 아빠가 사 오셨고 가족들과 나눠먹었고 지금도 나의 아이들과 나눠먹는다. 한 상자를 금세 먹어버리는 것은 너무 아쉽다. 언젠가는 한통을 온전히 나를 위해서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하나씩 하나씩 빼서 한통을 혼자 다 먹고 싶다.
결국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맛있는 것들을 나두고 순위를 매겨라고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열을 가려보라고 세 가지를 한꺼번에 누가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한번 해볼 만한 것 같다. 한 번은 고민해 볼 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