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및 역할 구조 분석 | 임원진은 없고 실무자만 갈아 넣은 회사
이상하게도 나는 이번 편의 연재를 가장 기다렸다.
이번 화는 앞선 현재 상태 진단보다 나라는 사람을 더 신랄하게 까발리고,
아이러니와 창피한 이야기가 쏟아질 예정인데도 말이다.
이왕 마주 보기로 한 것, 끝까지 파보자.
브랜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구조와 역할을 더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시점을 조금 바꿔보겠다.
'나'라는 브랜드를 운영하는 하나의 '회사'에 나를 비유해 보는 것이다.
정상적인 회사라면 CEO, CFO, 영업팀, 기획팀 등
회사 전체를 굴리기 위한 수직/수평적 구조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의 전략과 방향성을 제시할 CEO,
'나'라는 제품을 만들고 관리할 CPO, '나의 재무'를 담당해 줄 CFO 등이 필요하다.
'나'라는 회사는 전략과 방향을 제시할 최고위 임원진의 역할부터
실제로 은행 번호표를 뽑아야 하는 말단 실무진의 역할까지
나 스스로 혼자 감당해야 한다.
즉, 모두가 일인다역 구조의 1인 회사다.
본격적으로 '나'라는 회사의 뚜껑을 열어보니
C레벨(방향/통제)과 영업팀은 완전 실종 상태였다.
또 다른 부서는 파업 상태고, 몇몇 직원은 자기 일하고 싶을 때만 뜬금없이 가끔 고개를 쳐들었다.
방향을 잡아야 할 선장(CEO)은 출근조차 안 했고,
나를 팔아야 할 CMO는 존재 여부도 불분명했다.
오직 호기심 많은 R&D팀과 도덕적 결벽을 가진 감사팀,
그리고 말단 실무자들만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기형적 구조였다. (좋소기업... 아니, 동아리 수준이다)
결국 실무자인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야근을 전담했다는 뜻이다.
더 웃긴 건, 그 와중에 실속도 없는 '대외 협력 리스크팀'만 쓸데없이 바빴다는 점이다.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이라는 명목으로
남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경조사를 챙기고 평판을 관리했다.
본업의 컨트롤 타워는 비워둔채,
이것이 곧 사회생활이라며 안도했다.
임원진 없이 실무자의
호기심만으로 굴러간 회사의 목적지는 분명했다.
결국엔 전문성 대신 넓고 얕은 '물경력'만 쌓이며
끊임없이 흔들리고 표류했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방황 덕에,
나는 시장에서 제법 잘 팔리는 '멀티플레이어', '올라운더'가 되어버렸다.
혼자 분전하던 실무자인 나는 다른 회사에 실무 제공 역할로 '파견 요청'을 받곤 했다.
다행인지 CMO도 없는 '디자인/기획 실무자인 나'가 밖에 나가 열심히 돈을 벌어왔고,
무능하고 게으른 '내 회사의 재무팀장'은 열심히 벌어 온 돈을 전략 없이 금고에 처박을 뿐이었다.
계획 없는 표류가 생존 무기가 된 아이러니고,
무능으로 돈을 축적한 아이러니다.
(처박아 둘 게 아니라 불렸어야지라고 말하고 싶다.)
지난 현재 상태 진단(‘일=나’라는 위험한 물아일체)에서,
나는 노력 이상의 결과를 얻은 부분들을 나열했다.
짧은 대입 준비의 결과는 수석으로, 재밌다며 쌓은 경험은 실무 경력으로,
그 경력은 다시 추천과 소개로 이어졌다고. (그렇다, 비꼴려고 적어뒀다)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고,
계획조차 없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과분한 성과들이었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나는 '운구기일(運九技一)'의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운'이라는 것도
결국 실무자가 미친 듯이 뛰어다닐 때만
간신히 작동한다는 점이었다.
임원진의 부재를 실무자의 체력과 운으로 덮고 있었는데,
결국 과부하가 걸린 실무진이 지쳐버리자, 그 운도 함께 멈췄다.
나를 보호해 줄 CHRO(인사/복지)와 인사팀의 부재로,
혹사당하던 실무자(나)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마지막 남은 유일한 직원마저 드디어 파업을 선언한 것이다)
아프고도 웃픈 현실이었다.
이것으로 2화(상태), 3화(자산), 4화(인식), 5화(구조)에 걸친
'내부 진단'을 공식적으로 종료한다.
종료 후 포장을 걷어낸 나의 민낯은 다음과 같았다.
[2화. 현재 상태] 확장은 있었으나 정리는 없는 기형적 개발.
[3화. 자산 평가] 다양함을 가장한 산만함, 치밀함을 가장한 강박, 적극성을 가장한 충동
[4화. 내부 인식] 어른으로 포장한 유아적 사고, 바쁨으로 위장한 책임 회피.
[5화. 역할 분석] 무너진 구조, 컨트롤 타워 실종, 효율을 핑계 삼은 무질서한 1인극.
일반적인 브랜딩 진단에서 미래 상태(To-Be)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현재 상태(As-Is)의 명확한 파악은 반드시 필요하다.
바닥에 떨어진 먼지까지 털어내는
나라는 길고 긴 '내부 진단' 작업은 이렇게 끝이 났다.
자조적 평가와 함께 자기 객관화를 끝내고 보니
남은 문장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브랜드 진단 보고서 - 내부 진단 : 최종 As-Is 평가 및 결론]
기획, 디자인, 조언 등 눈에 보이는 구멍들을 혼자 다 메우며,
결과적으로 전체 맥락을 짚을 줄 아는 '가성비 좋은 올라운더'로 기능함.
성실함과 요행으로 '당장의 밥벌이'는 해냈으나,
정작 전략과 구조의 부재가 완벽히 은폐된 상태.
지금처럼 유능한 실무자의 충동과 임기응변에만 의지한다면,
이 브랜드의 성장은 현재 규모에서 멈출 수밖에 없음.
이제는 재료를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재료를 담을 '그릇(구조)'을 설계해야 할 시점.
바닥에 쏟아 놓은 이 참담한 결과물들은,
나중에 새로운 뼈대(To-Be)를 세울 때 아주 중요한 거름이 될 것이다.
내부는 충분히 헤집었다.
내 안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고장 났는지 확인했으니,
이제 세상은 이런 나를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지
외부 이미지를 점검해 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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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내 이름은 ‘가성비’ | 외부 이미지 진단 | 남들이 나를 '가성비 잡부'로 쓰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