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적으로 본 글의 치유 기능
1.글은 나를 종종 치유시켜주었다.
글을 쓰는 것이 좋았다. 특히 불안하거나 외롭거나 답답하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 글을 쓰면 마음이 안정되었다. 가끔은 시원했고, 또 새로운 해결방법을 찾아내서 힘이 솟구쳤다. 그 이유가 늘 궁금했다. 그것을 알기 위해 언어학이나 정신분석학 책들을 보았지만 만만치 않았다. 깊이 들어가면 프로이트도 그렇지만 특히 라캉(깡) 등의 책은 매우 난해했다. 그것에 대한 해설서 등도 역시 어렵고 다양했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러다 비교적 쉬운 책을 찾아냈다. 일본 학자 우치다 타츠 루가 쓴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갈라파고스, 2010)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어렵게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래서 더욱더 쉽고, 간단하게 소개하는데. 이런 책을 보면서 나의 체험을 섞어 왜 글쓰기가 우리를 치유하는가를 살펴보았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설들을 보면서, 내가 나의 체험을 섞어서 이런 '꼭지'를 만들어 본 것이다. 그러니 학문적 엄밀성이 떨어지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2.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라캉(깡)에 의하면 상상계는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면서 자아를 인식하는 세계다. 그전까지는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을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무질서하게 인지한다.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 않았다. 생후 6개월이 되면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아, 저 거울 속의 존재가 나로구나’하는 것을 인지하고 통일된 자아상을 확립한다고 한다. 이것을 거울 단계라고 부르며 상상계라고 표현한다. (꼭 거울을 보아서가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 그런 인식을 갖는 것 아닐까? 거울이 없던 옛날에는 어땠겠나? 나는 책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 좀 따지는 습성이 있다.) 어쨌든 상상계 속에서 아이는 전체 자신을 ‘나’로 인식하고 표현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간다.
그리고 점점 더 성장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사회적 질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상징계 속의 자아가 나타난다. 그것을 라캉(깡)은 ‘주체’라고 표현한다. 이제 사람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그 사회의 언어로 표현되는 자신을 인식한다. 부모, 자식, 선생, 학생, 무슨무슨 직업...등등. 그리고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 후, 살아간다.
실재계는 우리 앞에 펼쳐진 질서로부터 벗어난 광대한 물질, 욕망의 세계로 알려져 있다. 이거 학문적으로 보면 매우 복잡하고 표현하기 힘들다. 다만 나는 이것을 욕망, 죽음, 삶이 경계없이 어우러지고 소용돌이 치는 세계로 받아들이고 있다.
3.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자아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렇게 나누어진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속의 자아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상징계인 매스컴이나 사회적 관점에서 훌륭한 인격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학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학생들이나 언론 인터뷰에서 항상 인격적이고 논리적인 이야기를 한다. 이런 모습에서 ‘상징계 속의 주체’를 볼 수 있다. 반면에 그가 고등학교 동창생들과 가족들에게 대하는 것은 다를 것이다. 그는 긴장을 풀고 좀 더 편안하게 자신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의 생활 속에서 타인과 교류하며 만든 ‘상상계 속의 나’다. 그런데 그 학자가 밤에 아내와 섹스를 할 때, 그는 상징계의 근엄한 주체도 아니고, 상상계 속의 편안한 나도 아니다. 그는 ‘실재계 속의 욕망하는 자아’다.
인간은 이렇게 서로 다른 ‘계’에서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며, 다르게 평가받는다. 누구나 다 그렇다. 하지만 이런 불일치가 너무 심하거나 노출이 되면 문제가 생긴다. 방송에서 인터뷰할 때는 근엄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사적인 만남에서 풀어지고 감정적인 면을 보이면 주책 맞다고 본다. 반대로 사적인 자리에서는 진솔한 사람이 사회적인 장에서 너무 근엄하면 위선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또 그 교수의 섹스하는 장면이 몰카에 찍혀서 유포되면 설령 아내와 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하물며 불륜을 저지르면 세상은 더 비난한다. 바람둥이가 그랬다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상징계, 상상계 속의 그 교수와 너무 다른 실재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일치와 폭로는 종종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피해자가 너무 과도하게 비난받아 억울한 경우도 있지만 위선이 너무 심한 경우도 있다. 특히 타인의 불일치에 대해서 준엄하게 비난하고, 꾸짖고, 심판하던 사람이 나중에 더 그런 행동을한 것이 발각되면 자신이 억울하다고 한다. (물론 묵묵히 당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현상을 우리는 ‘내로남불’이라 부른다. 남의 불륜은 비난하면서 자기가 할 때는 로맨스라 여기는 이 현상은 인간에게 종종 나타난다. ... 하지만 요즘은 그런 것이 발각되어도 더 뻔뻔스럽게 나대는 세상이 되었다. 어쨌든 이런 모든 현상은 누구에게나 발생하는데 대개는 유명하지 않기에 큰 이슈가 되지 않는데 어쨌든 우리는 인간 누구나 갖고 있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차이를 갖고 살아간다.
4. 자아가 불일치 하는 정신적 환자들
그런데 정신적 환자들이 있다. 그들은 무의식 혹은 의식 속에 깃든 상처 받은 자아로 인해 괴로워하고,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자아가 분열을 일으키는 가운데 힘들어한다. 세가지 자아가 충돌하고, 불화하는 것이다. 그 차이가 적당하고 숨어 있으면, 그냥 숨기고 살아갈 수 있다. 나름대로 일치시켜가면서....그러나 그 차이가 심해서, 밖에 비치는 상징계 속의 자아는 멋지고 근엄한데,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는 가족,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갖고 있는 진솔하고 풀어진 관계의 차이가 너무 심하면 피곤해진다. 자신이 위선자라는 것을 당연히 느끼게 되면서 심리적 압박감이 있다. 거기다 실재계 속의 욕망이 꿈틀거리면 더 자아가 복잡해지고 불편해진다. 거기다 그것을 몰래 실행하면, 문제가 더 커진다. 가끔 우리 사회에서 저명한 인사가 사회에 알려진 상징적 자아는 매우 훌륭하고 소박하게 보이는데 그만 실재계 속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서 추문이 터지고...그래서 그 자아불일치 현상 속에서 도피처러 자살을 하기도 한다. 그럼 그의 '상징적 자아'만을 생각한 사람들은 그것을 고정 변수로 두고, 그를 괴롭힌 외부의 실체를 찾으려 하지만......내 생각에는 이런 자아의 불일치 현상에서 오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남을 비난하기는 쉽지만 우리 모두 갖고 있는 위험성 아닐까? 나는 그런 사람들을 과도하게 비난하고 싶지도 않고, 동시에 과도하게 변호해주고 싶지도 않다. 약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반대로 그런 도피처로 자살을 하지 않고, 반대로 뻔뻔스럽게 자신을 변호하고 나대는 인간들도 있는데 이런 인간들을 '소시오패스'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 10 - 20% 가 그렇다는데, 유명한 사람은 물론, 직장인, 주변 사람들 속에서도 종종 목격하게 된다.
5. 어떻게 극복할까?
그럼 이런 상처, 불안, 불일치...이런 것들 앞에서 늘 시달리면서 사는 대부분의 인간은 어떻게 이것을 극복하나?
정신분석학자가 이야기 하는 치료 방법은 환자가 정신분석가에게 자신에 대해서 털어놓는 것이다. 환자는 이때 항상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신분석가는 진실을 이야기하라고 강요하지 않은 채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환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무의식 세계에 깃든 상처를 의식의 세계로 갖고 온다. 환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바람직한 자아, 되고 싶은 자아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변명한다. 그렇게 자아 불일치 현상을 어떻게든 변명하면서 자아 통합을 꾀하게 된다. 정신분석가는 '진실'을 파헤쳐서 환자에게 '당신은 지금 이런 것이 문제이니, 반성하시오.'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환자는 듣고 있는 분석가가 자신을 그렇게 보아주기를 바라고, 인정받기를 원하며, 그렇게 말하는 가운데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믿게 된다. 분석가는 환자가 그렇게 이야기하도록 유도하고 그 바람을 ‘들어줌으로써’ 도와준다. 그렇게 환자와 정신분석가는 이런 공동 작업을 하는 가운데 환자는 스스로 ‘통합된 자아’를 만든다. 그때 치료가 끝난다는 것이다. 정신 분석이란 행위는 진실을 파헤친다고, 사람을 양파 껍질 까는 것처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간의 거짓, 바람, 위선을 스스로 만들어서 의식 속에 ‘통합된 자아’를 만드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엄밀하지 않다. 내가 글쓰기, 삶의 체험을 통해서 얻은 이야기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미리 알린다.)
6. 종교도 그렇지 않은가?
정신 분석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종교도 그렇지 않던가? 사람은 이성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하면 모호함과 모순과 위선이 드러난다. 그 헐벗은 인간들을 종교적 믿음과 주장은 위로하고 치유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마치 원숭이들이 서로 보듬고 쓰다듬고, 이를 잡아주면서 단결하고 위로하듯이, 인간은 고상한 존재, 초월적 존재를 상상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그것을 100% 믿지 않지만...다만, 그런 측면은 있다고 본다. )
7. 글이 치유하는 과정
글을 쓰는 행위도 비슷한 것 같다. 글을 못 견디게 쓰고 싶을 때는 자기 안에 고민, 갈등이 많을 때다. 상처받고거나, 괴롭거나 길을 잃었을 때다. 이것을 누군가에게 풀어내지 못하면 병이 될 수 있다. 대화를 하면서 푸는 것이 좋은데, 요즘 세상에 함부로 대화를 나눌 사람을 찾기란 힘들다. 친구 사이도 서로 입장이 다르면 왜곡되고, 그런 것이 퍼져나갈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은 이름을 드러내든, 익명으로든 글을 쓰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부터 공감받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우선, 글은 대체적으로 타인을 의식하면서 쓰는 것이다. 즉 환자가 정신분석가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자신을 다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타인이 나를 이렇게 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집어넣어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완전한 비밀 일기가 아닌 이상...) 그래서 사람들은 글을 쓰고 나면 공감, 라이킷을 원한다. 당연한 심리다. 여기서부터 초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도 상징계의 자아를 의식하면서, 늘 그럴듯하고, 멋진 말만 쓰는 사람들은 피곤해진다. 이런 인터넷 글쓰기도 그렇다. 그런 글들을 보면 그럴듯 한데, 글 많이 써본 사람들은 금방 안다. 그가 얼마나 피곤하게 사는 줄...글 하나쓰기 위해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한지......가장 편안한 글쓰기는 상상계 속의 자아가 쓰는 진솔하고, 편안한 글이다. 어깨에 힘 빼고, 사회적인 시선으로부터 물러나...그러나 약간은 상징계 속의 자아도 나오고....그리고 실재계 속의 자아, 흐릿하고 모호한 그런 욕망의 덩어리는 함부로 드러내면 위험해진다. 그래서 많이들 숨기게 된다. 그런데 약간, 그런 것을 드러내는 것도 요즘 세상에는 톡 쏘는 맛이 있다.가끔 그런 글도 보이지만...결국, 그것도 피곤해진다.
그러니 글쓰기란 이런 상상계 속의 자아, 상징계 속의 자아, 실재계 속의 자아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적정선을 잡아내서 자신을 표현하고, 사람들로부터 공감받고, 소통하는 가운데 스스로 치유하고, 혹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힘을 불러낸다.
하지만 과도하게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고, 대단한 성과를 기대할 때 글쓰기는 피곤해진다. 이런 인터넷 글쓰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책을 출간해도 그렇다. 나는 많은 여행기, 여행 에세이를 냈고 또 요즘에는 소설도 두 권 출간했지만, 그런 것을 기대했다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중간에 그만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 자체가 좋았고, 그것을 통해 내 삶을 점검하고, 돌아보면서, 또 작은 희망, 작은 목표를 불러냈기에 지금도 글쓰기를 즐기면서 쓰고 있다. 지금, 나에게 글쓰기의 즐거움이란 물론, 사회적 평가, 돈벌기도 약간의 목표도 되지만, 그보다는 나 자신을 표현하고, 정리하고, 상처, 불안을 치유하면서 계속 작은 희망을 불러내면서 작은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다. 그것이 글쓰기를 통해서 이루어질 때, 글쓰기는 너무도 내 삶에 중요해지게 된다. 아마 나는 내 기력이 다하는 날까지, 어떤 형태로든, 어디서든 쓰고 있을 것 같다. 가수가 늘 노래 부르듯이, 시인이 늘 시를 쓰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8. 너무 과도하면 안된다.
글이 너무도 현실 속의 자신과 다르면 거짓말이고, 위선이 되어서 문제가 되지만 자신 안에 깃든 은밀한 부끄러움, 갈등, 고민, 욕망을 해소하고 극복하는 차원이라면 또, 바람직한 자기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효과가 있다.
어차피 타인들은 그런 속 깊은 자신의 세계를 잘 알지도 못하고, 타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달팽이처럼 자기 집을 만들고, 그 과정을 통해 ‘새롭게 형성되는’ 자신을 느끼며 가끔 그 집 속에 들어가 쉬는 것, 그것이 치유 과정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거짓말을 하고 위선적인 자신을 만든다는 것이 아니다. 타인들을 속이고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심리적 차원에서 은밀한 자아의 상처, 타인은 모르는 자신만의 고민, 갈등을 치유하는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약간의 자기 기만, 자기 통합, 자기 위로를 말한다.
그것은 타인에게 거짓을 말하고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다. 이것이 가증스럽게 느껴진다면 세상은 너무 가혹한 곳이 된다. 양파를 까고, 또 까고, 또, 또 까면 텅 빈 ‘공(空)’이 나온다. 이 공의 영역에서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대 자유를 얻는 특별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하다. 그 지경까지 가면 허망하고 미쳐버릴 수도 있다.
나는 젊었을 때 그런 나와 인간의 행태가 싫어서 가혹하게 까고 또 까다가 미쳐버릴 뻔했었다. 또 글에 대해서 회의하고 멀리하는 과정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그런 나와 사람들이 측은해지면서 약간의 기만과 위선은 인정하는 편이다. 부족하고 불쌍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종교든 위로를 해주면서도 먼저 요구하는 것이 있다. 회개, 참회, 성찰이다. 타인은 몰라도 자신만이 아는 죄, 부끄러움에 대해 먼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 후에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좋게 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한다. 글 쓰는 과정에서도 그런 현상은 발생한다. 하여 자신에 대한 반성, 성찰은 항상 필요하고 그것이 따르는 올바른 글쓰기를 통해 치유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없이, 글을 통해 더 유명해지고, 뭔가를 성취하고 싶고...이런 욕망만 그득하면 자칫 실수를 하게 되고, 결국 고통만 받게 되는 경우를 나는 지난 37년간의 여행, 글쓰기에서 목격해 왔다.
9. 나의 경우
나는 여행하는 삶을 살아오면서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이 많다. 한동안은 잠을 못 잘 정도로 괴로웠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나를 반성하는 동시에 내 행위에 대해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해왔다. 물론, 내 여행과 삶은 언어로 규정되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복잡하다. 나도 실재계의 ‘욕망하는 자아’와 내가 생활 속에서 만든 ‘상상계의 나’와 책과 매스컴을 통해서 형성된 ‘상징계의 주체’는 다르다. 그 다름을 보고 인정하면서도, 너무 차이가 나지 않게 적절하게 조정하면서 살아왔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렇다는 이야기다. 한참 정신없이 살 때는 뭐가 뭔지 모르고 살았다. 그저 글을 쓰면서 의미 부여를 하고, 노력했을 뿐이다. 그것이 너무 과하면 ‘의미 과잉’이 되어서 피곤했다. 그렇다고 의미의 세계를 파괴하면서 욕망의 세계로 몸을 던질 수는 없었다.
가끔 주변에서 그런 이들을 보았는데 추락하는 이들도 종종 보았다. 과장된 포장과 위선은 나쁘지만 너무 벌거벗은 욕망을 드러내며 사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중도, 중용이 올바른 길이란 것은 여기에도 해당된다.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꾸미고 치장하는 것은 인간의 특성이고 아름다움 아닌가? 내가 글에 대해 회의하다가 차차 글을 사랑하게 된 이유다. 우리는 글을 통해서 자기를 만들어 간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있다. 좋은 언어를 사용하며, 자신이 원하는 상을 표현하면서, 만들어가는 행위 그것이 자기 치유의 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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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지상, 여행작가 이지상은 26권의 여행기, 여행에세이를 출간했고, 얼마 전에는 장편 소설 '무인카페(문학수첩, 2024), '가족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었어'(문학수첩, 2025)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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