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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내미 이 복 희 Dec 14. 2023

오래된 신발

누군가에게 편한 신발

                                        

나는 신발을 살 때 진열장의 신발 중 첫눈에 쏙 들어오는 것을 고른다. 사람을 사귈 때도 첫눈에 호감이 가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듯 신발을 고를 때도 그랬다. 처음 사 올 때와는 달리 신다 보면 불편하거나 싫증이 나는 신발도 더러 있다. 낡고 닳아도 수선을 해서까지 오래도록 신는 신발도 있지만, 신발장 구석에 자리만 차지하게 둔 신발도 있다.



  큰맘 먹고 신발장을 정리했다. 사놓고 몇 번 신지도 않은 것과 유행이 지난 것, 아까워 버리지도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언제 샀는지 기억에도 없는 신발까지 수두룩하게 꺼내 놓았다. 신을까 말까, 요모조모 따져가며 쓰레기봉투에 버리려다 한 번만 더 신으려고 다시 신발장에 넣기도 했다. 여러 켤레를 정리했는데도 신발장은 아직도 포화 상태다.



  신발장 제일 아래 칸에 자리한 검정 부츠가 눈길을 끈다. 오른손으로 치켜들고 굽이며 안쪽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딱딱하지도 않고 그리 부드럽지도 않은 재질의 가죽은 반지르르 윤기가 났다. 굽도 4cm 정도로 안성맞춤이다. 리본 모양의 장식이 세련미까지 더해 보인다. 유행을 타지 않고 싫증도 나지 않아 신을수록 정이 가는 신발이다. 싫증을 잘 내는 나의 성미에 유독, 이 부츠만이 제외된 이유는 따로 있다.




남편이 사준 첫 선물로 이십오 년이나 된 신발이다. 이 신발 속에는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는 내가 있다. 막 연애를 시작한 풋사과 같은 상큼함이 들어있고, 전화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거리던 시절이 있다. 그를 향해 언제라도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신발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늘 대기 중이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신발을 선물하면 여자가 그 신발을 신고 도망을 가버린다는 속설을 뒤집고, 이 부츠를 사준 남자와 알콩달콩 잘살고 있다.



  그가 하는 말이 폭죽처럼 터져 내 가슴에 별들로 떨어져 내리던 연애 시절, 새 부츠는 늘 또각또각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를 향해 문을 활짝 연 심장은 행복과 환희가 넘쳐났다. ‘새 신발인데 발가락이 좀 아프면 어때. 뒤꿈치에 잡히는 물집쯤이야, 새것이니까.’ 이 정도의 불편쯤이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발을 벗어놓으면 사람들에게 밟히지 않을까, 잃어버리지 않을까,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으로 잘 모셔 두었다. 그래도 다시 신을 때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온 신경이 그곳으로 갔다.



  늘 새 신발을 신었을 때와 같은 나날이었으면 오죽 좋겠는가. 아이가 하나둘 태어나고, 오늘도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수밖에 없는 일상이 지속됐다. 그와 불협화음이 일 때면 부츠 바닥에서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새 신발의 불편을 감수했던 인내는 어디 가고 밴댕이 소갈딱지가 되어 가슴에 꽁꽁 빗장을 걸었다. 환상이 깨진 날부터 그와 나는 조율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긋난 톱니바퀴의 덜커덕거리는 소리를 잠재우는 데는 서로의 따뜻한 마음이 묘약이었다.



  한때 위험수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가 신겨 주는 신발을 신고, 그의 울타리 안에서도 나의 안뜰은 향기로웠지만,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가자 바깥뜰로 내 생활의 폭이 넓어졌다. 밖의 햇살이 너무 강렬하고 아름다워 현혹될 것 같았다. 그는 어느 때나 내게 잘 맞는 맞춤형 신발인 줄 알았다. 욕심을 부려 이것저것 폭을 넓혀나가자 신발은 나를 옥죄어 왔다. 가슴에 멍울이 생기고 상처엔 고름이 터질 듯했다. 그럴 때는 신고 있는 신발을 벗어 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나의 이런 생각이 부질없는 망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 가정의 울타리를 더 튼튼히 다지기 위한 그의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나 역시 사랑하는 가족이 그 무엇보다도 먼저다.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남편과 아이들에게 되돌리면서 나만의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그의 따사로운 눈빛이 내 어깨에 햇살처럼 쏟아졌다. 신발은 느슨해지고 원래의 편안한 상태로 나를 끌어안았다. 그가 내준 안뜰에서 누리는 행복이 새삼스레 고마웠다. 어린 날 아버지가 사서 신겨 주시던 신발만큼이나 편하고 포근했다.



  장날, 시장에 가신 아버지가 노란 운동화를 사 오셨다. 디자인이 그 당시 최고 인기였던 N 상표랑 유사해 짝퉁이라도 보는 순간 맘에 들었다. 냉큼 신발을 신어보고는 인상이 찡그려졌다. 지난번 신발을 살 때보다 내가 얼마나 컸는지 아버지께서는 가늠을 못 하셨던 것 같다. 꽉 끼어 발가락이 좀 아팠지만, 엄지발가락을 살짝 꼬부렸다. 맘에 드는 신발을 놓치기 싫었다. 아프다고 했으면 아버지께서는 다음 장날에 바꾸러 가셨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나는 그날부터 고역을 치러야 했다. 걸음걸이도 부자연스럽고 세게 디디면 발가락이 신발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결국에는 뒤축을 꺾어 신고 다니다 아버지께 들통 나서 지청구를 들어야만 했다. ‘키는 더디 크면서 발은 왜 이리 빨리 커 가는지.’ 얼마 신지도 못하고 나는 그 신발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했다. 맞지 않는 신발을 고집하다가 된통 당한 경험은 그 이후로 신발을 살 때마다 그때의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 포근한 마음만큼은 지금도 큰 울림으로 남아있다.



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수십 켤레의 신발이 내게 왔다가 갔다. 인생의 반환점인 나이에 들어서고 보니 내가 상처 나게 한 신발, 화풀이의 대상이 된 신발, 묵묵히 나를 지켜봐 준 신발들을 되새기게 된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신발이 되기보다 내가 필요한 신발만 골라 신어 온 게 아닌지. 이제는 나를 위한 신발보다 누군가에게 편한 신발이 되어 줄 때다.



  오래된 신발을 정성 들여 닦는다. 밑창이 닳았지만 수선하면 새것이나 마찬가지다. 반짝반짝 광이 나는 신발을 현관에 가지런히 놓아둔다. 한 사람을 오래도록 지켜준 믿음과 신뢰가 녹아있는 삶의 버팀목이 된 신발이다. 앞으로 오십 년, 아니 백 년은 너끈히 신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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