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언론학 대학원을 다니는 석사 과정의 학생이었으며 촬영 및 영상편집기술이 뛰어났다.
그는 예의 그 기술을 십분 활용하여 내 연구분야에 대한 홍보영상을 훌륭히 촬영해주었다.
우리는 촬영을 위해 두 번 만났다.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고 볼 수 없다.
촬영 후 멀리까지 찾아온 그들과 나누던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가 던진 질문이다.
'제가 박사를 해야 할까요?'
직업소개에 써 있듯이 내 직업은 의사다.
나는 언론학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나오는 정도, 내가 책과 신문에서 읽은 정도만 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중립적인 조언이 가능하다.
대학원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꽤 잘 안다. 나도 다니기도 했고 가르치기도 하고,
주변에 학위를 가진 사람이 여기저기 있기도 하고.
'부모님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나요?'
'아니오. 저는 학비도 제가 벌고 있어서 꼭 부모님 의견을 물어보진 않아도 됩니다.'
'부모님과 상의해도 됩니다. 하지만 결정은 꼭 본인이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큰 결정을 내릴 때는 어떤 결정 후에도 약간은 후회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때 결정을 본인이 내린 사람들이 후회를 덜 합니다.
후회의 원인을 남에게 돌릴 여지가 덜하기 때문입니다.
'박사를 하는 것이 졸업 후 진로에 도움이 되나요?'
'많이는 아닙니다. 저희 분야는 직장에서 실무를 많이 하는 것을 더 인정해 줍니다.'
'그런데 왜 박사를 하려고 하나요?'
'일단 박사를 하면 주변에 보기 좋은 것도 있고.. 지금 모시는 교수님이 참 좋은 분인데 박사를 하라고 여러 번 권유하셨습니다.'
'박사학위를 하게 되면 학위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실무만큼 인정도 못 받으니 큰 실익은 없어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사학위를 하고 싶은 이유가 뭔가요?'
'지도교수님께서 인정해주시고 권유해주셨으니 잘해보고 싶습니다. 석사 학위때 많이 아껴주고 도와주셨는데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박사학위를 본인이 하고 싶은 건가요,
지도교수님이 선생님께 시키고 싶은 건가요?
그리고 박사학위를 하고 싶은 건가요,
지도교수님을 더 모시고 싶은 건가요?
> 후회를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라.
중요한 결정이 늘 어려운 이유는 후회가 남기 때문이다.
후회는 '아, 저녁 먹고 디저트를 안 먹었어야 하는 건데' 수준의 후회부터, 피눈물을 흘리고 수 년간 속으로 곰씹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는 것까지 다양하다.
모든 결정은 후회를 동반한다.
당신이 어떤 '가지 않은 길' 을 갔다고 해도 당신은 후회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후회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결정을 복기하며 더 나은 상황을 앞으로 예견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이것은 후회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위한 용기다.
자신의 선택과 그에 따른 불리함과 억울함을 받아들이겠다는 용기.
후회는 과거에 대한 복기가 용기가 아닌 분노로 이어지게 한다.
받아들임을 선택하지 못하면 우리는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 비난받은 자아는 두려움에 빠진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우리는 소위 '결정장애'라는 우울한 상태에 빠진다. 나 자신을 위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지 못하게 되어 타인이나 권위에 의존하게 된다. 의존과 우울은 불과 온기처럼 밀접하다. 심하게 의존하는 당신은 그 상황에 대해 더욱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 의존하는 사람은 주변의 악인들에게 좋은 먹잇감 (victim)이 되어 이용당한다.
용기는 고요한 내면 속에서 진솔한 행복을 느끼고, 열정을 찾을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얻어진다. 용기의 획득은 시간이 필요하고 평생의 과업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결정은 후회가 따른다.' (당신이 후회를 할 예정이기 때문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결정을 (주변사람이 하지 않고) 스스로 하는 것이다.
스스로 한 결정에서는 나중에 남을 원망할 여지가 별로 없다. 이는 배수진을 치고 용기를 내는 것이다. 스스로 결정해 행동에 옮기는 것 자체가 자아의 용기를 증가시킨다.
이런 결정의 반복을 통해 자아는 성장하고, 자신에게는 유리하고 세상에게는 이로운 선택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간다.
> 남이 원하는 것 아닌 내가 원하는 것
결정이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결정 이후의 상황을 우리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조언을 구해도, 결정 이후의 상황을 나보다 잘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세상의 어떤 현명한 사람도 바깥의 지식과 내 주변에 대해서만 알지, 나의 내면은 자신 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앞서의 대화에서, 지도교수님은 당신을 '인정한 적'이 없다.
교수는 본인이 지도하는 학생이 늘어날 수록 유리하다. 대학원생은 종속성이 있는 (저임금의) 노동자이면서, 학위를 받게 되면 논문과 학위 자체가 모두 교수의 실적이 된다.
물론 대학원생으로 들여 가르치고 싶지도 않을 만큼 싫다면 그런 권유를 하지 않았겠지만, 해당 교수가 '자신을 위해서' 그랬는지 (자신의 욕심), '자신과 당신, 그리고 학문의 발전' (약간의 욕심과 많은 양심) 을 위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또, '박사학위를 본인 vs 지도교수가 하고 싶은건지?' ''박사학위를 하고 싶은 건지, 지도교수를 모시고 싶은 건지?' 에 대한 답은 사실 질문자 본인은 말 속에 이미 들어 있다. 이 말을 한 당사자라면 생각을 곰씹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충분히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정말 원하는 바를 들여다보는 것은 어렵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내가 과거에 스스로에게 했던 거짓말들을 인정하고 걷어 내야 정말 자신이 원하는 바가 보인다.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변의 상황에 의해 판단하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했던 말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 별 생각없이 조언하는 친구들의 말들. 이들이 당신의 내면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0%다. 이들은 당신의 내면을 전혀 모른다.
타인의 조언이나 영향에 의한 결정은 당신 스스로 내리는 결정에 대한 불확실성을 피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당장은 편해보이지만, 당신의 모든 주변사람들은 당신보다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내 경험상 (그리고 아마 당신의 경험도) 세상 사람들은 야속하다. 주변인들은 나를 위한다며 여러가지 조언을 하다가도 자기가 조금이라도 피해를 볼 것 같으면 쉽게 침묵한다. 우리는 주변인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 만으로 그들이 우리를 이용하려고 하는지, 이용해서 공동선을 꿈꾸는지, 혹은 나를 위해 헌신하는지 (그런 사람은 아마 부모 정도 뿐이겠지만.) 대개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의 결정이 당신을 위한 것인지의 판단은 남의 말을 따를 것이 아니라 반드시 스스로 해야한다!
> '하던대로' 를 피하라
앞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내가 원하는 것' 을 찾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므로 필자는 여기에 마지막 묘수를 더하고자 한다. 바로 며칠 전에 썼던 글 '게으름이 악이라고?' 와 연결되는 내용이다.
해당 글에서 나는 가상의 옛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이야기에 나오는 주요 인물 3인은 변화를 선택함으로써 선한결과를 이루었고, 귀찮아서 하던대로 함으로써 악한 결과를 초래했다.
당신이 대학원 진학을 할 것인지, 취업을 할 것인지; 혹은 퇴사를 할 것인지, 회사를 계속 다닐 것인지; 두 개의 다른 직장에 합격하였는데, 어디를 갈 것인지; 등의 조언에서, 반드시 익숙하고 편안한 길이 있고 더 도전적이고 새로워 보이는 길이 있다.
익숙하고 편안한 길은 당신에게 변화를 제공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썩거나 고장나게 된다.
그리고 추후에 반드시 더 큰 변화의 도전을 받게 된다.
익숙하고 편안한 길은 '낙타의 길' 이다.
니체는 인간 성격의 3단계 진화를 낙타-사자-아이 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낙타는 무릎꿇고 앉아 무겁게 차곡차곡 쌓이는 짐을 받아들인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를 외치며 육중한 기합과 함께 일어서 끊임없이 걷는다. 사자는 포효하여 자신을 속박하려는 모든 것들을 파괴한다. 그는 자유를 얻었지만 파괴된 폐허 속에서 공허하다.
아이는 즐겁고 창의적이며,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롭다. 과거에 어떤 상처를 받았던 새로운 놀이감이 생기면 기꺼워하고 몰두한다. 창의적이고 몰두함으로써 노력이나 힘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수준의 성취를 이루어내기도 한다.
도전적이고 새로워 보이는 길은 '아이의 길' 이다. 아이들은 자기 놀잇감이 미래에 어떻게 될 지 걱정하지 않는다. 기꺼이 파괴하고, 빠르게 재창조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야 당신은 사라졌던 열정을 되찾을 수 있다. 일과 행복, 자존감의 추구의 방향을 일치시킬 수 있다.
'익숙하고 편안한 길' 을 피하는 것이 후회가 적은 결정을 내리는 마지막 묘수이다.
>요약
후회는 받아들이되 적게 하라. 답은 내 안에 있다. 변화를 두려워 말고, 오히려 변화하지 않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