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징조
“좋은 부모가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당신의 영광이다. -존 밀턴
아이는 최고의 스승이다. 대학 은사였던 미나가와 히로시 선생님은 “여자라면 언젠가 아이는 꼭 낳아야지.”라고 말씀하셨다. “아이를 낳으면 눈빛이 따뜻해지니까.”라고 덧붙이셨다. 요즘 같으면 여성 비하라던가 차별이라고 비난이 쏟아질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몇 년이 흘러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성장을 돕는 일이야 말로 신이 나에게 선사한 축복이며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이의 태몽을 4번 꿨다. 실은 나뿐만 아니라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에 관한 꿈을 꾼다. 그것을 태몽이라고 하는데 태몽에 관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메디아의 아스티아게스 왕의 딸 만다네는 음부에서 포도나무가 자라서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꿈을 꿨다. 그리고 세계 최초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의 창건한 키루스 대왕이 태어났다. 나의 경우, 어머니가 나를 가졌을 때 꿨던 태몽은 꽃뱀 꿈이었다고 한다. 작고 예쁜 꽃뱀이 엄마 곁으로 다가오길래 기뻐하며 조심스럽게 유리병에 담아 품에 안았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나도 꿈을 통해 내 아이와 첫 만남을 가졌다. 그것은 마치 영화 속의 판타지처럼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결혼하고 얼마 후 갑자기 졸음이 몰려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자 꿈에 3~4살 정도 된 남자아이가 나를 보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의 몸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마치 이 세상 아이가 아닌 듯 신성하고 고귀하게 느껴졌다. 꿈에서 깨어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꿈에서 본 아이가 아른거리며 자꾸만 생각났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바로 아이가 생겼다고 느꼈다. ‘일을 하고 있는 와중에 계획에 없던 애가 들어섰으니 이 일을 어쩌나...’하며 노심초사하면서도 꿈에서 본 아이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 마냥 기뻤다. 주위에서 다들 기뻐해 줘서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니 점점 마음이 편안해졌었다.
두 번째 태몽을 꾼 것은 4~5개월 정도 되었을 무렵이다. 나는 두 번째 태몽으로 아이가 남자아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일본의 병원은 너무나 신중해서 6개월이 지나도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꿈으로 아이의 성별을 짐작했다. 어느 날 꿈에서 한 지인 선배가 나타났다. “이거 아버지 유품인데 너에게 맡길게.” 라며 흰 속싸개에 수북이 담겨 있는 금은보화를 건네주었다. 그 순간 내가 앉아있던 침대 위에 금은보화가 한가득 쌓였다. 특히 금과 루비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어떤 할아버지가 내가 앉아있던 침대 위에 보석들 중에서 보석으로 만든 큐피드 조각상만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려야 한다며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조각상에서 남자의 상징이 ‘똑!’ 하고 침대 위로 굴러 떨어졌다. 나는 꿈에서 깼을 때 남자아이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6개월쯤 되었을 무렵 세 번째 꿈을 꿨다. 남자아이가 현관문을 박차고 활짝 웃으며 내 품으로 달려 들어왔다. 맨 처음 태몽에 나타나서 방긋방긋 웃고 있던 그 아이였다. ‘만약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런 얼굴을 한 아이일까?’하며 태어날 아이의 모습을 꿈에서 본 아이의 얼굴을 겹쳐서 상상하곤 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태어난 아이는 꿈에서 봤던 남자아이와 똑같은 얼굴로 자라고 있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나와 할머니는 항상 아이를 “다까라모노(보물)”라고 불렀다.
좋은 일이 있기 전에는 시련이 따른다. 정기 검진을 받았을 무렵에 나는 이미 의사로부터 전치태반과 전치혈관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부연 설명 없이 “만일 출혈이 있을 경우에 서둘러서 병원으로 오세요.”라는 말만 하고는 진료를 마쳤다. 그런 어느 날 병원에 정기 검진 날이라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피가 나기 시작했다. 배를 만져 보니 배 속의 아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병원에 가려고 준비했었기 때문에 그대로 서둘러서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도착해서 위급한 상황을 설명했더니 간호사가 “서너 시간 전에 병원에 세 쌍둥이가 태어나서 인큐베이터가 없는 상황이라 다른 병원으로 가야 될지도 몰라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최근에 임산부를 병원에서 받아 주지를 않아서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다가 끝내 숨졌다는 뉴스로 문제가 되었던 시기였다. 간호사로부터 그 얘기를 들으니 “나도 타라이마와 시 당해서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다가 죽는 거 아니야?” 라며 겁이 덜컹 났다.
그런데 상황은 위급했다. 출혈이 생각보다 심하다고 판단했던지 병원 측에서 인큐베이터를 빌려 주겠다고 했고 바로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실에 도착하자 “안녕하세요. 오늘 수술을 담당한 마츠이입니다.”, “마취를 담당한 이토입니다.” 라며 수술 담당과 마취담당 의사들이 친절하게 나에게 각각 자기소개를 하며 안심시켰다. 수술대에서 부분 마취를 했는지 의식은 또렷했지만 나의 몸 아래쪽에서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쓰윽 쓰윽. 적막이 흐르는 수술실이었지만 마치 종이를 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몸이 들썩 거렸다. 몸은 아무런 감각이 없었지만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나는 무심하게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며 눈만 멀뚱멀뚱 뜬 채 수술실 한쪽만 처다 보고 있었다. 이윽고 고개를 돌리고 있던 반대편에서 “김상, 여기 좀 보세요.”라는 말이 들려서 고개를 돌려 봤다. 그랬더니 간호사가 아이의 얼굴이 보이도록 나의 얼굴 가까이에서 아이를 안고 나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왈칵 눈물이 나왔다. 찰나였지만 이렇게 새 생명이 태어난 것을 실감했던 감동의 순간이었다. 2, 3초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의사들이 갑자기 서둘러서 마취를 했고 나는 바로 의식을 잃었다.
네 번째 꿈을 꾼 것은 아이가 태어난 날 밤이었다. 그때 나는 ‘수이 텐구’ 앞마당에 서 있었다. 아이를 갖은 직후에 참배 가서 ‘무사 출산 기원 의식’을 치렀던 그 신사였다. 그런데 하늘에서 에코가 걸린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너에게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의 옷을 하사하노라”라는 말과 동시에 하늘에서 왕족이 입는 기모노가 훨훨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옷이 내 몸을 감쌌고 어느새 내가 그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면서 나는 멀리서 기모노를 입은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이 나에게 입혀준 검은색 비단 기모노는 후리소데(소매)가 긴 왕녀의 기모노였다. 기모노를 입은 내 몸에서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고 고귀한 기품에서 위엄을 느꼈다. 기모노의 양 어깨에는 황금색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이라고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꿈을 꾸고 몇 년이 지나도 궁금증이 가시지를 않아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이 어떤 모양인지 찾아봤다. 그랬더니 양 어깨에 새겨져 있던 바로 그 크로버 같은 모양이 아닌가! 일본에 오래 살긴 했어도 하루하루 먹고사는데 급급한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문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꿈에서 내가 입었던 검은색 비단 기모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기모노에서 빛이 뿜어 나오는 듯한 아우라를 느꼈기 때문에 장례 때 입는 상복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는데 말이다. 요즘 사극에서야 왕세자들이 검은색 비단옷도 입더구먼 왕족의 옷에서 검은색 비단옷은 없었던 것 같다. ‘수이 텐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련성을 찾아봤지만 관련이 없는 듯했다. 어쨌든 마지막 태몽은 하늘이 나에게 아이 낳느라 고생했다고 내려주신 선물이 아니었을까? 찰나였지만 비장하면서도 장엄했던 나의 모습,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