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의 어린이 中 봄과 여름 사이
나는 식집사다. 식집사란 반려 동물을 키우듯이 식물에 애정을 갖고 키우는 사람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식물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꽃을 너무 좋아한다. 우리나라의 계절 중 봄은 나에게 하루하루가 너무 아쉬운 때이다. 봄에 피어나는 산수유, 목련, 개나리, 벚꽃, 진달래, 수선화, 튤립, 이름 모를 작은 꽃을 보기에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내 직업이 3, 4월에 꽃 구경 시간을 내기 힘들만큼 바쁘다. 새로운 어린이를 만나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요되는 달이다. 평일에 초과 근무를 종종 하고 무엇보다 퇴근할 때 몸이 천근만근이다.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던 몸이 한 번에 풀어지니 퇴근 길 버스에서 헤드 뱅잉을 하며 자는 날이 허다하다.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 구경도 못하고 말이다. 그럴수록 내 마음은 조급하다. 벚꽃이 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봐야 하는데…! 오늘같이 구름 한 점 없는 날 벚꽃을 봐야 하는데! 밤의 벚꽃을 봐야 하는데! 벚꽃이 떨어지기 전에 물이 오른 모습을 봐야 하는데!
그래서 봄에는 우리 반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나간다. 바깥 놀이를 나가거나 초등학교 인근 텃밭과 붙어있는 짧은 산책 길을 종종 걷는다. 물론 아이들을 데리고 나갈 땐 안전 문제 때문에 한 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나의 입도 쉬지 않는다. “유라야! 앞에 봐야지! 뒤에 보고 오면 넘어져!”, “미솔아. 신발 끌지 말고 걸어서 와줄래?, 미솔아!” 내 눈도 바쁘다. 아이들을 보면서 동시에 사방에 피어있는 꽃들을 틈틈이 봐야 하기 때문이다.
“어머, 얘들아 여기 벚꽃 좀 봐봐. 너무 예쁘지 않니?”
아이들은 잠깐 보고 “예뻐요.”라고 말한 뒤 땅에 있는 개미나 돌멩이, 작은 곤충에 더 관심을 갖는다.
“어머머, 이 꽃 얼굴 좀 봐. 너무 사랑스럽다, 빛깔이 어째 이런 연분홍일까?”
아무도 대꾸하 않는다. 아이들의 관심은 제각각 흩어지고 집중된다. 아이들은 보통 가만히 있는 나무나 꽃과 같은 식물보다는 생김새가 독특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곤충이나 동물에 호기심을 갖는다. 나는 작은 벌레보다는 봄에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식물에 관심이 많은 어른이기에 바깥에 나가면 어린이와 나의 시선이 겹치는 시간은 잠깐이다. 아이들이 관심 있게 보는 것을 같이 봐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지만 봄 날의 산책 길 위에서 나는 사심을 채우는데 바쁘다. 내가 꽃을 보고 탄성 하고 있을 때 한 두 명은 내 옆에 따라와 물어본다.
“선생님, 뭐해요?”
“선생님, 꽃 보고 있지. 이것 봐, 꽃이 하얀 밥 알 같지 않니?”
“밥 알이 뭐예요?”
“밥풀! 우리가 점심시간에 먹는 밥. 밥 알.”
“밥 알 꽃이에요?”
“이름은 조팝 나무래. 한 번 따라해 보자, 조-팝-나무.”
“근데 여기에 뭐 벌레가 있는데요?”
아이들의 관심은 금세 살아 움직이는 생명에 쏠린다.
가끔 아이가 어떤 꽃의 이름을 물어볼 때는 되도록 그 이름을 익히도록 몇 번이고 되뇌인다. 교실에 돌아와서도 아까 같이 보았던 꽃을 TV로 보여주며 꽃의 이름을 주입한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는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고. 어린이에게 그 꽃나무가 지나가는 배경이 아닌 마음을 잡을 수 있는 대상이 되길 바란다. 물론 식물을 좋아하는 나의 마음이 담긴 바람이지만. 그 꽃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땐 어린이가 지나다니는 사방팔방에 내가 아는 이름의 대상을 찾게 된다. 게다가 봄 꽃 사이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의 풍경은 하나의 명화다. 물론 그 안에는 “만지면 안 돼.”, “돌멩이는 다시 흙에 넣어주세요.”같은 산통을 깨는 선생님의 지시가 난무하지만 풍경 그 자체만 보면 이보다 더 평화로운 모습은 없을 것이다.
봄이 끝나갈 쯤 아이들은 기본적인 꽃 이름을 외울 줄 알게 된다. 봄의 시간 동안 계속 바깥에 나가고, 교실에 돌아와 꽃 이름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이들은 꽃에 대한 선호도가 생겼다.
“난 벚꽃이 제일 좋아.”
“나도. 난- 벚꽃.”
“나도 벚꽃!”
아이들의 선호도는 어른처럼 견고하지 않다. 금방 바뀐다.
봄의 아이들은 바깥 놀이에 다녀올 때마다 떨어진 꽃잎인지, 뜯은 꽃잎인지 모를 식물의 잔해들을 자꾸 가지고 왔다. 아마 밖에서 봤을 때 예뻐 보여 가져오고 싶은 마음인 것 같다. 손 위에 놓인 꽃잎은 교실에 들어오면 흐물흐물해진다. 색도 변한다. 그럼 별 볼 일 없어지는 걸 알면서도 바깥 놀이에 다녀올 때마다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들어오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애착을 가지고 키울 수 있는 식물을 하나 씩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0년생들은 초등학교 때 ‘강낭콩’을 키워 본 경험이 한 번 씩 있을 거다. ‘강낭콩’은 스테디셀러 쑥쑥 아이템이다. 어린이는 보기에 금방 변화가 보여야 흥미를 갖는다. ‘스투키’, ‘하트 다육이’처럼 모습에 변화가 없는 것을 키우는 것은 교실에 병풍을 갖다 놓는 거나 마찬가지다. 여하튼 나는 교실에서 아이들과 강낭콩을 하나씩 키우기로 했다. 그 당시 우리 교실은 오전 내내 햇빛이 잘 드는 공간이었고 한 쪽 벽 면이 전부 창문으로 되어 있었다. 쏟아지는 햇빛에 커튼을 치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커튼을 걷고 햇빛이 쏟아지는 장점을 활용할 기회가 왔다. 내가 강낭콩을 가지고 온 날 아이들은 강낭콩 씨앗의 자주색에 호기심을 가졌다.
“왜 색깔이 빨간색이에요?”
“음…글쎄…? 아 이건 ‘자주색’이라고 해.”
“자주색 꽃이 나요?”
“음…그건 아닌데, 나중에 열매가 맺어서 콩이 익으면 자주색이 돼.”
“왜 자주색이에요?”
“우리가 머리카락이 검정색으로 태어난 것 처럼 요 친구들도 타고난 색인 게 아닐까?”
“왜요?”
끊임없는 질문에 나는 대답을 중단하고 화제를 돌리기로 한다. 아이들은 꼬물거리는 작은 손으로 자신의 화분에 강낭콩을 소중히 심어주었다. 나는 아이 한 명당 강낭콩 씨앗 세 개를 주었다. 세 개 중 하나라도 정상적으로 쑥쑥 나길 바라며 삼각형 모양으로 씨앗의 집을 짓게 했다. 씨앗을 심은 뒤 아이들은 등원하자마자 ‘내 화분에 물 10번 씩 주기’가 루틴이 되었다. 내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 스스로 “너 물 줘야지, 너 것 물 안 줬잖아.”라고 서로 잔소리했다. 나는 미소가 '물 주기’ 의 재미에 빠져 흥건하게 물을 주는 것을 제지하느라 애를 먹었다. 물을 많이 주면 씨앗이 썩는다고 말했는데도 분무기 뿌리는 행위가 주는 재미에 빠져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강낭콩을 심은지 일주이 지나자 세 개의 강낭콩 중 하나 씩 싹이 트기 시작했다. 자신의 화분에 물 주러 달려간 아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나온다.
“우와! 내 꺼 싹 났어!”
“내 것도 싹 났어! 선생님 유라 꺼는 두 개나 났어요!”
“한솔이 꺼는 키가 엄청 커.”
얼마 전 까지 아무것도 없던 밋밋한 흙에 새 생명이 싹을 트는 순간을 본다는 건 어린이도 어른도 즐겁다. 아이들이 심은 씨앗은 자라는 속도가 달랐다. 같은 햇빛, 온도, 환경 임에도 씨앗에는 본디 자신의 속도가 있었다. 다행히 모든 아이들의 강낭콩에 싹이 텄다. 그 중 한솔이의 강낭콩은 자라는 속도가 유난히 빨랐다. 동화 잭과 콩나무에서 괜히 잭이 콩나무를 타고 올라간 게 아니었다. 하룻밤 자고 올 때 마다 강낭콩의 줄기는 어마어마하게 자랐다. 자신이 키운 강낭콩 줄기를 튕기며 놀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오랜시간 강낭콩 곁에 있는 한솔이가 있었다. 한솔이는 아침 정리를 마치자마자 화분 앞으로 달려갔다. 손가락으로 줄기를 타고 올라가기도 하고, 떡잎을 살살 쓰다듬어 보기도 한다. 다른 친구의 화분을 갖다 대며 키를 비교해보기도 한다. 한솔이의 이런 모습이 새로웠다.
“한솔아, 너 강낭콩 엄청 쑥쑥 자란다.”
“그건 내가…물을 줘서 그래요.”
“다른 친구들도 물 주는데?”
“아니, 내 강낭콩에 햇빛이 많아. 집에 가져가고 싶다”
그래, 안 그래도 이 강낭콩을 언제 집에 보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작은 화분 속에서 벌써 떡잎을 내는 강낭콩 세 줄기의 집이 좁아 보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분갈이를 한다는 건 상당히 큰 일이었다. 키우기 애매해지면 바로 집에 보낼 심산이었다. 본 잎이 나오면서 잎이 커지면 그때 집으로 보내야지. 줄기가 자라고 떡잎 사이에서 본 잎이 나왔을 때, 창문을 열러 아침에 교실에 들어갔는데, 한솔이의 화분 속 강낭콩 줄기 하나가 살짝 부러져있었다. 왜지? 어제 오후 시간에 누가 만지다 부러졌나? 어쩌지? 제일 잘 자라고 있는 강낭콩이었는데!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줄기가 아예 부러진 건 아니니 강낭콩의 소생력을 믿어야 했다. 나무젓가락과 빵끈을 가지고 지지대를 만들어 옆으로 뉘어있는 줄기를 세워 묶어주었다. 사람도 뼈가 부러지면 깁스를 하듯이 식물에게도 이 정도의 처치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오자마자 화분으로 달려온 한솔이는 눈이 동그래졌다.
“어? 뭐지? 이게 왜 있지?”
한솔이는 재빨리 다른 친구들의 강낭콩을 훑어보았다.
“왜 내 것만 그러지?”
그러나 절대 교사에게 물어보지는 않는다. 혼자 고민하고 생각한다. 난 좀 지켜보다 한솔이 옆으로 다가간다.
“아, 한솔이 거가 너무 길어서 줄기가 서 있기 힘든 거 같아. 쉽게 다치구.
그래서 곧게 자라라고 지지대를 만들었어.”
“지지대가 뭐야?”
“이렇게 나무젓가락 같은 걸로 식물을 지지해주는 걸 지지대라고 하는데…”
구구절절 이 지지대가 너의 강낭콩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열심히 설명한다. 한솔이가 내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수긍을 하는 모습이다. 다음날 나는 바로 아이들이 키운 강낭콩을 집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이곳에서 무슨 생채기가 나기 전에 말이다. 따로 내가 심은 강낭콩 화분만 두기로 했다. 강낭콩을 키우는 방법을 적은 작은 쪽지를 담은 강낭콩 화분을 가져가는 아이들의 표정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저 강낭콩이 집에서도 잘 자랄까? 자라기에 적절한 공간에 둘까? 부모님이 식물 키우기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면 어쩌지…콩 열매까지 맺어야 되는데! 강낭콩을 보내며 나는 아이들에게 신신당부 했다. 물 주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꼭 햇빛과 바람이 있는 곳에 두어야 한다고.
여름이 되어 교실에서 키우는 강낭콩 열매가 익어갈 때 까지, 나는 아이들에게 종종 물어보았다.
“집에 있는 강낭콩 잘 자라고 있니?”
“강낭콩 꽃은 폈니?”
“강낭콩 열매 맺은 친구 없니?”
아이들 대답을 들어보니 꽃을 맺은 친구는 세 명, 열매까지 맺은 친구는 두 명 쯤 된 것 같다. 나머지는 중간에 강낭콩이 죽었거나 엄마가 어디 놓았는지 모른다고 하거나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아이들이 심은 강낭콩의 모습은 각자의 집에서 대체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