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장에는 설익은 문장들이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잔얼음만 남은 유리컵을 톡톡 두드리다, 얼마 전 마셨던 포도맛 커피가 생각나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글 하나를 완성하겠다는 마음으로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던 어느 저녁이었다.
몇 주 전, 책을 반납하러 나온 김에 근처 단골 카페에 들렀다. 산미톤이 밝고 프루티한 커피를 좋아하는 나에게 사장님은 코스타리카 원두를 추천해 주셨다. 컵노트는 포도, 라벤더, 열대과일이었다. 한 모금 마시자 바로 진한 보랏빛의 향미가 떠올랐다. 날이 흐렸고, 포근한 매장에서는 느긋한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재즈와 포도맛 커피. 흐린 날 떠올릴 것이 두 개나 늘어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날 밤엔 쳇 베이커의 음악과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워시드 커피처럼 섬세하고 단정한 사장님은 얼마 전 다녀간 나를 기억하고는 추출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농도에 대해 조곤히 설명하셨다.
그때보다 조금 가볍게 부탁드릴게요.
그는 곧 은은한 포도향이 스며든 커피 한 잔을 건넸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밤을 걷는 기분이 좋다. 차가운 얼음들이 컵에 부딪히는 소리와 선선한 밤공기, 적당한 거리의 소음 속에서 무언가를 마음껏 생각할 수 있다. 정처 없이 걷는 것 같지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점도, 마음에서 누군가의 영역을 줄이거나 늘릴 수 있다는 것도 좋다. 포도맛 커피를 마시며 혼자 걷는 밤은 생각보다 꽤 근사하다. 이런저런 일들로 울적했던 마음이 조금은 맑아지는 것 같다. 흐리고 울적한 날, 나를 위로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든든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뭉근하고 말간 감정이 커피 향처럼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