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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정원

어머니 집 지붕의 생명터

by 우산

토요일 오후, 공원 산책을 할까 하다가 발걸음을 돌려 친정으로 향한다. 버스로 몇 정거장 되지만 공원의 저수지 둘레 길을 좀 걷다가 방향을 돌리면 제법 운동이 될 정도의 거리이다.

코로나로 모임이 적어진 상황이라 전보다 어머니 댁에 자주 가게 된다. 이모님이 아래층으로 이사를 오셔서 다행이지만 농사철에는 시골에 종종 내려가시니 어머니께서 혼자 계실 때가 많다.

어머니 댁으로 가며 도로변에 심어 놓은 꽃들이 볼만하다.

공원 옆 도로에는 가로등을 켜놓은 것처럼 커다란 꽃이 눈에 띈다. 마치 거실에 세워놓는 스탠드 같기도 하다. 아이보리 색의 큰 종모양의 꽃이 주렁주렁 달린 것이 무척 탐스럽다.

이름을 찾아보니 용설란과의 실유카라고 한다. 잎에서 실이 나와서 실유카라고 한다.

꽃말이 끈기, 강인 함이라니 요즘같이 코로나19로 오랜 시간 지친 사람들에게 길 가에서 희망 찬 격려의 박수를 쳐주는 것 같아 보인다.

조금 더 걸어가니 농협 앞에 흰 병꽃나무가 귀엽고 작은 병꽃을 가득 피웠다.

그 옆에는 수국이 보라색, 자주색, 하늘색으로 풍성하게 피어있다. 어찌 보면 꽃술이 있는 중심부가 족두리이고 가장자리로 뻗은 꽃잎은 가장자리로 뻗어 나와 흔들리는 족두리 장식 같다.

뿌리내린 흙의 성분이 산성인가, 알칼리성인가에 따라 꽃잎 색이 다르다는 수국.

이렇게 좁은 화단에서도 색이 다르다니, 한 부모 밑에서 자란 친형제 자매 간도 생김새나 성격이 다른 걸 보면 꽃인들 그렇지 않겠나 싶다.

친정어머니 댁은 89년 시멘트 파동이 났을 때 지어졌다. 긴 장마와 시멘트 파동으로 공사기간이 늦어지고 먼저 살던 집은 비워주어야 해서 콘크리트 벽만 만들어진 집에 들어가 한동안 창문 자리에 비닐을 치고 살았다.

아버지께서 직접 설계사무소를 뛰어다니고 인부들을 섭외하여 집을 지으셨다.

우리 가족이 두 번째 살게 된 우리 집이었다.

직장 생활하고 퇴직금을 받을 곳이 없던 부모님께는 노후대책으로 지은 집이기도 하다.

내가 결혼할 때만 해도 거실 다단으로 된 천장에 멋진 나무 장식이 있고 엄마랑 함께 고른 커다란 샹들리에를 달아 놓은 근사한 집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상권의 중심지가 바뀌며 어머니의 집 상가는 빌 때가 많았으며, 이제는 지나온 세월만큼 집이 많이 낡았다.

이 집은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을 일부 보내기도 했던 집이기도 하다.

대학시절의 우리 삼 남매와 아버지, 초등학생 우리 딸들 삼대가 산 셈이다.

요즘 아파트는 층간 소음으로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집에서는 딸들이 마음껏 뛰고 피아노를 쳤다. 비염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하던 아이가 주택에서 사니 밤잠도 깊이 잤다.

건축을 배우지도 전공하지도 않았던 아버지가 평생을 지켜온 성실과 고지식함으로 정해진 원칙대로 재료를 사용하여 지은 집은 삼십여 년을 버티었다.

방 보일러 배관도 한 번도 바꾸지 않았어도 아직 쨍쨍하다.

다만 가족들의 포근함을 지켜주며 눈비를 맞아 온 지붕만은 세월에 낡고 햇빛에 닳아 방수를 주기적으로 해주어야 한다.

경제의 흐름에 좀 더 민감하고 정보가 있었더라면, 짓고 몇 년이 지나 집의 가격이 가장 좋을 때 이사를 했으면 경제적으로 좋았을 것이다.

부모님은 아마 더 여유로운 삶을 사셨을 것이다.

하지만 살던 자리를 떠나기를 원치 않고 아버지는 그곳에서 떠나셨고 어머니는 홀로 그곳을 지키고 계신다. 그 집 안에는 우리 가족의 아프고 좋았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낡아가고 있다.

늙는 것과 낡은 것이 사람이냐 물건이냐의 차이가 있지만 세월을 품고 추억을 품는 면에서는 같은 일인 셈이다.

그곳에서 우리 남매들이 모두 결혼하고 어머니께서는 손주들을 돌보셨다.

그 집 옥상에서 말린 고추로 만든 김치를 먹고 우리 가족이 건강하게 살았다.

어머니께 예쁜 옥상정원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친정에 가니 어머니는 옥상에서 파를 다듬고 계셨다. 전에는 몇 개뿐이던 화분이 이번에 가니 20여 개 이상되고 옥상의 절반 이상을 고추 화분이 덮고 있었다.

빗물받이 통에도 물이 가득하다. 고추가 약간 시들하여 물을 주었다고 하는데도 통에 물이 넉넉하다.

음식물쓰레기로 만든 거름을 먹고 어머니가 엮어놓은 줄을 따라 수세미 잎이 초록 향기를 풍기며 펼쳐져 있었다.

쑥갓은 노란 꽃을 피우고 늘씬하게 자라 있었다.

아끼고 절약하는 것이 습관이 된 어머니는 음식물 찌꺼기와 빗물을 활용한 비용이 들지 않는 친환경 텃밭을 이미 만들어놓은 것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우리를 키우고 출가시킨 어머니는 손주들을 키워내고 이제는 초록색 고추와 건강에 좋은 여주, 상추, 쑥갓 등의 생명을 구도심 옥상에서 키우고 계셨다.

옥상에서 여전히 생명을 키우며 낡은 집을 생명이 넘치는 집으로 만들고 계신 어머니를 보며 이것이 늙어도 줄어들지 않는 어머니가 가진 사랑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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