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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문 Dec 21. 2021

불행 중 다행... 같은 건 없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 중에서

불행 중 다행... 같은 건 없다
불행은 그냥...
불행이다



건물 붕괴 사고로 동생 연수를 잃은 문수는, 살아남았다는 다행보다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야만 했다. 행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불행하기라도 해야 덜 미안할 것 같았다.


서로를 원망하던 부모님은 결국 헤어지셨다. 사실 그 원망의 대상은 자신이었다. 마지막 순간 , 떠나는 딸의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했던 죄책감이었다. 

맨 정신으로 아픔을 감당할 수 없는 엄마는 술에 취하고, 잠에 취하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 이웃에게 억지를 부리며 먹지 않아도 될 욕까지 먹기를 자처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잊지 않을 거 같아서... 떠난 자식을 잊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그녀에게 없었다.


떠난 동생을 움켜쥐고 있는 엄마를 지켜보는 문수는 슬퍼하는 것도 괴로워하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너라도 살아서 불행 중 다행이라는 아빠의 이야기는 문수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더 아팠을 것이다. 

불행은 그냥... 불행일 뿐이었다.

불행 중 다행 같은 건 없었다.




억지로 안 되는 거는 그냥 두라
슬프고 괴로운 거는 노상 우리 곁에 있는 거야
받아들여야지 어떡하니


사고에 대한 기억으로 힘들어하는 강두에게 약장수 할머니는 그냥 받아들이라고 한다. 아니 그냥 두라고. 힘들고 괴로운 건 늘 우리 곁에 있는 거라고.


강두는 마지막 생존자였다. 아버지를 잃었다는 슬픔보다 함께 갇혀있던 생존자의 죽음이 내내 따라다니며 강두를 괴롭혔다. 스스로를 괴롭히면 좀 잊혀질까... 하지만 그럴수록 고통은 더 선명지기만 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 같은 건 없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약장수 할머니는 남편을 떠나보낸 지 40년이 넘었지만 괜찮아지는 날은 오지 않더라고 한다. 할머니의 말씀이 맞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지만 다시 돌아온다는 강두의 말이 너무 공감이 된다. 그날의 아픈 나는 여전히 그 시간에 있고, 현재의 나는 나대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도 , 억지로 지우는 것도 어차피 안되는 일이다. 애를 써도 지울 수 없다면 안 하는 게 맞는 거겠지. 가끔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 아프더라도, 현재를 송두리째 과거 속으로 던지는 일보다는 나을지 모다.



10년이 되어 낡아버린 보일러 부품처럼
감정도 10년쯤 되면 닳아 없어져 버리면 좋겠다.
그래서
새로 갈아낄 수 있으면 좋겠다.


사고 보상금으로 차렸다는 문수네 목욕탕 보일러가 자꾸 고장이 난다. 10년이 넘었으니 고장 날 때도 되었다. 다행히 보일러 기계를 통으로 교환하지는 않아도 되는 모양이다.


낡은 부품 몇 개만 바꾸면 된다며 다행이라는 엄마를 보면서 문수는 생각한다. 10년이 넘어서 낡아버린 보일러 부품처럼 감정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마음껏 슬퍼할 수 조차 없던 문수는, 감정도 보일러 부품처럼 갈아 끼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감정도 마음도 갈아 끼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밉고 힘든 감정은 종량제 봉투에 몽땅 넣어 버려 버리고, 깨끗하고 예쁜 마음으로 다시 넣을 수 있으면 좋겠다.



강두와 문수는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준다.

사람에게 받는 진통의 효과는 확실히 있는 것 같다. 어릴 적 배탈이 나면 엄마 손은 약손이라며 배를 마사지해주실 때가 있었다. 소화제를 먹은 것도 아닌데 그러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배탈이 다 나은 것 같았다. 엄마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소화제보다 더 효과가 있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기하게 훨씬 덜 아프다.


아프고 힘든 감정을 갈아 끼울 수는 없지만, 닳아 없어질 리도 없지만, 내가 아플 때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을 견딜 수가 있다. 지나가고 나면 다시 찾아올 때까지는 잠시라도 현재에 충실할 수가 있다.


그렇게 아프며 견디며, 잠시 잊고 웃기라도 하며 꾸역꾸역 통과하는 것이 '삶'이라는 터널인가보다. 이래서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앞도 보이지 않는 터널을 혼자 걸어가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을 테니까. 손이라도 잡고 갈 누군가를 찾고 싶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아픔을 극복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같이 아파하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좋다. 나약해서 극복을 못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아서 좋다.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고 시간이 해결해줄거라는 무책임한 조언을 안해서 좋다. 아무 말 않고 곁에만 있어주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좋다.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며 아파하는 것도, 아파하는 사람의 곁을 지켜주는 것도 모두 사랑이다. 사랑이 예쁘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내가 아파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 그런 게 사랑이 아닐까.




할멈이 말했다.

"인생은 실패와 후회의 반복이라고."

내가 그랬다.

"그럴 거 왜 사냐고."

할멈이 말했다.

"더 멋지게 실패하라고. 그러니 쫄지 말라고."

-그냥 사랑하는 사이 중에서-


약장수 할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멋있으셨다.

사람이 죽으면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실패라는 말에 쫄지 말라고.

삶은 그런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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