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하나. 때 아닌 그대
그대 생각은
겨울에 피어버린 꽃처럼
겨울들꽃처럼
차가운 바람 다시 불어오는데
그대 생각은
봄에 내리는 눈처럼
봄눈송이처럼
따뜻한 바람 다시 불어오는데
생각 둘. 추억이라는 것
기차를 타고 싶습니다.
경춘선 옛 기차를 따라 흐르는
빛나는 강변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기차를 타고 싶습니다.
경춘선 옛 기차를 따라 흐르는
활기찬 숲길을 지나가고 싶습니다.
돌아오는 기차 창밖 너머에
강변과 숲길이 어둠 속에 아직도 함께 흐릅니다.
생각 셋. 눈
그곳도 하얀가요
내맘속 그대가 있는 가상현실에
눈이 내려요
생각 넷. 건너편
두 사람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억을 앓고 있는 눈길 너머로
멀리 뿜어내는 기차의 기적과 함께
세월을 거슬러 여행을 떠나게 되고
멀리 되돌아온 어느 작은 역에서
지평선같이 아득한
뒤안길을 바라보게 됩니다.
다시 세월을 거슬러 지나치게 될
하나하나의 기차역마다
눈물과 미소가 흐릿한 차창 밖의 이정표처럼 새겨집니다
종착역 무렵에서
조금씩 기억이 멈추어가면
처음 떠나왔던 그곳에서는
두 사람이 여전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서로의 저 먼 뒤편만을….
그리운 사람과 이별하기까지 사실은 많은 세월을 함께 보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 기억들은 설레는 아침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내려가서, 그날 밤에 올라오는 하루의 기차 여행처럼 짧은 단면으로만 다가옵니다.
추억을 떠올릴 때면, 마치 흐릿한 무성영화가 마음 속에 상영되는 듯합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설렘은 언제나 짧은 시간을 머물다가 이내 오래된 영화의 빛바랜 장면으로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설렘은 짧지만, 그것이 남기는 잔영은 너무나 깁니다. 때로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영화의 필름이 훼손되기도 하지만, 어떤 이야기는 먼지만 수북이 쌓인 채 하나도 변한 것 없이 그대로 재생됩니다. 내 마음속에 울려 퍼지지만,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무성영화처럼….
생각 다섯. 새벽 산책
낯익은 새벽 속을 거닙니다
어느 기억이 함께 따라옵니다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지나가 버린
기차의 옆모습을 그려봅니다
차창의 얼룩 같은 지난날을 바라보는
이슬 내린 눈길을 바라봅니다.
풀벌레 소리마저 조심스러운 새벽을 거닙니다.
어느 기억이 함께 따라옵니다.
저기 플랫폼에 가로등 하나가 켜져 있고
빈 벤치 위에 이야기가 흘러다닙니다.
달빛도 아직 제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은
비밀스러운 새벽을 거닙니다.
어느 기억이 함께 따라옵니다.
푸른 잎사귀에 한껏 영글었던 이야기는 어느새
낙엽이 부석거리는 소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래전에 내려놓았던 기억이
불현듯 되돌아와
다시는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여기로 저기로 발걸음을 끌고 다닙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듯이
아주 멀리 남겨두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낯선 새벽이라 내디뎠지만
늘 한걸음 뒤에 있었던 그 새벽을 만납니다.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을 우연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추억으로 들어서는 길의 어귀를 돌 무렵 덤덤하던 마음에 한풀 바람이 일어납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 시절의 일들이 되살아납니다. 그날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집니다. 그 날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옵니다. 이미 하얗게 잊어버린 줄 알았던 그 날들이 그곳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에서 빠져나온 추억들은 언제가 될지언정 다시 찾아올 우리를 기다리며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시간에 마르지 않은 채 그대로 머물고 있었습니다.
나무 아래 반쯤 해진 오래된 잎새들
사라진 줄 알았던 낙엽은
나무를 안고 있었네
생각 여섯. 공간과 시간의 그대
- 공간의 그대
내가 서 있는 이곳에 그리고 이 순간에
잠시 머물러
그리운 처음을 선사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다른 누구도 없었던 공간
덧없이
사라져야 하는 이 여운은
왜 굳이 왔다가 가려는가
공간은 비어 있는 듯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너무나 아득한 공간 때문에 그리움에 사무치기도 하며, 힘겨운 나머지 다른 무엇으로 공간을 메우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공간은 때로 우리에게 다가서라 말하고, 때로 우리에게 기다리라 말합니다. 가까이 갈 수는 없었지만, 적당한 거리에 있어 준 당신에게 그래도 고마웠습니다.
내가 당신을 더는 가까이하지 못하는 이 만큼이 바로 당신과 나의 공간입니다. 그 작은 공간에도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도 닿을 수 있는 곳에 당신이 있어 준다는 안도의 이야기, 곁에 다가가서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는 설렘의 이야기, 더 좁히려 할 때 불현듯 나타날 두려움의 이야기…. 당신과 내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이 공간만이라도 나는 간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결국엔 이 공간마저 우리에게 영원히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당신과 나 사이는 은하처럼 아득한 끝도 없는 공간으로 가득 멀어질 것입니다. 그제야 나는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손을 내밀면 닿을 수 있었던 당신과 나 사이의 공간을 그때에 마저 좁히지 못했던 것을….
곁에 있어 준다면 그래서 편한 미소를 지어준다면, 그 짧은 순간에 나의 지쳐 있던 마음은 잠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움은 언제나 떠나야 하는 법, 언제나 그 크기를 키워놓고 한참 동안은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나를 밀어 내리고 가버립니다. 어느 날 내가 살며시 시간을 멈추게 될 때, 그리움이 떠났던 마지막 장면은, 더는 아프지는 않겠지만 이미 지워버릴 수 없는 모습으로 어딘가에 박제처럼 쉬고 있을 것입니다.
- 시간의 그대
산사의 벽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곁을 어느 여승이 지납니다. 그는 불현듯 아련한 현기증 속에서 가없는 세월을 거슬러 오릅니다. 얼마나 먼 시간을 다녀온 것인가. 대웅전 낡은 처마만큼 깊게 팬 목탁 소리가 다시 들리고, 그는 다시 햇살 아래 눈을 뜹니다. 또 어떤 야속한 인연의 끈이 이어져, 한없는 시간을 머금어 갈 이곳 벽화 앞에 아물어버린 상처를 영문도 모르고 가려워하는 한 사람이 서 있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바위틈에 터를 내리고 드리워진 낡은 소나무 한그루만이 세월 속에 주인 잃은 사연을 홀로 품고 기울어갑니다.
생각 일곱. 거리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서로가 어쩌지 못하는 거리
그만큼만 우리는 떨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 여덟. 담 너머 서로의 온기에 가슴이 메며
그리움이 가슴을 드나든다면
당신과 나 사이에는
담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두 마음 사이에
담이 있을 리가 없겠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는
세상이 쌓아놓은 담이 있습니다.
세상을 차마 어기지 못해
허물지 못하는 담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우리 둘은 더 평온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기나긴 마음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우리 둘은
가끔은 담벼락에 몸을 기대며
가끔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가끔은 담 너머 온기에 가슴이 메며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담을 두드리려는 마음을
고이 접고 돌아섭니다.
그리움은 가슴으로 드나들도록 내버려두려 합니다. 아무리 밀쳐내도 그리로 들어오는 길까지 막아설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여잡아도 가슴에서조차 떠나가는 것을 막아설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의 뜻이 아닌, 그리움의 뜻대로 드나들도록 내버려두려 합니다. 지금은 가슴 속에 있는 저 너머 누군가 때문에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떠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아팠던 흔적만 남은 휑한 가슴을 들여다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떠난 그리움이 지친 모습으로 불현듯 다가와 나의 가슴에 잠시 또 쉬어가겠다면, 나는 덤덤히 언제라도 드나들도록 내버려두려 합니다.
아무래도 그대는 나를 만나지 못할 것이오
기척도 없이 내 안에 들어와 서성이는 그대를
나는 끝내 부르지 않을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