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하나. 먼발치에서 바라본 옆모습
앞모습이나 뒷모습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연민이 동료의 옆모습에서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조금 먼발치에서 바라본 옆모습 말입니다. 아마도 고개를 조금 숙이고 어깨를 움츠리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앞모습이나 뒷모습을 보았을 때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남을 의식하지 않고 턱 내려놓는 눈빛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나치다가 마주칠 때면, 아무리 실의에 빠진 사람도 웬만하면 그 외로움이나 고단함을 감추려 듭니다. 먼발치에서 그 옆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이 했던 말들이 하나하나 떠올랐습니다. 어떤 말 속에는 짐짓 외로움을 감추려는 허장성세가 들어있었고, 어떤 말 속에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고단함이 스며져 있었다고 그의 옆모습이 고백하는 것만 같습니다.
동료의 쓸쓸했던 옆모습을 우연히 보면서, 나는 나의 옆모습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마도 내가 동료에게서 느꼈던 비슷한 감정을 동료들도 느꼈을 것 같습니다. 타인이 나에게 측은지심을 갖게 하는 것도 어쩌면 좀 미안한 일입니다. 차라리 거칠 것 없다는 듯 호기롭게 보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깨를 좀 더 펴야겠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좀 더 들어야겠습니다. 그러면 타인에게 비치는 내 모습도 좀 더 당당해지면서, 타인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공연한 연민을, 이어서 그 자신에 대한 때아닌 연민을 불현듯 떠오르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각 둘. 닮은 모습
닮은 얼굴, 그것은 우연 같은 우리 삶을 필연처럼 보이게 합니다. 만약, 내가 정말 우연스럽게 만났던 지금의 아이 엄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더라면, 내 아이는 적어도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진 않을 것입니다. 내 아이는 엄마를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자녀들로 태어난 것이 필연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만남이 어떤 필연에 의한 것이라면, 그 만남을 태동시키는 남녀의 만남도 필연적 힘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카오스 같은 우주 속에서 어떤 생명의 기운이 그저 무작위로 지금의 아빠, 엄마의 몸을 빌려 이 세상으로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딘가에는 닮은 구석이 있는 걸 보면, 그저 단순한 우연의 만남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닮았다는 것은 정겨운 일입니다. 길을 걷다가 붕어빵처럼 비슷하게 생긴 부모와 자녀를 보면 괜스레 미소를 짓게 됩니다. 그럴 때면 적어도 저들만큼은 필연적인 사연으로 연결된 인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장차 어른이 되면 지금 옆에 서 있는 부모의 인자한 얼굴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언젠가 직장상사의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책상 위 작은 액자에 교복을 입은 상사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사는 분명 남성인데, 사진 속에서는 여학생의 자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사진은 상사의 사진이 아니라 그분 딸의 사진이었습니다. 얼마나 닮았는지, 그 딸이 어떻게 생겼냐고 누가 물으면 자신 있게 말합니다. “상사의 얼굴에 머리만 길다고 생각하면 돼”. 그렇게 얘기하면 다들 머릿속으로 어떤 재밌는 장면을 연상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너무 닮아서 그 딸도 부담스러울지 모르겠으나, 딸은 아버지를 닮아야 잘 산다고 했으니 나쁠 것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딸이 결혼하면 그 남편이 장인어른을 뵐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섬뜩해질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부부도 서로 닮는다고 합니다. 사람의 뇌는 타인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보기만 해도, 자신이 똑같은 행위를 하는 것처럼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부부가 닮는 것은 오랜 세월 서로의 언행을 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행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도 따라 한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남이 기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자기도 기쁘거나 슬픈 것처럼 뇌가 활성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부부는 행동이나 습관뿐만 아니라 얼굴이 닮기도 합니다. 아마도 긴 세월 동안 같은 희로애락을 함께 겪거나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것이 표정 속에 하나둘 축적되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유전자 없이 닮는 인연도 과연 범상치 않은 인연입니다. 아내의 얼굴이 더 밝아지기를 바라기에 오늘은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아야 할 듯합니다.
생각 셋. 사진
언젠가 아내와 아들의 사진을 찍고,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평소 무덤덤하게 얼굴을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모습들이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아직 소녀처럼 순진한 아내의 얼굴이 있었고, 어쩐지 몇 년 사이 아이 티를 벗고 훌쩍 청소년이 된 것처럼 느껴졌던 아들의 얼굴을 대신하여 너무나 천진난만한 아이가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주변 사람들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평소에는 잘 몰랐던 표정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때로는 오해나 미움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애처로운 감정이 생기고, 호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하게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에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상대방의 깊은 표정을 볼 수가 없었고, 때로는, 오해 때문에 자신의 본마음이 묻어나지 않는 표정을 짓는 상대방과 마주해야 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끔 주변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서, 그토록 아름답고 정감 어린 표정, 또는 그토록 믿음직스럽고 반가운 표정을 발견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표정을 생각하며 그들을 대면해 보려 합니다. 그러면, 오해에서 비롯된 미움은 아마도 아주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생각 넷. 친구
친구의 아픔을, 음지에 피어난 부끄러운 꽃 같은 아픔을 우연히 전해 들었습니다. 한참 세월을 내색하지 않으며 친구를 대했습니다. 때로는 짓궂게도 딴청을 피워주었습니다. 친구도 기색 하나 없이 나를 언제나처럼 맞아주었습니다. 때로는 신난 일이나 생긴 듯 부산을 떨었습니다.
친구의 상처가 껍질처럼 굳어갈 무렵 아무렇지도 않은 듯 흉터 위에 생긴 딱지를 건드려 보았습니다. 모른 척해주었던 친구의 부끄러운 시간을 떠올리며 안도의 미소를 머금어 보았습니다. 함께 해주지 못했던 친구의 홀로된 시간을 떠올리며 나는 고여있는 눈물을 그제야 밀어내어 보았습니다.
생각 다섯. 자녀를 위한 기도
더 넓은 강을 향하며 실개천 탁류에도 넉넉히 발 담그게 하소서. 더 높은 산봉우리를 향하며 낮은 산길 부딪히는 돌부리에 돌아서지 않게 하소서. 더 푸른 하늘을 기다리며 구름 가득한 날씨에 침울하지 않게 하소서. 한 걸음 멈추어 강과 산과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한 걸음 멈추어 강과 산과 하늘 같은 저 자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더 큰 정의를 위하여 조그마한 저에 대한 불의를 즐거이 눈감아버리는 아량을 갖게 하시며, 그토록 바라던 먼 곳에 도착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내 다시 훌훌 떠나는 나그네처럼 아쉬움 없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하소서.
생각 여섯. 아들의 자전거
천천히 세상 속으로 페달을 밟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들을 생각할 때, 잊히지 않는 장면 하나가 있습니다. 외아들이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로 기억합니다. 세발자전거를 타다가 두발자전거로 바꿀 때가 된 것입니다. 아들에게 맞는 아담한 두발자전거를 사주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집 앞에 나와 뒤에서 자전거를 붙들고 중심을 잡아주면서 함께 달려주곤 했습니다. 가다 서다 넘어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가 드디어 아들은 제힘으로 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제법 능숙하게 자전거를 타고 놀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무렵에 아들과 함께, 산책길과 자전거길이 나 있는 부용천에 자전거를 가지고 갔습니다. 산책길을 걷는데,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내 앞을 지나갔습니다. 불빛이 가물가물한 길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린 아들의 뒷모습…. 그 모습이 지금도 생각나곤 합니다. 그 당시 가정에 힘든 일이 있었고, 어린 나이지만 아들도 그 분위기를 느꼈을 것 같아서, 그 모습이 더 애잔해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멀리 불빛에만 의지한 채, 아무도 옆에 없는 어두워진 길 위에서 홀로 페달을 밟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 익숙하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이젠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는 듯 어깨가 조금 들썩이는 것도 같았습니다. 주위에 한눈을 팔지 않고 정면만을 응시하는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나이에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마치 정좌하고 앉아서 무언가 사색하다가 마음을 비우는 현자의 뒷모습과도 같았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세상으로 들어가는 모습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은 물론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곁에, 아니 내 마음 곁에 언제나 누군가가 있어줄 수는 없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청소년기가 되면, 그 나름대로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어른이 되면, 여러 사람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서도, 문득문득 홀로 있는 자기 모습과 마주쳐야 할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문드러진 가슴을 애써 모른 척하고, 무언가에 몰두해야 할 상황도 있을 것입니다. 삶을 부여받은 소임을 다할 무렵에는 낮은 소리에 이끌리는 낯선 길을 앞에 두고 아무도 곁에 없는 여정을 떠날 준비를 담담히 해야 할 것입니다. 아들은 이제 그렇게 이 세상의 길 위에서 페달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나 직장 초년생이었을 때, 집을 나서면 어머니는 항상 베란다에서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곤 하셨습니다.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나의 부모님도 자전거를 타고 노는 어린 아들의 뒷모습을 지금의 나처럼 바라보셨습니다. 지금도, 부용천을 밝히는 저 먼 가로등 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천천히 작아져 갑니다.
생각 일곱. 어머니
- 가슴 저미는 소리
어느 기사에서 접했던 이야기입니다. 7살 딸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되고, 어머니는 딸의 심장을 1살 된 소녀에게 기증했습니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어머니는 딸의 심장을 이식받은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소녀의 양해를 구한 어머니는 소녀의 가슴에 가만히 귀를 가져다 댑니다. 천천히, 그리고 점점 또렷하게 어떤 소리가 들려옵니다.
- 어머니의 뼈
네 명의 자녀를 낳고 기르신 저의 어머니는 가끔 몸이 춥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연히 어느 산사 곁을 지날 때 나지막이 들려온 이야기로 어머니 은혜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부모은중경에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종교를 떠나 어머니의 희생만을 생각합니다.
부처께서 대중과 함께 가시다가 한 무더기의 뼈를 보시고, 그의 제자에게 뼈를 가지고 나누어서 둘로 갈라놓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고 여자의 뼈라면 검고 가벼울 것이라 하셨습니다. 제자가 의아해하며 그 연유를 여쭈니, 부처께서 아래와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남자는 세상에 있을 때 강의도 듣고 경도 외우며, 예배도 하고 염송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 뼈는 희고 무거우니라. 여자는 아들딸을 낳아서 기르되 한번 아이를 낳을 때 서 말 서 되의 피를 흘렸고 여덟 섬 너 말이나 되는 젖을 먹여서 길러야 한다. 그 까닭으로 그 뼈는 검고 가벼우니라.”
- 놓지 못한 기억 하나
<치매를 앓는 엄마가 놓지 않았던 기억 하나>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알려졌던 기사가 있었습니다. 부산지방경찰청 트위터에 올라온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보따리 두 개를 들고 여기저기 거리를 서성거리는 어떤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치매를 앓고 있던 할머니는 도와주려는 경찰관에 자신의 이름도 대답할 수 없었고 그제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경찰이 수소문하여 결국 출산한 딸이 있는 병원으로 할머니를 모시고 갔더니, 할머니는 그제야 애지중지하던 보따리를 풀어 제치셨습니다. 그 안에는 딸을 먹이려고 준비한 밥과 미역국, 나물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기사를 접했던 많은 사람은 저마다 그들의 어머니를 떠올려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벌써 연로하신 노인이라면 더욱 애잔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고, 아직은 젊고 건재하셔도 언젠가 늙고 병들어 가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도 물질이고, 사람의 정신작용도 결국은 우리 머릿속의 신경 물질이 작용한 결과라면, 물성의 쇠퇴에 따른 안타까운 변화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물질 그 자체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원초부터 부여받아 영원히 쇠퇴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 물질의 외형 속에 존재하면서, 시간이 쌓여 쇠퇴해 버린 물성으로 인해 잠시 위축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기사에 나온 할머니보다 더 심각한 증세로 가족도 못 알아보시는 노인들이 이따금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도 실은 거추장스러운 물질 밖으로 가끔 본래의 마음이 모습을 비친 것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설령 이러한 바람이 틀렸고 모든 것이 물질이라 하더라도, 한 가지는 말하고 싶습니다. 저 할머니의 딸을 향한 마음 앞에서처럼 자연의 법칙이 숙연히 비껴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 두 여인
지난번 정기검진이 어제 일 같은데 그새 또 이 년여 세월이 흘렀나 봅니다. 숨 가쁘게 가동해온 나의 몸이 얼마나 감가상각이 되었는지 평가를 받습니다. 그동안 무심했던 자신의 몸을 오래간만에 들여다봅니다. 나처럼 헐렁한 옷을 입고 표정 없이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 그 얼굴들도 지난 시간이 배어있는 제 몸속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전전긍긍하며 삶의 현장을 누빌 때 우리의 몸은 소리 없이 고단한 노폐물을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내 앞자리에 여인들이 앉습니다. 문득 어머니의, 그리고 아내의 애잔한 얼굴을 바라봅니다. 나의 무관심에, 나의 생각 없는 말 한마디에 그들의 몸은 조금씩 상해왔습니다. 심전도 실에서 무거워진 가슴을 누이면서 나는 두 여인의 고단한 몸을 함께 뉘어주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