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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Apr 26. 2022

공간과 시간의 그대

생각 하나. 공간의 그대


내가 서 있는 이곳에 그리고 이 순간에

잠시 머물러
그리운 처음을 선사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다른 누구도 없었던 공간

덧없이

사라져야 하는 이 여운은

왜 굳이 왔다가 가려는가


 


 공간은 비어 있는 듯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너무나 아득한 공간 때문에 그리움에 사무치기도 하며, 힘겨운 나머지 다른 무엇으로 공간을 메우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공간은 때로 우리에게 다가서라 말하고, 때로 우리에게 기다리라 말합니다. 가까이 갈 수는 없었지만, 적당한 거리에 있어 준 당신에게 그래도 고마웠습니다.


 내가 당신을 더는 가까이하지 못하는 이 만큼이 바로 당신과 나의 공간입니다. 그 작은 공간에도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도 닿을 수 있는 곳에 당신이 있어 준다는 안도의 이야기, 곁에 다가가서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는 설렘의 이야기, 더 좁히려 할 때 불현듯 나타날 두려움의 이야기…. 당신과 내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이 공간만이라도 나는 간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결국엔 이 작은 공간마저 우리에게 영원히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당신과 나 사이는 은하처럼 아득한 끝도 없는 공간으로 가득 멀어질 것입니다. 그제야 나는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손을 내밀면 닿을 수 있었던 당신과 나 사이의 공간을 그때에 마저 채우지 못했던 것을….



 곁에 있어 준다면 그래서 편한 미소를 지어준다면, 그 짧은 순간에 나의 지쳐 있던 마음은 잠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움은 언제나 떠나야 하는 법, 언제나 그 크기를 키워놓고 한참 동안은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나를 밀어 내리고 가버립니다. 어느 날 내가 살며시 시간을 멈추게 될 때, 그리움이 떠났던 마지막 장면은, 더는 아프지는 않겠지만 이미 지워버릴 수 없는 모습으로 어딘가에 박제처럼 쉬고 있을 것입니다.





생각 둘. 시간의 그대


 산사의 벽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곁을 어느 여승이 지납니다. 그는 불현듯 아련한 현기증 속에서 가없는 세월을 거슬러 오릅니다. 얼마나 먼 시간을 다녀온 것인가. 대웅전 낡은 처마만큼 깊게 팬 목탁 소리가 들리고, 그는 다시 햇살 아래 눈을 뜹니다. 또 어떤 야속한 인연의 끈이 이어져, 한없는 시간을 머금어 갈 이곳 벽화 앞에 아물어버린 상처를 영문도 모르고 가려워하는 한 사람이 서 있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바위틈에 터를 내리고 드리워진 낡은 소나무 한그루만이 세월 속에 주인 잃은 사연을 홀로 품고 기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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