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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Apr 26. 2022

그대의 모습

생각 하나. 먼발치 뒤에서 바라본 옆모습


 앞모습이나 뒷모습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연민이 동료의 옆모습에서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조금 먼발치 뒤에서 바라본 옆모습 말입니다. 아마도 고개를 조금 숙이고 어깨를 움츠리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앞모습이나 뒷모습을 보았을 때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남을 의식하지 않고 턱 내려놓는 눈빛을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나치다가 마주칠 때면, 아무리 실의에 빠진 사람도 웬만하면 그 외로움이나 고단함을 감추려 듭니다. 먼발치 뒤에서 그 옆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이 했던 말들이 하나하나 떠올랐습니다. 어떤 말 속에는 짐짓 외로움을 감추려는 허장성세가 들어있었고, 어떤 말 속에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고단함이 스며져 있었다고 그의 옆모습이 고백하는 것만 같습니다.


 동료의 쓸쓸했던 옆모습을 우연히 보면서, 나는 나의 옆모습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마도 내가 동료에게서 느꼈던 비슷한 감정을 동료들도 느꼈을 것 같습니다. 타인이 나에게 측은지심을 갖게 하는 것도 어쩌면 좀 미안한 일입니다. 차라리 거칠 것 없다는 듯 호기롭게 보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깨를 좀 더 펴야겠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좀 더 들어야겠습니다. 그러면 타인에게 비치는 내 모습도 좀 더 당당해지면서, 타인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공연한 연민을, 이어서 그 자신에 대한 때아닌 연민을 불현듯 떠오르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각 둘. 딸이 아버지를 빼닮으면 사위가 섬뜩하겠지만


 닮은 얼굴, 그것은 우연 같은 우리 삶을 필연처럼 보이게 합니다. 만약, 내가 정말 우연스럽게 만났던 지금의 아이 엄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더라면, 내 아이는 적어도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진 않을 것입니다. 내 아이는 엄마를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자녀들로 태어난 것이 필연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만남이 어떤 필연에 의한 것이라면, 그 만남을 태동시키는 남녀의 만남도 필연적 힘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카오스 같은 우주 속에서 어떤 생명의 기운이 그저 무작위로 지금의 아빠, 엄마의 몸을 빌려 이 세상으로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딘가에는 닮은 구석이 있는 걸 보면, 그저 단순한 우연의 만남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닮았다는 것은 정겨운 일입니다. 길을 걷다가 붕어빵처럼 비슷하게 생긴 부모와 자녀를 보면 괜스레 미소를 짓게 됩니다. 그럴 때면 적어도 저들만큼은 필연적인 사연으로 연결된 인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장차 어른이 되면 지금 옆에 서 있는 부모의 인자한 얼굴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부부도 서로 닮는다고 합니다. 사람의 뇌는 타인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보기만 해도, 자신이 똑같은 행위를 하는 것처럼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부부가 닮는 것은 오랜 세월 서로의 언행을 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행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도 따라 한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남이 기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자기도 기쁘거나 슬픈 것처럼 뇌가 활성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부부는 행동이나 습관뿐만 아니라 얼굴이 닮기도 합니다. 아마도 긴 세월 동안 같은 희로애락을 함께 겪거나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것이 표정 속에 하나둘 축적되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유전자 없이 닮는 인연도 과연 범상치 않은 인연입니다.


 언젠가 직장상사의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책상 위 작은 액자에 교복을 입은 상사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사는 분명 남성인데, 사진 속에서는 여학생의 자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사진은 상사의 사진이 아니라 그분 딸의 사진이었습니다. 얼마나 닮았는지, 그 딸이 어떻게 생겼냐고 누가 물으면 자신 있게 말합니다. “상사의 얼굴에 머리만 길다고 생각하면 돼”. 그렇게 얘기하면 다들 머릿속으로 어떤 재밌는 장면을 연상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너무 닮아서 그 딸도 부담스러울지 모르겠으나, 딸은 아버지를 닮아야 잘 산다고 했으니 나쁠 것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딸이 결혼하면 그 남편이 장인어른을 뵐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섬뜩해질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생각 셋. 사진


 언젠가 아내와 아들의 사진을 찍고,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평소 무덤덤하게 얼굴을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모습들이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아직 소녀처럼 순진한 아내의 얼굴이 있었고, 어쩐지 몇 년 사이 아이 티를 벗고 훌쩍 청소년이 되어 버린 듯 느껴졌던 아들의 얼굴을 대신하여 너무나 천진난만한 아이가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가끔 주변 사람들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평소에는 잘 몰랐던 표정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때로는 오해나 미움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애처로운 감정이 생기고, 호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하게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에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상대방의 깊은 표정을 볼 수가 없었고, 때로는, 오해 때문에 자신의 본마음이 묻어나지 않는 표정을 짓는 상대방과 마주해야 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끔 주변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서, 그토록 아름답고 정감 어린 표정, 또는 그토록 믿음직스럽고 반가운 표정을 발견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표정을 생각하며 그들을 대면해 보려 합니다. 그러면, 오해에서 비롯된 미움은 아마도 아주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생각 넷. 친구


 친구의 아픔을, 음지에 피어난 부끄러운 꽃 같은 아픔을 우연히 전해 들었습니다. 한참 세월을 내색하지 않으며 친구를 대했습니다. 때로는 짓궂게도 딴청을 피워주었습니다. 친구도 기색 하나 없이 나를 언제나처럼 맞아주었습니다. 때로는 신난 일이나 생긴 듯 부산을 떨었습니다.


 친구의 상처가 껍질처럼 굳어갈 무렵 아무렇지도 않은 듯 흉터 위에 생긴 딱지를 건드려 보았습니다. 모른 척해주었던 친구의 부끄러운 시간을 떠올리며 안도의 미소를 머금어 보았습니다. 함께 해주지 못했던 친구의 홀로된 시간을 떠올리며 나는 고여있는 눈물을 그제야 밀어내어 보았습니다.





생각 다섯. 자녀를 위한 기도


 더 넓은 강을 향하며 실개천 탁류에도 넉넉히 발 담그게 하소서. 더 높은 산봉우리를 향하며 낮은 산길 부딪히는 돌부리에 돌아서지 않게 하소서. 더 푸른 하늘을 기다리며 구름 가득한 날씨에 침울하지 않게 하소서. 한 걸음 멈추어 강과 산과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한 걸음 멈추어 강과 산과 하늘 같은 저 자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더 큰 정의를 위하여 조그마한 저에 대한 불의를 즐거이 눈감아버리는 아량을 갖게 하시며, 그토록 바라던 먼 곳에 도착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내 다시 훌훌 떠나는 나그네처럼 아쉬움 없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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