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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Apr 26. 2022

이별

생각 하나. 폴터가이스트, 그리고 떠나는 그대


 폴터가이스트는 '시끄러운 영혼'이라는 뜻으로,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해 물건이 움직이거나 소음이 발생하는 등의 현상을 말합니다.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가득 담긴 노트북 가방의 바깥쪽 주머니에 무선 이어폰 케이스를 넣고 지퍼를 채우지 않은 채 기차의 선반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는데, 가방을 내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케이스가 툭 빠져버리는 경우와 같이 아무리 생각해도 잃어버릴 상황이 아닌데도 그 희박한 가능성으로 소지품이 내 곁을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걸 믿지는 않지만, 분실한 물건을 찾아 헤매다가 짜증이 나면 자신에 대한 불만을 다른 대상에 전가하듯, "폴터가이스트가 장난을 치나"라는 무의미한 말을 내뱉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진짜 폴터가이스트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상식적으로 또는 과학적으로 도저히 물건이 없어질 상황이 아니라고 최종적으로 결론이 난 이후에 그렇게 생각해도 늦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물건이 자주 분실되는 나의 생활 장소에 CCTV를 설치하고, 나중에 화면을 돌려보면 거기서 폴터가이스트의 단서가 보일 가능성보다는 그 대신에 수십 년간 굳어진 나의 잘못된 습관 하나가 눈에 띄게 될 가능성이 더 클 것입니다. 나에게는 노트북 가방의 바깥쪽 주머니를 잠그지 않는 묘하게 안 좋은 습관이 있었고, 열린 주머니에서 물건이 빠져나가는 경우가 간혹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물건만이 우리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내 곁을 지켜주는 대부분의 고마운 사람들과 달리 이런저런 이유로 나를 오해하거나 나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고 나를 떠나는 사람이 있다면, 폴터가이스트와 같은 묘한 기운이 작용했다는 주술적인 생각을 하는 대신에, - 대다수의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내 곁을 지키지만 - 어떤 자극에 민감한 사람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오랜 시간 동안 굳어져 버린 대인관계와 관련된 안 좋은 습관이 나에게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생각 둘. 빈자리


창틈으로 들어온 햇살만이 빈방의 바닥에 내려앉은 풍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비워진다는 것은 우리를 상념에 젖게 합니다. 언제나 무언가가 제자리를 벗어나서야 그 존재에 대하여, 그 빈자리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됩니다. 몇십 년을 함께 한 서재의 책장이 있었습니다. 빼곡히 꽂혀있는 책 한 권을 꺼내려 하니 지지대가 기우뚱하였습니다. 그 안쪽으로는 오랜 세월 키를 키워 온 듯한 금이 나 있었습니다. 너무 고단했던 그 책장을 그만 쉬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있었기에 평소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언제나 나를 아늑하게 해 준 것 같은 그 책장이 사라지고 휑하니 비어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무언가가 내게서 빠져버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있을 때는 있는 줄을 모른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나 봅니다.

조그만 책장 하나가 그럴진대, 집안의 모든 사물이 빠져나간 모습을 본다면 그 허전한 느낌은 자못 클 것입니다. 언젠가 이사를 하던 날, 정들며 살았던 우리 집의 세간이 모두 비워져 창틈으로 들어오는 햇살만이 바닥에 내려앉은 풍경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 나는 마루 한복판에 서서, 이 벽 저 벽을 타고 울려 퍼지는 가족의 웃음소리와 아이의 투정 소리, 아내의 토라진 말투 등을 듣고 있었습니다. 무정의 사물들조차 그 빈자리에서 생명의 흔적을 남기는데, 정을 가진 사람이 남긴 빈자리에선 훨씬 더 오래 남을 흔적이 두고두고 우리의 시선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 나는 과연 나의 빈자리에서 어떤 의미를 남길 것인가….

 

 제자리에서 사라진 책장이 내게 허전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내가 그 책장에 대하여 나도 모르는 정을 품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풍부한 감성의 이야기들을 내게 선사하는 보물 상자와 같이 휴일이면 언제나 내게 위안을 주었던 책장처럼, 나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 셋. 한계


열정과 애정, 그리고 우리의 삶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저멀리 어두운 막다른 길이 보이는 듯한 한계라는 말보다, 저멀리 빛나는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한 영원이라는 말을 소망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적당한 길이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섭리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생존과 즐거움을 위해 섭취해야 하는 하루의 양식에도, 건강을 위해 운동기구와 힘겨루기를 하거나 달리기를 하는 시간에도, 오늘 어떻게든 진행해야 하는 학업이나 과업에도 모두 적당한 길이가 있습니다. 매일 이동해야 하는 거리에도, 가끔 먼 여행을 떠날 때도 지치지 않는 선에서의 적당한 길이가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자연스런 한계에 의해 재단되거나, 오랜 세월 사람들의 경험과 지혜가 축적되어 재단된 길이입니다. 그리웠던 사람과의 해후에도, 그토록 바라던 좋은 일이 생겼을 때에 찾아오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즐거운 기분에도 모두 적당한 길이가 있습니다. 때론 그 길이가 예상보다 길어지는 경우도 물론 있긴 합니다. 그래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지지는 않습니다. 아니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세상 모든 일에 적당한 길이가 없다면, 그것이 힘들거나 좋지 않은 일이라면 그 자체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이고, 그것이 편하거나 좋은 일일지라도 이는 급기야 버거운 일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취미라도 쉬지 않고 계속 한다거나,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잠깐의 여유도 없이 계속 함께 있어야 한다면, 어느 길이를 넘어서면 그 즐거움이 퇴색하듯이 말입니다.

 

 열정의 대상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에 한계가 있다는 것, 애정의 대상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너무 서글퍼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유한한 길이가 있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생각 넷. 이별, 그리고 미소


돌아올 수 없는 이별을 앞두고도 담담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동안 차갑게 굴던 저를 용서하십시오.

단 한 번도 따뜻하게 대하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하지만 곧 다시 오시겠기에 

이렇게 미소로 보내드립니다.

속히 오셔서 저에게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곧 돌아올 것입니다.

아무 걱정도 마십시오.

이렇게 약조를 하겠습니다.


부마의 평온한 미소를 들여다보니

이제 마음이 놓입니다.

어서 다녀오십시오.


참으로 야속하고 끈질기지를 않은가.

오랏줄에 엮이어 머리를 늘어뜨린 부마의 모습이

언제부턴가 나타나 사라질 줄을 모르니.


참으로 가슴을 후벼대는 장면이 어찌 떠나가지를 않는가.

어느 낯선 고을의 노비가 되어버린

공주의 모습이 나타나

왜 이리 점점 또렷하게 다가오는 것인지.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남편이 목숨을 걸고 단종 복위를 추진하는 길을 떠납니다.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두 사람은 재회를 기약하며 이별을 합니다. 언젠가 어느 연인에게도 영원한 이별의 순간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가슴은 뜨거워져도 표정은 담담했으면 좋겠습니다. 미소까지 지을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생각 다섯. 마지막으로 돌아섬에는


지나온 시간 하나하나가

한순간도 헛됨 없는

정성 어린 작은 조각들이었기를


그 속에서 때로는 

상처도 받고

상처도 주었다


후회함에 다시

새로운 마음을 가져보지만

격랑 속에서

우리는 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받으리라


하지만 마지막으로 돌아섬에는 

봄 햇살 같은 손길을 얹어 주고픈

그런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돌아섬에는

호수와 같은 눈가로 웃어 주고픈

그런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기를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더는 다가가기 어려운 마음의 영역이 존재합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돌아섬'에서는 아주 잠깐 그 영역 안으로 서로 들어가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럴 수 있다면, 지나간 오해와 아쉬움 대신에 돌아서던 그때의 기억만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생각 여섯. 마지막 이름


조국이여, 이 순간만큼은 당신이 내게 양보하소서



사랑스러운 딸아이도 이젠 그만이다

보고픈 아내도 이젠 그만이다

그리운 어머니도 이젠 그만이다


조국을 위해 기꺼이 달려들지만

지금 내겐 조국이 보이지 않는다.


점점 멀어지는 아군의 참호가 

봄날의 오후처럼 아늑해지고

사방으로 퍼지는 포탄 소리마저 고요해지면

그제야 나는 번뇌의 질곡에서 벗어난다


아, 내 이름을 부르고야 마는 조국이여

나는 이 순간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당신이 내게 양보하소서


내가 놓아버린 기억마저 주워 담고

무거운 시간을 맞서야 하는 나의 사랑을 위해

이 순간만큼은 당신이 내게 모든 걸 양보하소서



 그리스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그린 영화 ‘300’을 보면, 300명의 친위대를 이끌고 싸우다가 최후를 준비하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적의 화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생의 마지막 독백을 합니다. “my queen... my wife... my love...”


 그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까.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미련일까. 이루지 못한 꿈들에 대한 아쉬움일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뉘우침일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지난날에 대한 미안함일까. 사랑하는 가족과의 정겨운 추억일까. 이 모든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흐르겠지만, 그 마지막 경계선에서 마지막으로 떠올라서 품고 갈 생각은 무엇일까. 지금은 아득할지라도 언젠가 누구에게도 반드시 찾아올 그 마지막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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