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신체적으로는 이차 성징이 나타나며 정신적으로는 자아의식이 높아지는 사춘기라는 발달의 시기를 거친다. 사람에 따라서 쉽게 지나기도 하고 심하게 힘겨운 사춘기를 지나기도 한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시기를 떠올려 보면 왠지 가슴 한쪽이 짠해 온다.
나는 육 남매의 딱 중간 넷째 딸이다. 오빠, 언니, 남동생 여동생 모두 있어서 좋겠다고 말을 하지만 자랄 때는 가장 나쁜 위치로 형제들에게 치이기도 한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면서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려고 무척 노력했던 것 같다.
엄마는 어쩌다 보니 5남매가 모두 다닌 유치원을 나만 못 보냈다고 하셨다. 모두 다닌 유치원을 나만 안 보냈다고 원망할까 봐 피아노를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가 퇴근해서 오시면 베개를 피아노 삼아 노래를 부르며 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측은해 보였는지 피아노를 사 주셨다. 피아노 못 치는 사람이 치면 고장 난다며 피아노를 잠그고 열쇠를 감추고는 했다.
당시에는 나에게 사주신 피아노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열쇠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거나 주라고 야단을 치지도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은 아마도 유치원을 못 보낸 미안함이셨던 것 같다. 오빠나 언니는 피아노가 치고 싶어서 나한테 먹을 것을 주거나 심부름을 대신해 주기도 했다. 피아노 덕분에 특별한 잘못 없이 벌을 주던 오빠들의 엎드려뻗쳐, 기합은 끝이 났고 언니만 기합을 받게 되었다. 그 덕분인지 언니는 체력장 만점을 받았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 회사가 부도가 났다. 천식과 심장이 안 좋아서 병원에 입원하셨던 아버지는 검사 결과를 기다리시던 중 심장 마비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극과 극의 세상을 살아야 했다. 피아니스트의 꿈은 사라지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피아노는 주인을 떠나고 말았다. 피아노 연습을 하라고 할 때는 지겹더니 마지막 배우고 오던 날에는 달을 보며 엉엉 울면서 집에 갔다. 그리고 한동안 피아노 소리만 들으면 슬펐다. 지금도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 왠지 애잔한 생각이 든다.
나의 사춘기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을 버리게 하고 새로운 것을 요구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세상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떠나 버렸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여느 때와 똑 같이 행동했지만, 내면은 많이 위축되어 자신감도 없어지고 말수도 적어졌다. 우리 집을 자기네 집처럼 살면서 신발이 닳도록 드나들던 친척들은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 사정이 바뀐 것을 모르는 친구들이 함께하자는 그룹 과외나 학원은커녕 참고서도 사 달라고 말을 못 하고 선배들에게 물려받았다. 차츰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는 멀어졌다. 대신 그동안 별로 관심도 없고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고민 많거나 집안이 어렵고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는 아이들과 가깝게 지내게 됐다. 새로 사귄 친구들의 힘든 가정사를 들으며 몰랐던 세상을 알게 되었고 이해와 공감하게 되었다.
와중에 집안 사정을 모르는 선생님은 3박 4일 '재일교포 한국 체험 가정'을 부탁하셨다. 엄마와 큰 오빠는 나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시려는 마음에 허락해 주셨다. 큰 오빠는 서울 시내가 보이는 남산 타워와 고궁, 야구장 등 데리고 다니며 한국 체험을 도와주었다. 드러나지 않았던 가정환경의 변화는 고2 수업 중간 목청이 큰 기술 선생님이 교무실로 부르며, 담임 선생님과 많은 선생님이 알게 되었다. "너희 집이 망했으니 빨리 집에 가 보라는······" 가면 쓴 얼굴이 벗겨지며 기가 죽어 버린 학교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집이 망했다는 소식보다는 비웃듯 아무렇지도 않게 충격적 광고를 하신 선생님에게 실망과 깊은 상처를 받았다. 나에게만 조용히 말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꿈 많은 사춘기 소녀가 아버지라는 한쪽 날개를 잃고 추락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눈을 무시하고 날아가기에는 감당하기 힘든 버거운 시간이었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 생각이나 꿈은 무시되었고 '어려운 너희 집 형편'이 우선되었다. 신경 쓰며 격려해 주시는 선생님도 계셨고, 자격지심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선생님은 업신여기는 듯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이었지만, 부모님이 자랄 때 남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특별한 것들을 경험하게 하며 심어주신 자긍심 덕분에 그런 태도들을 무시하고 잘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무서운 것 없이 이기적이고 오만했던 내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알고 이해하며 공감한다는 것은 굉장한 변화다. 급격한 가정환경의 변화와 겹쳐진 사춘기로 적응이 힘들어 마음을 많이 다쳤었지만 모난 돌은 다듬어지며 생각은 깊어지고 철이 들면서 사람이 되어 갔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죽을 만큼 힘들었던 그 시간은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겸손함을 배웠던 축복받은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이 아니었다면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