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전쟁이 악몽이길 바랐다. 군에 간 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시어머니와 함께 병을 앓는 시아버지를 손수레에 모시고 일곱 살 시누이와 피난을 떠났다.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서 동짓날 출발했지만, 양수대교가 폭격에 끊겨 얼음 위를 걸어서 북한강을 건넜다. 어머니는 얼마 가지 못해 양평 국수리 빈집에 시아버지를 모시고 시누이와 이천 친척 집으로 향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떠난 피난길은 위험과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어머니는 음식을 구하러 다니다 어린 시누이를 잃게 되었는데 그 후로 눈물 마를 날 없는 시집살이를 하였다. 시누이를 잃어버린 죄책감으로 평생 죄인처럼 살며 괴로워했다. 주무시는 어머니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전쟁의 난리 통에 잃은 시누이를 만나기라도 하는 걸까. 어머니는 전쟁의 참혹함을 겪었기에 또다시 전쟁이 발발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자연이 만든 습지에서 침수식물과 정수식물이 군락을 이뤄 햇빛에 반사된 물결이 일렁인다. 흐드러지게 핀 개꽃이 바람에 나풀나풀 춤을 춘다. 비무장지대 한 가운데 원두막처럼 우뚝 솟아있는 망루형 초소는 긴장과 평화가 공존한다. 그 곳에는 인간이 만든 편협한 이념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재두루미가 떼를 지어 하늘을 날아가는 평화로운 일상의 비무장지대에는 전쟁 준비로 삶을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다.
햇살이 비치지 않는 아찔한 급경사 47M 지하 동굴 끝 계단에 내리자 타원형의 제3땅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에서 바라본 땅굴은 인력으로 굴을 뚫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했다. 야트막한 굴 안으로 발을 들이자 숨이 꽉 막혔다. 음산한 냉기가 느껴지는 굴을 따라 들어갈수록 등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터널을 뚫고 수레를 끌며 흙을 나르는 사람의 얼굴에 땀과 먼지가 찌든 형상이 아른거렸다. 그들은 흙먼지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감독자의 지시에 따랐을 테고 햇빛이나 바람보다는 물 한 모금이 더 절실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부역을 하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들은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귀가할 때 안도의 한숨을 쉬기나 했을까, 바람도 들지 않고 햇빛도 비치지 않는 땅굴은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땅굴로 깊이 들어갈수록 폐소공포증이 엄습해 온다. 총길이 1,635m를 파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땅굴의 끝에서 그들이 손수레를 끌고 달려 올 것만 같다. 그들은 불행이나 재해를 막으려고 안전을 기원하는 정신으로 인내를 품었을 것이다. 지하에서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떨었을 그들은 전쟁 준비의 피해자이며 우리의 적이 아닌 한민족이다. 그저 평범한 우리 이웃의 형,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었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만 한번 표출 하지 못한 채 억압에 묵묵히 작업 하던 그들은 가족을 위해 참고 또 참았을 것이다. 그들은 임금 인상이나 작업환경 개선은 물론 의사 표시 한번 해본 적도 없다.
동굴을 뚫는 발파 소리와 붕락(崩落)을 알리는 그들의 고함이 터널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채 귓가에 맴돈다. 그들이 한순간 흙 속에 갇혀 엄마를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탁한 공간에서 얻은 병은 기침으로 밤새 갑갑한 숨을 몰아쉬었을 것이다. 먼지와 땀으로 절은 고된 얼굴은 힘없는 가장의 슬픈 모습이었을 테고 주어진 과업에 누구를 원망할 힘도 가져 보질 못했음은 당연리라.
그들의 노역은 찬밥 한 덩이 먹을 수 있다는 만족으로 끝나야 했으며 그 만족 속에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을 것이다. 강요에 의한 전쟁 준비로 지하에서 괭이질과 돌을 운반하며 고통 받았을 그들의 삶이 안타까워 눈물이 맺혔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발발한 전쟁은 남북한을 고통에 빠트렸다. 전쟁을 가볍게 여기며 언제든지 다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지도자들의 생각은 고쳐져야 한다. 짧은 생을 전쟁에 몰두하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에 가슴이 답답하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전쟁은 범죄 행위다. 전쟁으로 사상자가 생기고 가족과 이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와 어머니의 바람이다. 아니, 남북한 모두의 바람이며 전 세계인의 바람일 게다. 사람이 사람을 희생시키며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잘못된 의식에서 깨어나야 한다. 남북한 대다수의 국민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 전쟁을 위한 준비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고통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남북한은 한배에서 나온 쌍둥이와 같다. 남북한이 함께 나아가는 통일의 염원을 남북한 정상은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외면하지도 말아야 한다. 전쟁은 모두에게 죽음과 고통을 줄 뿐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동시에 누구를 불행하게 만들 자격은 세계 어느 지도자에게도 없다. 아무리 좋은 전쟁도 가장 나쁜 평화보다 나을 수 없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깊은 고통과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은 종식되어야 한다.
남북한은 서로 줄탁동시(啐啄同時)와 같은 조화로 통일을 이루어 평화를 누려야 한다. 분단 상황에 익숙해진 관습에서 깨어나 ‘통일’이라는 진정성을 갖길 희망한다. 우리는 마음으로 생명·평화·통일에 대해 노래하며 서로 이해하고 어우러져 함께 해야 한다. 남북한은 중지동천(衆智動天)의 마음으로 통일 희망이 전 세계에 전해질 때 호국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에 보답하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생활의 여유도 평화의 덕분이다. 이 소중한 일상이 모래 위에 지어진 평화가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