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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준 Sep 13. 2021

빨강구두 속의 비밀

꽉 막혀 통풍구 하나 없는 신발 속에서 아픔을 호소해도 못 들은 척,

어머니 발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 드렸다. 발바닥은 삶의 무게를 견디느라 딱딱하게 굳고 발톱은 푸른곰팡이(녹농균)가 번져 회갈색이다. 휘어지고 굳은살 배긴 발가락은 어머니 삶의 흔적이다. 아흔의 세월을 보낸 발가락 마디마다 아픔이 전해졌다. 소녀 시절 매발톱꽃처럼 아름다웠던 발톱은 생기를 잃었다. 발톱은 제때 잘라주지 않으면 살 속으로 파고들어 통증을 느낀다. 세월에 풍화된 발가락 끝마다 하나씩 뭉텅 솟은 어머니 발톱을 잘랐다. 

  

군에서 치수가 작은 군화를 신고 행군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군화가 발가락을 옥죄어 고통스러웠다. 부작용으로 오른쪽 엄지발톱을 빼고 네 개의 발톱이 멍들고 파리하다. 손톱보다 더디게 자라는 것도 느긋한 성품이라며 눈여겨 본적이 없었다. 무생물이며 변변한 뼛조각도 아닌 것이 표피 밖으로 돋아나면 갑각류의 등딱지같이 단단해진다. 

  

몇 해 전 축구 친선 경기 중에 축구화 징에 밟혀 왼쪽 엄지발에 통증을 느꼈다. 그 후로 피멍이 들고 짓무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톱이 검게 변해 뱀 머리처럼 들고 일어섰다. 엄지발이 형체를 잃고 무너지자 발톱도 더는 버티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조만간 빠지고 새 발톱이 나겠지 하고 무관심하게 생각했던 엄지발톱이 나를 노려보는 듯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할 일을 마친 엄지발톱이 뽑혔다. 

  

여성은 아름다움을 위해 하이힐을 신고 다닌다. 하이힐을 신고 오래 걸으면 엄지발은 검지 쪽으로 기울어져 무지외반증이 오고 피로가 쌓인다. 엄지발을 바로 잡고자 실리콘 교정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딱딱한 구두 속 발가락은 혹독한 환경에서 기질을 보이며 아픔을 견디는 인내를 발휘한다. 패션의 완성 하이힐 속에는 뿌리 같은 발가락이 몸의 하중을 견뎌내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인체 중에 열 개의 발가락은 체중의 몇 배 이상의 압력을 받는다. 맨 끝에 자리 잡은 발가락에 체중이 미치는 영향은 중요하다. 우리의 발은 아주 단단하게 이루어져 있지만, 순간적인 충격이나 강한 외상으로 골절될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인체의 뿌리는 발이고 발의 기초는 발가락이다. 발을 보면 그 사람의 건강과 불편함을 알 수 있고 건강한 발은 균형 잡힌 신체를 유지한다.

  

발가락은 크기가 제각각이지만 충격을 흡수해 넘어지지 않게 하는 강한 힘이 있다. 습한 음지에서 제 몫을 다하는 발가락은 인체의 버팀목 역할을 충실히 한다. 몸을 지탱해 주는 발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신체도 사회구조와 비슷해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면 관심과 사랑의 대상에서 멀어진다. 모든 것은 관심의 정도에 따라 보이는 것이고 아는 만큼 느끼는 것이다. 나는 무심하게도 발가락을 소중하게 돌 본 적이 없었다. 맨 아래 있다고 등한시하기 일쑤였다. 꽉 막혀 통풍구 하나 없는 신발 속에서 아픔을 호소해도 못 들은 척, 못 본 척할 때가 더 많았다. 수고와 애씀에 비해 무엇을 해주었나 하는 자책의 마음이 들었다. 몸의 소중한 한 부분인데도 여태껏 소중하게 어루만져 주지 않아 미안했다. 

  

가족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의 발이 무거워 보인다. 가장의 지친 발가락이 온전한 삶의 모양새를 갖추고 살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발가락에 가장의 요란하고 부산했던 하루의 일과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바닥이 주는 충격을 고스란히 껴안고 땅을 박차고 나아가 원동력이 되는 뿌리. 열 개의 전사 도움으로 넘어지지 않고 어디든 달려갈 수 있었다. 발가락이 열 개인 이유는 자신이 열렬히 원하는 삶을 살며 희망의 에너지를 발산하라는 메시지인 듯하다.

  

손가락보다 대접을 받지 못해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발가락이 믿음직스럽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는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숭고하다. 

  

나름 삶의 이유를 찾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뭉클한 감동을 준다. 그 감동의 움직임은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 의미를 다시금 음미하는 시간으로 이끈다. 그 시간 속에서 발은 절박한 ‘열정과 냉혹한 현실’ 속에서 치열함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와 함께 동고동락한 발을 위해 신발을 바람에 말리고 햇살에 쪼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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