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난 지 5일째. 드디어 배에서 1박을 했다. 떠 있는 작은 마을인 크루즈. 3000여 명의 승객과 2000여 명의 종업원이 승선해 있다. 목에 걸고 있는 메달 하나로 승선과 하선의 체크가 되고, 음료 주문은 물론 동행하는 사람들의 위치 추적도 가능하다. 물건을 구매할 때도 현금은 전혀 쓰지 않고 메달을 통해 모든 결제가 이루어진다. 이런 편안함 때문에 소비욕구가 더 많아지는 것 같은 판매전략에 혀를 내두르며 백화점처럼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곳들을 기웃거린다.
늘 음식이 넘치는 뷔페식당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예정된 시간에 하선을 했다.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를 만나고 버스에 올랐다. 40여 명이 탄 버스. 가이드는 자기소개를 불어로 했다.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 난감해서 둘러보니 다른 관광객들도 마찬가지 표정이었다. ‘이거 어쩌지? 불어?’하는. 그러나 가이드는 크게 웃으며, 영어로 다시 말했다. ‘손님 여러분 놀라셨지요? 불어로 하는 하루 관광인 줄 알고요?’ 영어와 불어를 동시 할 수 있다는 가이드는 프랑스 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였다. 퀘벡에 살고 있는 이유는 교수인 부인을 따라서 온 것이고 자신의 이름을 딴 블로그를 가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오늘 함께 할 8시간은 프랑스와 영국, 캐나다로 이어지는 전쟁 유럽 이민자들의 역사 교육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가이드에 따르면 퀘벡은 프랑스 본토보다 더 많은 인구가 불어를 쓰고 있다고 한다. 지구상에서 불어를 쓰는 인구가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 캐나다 속의 작은 프랑스가 바로 퀘벡이라 한다.
관광은 아래쪽 타운(Lower town)부터 시작했다. 세인트 로렌스 강을 타고 이어져 있는 동화 같은 마을이 모여 있었다. 어느 쪽을 쳐다봐도 알록달록한 창문들이 그림엽서처럼 옛 유럽 자취들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이어지는 프레스코 벽화. 5층 건물에 실물 크기의 사람들의 특성을 살려 넣은 벽화였다.
퀘벡의 겨울이 너무 추워 북쪽으로는 창을 내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니 건물의 북쪽 벽이 너무 밋밋하여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하였고, 그 건물에 그려진 인물들은 퀘벡 역사에 남을 만한 인물들의 특성을 살려 그려 놓은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인물들이 시대적으로 구분되지는 않았고 필요한 공간에 알맞게 그려져 있었다.
이어지는 로열 광장(Place Royal)의 승리의 노트르담 교회. 작은 교회의 문은 잠겨져 있었지만 북미 최초의 석조 건물이라는 설명과 디카프리오 주연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Catch me if you can)’를 찍은 곳이라고 했다. 또한 로열 광장은 본토의 옛 주인인 인디언들이 물물 교환을 하던 시장이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래서인지 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상점들은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전시하며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광장에서 내려다본 세인트 루이스 강까지의 골목들은 예술적인 감각을 뽐내며 사진에서 보았던 옛 프랑스의 거리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다음은 퀘벡 교외의 한적한 동네를 지나 만난 곳. 성 안느 드 보프 레 대성당(Basilica of Sainte-Anne-de-Beaupre). 북미 3대 가톨릭 성지 중의 하나로 꼽힌다.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안느 성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58년 건립되었다. 이 성당은 전 세계에서 한 해 2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방문하여 치유의 은사를 받고 간다고 한다.
기적을 이룬 증거품으로 휠체어, 워커, 크러치 등이 한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방문하기 전에 사용하였던 것을 치유가 되면서 그곳에 두고 간 것이라는 설명에, 나와 친구는 촛불 하나 밝히며 친구 사돈의 쾌유를 빌었다. 성당 안에서는 마침 누군가의 장례미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가이드의 설명은 듣지 못했고 책자 하나를 얻어 보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이어 몽모렌시 폭포(La chute Montmorency). 나이아가라를 보고 와서 일까. 폭포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높이는 나이아가라의 1.5배쯤 된다는 설명이었다. 멀리 폭포 위 다리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보였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와 나는, 저기까지 걸을까 했지만 참으라는 남편들의 말과 또 시간이 꽤 많이 걸릴 것 같아 가지 않기로 했다.
점심시간에 가이드가 알려준 식당으로 들어갔다. 스테이크 한쪽에 짜게 으깬 감자를 먹고 콜라 한잔에 케이크까지 후식으로 먹으며 이 칼로리를 다 어쩔까 싶었다. 그러나 여행의 묘미는 좋은 음식과 눈요기와 새로운 문화를 배우며 나누는 것 아니냐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오후에는 위쪽 타운(Upper town)이다. 가이드는 퀘벡의 랜드마크인 쌰또 프롱티낙호텔(Chateau Frontenac) 근처에 우리들을 내려 주었다. 1893년 건립된 호텔은 1980 년 캐나다 국립 사적지로 지정되었고 세인트 로렌스 강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다. 이 근처에서 1 시간 가량 자유시간. 모두들 인증샷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들도 여러 곳에서 포즈를 잡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아 인증샷 몇 개를 겨우 건졌다. 이어지는 화가의 거리, 길은 좁고 짧았지만 예쁜 그림들이 꽤 많이 전시돼 있었다. 남편은 그곳에서 그림 한 점을 샀다. 너무도 꼼꼼하게 포장을 해주는 화가의 진심 어린 마음에 잘 샀다며 남편을 칭찬해 주었다.
자유시간 한 시간은 훌쩍 갔다. 늦은 점심에 꽤 긴 걷는 시간이 있었던 관광일정 때문이었는지, 배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는 모두들 ‘꾸벅꾸벅’이었다. 그래도 가이드는 열심히 프랑스와 영국과 캐나다로 이어지는 유럽과 북미 신대륙의 발견과 전쟁에 관한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어쩌면 친구네는 이 긴 일정이 고역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으니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친구의 옆에서, 남편은 친구 남편의 옆자리에서 쉽고 편하게 한국말로 통역을 해주느라 했지만, 가이드의 설명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었다. 주요 골자만 통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는 옆에서 ‘영어 공부를 좀 해서 오는 건데…’하는 이야기를 몇 번 했다. 돌아가면 열심히 해서 다음에는 편하게 여행하라는 격려를 잊지 않았다.
하루가 가고 다시 승선하여 좀 쉬었다가 저녁 시간에 만났다. 프린세스 크루즈는 길고 큰 기적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승객들은 15층 갑판에 나와 캐나다 속의 작은 프랑스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시 만남을 기약했다.
다시 또 올 기회가 주어진다면 프랑스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곳에 며칠 머물며 좀 더 심도 있게 알고 싶었다. 배는 서서히 로렌스 강을 지나 대 서향을 향하고 있었다. 다른 때 보다 배의 요동이 좀 심했다. 우리는 요람에 안긴 아기처럼 흔들거리며 잠을 청했다. 밤 새 달린 배가 도착할 다음 행선지는 사그네이(Saguenay). 우리들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할머니들의 수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