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마음으로 하선을 하는 새 동네. 오늘은 또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하는 크루즈에서의 아침. 오늘은 그런 기대감이 먼바다의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뱃머리나 선미에서도 똑같은 풍경인 끝도 없는 수평선만 바라본다. 흰 파도를 일구는 바다 물결들과 간간이 지나가는 갈매기가 전부이다. 방향감각도 잃었다. 그냥 사방이 바다인 곳 가운데. 먼 곳만 바라본다.
친구도 나도 감기 몸살인 것 같았다. 친구는 한국을 떠나 하루도 쉬지 못한 강행군의 여정이었고, 나도 피곤이 쌓여 있었나 보다. 하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긴장을 놓았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타이레놀을 먹고 뜨거운 레몬티와 생강차를 마시며 종일 누워서 딩굴거렸다.
남편들은 우리들에게 티를 배달해주고, 배를 몇 바퀴 돌고, 카지노를 기웃거리다가 ‘하늘 아래 영화관’이라는 대형 스크린 아래에 앉아 영화 감상을 한단다. 마침 ‘보헤미안 랩소디’를 상영하고 있어 맥주를 마시며, 커다란 실외용 모포를 겹으로 쓰고 영화 감상을 했단다. 추억을 불러왔던 음악 영화를 즐기는 사이, 친구와 나는 ‘자고 또 자고’ 했다. 다행히 오후가 되자 몸 컨디션은 나아졌고, 저녁 먹을 식당은 정장을 입어야 해서 약간의 치장을 해야 했다.
크루즈 안에는 매일 방으로 배달되는 신문이 있다. 그날 하선하는 곳의 날씨와 그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전해주고 꼭 봐야 할 곳들을 알려준다. 물론 이 신문조차도 쿠르즈가 주관하는 그날의 볼거리를 예약하고 가보라는 상술이긴 하지만, 그 내용을 읽어보며 무엇을 봐야 할지, 하루를 계획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배 안에 있을 때와 하선 후의 날씨가 다를 때가 무척 많으므로, 그날 입을 옷을 결정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우비를 준비하거나 우산을 갖고 내리고 바람이 분다면 얇은 재킷을 여분으로 준비하는 등등 말이다.
오랜만에 머리를 드라이기로 정성껏 말리고 스프레이를 최대로 뿌려 흐트러짐을 막는 것은 물론, 몇 개 안 되는 색조 화장품으로 화장을 마쳤다. 어떤 걸 입을까 고민하다가 오래된 긴 드레스를 택했다. 10년도 더 된 옷이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어서 혹시나 하며 짐에 넣어 왔던 것이었다. 다른 긴 드레스들은 이미 한 번씩 크루즈에서 입었던 것들이라 미뤄두기로 했다. 이번엔 새 옷을 장만하지 않았던 것은 몇 번의 크루즈를 다녀오고 나니, 다른 곳에서는 거의 입을 일이 없는 드레스가 몇 개 생겼고, 더 이상 구매를 하는 것은 괜한 욕심인 것 같았다. 더구나 몸무게가 좀 늘어나, 허리가 맞는 옷들이 거의 없었는데, 그 드레스는 아직 입을만했다.
남편 양복도 다림질을 하고 구두의 먼지도 털었다. “준비됐니?” 전화를 하자, 친구네도 준비가 됐단다. 정장을 하고 가야 하는 디너 시간은 5시였지만 한 시간 전쯤 방에서 나왔다.
배에서 조명이 가장 잘 받을 것 같은 몇 곳에서 사진을 찍고, 샴페인 따르는 행사도 보기 위해서였다. 친구는 정장으로 개량 한복을 준비해 왔다. 지나가는 손님들이 모두 우리에게 시선이 오는 것 같았다. 친구의 전통의상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나 보다.
배의 가운데로 가니, 이미 사람들은 정장을 하고 삼삼오오 모여 사진 찍기에 바빴다. 크루즈 안에서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는 사진사들은 근사한 조명을 밝혀놓고, 멋있는 뒷 배경을 곳곳에 붙여 놓고 사진을 찍으라는 청객 행위를 했다. 그러나 그 상술에 넘어갈 우리가 아니었다. 손님이 없는 빈시간에 우리도 그 뒷배경과 벤치와 조명을 이용하려고 했더니, 어느새 사진사가 나타나 안된다며 고개를 젓는다. 하기사 그들이 만들어 놓은 곳을 덤으로 이용해 보려 했던 우리의 심보가 나쁠 수밖에. 아쉬워하며 우리는 나름대로 몇 곳을 찾아 사진 촬영을 했다. “스마일, 김치, 치즈…”. 주름이 더 늘기 전에 한 번쯤 이런 사진을 찍어 둔다는 것과 이런 우아한 시간도 친구 부부와 함께 했다는 것에 그 의미를 둔다.
식사가 끝나고 일찍 들어가서 쉬기로 한 것은 사진을 찍는다고 갑판에서 바닷바람을 많이 맞은 탓에 컨디션이 다시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크루즈 안에 있는 의무실을 찾을 수도 있었지만 일단 더 쉬어 보기로 하였다. 몸의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들어가자며 서둘어 방으로 향했다. 샤렛 타운(Charlottetown)을 못 본 것은 아쉬웠지만 다음날 아침도 늦잠이 허락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음 날도 늦잠. 다행히 둘의 몸 상태는 많이 나아졌다. 역시 잠은 좋은 치료제인 것 같다. 늦은 아점을 먹고 쓸데없이 잡화점과 보석상과 화장품 가게를 기웃거렸다. 아이 샤핑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나름 시간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오후엔 라인댄스와 줌바를 기웃거렸고 저녁은 특별히 이태리안 레스토랑에서 근사하게 마쳤다. 바다에 떠 있던 시간, 흔들리는 편안한 요람 같은 배도 이틀은 좀 지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