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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Jul 18. 2024

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펑펑 울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끝이 없어서 나도 주변인들도 지친다.

 슬픔을 느끼니 행복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이제 너무 많이 느껴서 그만 느끼고 싶다.'


"선생님, 왜 온통 슬픔에 대한 거예요?"

"기쁨이나 즐거운 경험에 대해서는 평소에도 많이 생각하고 쓰지 않니, 생각해 보면 슬픔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주 말하지 않는 것 같아서, 한번 써보면 어떨까? 자기가 쓰고 싶은 질문만 골라서 그 아래 써도 돼."


가끔 누군가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의 나이를 잊어버리게 된다. 글은 그렇게 나의 편견과 선입견을 지워준다. '울고 나도' 끝이 없는 슬픔에 대해 생각했다. 어리다고 슬픔에 지친 마음을 어리광이나 투정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꽤나 또박또박 적었다.




'슬픔을 통해 나를 더 잘 알게 되었다.

 운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는 게 달라진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슬픔 앞에서 할 수 있는 우는 일이다. 그러나 운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아버렸다. 눈앞의 뿌연 세상이 그치면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나의 마음과 하늘의 색은 땅과 하늘만큼의 차이처럼 잿빛이다. 그는 슬픔을 통해 체념이 아니라 현실을 알게 되었다. 안다는 게 달라졌을 뿐 안다고 달라진 건 없다.




'때론 그냥 울면서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과 '좋다'라는 말에 눈길이 멈추었다. 이 문장에 모순은 없다. 하지만 '자기'의 말이 아니다. 이는 슬픔을 듣고, 객관화할 수 있는 타인의 말이다. 그들은 듣고, 평가하고, 충고할 특권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손으로 쓰인 글로 슬픔을 배웠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쓸 때 가장 어렵고 슬픈 부분이 나의 손에서 타인의 글이 써진다는 사실이다. '나의 글'에 집착하는 것도 병일 수 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내 안에 감추어진 말을 찾고 싶어서 여전히 글을 쓴다. 결국 내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더욱 충실히 타인의 글을 읽으면 되는 거고,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그 자체로 희열이 있지 않을까.


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이 글에도 몇 개의 라이킷은 달리겠지.

그들이 슬픔에 대하여 썼다고 해서 역시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 없다.

이 상황이 조금은 억울해서, 입안에 넣으면 아찔할 정도로 단 사과파이를 준비했다.

슬픔을 달콤함으로 포장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그의 글에 라이킷을, 나만의 방식으로 단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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