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일까, 권고일까, 다그침일까
“산 사람은 살아야지…”
장례 일정이 진행되는 동안 흔히 하는, 또는 듣게 되는 이 말은 위로일까요, 권고일까요?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긴 합니다만, 저는 이 말이 참 듣기 싫었습니다. 거의 반세기전 부모님을 잃었을 때도, 그 반세기 후 아내를 잃었을 때도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이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슬프고 괴로워도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고,밤이 깊으면 잠도 자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었는데, 그 유해가 아직 여기 누워 있는데, 또는 한 줌 재가 되었는데, 살아남은 나는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고, 잠이 오고… 그런 육신의 필요가 느껴지고, 거기에 순응해 먹고 마시고 자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고 괴롭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망자에 대하여 무슨 큰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육신에 얽매인 생명체인지라, 억지로라도 먹고 마시고 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뭔가를 먹는데 문득 ‘맛있다’는 생각이 들거나, 혹은 입 밖으로 그 말이 나오기도 하고, 우스운 상황을 보고 피식 웃기도 합니다.
그러면 화들짝 놀라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 사람을 잊어버렸거나, 본능에만 충실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내는 나의 반쪽이었고, 그러므로 그녀가 떠나버린 것은 내 존재의, 내 삶의 절반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세계가,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우주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건물이 절반 무너졌다면, 그 건물은 이미 건물이 아니겠지요. 사실상 다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나의 우주’가 산산조각 나 사라져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나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길을 걸어도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이 없습니다. ‘나의 세계’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면 정작 이 세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대로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오가고, 즐겁게 대화하면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십니다. 자동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항공, 선박, 열차는 모두 정상적으로 원활하게 운행됩니다. 스위치를 켜면 전깃불이 들어오고, 수도 꼭지를 틀면 찬물 더운물 이상 없이 잘 나옵니다. TV에서는 제 시간에 드라마 스포츠중계 개그 등등이 정상 방영됩니다.
이 사회, 이 세상은 어느 하나 흐트러짐 없이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의 세계’는 무너졌는데 ‘세계’는 온전합니다.
‘나의 우주’는 무너졌는데, ‘우주’는 온전합니다.
나의 절반, 아니 나의 전부인 내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는데도 세계는, 우주는 한 점 흐트러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정상이고, 이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나의 세계, 나의 우주는 무너졌는데, 누구도 터럭 하나 다치지 않고 온전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내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졌는데 이 세상은 그로부터 어떤 타격도 입지 않았고, 어떤 변화도 없다는 것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아무런 변화없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세계, 나의 우주는 무너졌지만, 실제 이 세계 이 우주는 무너지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그 세계에 발을 딛고 있으므로, 아침에 일어나서 때가 되면 식사를 하고, 용변을 보고,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사람을 만나고, 볼 일을 보러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 짜여진 ‘시나리오’ 대로 돌아가는 이 세상의 일에 나의 슬픔이 차지할 자리는 없습니다. 내가 슬픔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지 않으면, 나의 삶의 기반도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나도 무너진 ‘나의 세계’를 벗어나, 아무 일 없는 듯이 정상적으로 운행되는 ‘이 세계’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차를 갈아타듯이.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 말에는 바로 이런 모든 것 내포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에게 주변에서는 모두가 하루 빨리 정상 생활에 복귀하라고 ‘다그칩니다.’ ‘다그친다’는 표현이 옳지 않은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란 말에는 바로 그런 ‘다그침’이 들어있습니다.
“울지 마라”, “너무 상심하지 마라”, “마음을 굳게 먹어라”, “힘내라”… 등등의 위로 또는 격려의 말은 결국 모두가 이처럼 하루 빨리 ‘정상 생활’로 복귀하라는 다그침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겠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떠났어도, 남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몇 달이 될지, 몇 십년이 될지 몰라도, 살아가야 할 나날이 남아 있으니까요.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 몸부림칠 수만은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슬픔을 가누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고, 죽을 때까지 슬픔에 빠져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법도 없지 않습니까?
슬픔을 견디어 내고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슬픔을 견디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몫 아닐까요? 끝내 슬픔을 못 이기고 세상을 떠났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슬픔을 견디어 내고 새로운 삶을 삽니다.
그렇다면 하루빨리 슬픔을 잊고 정상생활로 복귀해 ‘산 사람은 사는 것’이 능사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그렇게 되더라도, 슬픔을 견디는,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그 사람을 충분히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작정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다그쳐서 될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에게 ‘더 이상 이전의 가지런한 세상은 없다’고 표현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처럼 된다고도 합니다. 이 세상도, 자기 자신도 모두 바뀌어 버린다는 것이지요.
특히 배우자를 잃는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일생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가 배우자를 잃은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죽음이 부모를, 자녀를, 형제자매를, 친구를 앗아가지만, 그 모든 상실보다 배우자의 상실이 가장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견디기 힘들고, 큰 슬픔을 겪습니다.
그 슬픔은 노력한다고 해서 빨리 잊혀지는 것이 아님은 물론, 금방 가벼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무겁게 오래 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격렬한 파도처럼 몸과 마음에 몰아칩니다. 쓰나미처럼 밀려와 영혼을 온통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것이 서서히 잦아들어 깊은 바다처럼 말없는 침묵 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이 슬픔의 바다는 노도와 같이 영혼을 뒤흔들지는 않지만, 깊은 일렁임으로 삶 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렇게 내 영혼의 일부가 되어 잊혀진 듯, 잊혀지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는 과정이 치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처음 쓰나미가 몰아칠 때는 저항할 수 없습니다. 몸부림치고 저항할수록 영혼은 망가집니다. 조용히 슬픔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떠난 이를 애도하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많이 울고, 소리 치고 싶으면 소리 치고… 울음에 충분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울어도 그 울음은 부족합니다.
이럴 때는 주변에서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충고는 피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붙잡아주고, 안아주고, 토닥거려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이 슬픔의 쓰나미가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결코 이전의 ‘가지런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삶’입니다. 그 과정은, 어떤 길을 거쳐가는지, 어떤 일을 겪는지, 어떤 상황에 맞닥뜨리는지, 사람마다 모두 달라,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슬픔이 가슴 속 한 켠에 조용히 자리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책을 다 읽고 책꽂이 한 구석에 꽂아두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가끔 그 책을 뽑아서 아무데나 펼쳐볼 수도 있고, 그렇게 펼쳐놓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우연히 다시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때로는 새로운 슬픔이 솟아나고, 때로는 울컥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이 솟구치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행복했던 순간의 추억이 떠올라 잔잔한 미소가 피어나기도 합니다. 이것이 슬픔을 견디어 낸 후 받아 드는 일종의 ‘수료증’입니다.
흔히 이런 상태를 ‘극복’이라고 표현하지만, 슬픔은 극복되는 것도 아니고 극복해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고이 접어서 의식의 깊은 곳에 보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산 사람은 사는 것’입니다.
먼저간 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슬픔과 아픔과 그리움이 영혼 깊은 곳에 상흔처럼 새겨진 상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