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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Nov 25. 2024

[투병기] 땅끝까지...마지막 여행

생애 마지막 1년이 주어진다면?

귀하고 안타깝다.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천금이고, 일분 일초가 안타깝다. ‘그 날’이 다가올수록 더욱 그러하다. 모래를 움켜쥔 듯, 그렇게 속절없이 사라져간다. 움켜쥘수록 그것은 더 빨리 빠져나간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귀하고 안타까운 시간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만약 누군가에게 생애 마지막 시간으로 1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까? 생계에 쫓겨 못했던 여행도 하고, 멋진 곳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시간도 보내고, 가족들과 유쾌한 시간도 보내고… 못다한 것들을 마음껏 하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보통은, 주어지지 않는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부분 이미 몸이 만신창이가 된 다음이다. 그러므로 실제 생애 마지막으로 주어진 시간은 온갖 튜브를 몸에 주렁주렁 달고, 이런 검사 저런 치료를 위해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귀하고 안타까운 시간을 알차고 소중하게 보내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8월18일 폐암 확진을 받았고, 정확히 13개월 후인 이듬해 9월18일 헤어졌다. 생애 마지막 시간이 13개월 주어진 셈이다. 혹시 확진 1년 전에 이런 상황이 펼쳐질 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1년의 마지막 시간을 알차고 소중하게 보낸 후 투병생활에 들어갔을까? 십중팔구 이 운명을 피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다행히 오늘날 의료체계는 이런 점을 어느 정도 배려하는 것 같아서 감사하다. 

대학병원의 경우,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2주 또는 3주 이상 입원할 수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투병기간 내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게 된다. 그 입원 휴지기에 비록 환자의 몸이 불편해도, 주어진 상황에 맞춰 뭔가 뜻있게 마지막 때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둘만 다니는 여행을 좋아했다. 둘이서 때로는 배낭을 메고, 때로는 카트를 끌고, 때로는 국내로, 때로는 해외로 다녔다. 대부분 스케줄은 없었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다녔다. 일본 오사카 어느 동네 허름한 라멘집,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변두리 이름모를 시장의 이상한 카페,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역 근처 어떤 서점….통영 부둣가 어느 건물 2층의 통유리창이 있는 카페, 문경새재 초입의 커피샵, 원주 어느 거리의 추어탕집, 제천 어느 뒷골목의 60년대 스타일 다방… 추억이 서린 곳들 중 상당수는 우연히 가게 된 곳이기 때문에 다시 찾아가지도 못한다. 

그래서 투병 기간 처음엔 여행을 좀 다녔다. 간 크게도 해외여행을 계획하기도 했다. 미얀마를 가보자고 했다가 마카오로 목적지를 바꿨다. 그러나 결국 포기했다. 그렇게 까지 대담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대신 강릉 바닷가, 설악산 등 공기 좋은 바닷가나 산으로 다녔다. 

갈수록 여행은 어려워졌다. 처음 설악산을 갔을 때는 흔들바위까지 거의 같이 올라갔다. 그러다가 다음에는 입구 둘레길을 걷는 정도에 머물렀고, 나중에는 그나마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다. 강릉에는 지인이 마련해둔 작은 아파트가 있어서 자주 이용했다. 그냥 가서 그곳에 묵으면서 삼사 일 지내다 오는 것이다. 그것도 나중에는 내가 뭔가 사러 나왔다가 들어가면 문을 열어주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더니, 결국은 혼자 문을 열어주지 못하는 지경까지 되었다. 

국내 여행은 자가용을 이용하면 되므로 어려울 것은 없었다. 언제든 되돌아올 수 있고,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어디든 도움을 청할 수 있으니까. 또 뭔가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언제든 스케줄을 바꿔 그런 음식점을 찾아가면 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묵 밥’이 먹고 싶다고 한다. 충북 괴산을 지날 때였다. 검색을 해보니 멀지 않은 곳에 ‘묵 밥’ 집이 있었다. 네비게이션을 켜고 따라가보니 ‘수옥정관광지’라는 곳이 나왔다. 물론 이전에는 알지도 못했고, 가 보지도 않았던 곳이다. 그 근처 어떤 곳에 시골 주택 같은 식당이 있었고, 평일이라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꽤 알려진 곳이었던지,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와 함께 다닐 때 가장 어려운 점은 화장실 문제다. 그것이 해결 가능했던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휠체어가 구비되어 있고, 장애인 화장실은 물론 ‘가족화장실’이 있어, 보호자가 환자를 데리고 함께 들어가 여유 있게 용변을 처리할 수 있다. 그러니 고속도로 위주로 다니면 큰 어려움은 없다. 

여름이 되었다. 다시 퇴원하는 날. 담당 교수님이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다.


“가족 친지들과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십시오!”


마지막 ‘휴가’란 뜻이다. 대화 중에 그 뜻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냥 이 마지막 휴가를 소중하게 보내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그 전에, 아직 휠체어 신세를 지기 전에, 나는 나름대로 마지막 여행을 준비했다. 1주일의 캠핑카 여행이다. 캠핑카를 대여하고, 여러가지 캠핑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고 서울을 떠났다. 먹거리는 별로 준비하지 않았다. 현지 마트에서 그때그때 가장 신선한 것으로 구매하면 되기 때문이다.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물론 약이다. 환자는 때때로 기력이 크게 떨어질 때가 있다. 집에 있을 때라면 동네 의원에 가서 영양제도 맞고, 다른 여러가지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여행 중에는? 이런 경우에 필요한 몇가지 약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링거 주사가 아니라 말하자면 ‘먹는 링거’인 셈이다.

그렇게 서해안을 거쳐 해남 땅끝마을, 완도 청해진 등을 거쳐 안면도 등 서해안 곳곳을 누볐다. 완도였던가? 캠핑장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관리소 측에서는 아무데나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면 된다고 한다. 가장 뷰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관리소에서 장작을 사서 캠프 파이어를 했다. 낙조가 너무 아름다웠고, 색소폰 독주회도 열었다. 목이 메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땅끝마을 전망대에서 멀리 바다를 내려다보며 차를 마시고, 시장에서 산 싱싱한 생선과 조개도 구워 먹고,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보면서 즐거웠던 추억을 회상하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뭐가 제일 좋았어?”

“행담도 휴게소에서 라면 끓여먹었던 것!” 언젠가 우리 부여 갔을 때… 비 오는 날 차 트렁크 열어놓고 거기서 라면 끓여 먹었잖아… 그 생각 나더라.”


그래. 산해진미보다, 멋진 명품보다, 그런 것이 기억에 오래 남기 마련이지…


감사한 것은 이렇게 중간에 퇴원할 때마다 병원에서 환자의 기력을 잔뜩 끌어올려 준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처방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입원 후 집에 돌아올 때마다 이제 곧 낫겠구나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너무 씩씩해서. 물론 그것도 회가 거듭될수록 점점 저하되지만… 그것은 의료진도 환자의 남은 삶이 좀더 행복하게 해 주려고 애를 쓴다는 증표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가망이 없는 치료에 매달리기보다는 남은 짧은 시간이나마 의미 있게 보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마지막 휴가를 마치고 다시 입원하는 날, 나는 분명히 예감할 수 있었다. 


“이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겠구나…”


그 사람도 예감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준비를 해서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땅끝까지 갔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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