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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달의 연애

by 오분레터

그 며칠이 왜 그렇게 길었는지 모르겠다. 평소 같으면 금방 지나갔을 주말이 마치 한 달처럼 느껴졌다. 쓸데없이 휴대폰을 수시로 확인하고, 혹시 문자가 왔는데 소리를 못 들었나 싶어서 볼륨을 최대로 올려놓기도 했다. 월요일 오전, 회사에서 일하는 중에도 계속 휴대폰이 신경 쓰였다. 점심시간에 혹시나 싶어 확인해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제주도에 있나? 언제 돌아온다고 했더라? 화요일 저녁, 드디어 아내에게서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제주도에서 돌아왔어요. 이번 주말에 시간 되시면 만나 뵐까요?"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즉시 답장을 보냈다.

"네!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어디서 만날까요?"

"통영 시내 어디든 좋아요. 맛있는 곳으로 추천해 주세요."

나는 곧장 준비해 둔 장소를 떠올렸다. 사실 며칠 전부터 ‘만약 아내를 만나게 된다면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며 알아본 곳이 있었다. 바로 통영타워 회전 레스토랑. 시내 전경이 한눈에 보이고, 밤에는 야경이 아름답다고 했다. 분위기도 괜찮아 첫 만남에 제격일 것 같았다.

"통영타워 회전 레스토랑 어떠세요? 토요일 저녁 7시에 만나면 될까요?"

"좋습니다. 그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토요일, 나는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평소 같으면 늦잠을 잘 텐데, 다섯 시가 되자 번쩍 깼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구나. 오전 내내 옷장 앞에서 씨름했다. 몇 벌 안 되는 옷들을 모조리 꺼내 입어보고는 다시 벗기를 반복했다. 정장은 지나치게 격식 있고, 청바지는 너무 가벼워 보였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흰 셔츠에 검은 면바지를 택했다. 머리 모양도 문제였다. 왁스를 발랐다가 지웠다가, 다시 발랐다가. 거울을 보니 영 어색했다. 결국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선택이다. 첫 만남에 모자를 쓰다니.

6시가 되어 집을 나섰다. 나는 곧장 아내의 숙소가 있는 아파트 앞으로 향했다. 초저녁 공기는 선선했고, 가을 냄새가 스며 있었다. 잠시 후, 아파트 주차장으로 아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한 차림에 은은한 향기가 어울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내가 조심스레 웃으며 물었다.
“아니에요. 방금 도착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짧은 첫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나란히 차에 올라탔다. 어색한 첫인사. 그녀는 내 야구모자를 보더니 살짝 미소 지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이 사람 좀 특이하네'라는 의미였나 보다. 나는 긴장한 탓에 괜히 쓸데없는 말을 꺼냈다가 스스로 민망해졌다. 하지만 다행히 아내는 가볍게 웃어 주었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목적지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도로 위의 가로등 불빛이 차창에 스쳐 지나갔다. 내 심장 박동은 그 불빛보다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둑해진 저녁, 통영타워 회전 레스토랑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천천히 돌아가는 원형 홀 너머로 통영 시내의 불빛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창밖으로는 통영항의 잔잔한 물결과, 대교 위를 달리는 차량 불빛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와, 여기 정말 예쁘네요.”
아내가 창밖을 바라보며 감탄하자, 나는 속으로 가만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장소 선택이 틀리진 않았구나. 메뉴판을 펼치니 스테이크와 파스타가 주를 이뤘다. 사실 이런 서양 음식은 내게 낯설었다. 평소 식탁엔 늘 삼겹살과 김치찌개가 익숙했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저는 등심스테이크로 하겠습니다.”
조심스레 주문을 넣자,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스테이크로 할게요.”

순간, 마치 취향까지 맞춘 듯한 기분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음식이 나오자 나는 정말 열심히 먹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너무 긴장한 나머지 뭘 먹는지도 모른 채 그냥 먹어치웠다. 접시에 남은 소스까지 빵으로 싹싹 닦아 먹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내는 나와 달리 여유로웠다.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제주도 여행 어떠셨어요?”
“좋았어요. 날씨도 맑고, 음식도 맛있고.”
“혼자 다녀오신 거예요?”
“네. 혼자서요.”

대화는 약간 어색했지만,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생각보다 그녀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있었다. 웃을 때 눈가에 잡히는 작은 주름이, 괜스레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던 중 아내가 돌직구를 던졌다.

“근데… 왜 갑자기 연락하셨어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충분히 예상했던 질문이었지만, 어리석게도 답변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

“그냥… 계속 궁금했어요. 어떻게 지내시는지.”
“저를 기억하세요? 우리 회사에서 제대로 얘기해 본 적도 없는데.”
“네, 기억합니다. 재무팀에서 일하시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아내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긴장이 조금 풀렸다. 아, 다행이다. 일단은 위기를 넘겼구나.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만남은 꾸준히 이어졌다. 처음엔 어색한 침묵이 많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대화가 자연스러워지고 마음의 거리가 좁혀졌다. 아내는 나보다 네 살이 어려웠다. 흔히 궁합도 안 본다는 나이 차이였다. 아내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자라났고, 대학도 진주에 있는 경상대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도시, 서로 다른 대학에서 각자의 청춘을 보냈다. 가끔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같은 캠퍼스에서 만났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더 일찍 시작됐을까?

“대학 시절에 만났으면 어땠을까?” 내가 웃으며 물었다.
“글쎄.” 아내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마 그때는 서로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겠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만났으니, 그것만으로도 기적 같았다.

아내는 대학 시절, 조용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했다. 반대로 나는 공대 특유의 눈치 없는 전형적인 공대생으로 지냈다. 생각해 보면, 설령 같은 캠퍼스에 있었다 해도 우리는 그냥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매주 주말마다 함께했다. 통영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해안도로를 달리며 바닷바람을 맞고, 가끔은 영화를 보았다. 아내는 조용한 영화를 좋아했고, 나는 액션 영화를 즐겼지만, 그 시절 나는 아내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어느 날, 아내가 불쑥 말했다.

“나 사실, 처음엔 오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이상하다고?”
“첫 만남에 야구모자 쓰고 나오고, 스테이크 소스까지 싹싹 먹고…”
“아… 내가 그랬나?”
“근데 그게 오히려 좋았어. 가식 없는 진짜 모습 같아서.”

아내는 회사에서 제법 많은 구애를 받았다고 했다. 대학 시절엔 조용했지만, 직장에선 달랐다. 하지만 대부분은 겉모습만 번드르르했지, 진심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반면 나는 조금 어설프고 서툴렀지만, 그래서 더 진실하게 보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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