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직장은 경남 통영의 작은 조선소였다. 철판과 용접봉 냄새가 뒤섞인, 거칠고 묵직한 남성들의 세계. 새벽 여섯 시 사이렌이 울리면 수천 명의 남자들이 작업복을 입고 하나둘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여직원은 바위틈에 핀 들꽃처럼 귀한 존재였다.
특히 재무팀에서 근무하던 아내는 남달랐다. 키 165cm 정도의 늘씬한 체격, 단정히 빗어 넘긴 긴 머리가 햇살에 반짝였다. 무엇보다도 쉽게 설명하기 힘든 아우라가 있었다. 차갑다고 해야 할까, 도도하다고 해야 할까. 마치 “나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에 속해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누구도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점심시간이면 남자 직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내를 따라갔다. 구내식당에서 식판을 든 채 서 있는 뒷모습만 보아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꼿꼿이 선 어깨, 조금은 거만해 보일 정도의 태도. 그러나 그 모습조차 우아했다.
“야, 저기 온다. 오늘도 화장 예쁘게 했네.”
같은 부서 동료 하나가 식당 입구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그러게. 말 한번 걸어보고 싶긴 한데… 가까이 다가가기가 쉽지 않단 말이지.”
“그래도 석호는 친한 것 같던데?”
그 대화를 들으며 나는 멀찍이서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와 입사 동기인 석호가 부러웠다. 둘이 함께 웃으며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속이 쓰렸다.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수줍은 공돌이였다. 남학생뿐인 공대를 졸업하고, 처음 와본 통영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풋내기 신입사원. 키 173cm의 평범한 체격, 안경을 낀 특별할 것 없는 외모. 그런 내가 아내에게 말을 걸기엔 용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때, 복도에서 스쳐 지날 때. 그러나 매번 “안녕하세요”라는 한마디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끝내 삼켜졌다. 아내의 도도한 눈빛이 다가서기를 어렵게 만들었고, 혹시 “이 사람이 왜 나한테 말을 걸지?” 하는 시선을 받을까 두려웠다. 그렇다. 나는 철저히 ‘I형 인간’이었다.
입사 2년쯤 지나자 회사는 경영난에 빠졌다. 다행히 나는 때마침 거제도에 있는 조선소로 이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떠나는 날까지 아내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다가서지 못했다. 거제로 옮긴 뒤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회사는 더 커졌고, 업무는 복잡해졌으며, 동료들마저 낯설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모습은 늘 머릿속을 맴돌았다. 구내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서 있던 뒷모습, 엘리베이터에서 스쳐 지나며 맡았던 은은한 향기, 동료와 대화하며 지었던 미소까지.
“그 사람, 아직도 회사 다니고 있어?”
가끔 통영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을 만나면, 농담 섞인 질문이 늘 따라붙곤 했다.
거제도로 이직한 지 1년 2개월이 지났다. 2012년 봄, 벚꽃이 만개한 어느 금요일 저녁이었다. 퇴근 후 기숙사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는데, 문득 아내가 떠올랐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직도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까. 살짝 올라온 술기운에 용기를 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갑자기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금요일 저녁임에도 야근을 하던 친구는 영혼 없는 말투였다.
"OOO 말이야. 혹시 연락처 알 수 있어? 직원 조회 가능하잖아."
"왜? 설마 아직도…"
"그냥 궁금해서. 안 준다면 말고."
친구는 한참 망설이다가 물었다.
"야, 솔직히 말해. 진짜 관심 있는 거야?"
"당연하지."
"그럼 정말 진심으로 만날 생각이야?"
"당근이지."
마침내 친구가 아내의 번호를 불러주었다. 010-XXXX-XXXX. 나는 긴장되는 손으로 그 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했다. 이름은 ‘그녀’라고 했다. 번호를 받고 나니 오히려 더 떨렸다. 이제 어떻게 시작하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마음을 다잡았다.
“안녕하세요. OO에서 같이 일했던 OOO입니다. 갑작스럽게 연락드려 놀라셨죠? 혹시 시간 되실 때 한 번 차 한잔 하실 수 있을까요?”
문자를 보내고 나서 즉시 후회했다. ‘너무 직설적이었나? 너무 갑작스럽나? 뜬금없이 이렇게 연락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미친놈이라 생각하면 어떡하지?’ 휴대폰을 소파에 던져놓고 방 안을 서성였다. 30분이 지나도 답이 없었다. 1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조용했다. 아, 역시 안 되는구나. 괜히 민폐만 끼쳤나. 자책하며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반가워요.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제주도에 여행 중이어서요. 며칠 뒤에 돌아가는데 그때 연락드려도 될까요?”
심장이 쿵쿵 뛰었다. 거절당한 건 아니구나. 나를 기억 못 하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답장을 해줬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뜻 아닐까.
“네, 괜찮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시고 돌아오시면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날, 나에게 그런 용기가 어디서 솟아났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그 용기를 그대로 받아준 아내 또한, 나에게는 참으로 감사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