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설픈 프러포즈

by 오분레터

우리가 만난 지 열 달쯤 되었을 때, 결혼 이야기가 자연스레 오가기 시작했다. 딱히 누가 먼저 꺼낸 말은 아니었다. 함께 미래를 상상하다 보니, 어느새 결혼이란 단어가 입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우리 언제 결혼할까?”
“글쎄… 언제가 좋을까?”
“올가을쯤?”
“좋네.”

그 대화는 너무나 간단했다. 거창한 프러포즈도, 드라마 같은 극적인 순간도 없었다.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결혼을 약속했다. 이제 남은 건 한 가지였다. 아내의 아버지께 허락을 받는 일. 아버님은 진주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고 계셨다. 아내가 대학생일 무렵, 어머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오빠는 결혼해 따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나는 정장을 차려입고 진주로 향했다. 아내의 집은 주택가에 자리한 오래된 2층집이었다. 낡았지만 단정한 기와지붕과 좁은 마당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곧 환갑을 맞이하는 아버님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딸을 좋아해 준다니 고맙네.”
“저야말로… 이렇게 좋은 따님을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버님은 내 이야기를 잠잠히 들은 뒤, 잠시 한숨을 내쉬셨다.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들었네.”
“네. 어릴 적에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고, 방 안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데 아버님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그래도 이렇게 씩씩하게 잘 자랐구먼. 딸이 좋아한다니, 나도 그걸로 충분하네.”

그 순간 긴장이 확 풀렸다. 예상보다 훨씬 쉽게 승낙을 얻은 것이다. 아버님은 환갑을 앞두고 계셨고, 그래서인지 딸의 결혼을 누구보다 서두르시는 듯했다. 아버님의 허락을 받고 나니 이제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해야 했다. 하지만 막상 어떻게 할지 막막했다. 영화에서 보던 반짝이는 이벤트들은 내게 너무 과장되고 어색했다. 그러던 중, 라디오 사연 코너를 듣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직접 말하기 쑥스럽다면… 녹음을 해보자.’

며칠 뒤 주말 저녁, 우리는 다시 통영타워 회전 레스토랑을 찾았다. 첫 만남의 추억이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차에 올라탄 나는 태연한 척 말했다.

“잠깐, 라디오 좀 들어볼까?”

미리 넣어둔 CD를 틀자 차 안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어색한 여성 DJ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안녕하세요, 청취자 여러분. 오늘은 특별한 사연을 소개합니다. 거제도에 사는 한 남성분의 이야기인데요…”

아내는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눈치를 챘는지 웃음을 참으며 듣고 있었다.

“10개월 전, 야구모자를 쓰고 나타나 스테이크 소스를 빵으로 싹싹 찍어 먹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바로 저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사랑했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고 싶습니다.”

녹음이 끝나자 차 안은 고요해졌다. 뒷자리에 미리 준비해 둔 꽃다발을 아내에게 내밀며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아내는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얼굴을 들었을 때,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정말 어설프다.” 아내는 웃으면서 눈물을 훔쳤다.
“목소리가 너무 부자연스러워. DJ 흉내도 안 똑같고.”

“그래도 감동했지?” 나는 조심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상하게 눈물이 나네.”

아내는 그날 꽤 많이 울었다. 내 어설픈 프러포즈 때문이었을까, 어설픈 DJ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모든 순간에 스며 있던 우리의 사랑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마침내 2013년 10월 14일, 진주의 작은 웨딩홀에서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화려하지도, 규모가 크지도 않았지만, 그날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대였다. 양가 가족과 몇몇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약을 하고 반지를 끼워주던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의 신혼집은 통영의 작은 투룸이었다. 전세 보증금 5천만 원이 우리의 전 재산이었지만, 그 좁은 공간은 세상 어느 집보다 따뜻하고 빛났다. 두 사람만의 집, 두 사람만의 삶이 시작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결혼 첫날밤, 아내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오빠, 우리 행복하게 살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응, 그러자. 무조건 행복하게 살자.”

그때의 우리는 몰랐다.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시련들을. 네 번의 우울증과 네 번의 육아휴직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조선소의 마돈나와 수줍은 공돌이의 사랑 이야기.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나타나 스테이크 접시를 싹싹 비우던 남자와, 차가워 보였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자. 돌이켜보면 모든 게 우연이었다. 아내가 제주도에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내가 용기를 내지 못했다면, 친구가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수많은 작은 우연들이 겹쳐져 하나의 기적이 되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서로를 만났다. 그리고 그 우연이 만든 사랑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때로는 힘들었고, 때로는 아팠지만, 우리는 끝내 서로를 놓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진짜 사랑의 모습이다. 어떤 사랑은 천둥처럼 시작되고, 어떤 사랑은 속삭임처럼 시작된다. 우리의 사랑은 야구모자와 스테이크 접시 사이에서 조용히 피어났다. 그리고 그 조용한 시작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다.

keyword
이전 04화열 달의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