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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길, 믿음의 자리

by 오분레터

1년 뒤 나는 대학입시에 실패한 나는 재수를 선택했다. 안타깝게도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형편이 되지 않았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렸고, 낮에는 독서실 총무일을 하며 수능을 준비했다. 두 번째 수능 성적은 예상보다 좋지 않았고 학비가 저렴한 대학교를 골라 입학했다. 입학 후 두 달쯤 지났을까, 엄마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시던 날, 나는 술에 취해 일찍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휴대폰 화면 가득 셀 수 없는 부재중 통화가 쌓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모, 이모부, 그리고 외숙모까지… 한밤중에 쉴 새 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래도 단순히 내가 그리워서일 리는 없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때였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고, 화면에는 외숙모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야 이놈의 새끼야,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부산이 고향인 외숙모는 언제나 말투에 바닷바람 같은 거친 기운이 묻어 있었다.
“네... 어제 일찍 좀 잤어요, 숙모. 무슨 일이에요?”
“네 엄마 돌아가셨어! 빨리 와!!”
“…네? 엄마가… 뭐라고요…?”

나는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창밖의 풍경은 흐릿하게 번져갔고, 택시 안에서는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병원에 닿았을 때, 엄마는 이미 하얀 천에 덮인 채 싸늘하게 누워 계셨다. 얼굴에는 핏기 하나 남지 않았고, 몸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렇게, 한순간에 나는 엄마를 하늘로 떠나보내야 했다.


장례가 끝난 뒤, 나는 홀로 텅 빈 집에 들어섰다. 익숙한 현관문을 열었지만 안은 이미 낯설게 비어 있었다. 반겨줄 엄마의 목소리도, 부엌 가득 퍼지던 따뜻한 밥 냄새도 사라진 자리였다. 전세로 살던 집을 정리하고 남은 것은 고작 보증금 1,800만 원. 그것이 내게 남겨진 전부였다.

“이제 진짜, 나 혼자구나…”

남은 가족도, 돌아갈 집도 없었다. 기숙사가 내게 허락된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집이 없는 서러움보다 더 고된 건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대학 시절 내내 가장 외롭던 순간은 언제나 명절이었다. 방학 땐 그나마 계절학기 학생들 덕에 캠퍼스가 숨을 쉬었지만, 명절만큼은 완벽히 달랐다. 구내식당은 굳게 닫혔고, 준비해 둔 것이 없으면 며칠을 라면으로 버텨야 했다. 어느 날, 컵라면을 휘젓다 말고 나도 모르게 속삭였다.

“아… 라면조차 목으로 안 넘어가네..."


외로움이 켜켜이 쌓여가던 어느 날, 나는 학교 후문 근처를 걷다가 우연히 작은 교회를 발견했다. 낡은 벽돌 건물, 창가에는 ‘○○교회’라 적힌 흰 간판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날 그곳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엄마가 떠나시던 그해 여름, 나는 두 발로 그 교회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건, 그 길을 스스로 선택해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교회 안은 예상보다 따뜻했다. 그리 넓지 않은 예배당, 오래된 나무 벤치에서는 은은한 향이 배어 나왔고, 작은 피아노에서 흐르던 반주 소리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혼자 교회 안으로 들어온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따뜻한 미소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처음 오셨어요? 형제님, 어서 오세요.”

‘형제님’이라는 말이 그렇게 따뜻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 이름도, 배경도 모르는 사람들이 마치 오래된 가족처럼 나를 품어주었다. 방학이 되자 교회에서는 여름 캠프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또래 학생들의 환한 웃음이 내 마음을 이끌었다.

“같이 가요. 별건 없어요. 말씀 듣고, 찬양 부르고, 같이 밥 먹고… 가족처럼 지내는 거예요.”


캠프에서는 낯선 사람들과 조를 짰지만, 그 누구도 나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았다. 함께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따뜻하고,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술 한잔 하지 않고 이렇게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거지?’

그때까지만 해도, 술에 기대어 살아가던 내게 모든 풍경은 낯설고 신기했다. 캠프 마지막 날 밤, 넓은 강당에서 다 함께 찬양을 부르고 있을 때였다. 무대 정면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그림자가 예수님의 형상처럼 보였다. 숨이 멎는 듯한 순간이었다.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봐도, 또다시 봐도… 분명히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분이 거기, 계신 것만 같았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강당의 조명과 구조물이 만들어낸 우연한 형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믿고 싶었다. 믿는 대로, 그대로 믿어졌다.

그날 마지막 시간, 나는 첫 참가자로 소감을 전하게 되었다. 수많은 시선이 내게 쏟아지는 순간, 손과 입이 덜덜 떨렸다. 한 마디를 내뱉기도 전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폭풍처럼 쏟아진 울음만은 선명하다. 지나온 삶의 서러움과, 그 순간 느낀 깊은 고마움이 뒤섞여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기숙사에서, 강의실에서, 헬스장에서… 매일이 감사로 가득했다. 어느 날, 헬스장에서 러닝머신 위를 달리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주말 오후의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맑았고, 햇빛은 투명하게 유리창을 뚫고 안으로 스며들었다. 사람 하나 없는 조용한 헬스장에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운동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숨 쉬는 것조차 감사하게 느껴지던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그렇게 한동안 기독교 안에서 마음을 채웠다. 그러나 졸업반이 되고 취업 준비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면서, 자연스레 교회와는 점점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모님이 문득 연락을 주셨다.

“우리 교회에서 찬양 예배를 준비하는데, 네가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대학 시절 나는 통기타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친한 친구는 드럼을 연주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모님이 다니시는 작은 교회를 찾았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담하고 조용한 교회였다. 친구는 드럼을, 나는 기타와 찬양을 맡아 몇 달 동안 예배를 준비했다. 작은 교회 안에서 사람들과 웃고, 찬양하고, 기도했던 시간들은 짧았지만 마음 깊이 남아 따뜻하게 빛났다. 그러나 바쁜 삶이 서서히 신앙을 밀어냈다. 졸업, 취업, 사회생활, 그리고 결혼까지. 교회와 나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고, 다시는 기독교와 인연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학교를 졸업했고 첫 직장을 얻어 학교와 교회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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