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택의 무게

by 오분레터

우리 부부에게는 육아를 도와줄 양가 어머님이 안 계신다. 내 어머니는 내가 21살 때, 장모님은 아내가 대학생일 때 돌아가셨다. 의지할 친척도 없었다.

주변에서는 쉽게 말했다. "부모님한테 좀 맡기지 그래", "친정어머니가 와서 좀 도와주시면 되잖아". 그럴 때마다 "저희 양가 어머님 모두 돌아가셨어요."라고 대답해야 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사람들은 "아, 미안..."이라며 말을 흐렸다. 설명하는 것도, 위로받는 것도 지쳤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회사에서는 점점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자주 조퇴하고, 가끔은 아예 출근하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팀장은 "가정사로 너무 자주 빠지는 것 같네."라며 암묵적으로 불만을 표했다. 중요한 회의에 빠지는 날도 많았고, 프로젝트 진행에도 차질이 생겼다. 동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그런 말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이 전쟁이었다. 아이를 돌보고, 아내에게 약을 챙겨주고, 급하게 출근 준비를 했다. 회사에 가 있는 동안에도 휴대폰을 놓을 수가 없었다. 혹시 아내에게서 연락이 올까,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노파심에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내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더욱 심각해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매일 같은 광경이 반복되었다. 퇴근하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부터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 거실을 지나 안방으로 가면 아이는 목이 쉬도록 울고 있었고, 아내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이의 기저귀는 무겁게 축축했고, 분유병은 아침에 내가 준비해 둔 그대로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버티는 게 아니라 방치하는 거였다. 무언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직장을 계속 다니면서 아내와 아이를 돌볼 수는 없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나에게 최우선은 가족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현실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육아휴직을 내면 수입이 확 줄어든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육아휴직 급여로 월급을 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경력에도 공백이 생긴다. 복직 후 승진에도 불이익이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옆에 조용히 누워 있는 아내를 보며 생각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돈을 벌어도 아내가 무너지면? 승진해도 아이가 방치된다면? 내가 이룬 가족이 무너지는데 돈, 경력 따위가 문제 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팀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손에 땀이 났다. 아직 남성 육아휴직이 매우 드물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우리 회사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팀장님, 저 육아휴직 좀 내야겠습니다."

팀장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육아휴직? 와이프가 많이 안 좋은가?"

"네, 아내가 산후우울증으로 아이를 돌보기 힘든 상황입니다."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아내의 상태, 약물치료를 받고 있지만 호전되지 않는 상황,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지만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단 1년 정도 생각하고 있지만, 아내가 건강을 회복하면 언제든 조기 복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1년? 그렇게 오래? 그럼 프로젝트는 어떻게 하고..."

팀장의 목소리에는 난처함이 묻어났다. 이해했다. 갑자기 팀원 한 명이 1년을 빠진다는 건 팀 입장에서는 큰 타격이었다.

동료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어떤 이는 "남자가 육아휴직을 왜 내느냐"며 의아해했고, 어떤 이는 "회사 생활에 지장이 있을 텐데"라며 걱정해 주었다. 친한 파트장은 조용히 말했다. "내년 진급 대상자였는데, 이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며칠 후, 나는 1년간의 육아휴직을 시작했다. 차디찬 2월이었다. 처음 맞이한 평일 오전, 회사에 가지 않는다는 게 묘하게 낯설었다. 처음에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아이 돌보기, 집안일, 아내 케어까지. 모든 것이 새롭고 어려웠다.

기저귀 갈기, 분유 타기, 트림시키기, 목욕시키기. 모두 퇴근 후나 주말에 해왔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매일매일 혼자 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새벽 2시, 4시에 깨서 분유를 타고, 낮잠 재우기, 보채는 아이 달래기, 그 사이사이 빨래와 청소, 장보기까지 쉴 틈이 없었다. 퇴근 후 두세 시간 돕는 것과 24시간 온전히 책임지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점차 요령이 생겼다. 일주일, 2주일이 지나자 손이 익숙해졌다. 아이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배가 고픈 건지, 기저귀를 갈아달라는 건지, 그냥 안아달라는 건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내 품에서 잠들어가는 아이를 보며, 이 작은 생명체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익숙해졌다. 눈은 감기지만 정신은 늘 반쯤 깨어있는 상태. 아이의 작은 움직임에도 바로 눈을 뜨게 되었다. 피곤했지만, 동시에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첫 미소, 첫 웃음소리와 내 손가락을 꽉 쥐던 순간까지, 이런 것들을 직접 경험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아내는 여전히 힘들어했지만, 내가 아이를 돌보는 것을 보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가끔은 침대에서 일어나 아이를 바라보기도 했고, 아주 가끔은 아이를 안아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심스럽게 격려했다.

"잘하고 있어. 천천히 가도 괜찮아."

아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미안해. 내가 이래서."

"미안할 거 없어. 아프면 쉬어야지. 당연한 거야."

하루하루가 반복되었.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고, 놀아주고, 재우고. 그 사이사이 빨래하고, 청소하고, 장 보고. 저녁에는 아내의 약을 챙겨주고, 아이를 목욕시키고, 재웠다. 그리고 나면 녹초가 되어 쓰러졌다.

육아휴직 3개월째, 봄이 찾아오면서 아내에게도 작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아내가 침대에서 나와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 조금씩 늘어났다. 아이와 눈을 맞추는 시간도 늘어났다. 약물치료의 효과가 찾아오는 듯했다.

"오늘은 좀 기분이 괜찮은 것 같네."

아내가 이 말을 한 날, 나는 정말 기뻤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긍정적인 말이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터널 끝의 작은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이는 하루하루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목을 가누기 시작했고,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내가 부르는 이름에 반응하기도 했다. 뒤집기도 시작했다. 이 모든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했다. 이런 순간들을 놓쳤다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아내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아내의 품에서 평화롭게 자고 있었고, 아내는 조용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이 어둠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우울증은 그렇게 서서히 우리 삶에 찾아왔다가, 서서히 물러가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 어둠을 함께 헤쳐나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적이었다.

내가 내린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이제는 확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keyword
이전 10화첫 번째 산후우울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