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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들은 위로

by 오분레터

세 번째 병원은 대학병원이었다. 이번에는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자는 마음으로 찾았다. 혹시 우울증이 아닌 다른 질환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뇌종양이나 갑상선 질환도 우울 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다.

대학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는 마치 거대한 공장처럼 돌아갔다. 하루에 수백 명의 환자를 처리하는 시스템이었다.

"먼저 검사부터 받아보시죠."

50대 중반의 남자 교수는 여러 가지 검사를 지시했다. 뇌파 검사, 뇌 MRI, 혈액 검사, 갑상선 검사, 그리고 각종 심리 검사까지.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검사였다. 뇌파 검사실에서 아내는 머리에 무언가를 붙이고 30분 동안 가만히 누워 있어야 했다. 검사 후 나온 아내의 얼굴은 창백했다.

"여보, 내 뇌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가 너무 무서웠어."

심리 검사는 더 힘들었다. 100개가 넘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나는 가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내 인생이 실패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된다고 느낀다'. 질문을 읽는 것조차 아내는 힘겨워했다. 검사실을 오가며 하루 종일 병원을 헤맸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아내는 내 팔을 꽉 잡았다. 마치 길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일주일 후,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특별한 이상 소견 없음."

뇌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혈액 검사도 정상, 갑상선 기능도 정상이었다. 심리 검사에서만 '중증 우울증'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검사 결과상 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요. 우울증이 맞는 것 같네요. 다만 증상이 꽤 심한 편이니 약물 치료를 적극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교수는 더 강한 항우울제를 처방했다. 그리고 항불안제도 함께 처방했다.

"불안 증상도 보이니 이 약도 같이 복용하시면 좋겠습니다."

검사비는 적지 않게 나왔다. 하지만 우리에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뚜렷한 원인을 찾고 싶어 받았던 검사였지만, 결국 우리가 얻은 것은 '우울증이 맞다'는 재확인뿐이었다. 새로운 해답을 찾을 거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더 강한 약을 먹기 시작한 아내는 부작용에 시달렸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입이 심하게 말랐다. 그리고 체중이 급격히 빠지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5킬로그램이 줄었다.

"여보, 나 거울 보기가 싫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 이게 나야?"

아내는 거울 보기를 힘들어했다. 우울증 때문에 이미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진 상태에서 약의 부작용까지 겹치니 더욱 견디기 힘들어했다. 식사 시간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밥을 먹으려고 수저를 들면 손이 떨려서 국그릇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아내는 결국 수저를 내려놓고 눈물을 흘렸다.

"나 이제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사람이 됐네."

나는 아내의 손을 잡아주며 함께 수저를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 숟가락씩 천천히 밥을 먹었다.


네 번째 병원을 찾기 위해 우리는 부산으로 향했다.

거제도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 것 같았다. 세 군데 병원을 다녀봤지만 아내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 우울증 환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부산의 한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글을 발견했다.

"5년 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는데, 이 병원에서 완치됐어요. 원장님이 정말 환자 이야기를 잘 들어주세요. 부산에 계신 분들은 꼭 가보세요."

댓글에는 비슷한 경험담들이 줄을 이었다. "저도 여기서 좋아졌어요", "원장님이 천사예요", "다른 병원과는 정말 달라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였다. 거제도에서 부산까지는 새로 생긴 해저터널을 통해도 1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아이와 아내를 태워 나는 부산으로 향했다. 거가대교 위 먼바다를 바라보며 아내가 말했다.

"오빠, 이번엔 좀 좋아지면 좋겠네…"

아내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가 배어 있었다. 지난 6개월 동안 세 군데 병원을 전전하면서 받은 스트레스와 실망감이 쌓여 있었다. 나는 그저 "괜찮아, 이번엔 분명 달라질 거야"라고 말했지만, 내 마음도 여전히 불안했다. 이번엔 정말로 달라질 수 있을까? 아니면 또다시 똑같은 실망을 맛봐야 할까? 마음속은 불안과 희망이 교차했다.

부산으로 찾아간 네 번째 병원은 예상보다 작은 곳이었다. 10층 건물에 한 층을 사용하는 작은 전문 병원이었다. 다행히 그곳의 원장은 지금까지의 병원과 달랐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의사였다. 그는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따뜻하게 우리 가족을 맞아주었다.

"안녕하세요. 멀리서 오셨네요. 많이 힘드셨을 텐데, 용기 내서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첫마디부터 달랐다. 이전 병원들에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따뜻한 인사였다.

"천천히 이야기해 보세요. 시간은 충분하니까요."

아내는 그 말에 30분 동안 그동안 참았던 모든 것을 쏟아냈다.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시작되었는지, 어떤 약을 먹어봤는지, 어떤 검사를 받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선생님, 저는 정말 살고 싶어요. 예전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고, 남편한테 짐이 되지 않고 싶어요. 그런데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오늘도 이 고통을 견뎌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 자신이 너무 무서워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중간에 끊지도 않고, 컴퓨터를 보지도 않고, 오직 아내만을 바라보며 들어주었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견뎌온 것만으로도 대단해요. 그리고 여기까지 오셨잖아요. 포기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 말에 아내는 펑펑 울었다.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들어본 진심 어린 위로였다.

"우울증은 마음이 약해서 생기는 병이 아니에요. 뇌의 신경전달물질 불균형 때문에 생기는 병이에요. 환자 잘못이 아니에요."

의사는 새로운 약을 처방하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왜 이 약을 선택했는지,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 부작용은 무엇인지.

"2주 후에 다시 오세요. 그때까지 변화가 없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우울증 치료는 마라톤이에요. 천천히 가야 해요. 조급해하지 마세요."

병원을 나오면서 아내가 말했다.

"여보, 이번엔 정말 좋아질 수 있을까?"

정말로 한동안은 아내의 상태가 호전되는 듯했다. 조금씩이나마 웃음이 돌아왔고, 밤에도 전보다 편안하게 잠들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부산까지 왕복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매번 먼 길을 오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2주에 한 번씩 부산까지 갈 수 있을까?"

아내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지속 가능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좋은 의사를 만났지만, 그 거리가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거제도의 병원으로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부산까지의 먼 길을 계속 감수해야 할까. 아내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만 아내의 손을 꽉 잡아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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