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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태민은 교정의 단상이 정면에 보이는 그네에 앉았다. 흙 놀이를 했던 운동장 바닥은 푸릇푸릇한 잔디로 바뀌었다. 천천히 흔들리는 그네 줄을 붙잡고 고개를 크게 젖혔다. 그 때도 푸르렀던 하늘이, 그 때도 따뜻했던 햇살이 가슴 안까지 깊숙이 스며 들어왔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태민아, 너 이제부터 종호하고 너무 어울려 다니지 마라. 걔는 말만 못하는 게 아니라 지적장애도 있는 것 같더라. 아직 한글도 못 읽고 구구단도 못 외우는데 네가 배울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다. 너에게 도움이 하나도 안 돼!’ 아빠가 거북선 그림이 있는 점퍼의 팔을 끼워주며 말했다.
‘그래도 종호가 태민이 준비물 같은 거도 빌려주고 애가 착하니까. 걔 부모도 좋은 사람들이고. 너무 있는 티 내는 것만 빼면 좋을텐데.’ 엄마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태민이도 슬슬 일반 애들과 두루두루 어울리고 해야지 말도 빨리 늘고 사회성도 길러지지. 껌딱지처럼 종호와 붙어 다니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누구 좋으라고?’ 아빠의 목소리다.
‘그건 그래. 안 됐지만 종호는 너무 발전이 없더라. 부모가 그렇게 돈으로 투자했는데도 그 정도면. 정말 앞날이 캄캄해.’ 엄마의 목소리다.
‘여보,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종호 엄마, 세컨드야.’
‘아닐 텐데?’
‘돈 많은 남자 잡아서 들어온 거지. 아픈 애가 있어도 남자가 큰 버스회사 사장이면 세컨드 할 만하지.’
‘어디서 들었어?’
‘테니스 동호회 회원들끼리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들었어. 당신이 종호 엄마 같은 상황이면 종호에게 친자식처럼 대할 수 있겠어? 아무래도 힘이 빠지겠지. 하고 다니는 거 한번 봐! 멋을 잔뜩 부리고 다니지 않아? 애 때문에 찌든 티가 하나도 안 나지? 그러니까 그 애가 발전이 없는 거야. 알겠어?’
‘태민이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쟤가 딴청 피우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은근히 다 듣고 있어.’
한 무리의 아이들이 축구공을 차며 학교 운동장으로 몰려 들어오는 소리에 태민은 눈을 떴다. 서둘러 그네를 멈춘 후 귀마개를 끼웠다. 또래보다 키가 큰 아이가 공을 잡고 골대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슛! 골인! 아이가 주먹 쥔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머릿속이 다시 안개처럼 흐려졌다.
‘종호야! 패스!’ 콧대가 휘어진 아이가 소리쳤다.
나와 함께 수비를 하던 종호는 공을 잡고 방향을 바꾸더니 우리 편 골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종호야 이 쪽으로!’ 골키퍼가 두 손을 내밀었다.
종호는 강하게 슈팅 했고 자살골은 멋지게 성공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지! 뭐하는 짓이야?’ 심판을 보던 빨간 스트라이프 체육복 선생님이 호통쳤다.
종호는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웃지 마, 임마! 학교가 장난치는 곳이야? 집에 서나 어린 양 피워!’
아이들이 선생님의 호통 소리를 듣고 중앙선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웃지 말라고, 자식아! 공동생활은 룰이 있는 거야 임마! 가장 기초적인 거라고. 스포츠도 마찬가지야.’ 선생님이 종호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저 멀리 아이들 뒤편에 떨어져 있던 남자 아이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희미하다. 조금 더 가까이, 조금만 더! 햇살 속에서 웃고 있는 그 아이의 얼굴이 거의 나타났을 때 눈이 동그란 여자 아이가 그를 밀쳐 버렸다. 그 아이는 슬라이딩 하듯 바닥에 고꾸라졌다.
‘가지가지 한다. 정말! 통합 교육이고 나발이고 장애아들은 따로 격리를 시키는 게 맞다니까. 같이 있으면 뭐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있어야지. 이 귀한 수업 시간에 너네 둘이 다른 애들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 지 알고 있어?’ 체육 선생님이 멋도 모르고 웃고 있는 두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태민은 그네를 멈췄다.
눈이 동그란 여자아이…. 눈이 동그란….
갑자기 감전된 것처럼 등을 타고 빠르게 닭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태민은 폰을 꺼내 성민에게 SOS를 쳤다. 다행히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성민이 이성준을 데리고 학교 운동장에 나타났다.
“휴일인데 여기서 혼자 뭐 하세요?” 이성준은 팔을 크게 돌리며 웃었다.
태민은 겸연쩍은 미소로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저야 주말에도 가끔 씩 학교에 나오니까. 어차피 오늘 할 일이 있어서 잠깐 나올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정글짐에 걸터앉았다.
태민이 성민에게 눈이 동그란 여자아이에 대해 설명하자 성민이 외계어를 통역했다.
“눈이 동그란 여자아이! 하하! 예쁜 여자죠? 당연히 알고 말고요. 이름이 박소영이고 아이스크림 학원 딸이죠. 지금도 그 학원이 여기서는 제일 유명한 학원일 겁니다. 소영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죠. 학원장 딸에다가 눈이 동그랗게 크고 쌍꺼풀도 졌던 기억이 있는데. 아무튼 아주 예뻤지요.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그냥….”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혹시 근황은 모르시죠?” 성민이 그의 옆에 걸터앉았다.
“사실 모르는 게 정상이지만. 그 애를 짝사랑했던 남자가 한 두명이어야 말이죠. 초등학교 남자 동창들끼리 가끔 모이면 그 애 얘기가 술자리 안주거리라니까요.”
태민은 그녀의 동그란 눈매만 희미하게 떠올랐다.
“서울 살다가 남편하고 헤어진 후 진해에 내려와서 자그마한 카페를 했어요. 딸 아이가 한 명 있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그 사건이 터져 버려서…. 아무튼 간에 지금은 아무도 소식을 모릅니다.”
“알 수 있는 방법 없을까요?” 성민이 태민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동창들에게 수소문은 해 보겠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사건의 충격도 가시지 않았을 테고 아직 범인도 안 잡힌 상황이라 겁도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태민은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 카페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거기가 제황산 공원에서 내려와 중원 로터리 쪽으로 가는 길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KT건물 맞은편에 있는 중앙아파트 상가라고 보시면 됩니다. 알게 모르게 찾아가 본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근데…. 태민씨는 박소영도 기억이 전혀 안 나세요?”
태민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리 형이 어떤 때는 진짜 기억력이 좋거든요. 그런데 어떤 때는 속된 말로 닭 대가리 같습니다. 상상을 초월하죠.”
“그러면 학교에서 열렸던 미남 미녀 선발 대회도 생각 안 나세요?”
“그런 것도 있었어요?” 성민이 히죽거리며 끼어들었다.
“희한하게 저희 학교에서 그런 선발전을 했죠. 딱 한 번으로 끝났지만.”
성민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그 대회에서 미녀는 당연히 그 원장 딸이 뽑혔고 미남은 누가 뽑혔을 것 같습니까?” 그가 태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설마….” 성민이 태민을 살짝 밀쳤다.
“네. 맞습니다. 그것도 기억 못하시나 봅니다.”
성민이 태민의 등 짝을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내리쳤다. “우와. 뭐야? 난 기억이 안 나는데…. 형은 초등학교 때까진 진짜 잘나갔네. 영광의 시간이 짧긴 했지만 그런 왕좌의 시간이 있었다는 게 어디야. 그런 건 얘기해줘야 알지 난 처음 들었다.”
태민은 미남 미녀 대회는 생각나지 않고 아이들의 환호를 받으며 좋아하는 학용품 세트를 선물로 받았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아! 맞아요. 생각났는데 그 애가 서울 의사와 결혼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역시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 애를 왜 찾으시죠?”
태민은 얼렁뚱땅 넘어갈 구실을 생각했다.
“저희 형도 아직 결혼 안 했습니다.” 성민이 웃었다.
“그 친구도 소영이를 정말 좋아했죠.”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 요?”
“저번에 말씀하셨던 대근이요.”
“아…. 그렇습니까?”
“그럼요. 둘이 그림이 안 나오긴 하지만 어쨌든 말 못하는 이대근도 박소영 앞에서는 좋아하는 티가 팍팍 났습니다. 제가 대근이 데리고 다니면서 그런 것도 몰랐겠습니까? 남자는 장애가 있건 아니건 간에 뭐 다 똑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가 정글짐을 밟고 일어섰다.
“선생님은 그 여자 안 좋아했습니까?” 성민도 정글짐으로 올라갔다.
“저는 그 애 말고 다른 애 좋아했죠. 소영이처럼 새침데기는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
성민은 태민의 눈치를 본 후 말했다. “선생님, 휴일에 시간 너무 많이 뺏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소영이 근황 한 번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가 인사를 나누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형, 여기서 혼자 뭐했어? 혹시 이곳에 과거로 통하는 문이라도 있어? 초등학교 때 기억도 까마득하다는 사람이 뜬금없이 박소영이란 여자는 어떻게 생각난 거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정말 희한해….”
박소영…. 태민은 학교 정문을 나오며 큰 느티나무 옆에 있는 과학실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오래 전 그곳에서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을 감싸 안은 손가락 사이로 반짝이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말을 거는 것처럼 가까이 느껴졌다.
66
태민은 박소영이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리멤버라는 카페를 몇 년 동안 운영했던 사실을 확인했다. 위치는 소문대로 제황산 공원 입구에서 멀지 않았다. 그리고 원장 일가 살인사건이 발생한 이후 그녀는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태민은 체리 베이커리 앞에 도착한 후 폰을 확인했다. 제황산 공원 입구에서 출발해 리멤버 카페가 있던 곳을 지나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보통 걸음으로 약 십 오분. 빠른 걸음이면 십 분 안에도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태민은 왔던 길의 필름을 반대로 돌렸다. 천천히 걸어 러시아풍 우체국 건물을 지나고 진해문화원의 검은 동상 옆 벤치에 앉았다. 지금까지 확인한 CCTV만 세 개. 리멤버 카페는 오전 열 시 삼십 분 오픈에 오후 아홉 시까지 영업을 했다. 태민은 리멤버 카페가 있었던 자리까지 걸어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작고 허름한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물건도 별로 보이지 않는 매대 안 쪽에 여든 살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방과 붙어있는 작은 평상에 걸터앉아 태민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태민은 냉장고 속을 가득 채운 캔 커피 하나를 꺼내 와 계산을 했다. 할머니가 반갑게 말을 붙였다.
“총각, 낯이 익네!”
태민은 용기를 내어 폰 메모장에 옆 집 이사 갔어요? 라고 화면이 가득 차게 글씨를 크게 적은 후 할머니 눈 앞에 내밀었다.
“에이고 말도 마. 참 딱하지.” 할머니가 주름 위에 주름을 짜내었다.
태민은 귀마개를 빼서 할머니께 보여 준 후 주머니에 넣었다.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귀가 멀어서 어째? 나도 아직 보청기 안했는데.”
태민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렸다.
“그 새댁이 참 야무지고 싹싹했지. 얼굴이 고와서 남자 손님도 많이 오고. 여자애가 하나 딸려 있었는데 가끔 씩 지나가다 보면 카페 구석에서 조용하게 만화만 보고 그랬던 것 같네. 그 꼬맹이 가끔 우리 집에 과자도 사러 왔었지. 아이 불쌍한 강아지. 어째….”
태민은 캔 커피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이 동네 살아?”
태민은 폰 메모장에 근처요 라고 크게 적어서 내밀었다.
노인은 아픈 소리를 내며 자세를 바꿨다. “이 동네는 봄에만 잠깐 외지 사람들로 붐비고 평상시는 사람 구경하기도 힘들어. 내가 여기서 장사를 삼십 년 넘게 했는데 점점 더 힘들어지네. 오늘 내일 그만둔다는 것이 아직까지 붙잡고 있어.”
태민은 폰에 옆집 어디로 이사? 라고 적은 후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이 손을 흔들었다. “아서, 생각나도 그냥 내버려 둬!”
태민은 할머니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방 안 쪽에서 갈치 조림 냄새가 났다.
“그 새댁 있을 때 매일 밤에 캔 커피 하나씩 사가던 총각도 요즘은 보이지 않네.”
태민은 손에 들고 있는 캔 커피를 가리켰다.
“그래. 맞아. 얼굴이 뽀얗고 곱상하게 생긴 것이 자네처럼 인물이 좋았지. 한 날은 내가 눈이 어두워서 돈을 잘못 거슬러줬어. 총각! 하면서 나가봤더니 차를 타고 쌩하고 가버려. 다음에 왔을 때도 한사코 안 받아. 과자라도 하나 챙겨줘야 되는데….”
태민은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폰에 새댁에게 나쁜 일? 을 적어 노인에게 내밀었다.
“말도 못해! 그 새댁 딸아이 하나 있는 것하고 같이 살던 부모가 전부 죽었어.”
태민은 보란 듯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튼 무슨 일이 일어 날려고 하면 낌새가 안 좋아. 그 날 가게 문을 닫으려고 나왔는데 옆 집 카페 새댁의 차가 아직 있었어.”
태민은 눈이 번쩍 뜨였다. 폰에 카페 새댁 자동차를 타요? 를 써서 그녀에게 보여줬다.
“그럼. 벌써 퇴근을 했을 텐데 이상해서 자동차 안을 들여다보니 새댁이 차 안에서 자고 있더라고. 애들 키우고 장사하느라 얼마나 노곤했을까 그냥 안 된 마음이 들어 눈 좀 부치라고 내버려뒀지. 그런데 하필 그 날 그 사단이 나버렸지 뭐 야.”
태민은 폰에 할머니 가게는 몇 시에 닫아요? 라고 적었다.
“우리 가게는 일년 365일 거의 열한 시까지 하지. 그 때가 열한 시를 좀 넘었을 거야. 사실 이런 말 하면 그렇지만 그 새댁이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어. 보통 때처럼 퇴근하고 집에 갔다면 같이 죽었겠지. 암.”
태민은 경찰? 이라고 폰에 적었다
“아서. 내가 나서서 그런 말을 왜 해? 나는 그런 무서운 일에 복잡하게 엮이는 거 딱 질색이야. 그냥 총각이니까 생각나서 말하는 거지. 함부로 다른데 가서 얘기하면 안 돼!”
태민은 어떤 자동차? 라고 폰에 적었다.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 몰라. 예전에 집 앞에서 택시 내리다가 발을 삐끗한 적이 있는데 카페 새댁이 병원까지 자기 자동차로 태워 준 적은 한 번 있지. 어떤 때는 자식 들보다 훨씬 좋았어.”
태민은 자리에서 일어서다 폰을 다시 들어 캔 커피 총각, 장갑 꼈습니까? 를 적어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은 갑자기 박수를 치며 웃기 시작했다. “맞아. 맞아. 용하네. 총각은 그런 건 어떻게 알고 있어? 항상 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어. 총각 아는 사람이야?”
태민은 그저 웃기만 하다가 노인에게 깊이 머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아니 이 동네는 또 왜 왔어?” 리멤버 카페가 있었던 자리 옆 길가에 차를 대며 창밖으로 성민이 소리쳤다.
태민이 성민의 차에 탄 후 구멍가게 할머니와 나눴던 얘기를 설명했다.
“형,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붙임성 있네. 외계인이 겁도 없이 지구인 할머니와 구구절절 중요한 이야기를 하셨구나.” 성민이 키득거렸다.
조수석에 앉은 태민이 시동을 짧게 한 번 누른 후 길게 눌러 시동을 걸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조수석에서 시동을 걸고 운전이 가능한 지 확인이 필요하다.
“또 무슨 생각하는거야? 시동이야 조수석에서 걸 수 있다 쳐도 운전은 무리가 아닐까? 살다 살다 조수석 운전이라니….”
범인이 수면가스를 피워 운전석에서 기절한 박소영을 그대로 눕힌 채 조수석에 탄 채로 운전을 했다면….
“설마? 운전석에 기절한 사람을 앉힌 채로…. 아 그건 정말 아니다.”
태민은 운전석의 의자를 최대한 뒤로 밀어 젖힌 후 조수석에서 왼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왼발을 페달 쪽으로 쭉 뻗었다.
“어…. 형…. 왜 그래? 서커스 해?”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는 밤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무슨 게딱지도 아니고 그 자세로 직접 한 번 시도해 보려고? 와 못말린다.” 성민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태민이 천천히 엑셀을 밟았다.
“어…. 형…. 하지 말라니까. 위험해. 진짜 가는 거야?” 성민이 누워서 엄살을 부렸다.
태민은 조금 차를 몰다 성민에게 운전대를 넘겼다. 아이스크림 원장이 살았던 집 근처 신호등에 차가 멈췄다. 이십 분 정도의 거리다. 아이스크림 학원의 법인 렌트카를 원장 대신 그녀의 딸인 박소영이 몰고 다니는 것도 납득이 갔다.
“조수석에서 굳이 게 다리 동작을 안 해도 운전할 수 있지 않을까? 엑셀과 브레이크를 누를 수 있는 긴 막대기 같은 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성민이 번뜩이는 머리를 굴렸다.
막대기…. 태민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나머지 손으로 막대기를 누르는 포즈를 취해봤다.
“갑자기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지네. 범인이 기절한 박소영을 운전석에 앉힌 채 이 근방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범인은 집 밖에서 박소영을 기다리던 아이스크림 원장 내외와 그녀의 딸이 자동차에 타는 것을 지켜봤을 것이다.
“일단 그들이 차에 타고 나면 사전에 차 문을 고장 내 놨으니까 차에서 나올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거고 그 때 범인이 준비한 수면 가스를 트렁크에 넣는다. 여기까지 맞지? 죽지 않을 만큼이 어느 정도 양인지 전문가가 아니 라서 모르겠지만…. 그러면 여기서 질문 두가지!”
태민은 얼마든지 해보란 듯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이 자동차 잠금 장치를 사전에 작업해 놨다면 조수석에 앉아 있던 범인도 원장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못 내리는 거 아니야?”
범인은 그가 내릴 수 있도록 조수석 문틈에 무엇 인가를 끼워 완전히 문이 닫히지 않게 조치했을 수 있다.
“음.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원장 가족들은 왜 그 날 박소영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집에 있지 않고 그녀의 차에 함께 탔을까?”
그 날은 가족 모두 집에 들어가지 않고 근처에서 만나 다른 곳으로 이동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딸의 퇴근 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의 차가 도착하자 아무 의심 없이 차에 올라탄 것이다. 범인은 오랜 시간 그녀를 관찰하면서 이 모든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빈틈이 생기기 만을 노리고 있었다.
“빈틈을 노렸다고? 어떻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체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의 폰을 해킹하는 것이지만 범인이 거기까지 나갔을 지는 미지수다.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결정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
태민이 성민을 쳐다봤다.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내외와 손녀는 질식사 시킨 후 휠체어를 이용해 집 안으로 옮겼다고 쳐. 하지만 운전석에 기절해 있던 박소영은 왜 죽이지 않고 다시 차에 태워서 그대로 리멤버 카페 앞으로 옮겨 놨을까?”
그렇게 하면 차량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트릭이 성립될 수 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거리에 CCTV 같은 거도 있고 보는 눈도 있을 건데 누군 죽이고 누군 안 죽이고 너무 이상한데….”
박소영만은 죽일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럴까? 그런 논리면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내외는 그렇다고 해도 박소영의 딸까지 죽일 필요가 없지 않아??”
박소영의 딸…. 태민은 오른 주먹을 턱에 괴었다. 죽이지 않고 싶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살아 있다면 범행 현장을 진술할 수 있는 증인이 될 수 있다.
“음…. 그렇게 되면 범인의 입장에서 불가피하게 아이를 죽일 수 있을 거 같네. 김 형사가 이 시나리오를 들으면 놀라 자빠질 것 같은데. 박소영이 깨어났을 땐 자기가 잠들었던 시간 동안 차 안에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 수 없는 거지.” 성민은 깍지 낀 팔을 머리 위에 올리며 감탄사를 내뱉았다.
67
유키에는 정령처럼 주위를 떠도는 판다 노인의 당부를 떨쳐내기 위해 수시로 머리를 세게 흔들어댔다. 지난번에 못 받았던 중도금과 잔금 그리고 이번에 맡은 일의 선수금이 각각 구분되어 정확하게 계좌에 입금되었다. 눈 딱 감고 이번 한 번만이다. 이 나이에 제대로 된 직업도 없고 가족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다. 노년에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데 이제 와서 무슨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릴 필요가 있나? 그럴 나이는 지나고도 남았다. 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지도 못했던 이 도시가 세 번의 방문으로 어느새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오후 한 시 오십 분. 이제 정확하게 십 분 남았다. 그녀는 자그마한 공원 벤치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뛰어노는 어린이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순간 벤치를 둘러싼 나무가 괴물의 환영으로 보여 깜짝 놀란 그녀가 미끄럼틀을 향해 뛰쳐나갔다.
‘유키에, 너를 잡아먹고 말겠다.’ 파르페 아빠가 괴물 목소리를 내며 쫓아왔다.
아빠를 놀리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 나는 웃음 보따리를 곳곳에 흘리며 빙글빙글 미끄럼틀 주위를 돌았다.
‘유키에, 거기 서라!’ 그가 헐레벌떡 지친 모습으로 속도를 늦췄다.
나도 숨을 고르며 미끄럼틀 사이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으아아….’ 그가 무서운 표정으로 소리치며 미끄럼틀 밑으로 몸을 낮추고 빠르게 다가왔다.
나는 까무러치며 도망가다 그만 잡히고 말았다.
따스한 손의 감촉 뒤 파르페 아빠의 까칠한 수염이 볼에 닿았다. ‘앗 따가워.’
유키에는 몸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앉아있던 벤치 위에 파란 종이 가방이 놓여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종이 가방 속에 든 물건을 집어 들었다. 압축 비닐로 진공 포장된 검은 하드커버 논문. 제목이 그럴 듯하다. 물론 내가 쓴 것도 아니지만…. 1930년 진해 대화재 사건의 진실! 그래 좋아! 물건을 종이 가방 속에 살며시 다시 넣었다. 그리고 미끄럼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파르페 아빠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눴다. 웃음 짓던 아빠가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갑자기 종이 가방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있는 힘껏 뺨을 독하게 한 번 후려친 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이순신 동상이 있는 북원 로터리를 돌아 성민과 블랙핑크 댄스를 췄던 중원 로터리까지 마음을 정리하며 걸어갔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봇물 터지듯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인적이 없는 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냥 못하겠다고 할까…. 그녀는 한적한 공터의 벤치까지 걸어가 화장을 고쳤다.
“저기, 실례하겠습니다. 잠깐만 시간 되세요?” 오십 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활짝 웃으며 그녀 앞에 섰다.
유키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잠깐이면 됩니다.” 한 여자가 거절에 익숙한 듯 유키에 옆에 앉았다.
“약속이 있어서….” 유키에가 도망칠 것처럼 일어섰다.
“지금 하려는 일을 당장 그만 두세요! 불안한 기운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뭐라구요?” 유키에는 눈살을 찌푸리며 옆 자리의 여자를 흘겨봤다.
“그만 두라니까요!” 여자가 종이 가방을 든 그녀의 손목을 꼭 붙잡았다.
유키에는 힘에 이끌려 털썩 주저 앉았다.
“울 만한 일은 하지 마세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녀가 손목을 놓은 후 작은 팜플렛을 내밀었다. “한 번 읽어보세요!”
유키에는 팜플렛의 그림들을 보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어 그들의 중얼거림을 뒤로한 후 도망치듯 약속 장소로 향했다.
체리 베이커리에 들어선 유키에는 공간 가득 스며든 버터와 계피 향을 맡으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테라스 가장 바깥 쪽 자리에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이건우와 그의 아들의 옆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이건우가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밖에서 보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바람도 쐴 겸 해서, 저희가 알아서 좀 주문했습니다. 좋아할 지 모르겠네요.”
“제가 빵이라면 다 좋아해서….” 유키에는 의자 옆에 살며시 종이 가방을 내려놓은 후 이건우 맞은편에 앉았다.
“사실 저번에 방문하셨던 일본 손님들이 그렇게 돌아가셔서 마음이 많이 안 좋습니다. 아가씨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우리 집에서 그런 일만 없었어도 그 분들이 병원에서 그런 화를 입지도 않았을 건데…. 정말 면목이 없네요.” 이건우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유키에도 호응하듯 머리를 숙였다.
“설마 병원 화재 사건 때문에 참고인 조사 같은 거 받으러 먼 길 오신 건 아니죠? 물론 경찰에서 더 이상 귀찮게 할 일도 없겠지만….”
“네 그건 아닙니다.” 유키에는 테이블 아래에서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손을 기도하듯 꼭 붙들며 가까스로 얼굴에 퍼진 미소를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용을 썼다.
“그러면 이번에는 무슨 일로 이 먼 길을 또 찾아오셨어요?” 이건우가 그의 아들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작은 답례라도 하는 게 좋은 것 같아 서요.” 유키에의 미소가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다.
그가 손사래를 쳤다. “에이. 논문은 잘 끝났습니까?”
“덕분입니다. 그래서 논문을….” 유키에가 가까스로 억지웃음을 짜냈다.
점원이 빵과 음료가 든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놨다.
“일단 먼저 드시고 얘기합시다.” 그가 쟁반을 유키에쪽으로 밀었다.
좋아하는 빵은 없었지만 그녀는 멜론 빵 하나를 얼른 집어 들었다.
이 층으로 올라온 남녀 한 쌍이 슬쩍 유키에를 쳐다본 후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사적인 질문하나 해도 될까요?” 이건우가 팥 빵을 집어 들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유키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 했어요?”
“아직….”
“아가씨 한국에서는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일본 남자들은 보는 눈이 없나 보네요. 일본 남자들 단단히 실수하는 겁니다.”
유키에의 볼이 살며시 붉어졌다.
“웃는 모습이 연꽃같네요. 농담이 아니고 며느리 삼고 싶어요.” 그가 호탕하게 소리 내며 웃었다.
유키에가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를 주시하는 이대근의 창백한 눈빛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유키에는 멜론 빵을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미각이 마비된 것처럼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다.
“지금이야 상상도 못하지만 예전엔 제 아들 놈이 많이 아파서 여자나 만날 수 있을까 걱정하던 때가 있었지요.”
유키에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사라지면 앞으로 이 녀석도 독립해야 하니까 슬슬 걱정이 되네요.” 이건우가 단팥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유키에가 의자 옆으로 손을 뻗어 종이 가방에서 선물을 꺼내 들었을 때, 동시에 이대근이 그녀에게 냅킨 한 장을 내밀며 손끼리 부딪혔다. 그녀의 오른손에 들었던 선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구석에서 얘기를 나누던 남녀 한 쌍이 황급히 자리를 피해 일 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유키에가 선물을 줍기 위해 바닥으로 고개를 숙였을 때 테이블 밑으로 이대근의 하얀 운동화가 보였다. 좀 더 몸을 뻗자 운동화에 박힌 작은 분홍색 점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선영아! 선영아!’ 불길로 자욱한 건물 안에서 조선어가 크게 울려 퍼졌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외할머니는 조선어가 들리는 쪽으로 손을 뻗어 외할아버지의 발목을 꽉 붙잡았다.
외할아버지가 멈칫했다.
‘중신아! 중신아! 여기야.’ 외할머니 뒤편에서 조선인 소녀가 외할아버지를 애타게 불렀다.
외할아버지가 조선인 소녀 쪽으로 이동하려 하자 외할머니는 그의 발목을 온 몸으로 붙들었다.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를 뿌리치지 않고 조선인 소녀에게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외할머니를 들쳐 업었다.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문을 열고 나갔다.
“이거 놔요!” 이대근이 소리쳤다.
유키에는 죽어라 붙잡고 있던 이대근의 발목을 천천히 놓았다.
“괜찮아요?” 이건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키에를 쳐다봤다.
“네….” 그녀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오늘 따라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유키에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서 좀 쉬세요.” 이건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있으면 괜찮아 질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질문하나 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그…. 선생님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유키에가 빵을 보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 이건우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유키에는 기운을 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옛날 사람이지 뭐. 특별할 게 있나요?” 이건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할아버지는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대근이 불쑥 튀어나왔다.
은혜…. 유키에는 떨리는 손으로 선물을 힘껏 움켜 쥐었다.
“여하튼 잊지 않고 찾아와 줘서 고맙네요. 어여 빵부터 좀 들어요.” 이건우가 밖을 내려다보다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남녀 한 쌍과 시선이 마주쳤다. “저기 밑에 선글라스 쓴 남자는 갑자기 빵 먹다 밖으로 튀어 나가더니 아직 까지 저기 서 있네.”
이대근이 이건우의 팔에 손을 올렸다.
“이거 선물….” 유키에가 덜덜 떨며 진공 포장된 논문을 천천히 내밀었다.
이대근이 맹수처럼 그녀를 노려봤다.
“제 논문입니다. 덕분에 잘 완성했습니다.”
“고생한 보람이 있으시네요.” 이건우가 자신의 아픈 손을 내밀어 그녀의 떨리는 손을 살포시 감싸 안았다.
선물을 든 그녀의 손에 힘이 빠져나갔다.
“고마워요.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아들하고 가끔 씩 연락도 하고 지내면 좋겠어요.” 그가 받아 든 선물을 이대근이 살며시 자신의 옆 자리에 내려 놓았다.
“이번에는 그 메달 목걸이 안 하고 오셨네요?” 이대근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눈으로 유키에를 응시했다.
“네….” 유키에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 잔을 들었다.
68
태민은 숲 속으로 꼬불꼬불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 한 참을 들어갔다.
“형! 이런 외딴 곳에 사람이 살까?”
태민은 건축 일을 하는 동창생이 떠벌리는 말을 굳게 믿었다.
“어 보인다. 저 집 아냐?”
태민은 성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 품속에 포근하게 안긴 듯한 하얀색 단층 집이 보였다.
“우와. 여긴 완전 은신처네. 전쟁 나도 모르겠다. 아…. 인터넷도 안 터질 것 같은데…. 여자 혼자 무섭지도 않나?” 성민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기웃거렸다.
태민은 아무 말 없이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하얀 집을 향해 걸어갔다.
약속이나 한 듯 백발을 대충 묶어 올린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성민이 소리쳤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더니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순간 동그란 두 눈의 말괄량이 여학생이 빛처럼 태민의 마음에 반짝였다.
‘너! 우리 학교에서 내가 제일 예쁜 거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나 좋아하는 남자애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너는 나에게 정말 감사해야겠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꿀 먹은 벙어리에 눈치라곤 없는 녀석이군.’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던 그 가을 소풍 이후로 말괄량이 소녀는 나를 볼 때마다 그 동그란 눈을 흘겼다.
“잘 지냈어?” 그녀가 태민에게 천천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태민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잘 생긴 건 변함없네. 말은 좀 늘었어?”
태민이 그녀의 손을 놓고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형! 거 참, 갑자기 왜 그래? 각본에 없던 시츄에이션인데 이거….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감동한 거야?” 옆에 서 있던 성민이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태민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우리 형이 원래 전혀 감성적인 사람이 아닌데 난처하네요. 지금껏 초등학교 일은 기억도 안 난다고 하더니 순전히 거짓말이었나 봅니다. 아. 거참. 형! 뭐 때문에 그래?” 성민이 태민의 어깨를 감쌌다.
“절 봐서 너무 기쁜가 보네요.”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러게요. 저는 형 우는 거 부모님 돌아가신 이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울먹이던 태민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만날 사람은 어떻게 하든 만나게 되네. 늦게 라도 찾아와 줘서 정말 고맙다. 친구!” 그녀가 오른 손을 다시 내밀었다.
태민은 그녀의 여린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 따라온 것 같습니다. 두 분이서 따로 만나야 되는데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끼어들어서.”
태민이 기차역 플랫폼에서 이별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손을 마지못해 놓았다.
“예전엔 진해 내려와서 동창 모임에도 가끔 참여하곤 했는데 넌 코빼기도 안보이더라.” 그녀가 앞머리를 매만졌다.
태민이 외계어를 중얼거렸다.
“이상한 말은 여전하네.”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지요?” 성민이 통역했다.
그녀는 말 없이 그저 하늘만 올려다봤다.
“여기는 약초 같은 거 많은 가 보네요.” 성민이 집 앞 빨랫줄에 줄줄이 걸려 있는 그물망들을 보며 말했다.
“무릉도원이지요. 지천에 깔린 게 나물과 약초에요.”
“네…. 그동안 형이 초등학교 동창들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어서 저는 정말 아무 기억도 못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한 명 한 명 동창들을 만나다 보니까 형의 기억이 많이 살아나는 것 같아요. 솔직히 저는 지금 충격 받았습니다. 대충격요.”
그녀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형이 탐정을 하고 있다는 건 아세요?”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을 조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성민이 두 손을 모았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떨렸다.
“그 날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면 좋겠습니다.” 태민의 말을 성민이 통역했다.
“들어가서 차 한잔하세요.” 그녀가 현관 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태민과 성민은 천천히 그녀 뒤를 따랐다.
“여기 혼자 계시면 무섭지 않으세요?” 성민이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 찾아오지도 못할 거니 괜찮아요. 가끔 동물들이 내려와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젊은 여자 혼자….”
“외져서 그렇지 조금만 내려가면 이웃들도 있어요.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가 싱크대가 보이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형! 갑자기 왜 울고 그래?” 성민이 속삭였다.
태민은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동창이 불쌍해서 그런 거야?”
태민은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뭐 야? 이 야심한 산 속으로 들어와서 용암 터지듯 갑자기 울음보나 터트리고 정말 당황스럽네. 그럴 거면 앞으로 형 혼자 와.” 성민은 아담한 거실 주변을 둘러봤다.
“녹차 괜찮아요? 세작 녹차?” 그녀가 싱크대 쪽에서 말했다.
“주시는 데로 마시겠습니다.” 성민이 구석에 놓인 호신무기세트 상자를 보며 말했다.
태민도 상자를 유심히 살펴봤다.
“형은 정말 알다 가도 모르겠어. 상봉의 기쁨으로 눈물까지 흘릴 정도의 사이인 것 같은데 말이지…. 여태 저 사람이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딸인 것도 몰랐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성민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댔다.
태민은 눈을 감았다.
“이런 데까지 들어와서 사는데 괜히 아픈 과거를 들춰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집에 물건도 거의 없고 완전 도 닦는 분위기인데.”
쟁반을 들고 오는 그녀를 돌아보며 태민이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그냥, 이러고 삽니다.” 그녀가 자신의 백발을 힐끗 쳐다보는 성민을 향해 말했다.
“잘 마시겠습니다.” 성민이 하얀 찻잔을 입에 대었다.
“날씨 참 좋지?” 그녀가 태민을 눈에 넣을 듯이 빤히 쳐다봤다.
태민이 그녀를 슬쩍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형이 말을 안 해서 제가 도무지 모르겠는데 혹시 두 사람은 무슨 관계예요?”
태민이 성민을 살짝 밀쳤다.
“글쎄요…. 초등학교 때 태민이가 절 많이 좋아했죠.” 그녀가 피식 웃었다.
“형. 진짜야?” 이번에는 성민이 태민을 밀쳤다.
“어릴 때는 잘 모르죠. 부모님 말에 휘둘리기도 하고. 사실 저도 태민이에게 관심이 있었는데…. 인연이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그녀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와. 대박! 역사적인 순간에 저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민은 태민에게 장난하듯 고개를 숙였다.
태민은 그녀의 주름진 눈가에 깊이 패인 슬픔을 느꼈다.
“여기선 주로 뭐하시고 지내세요?”
“주로 책 읽고 가볍게 산책하며 나물이나 약초도 캐고 다닙니다. 텔레비전이나 폰 같은 건 끊은 지 오래 됐어요.” 그녀가 소녀처럼 웃었다.
태민은 그녀의 덧니를 슬쩍 본 후 다시 눈을 감았다.
“분위기를 깨서 죄송하지만 저희 형이 장기 미제사건 하나를 조사 중입니다.” 성민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낮은 톤으로 바뀌었다.
“두 분이 여기까지 저를 찾아온 거 보면 용건은 충분히 알겠어요.” 그녀가 팔짱을 끼었다.
“네….”
“예전에 경찰 조사 받을 때도 그랬지만 별다른 거 없었어요.”
“사실 형 덕분에 그 때 경찰 조사 받으셨을 때보다는 사건이 많이 진전되고 있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사건이 발생했던 그 날 퇴근 후 기억나는 것에 대해 있는 데로 말씀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보자…. 사건 당일에는 점심 때쯤 엄마에게 전화가 왔어요. 퇴근 후 집 앞에 도착하면 집 안에 들어오지 말고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게 마지막입니다.”
“예전에도 가끔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전혀요. 시계추처럼 딱딱 시간 맞춰 출근하고 퇴근하는 생활의 반복이었죠.”
“혹시 차는 고장 나 있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그 차가 아이스크림 학원에서 리스한 차라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반납했습니다. 경황이 없어 그런 거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평상 시 운영하셨던 카페 손님 중에 수상한 사람은 없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었어요. 주로 동창생들이나 지인이 자주 방문했지요. 군인들도 조금 있었고.”
“이제 폰은 아예 안 쓰세요?”
“옛날에 딸 아이가 깔아놓은 게임 앱 때문인지 무슨 바이러스도 딸려온 것 같기도 하고 자꾸 애 사진도 들춰보고 해서 처분해 버렸어요.”
“아….”
“그 날 차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죠? 얼마나 잤습니까?” 성민이 태민의 말을 통역했다.
“그런 것도 조사하셨어요?” 그녀가 눈을 비볐다. “희한하게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버렸던 것 같아요. 열 한시는 넘어서 잠이 깼으니까. 아홉 시 좀 넘어서 차에 타서 기억이 없고요. 거의 두 시간을 자버린 셈이죠.”
“가끔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차에서 잠이 든 것요? 매장에서나 한가할 때 잠깐 눈 부치곤 했지, 퇴근하려고 차에 탔는데 그새 잠을 자겠어요?” 그녀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눈을 감았다. “요즘은 이게 다 제 업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혹시 평상시에 이대근은 못 봤습니까?” 태민은 외계어를 통역했다.
“누구요?”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가 순식간에 더 부풀어 올랐다.
“이대근.” 성민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녀가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왜 그러세요?” 성민이 깨진 찻잔 조각을 집어 한 곳에 모았다.
태민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두려움을 보았다.
그녀가 창문을 조금 더 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이제야 기억이 났는데…. 이대근의 아빠가 학원에 찾아온 일이 있었어요. 다짜고짜 엄마를 불러서 교실에 들어가더니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엿들었어요. 이대근의 책가방에 달려있는 키링 실 매듭 이야기였습니다. 엄마는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장난치다 그럴 수도 있는데 왜 엉뚱하게 학원에 와서 난동을 부리냐는 말을 했고 이대근의 아빠는 대근이의 책가방이 학교 책가방과 학원 책가방 두 개로 나뉘어져 있고 학원 책가방에만 그 키링이 달려있었다고 호통을 치면서 누가 그랬냐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누가 그러 다니요?”
“이대근 콧구멍 속에 키링 실매듭이 오랫동안 박혀 있었나 봅니다.”
“세상에…. 그 작은 게 콧구멍 속에 박혀 있었다고요?”
그녀가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태민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엄마는 끝까지 시치미를 뗐지만 사실 이 대근에게 장난을 친 건 접니다. 제가 그 아이의 콧구멍 속에 키링 실매듭을 억지로 집어넣었어요.”
“아…. 이대근은 그걸 뺄 수 없었을까요? 깊이 들어갔다고 해도 불편하면 어떻게 든 뺄 수 있었을 텐데.”
그녀의 울음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태민은 울먹이는 그녀를 아기처럼 살며시 안았다. 파란 하늘 저편 아주 멀리서 말괄량이 소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던 어느 오후 아이스크림 학원 맞은편 공터에서 원장이 소녀의 머리를 묶으며 그녀를 다그치고 있었다.
‘엄마, 나 태민이와 사귈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왜? 잘 생겼지 않아? 착하기도 하고.’
‘너 평강공주 할 거야? 평생 바보 온달 뒷바라지나 할 거냐고? 걔는 앞날이 뻔해. 자폐증 애들이 사회에서 무슨 대접을 받겠냐? 돈 잘 버는 의사하고 결혼해. 그래야 네 인생이 핀다.’
‘아니야. 나 태민이와 사귈 거야.’
‘넌 엄마가 학원에서 성인군자처럼 바보병신들 거둬 준다고 착각하지 마라. 다 이유가 있어서 잘해 주는 거야.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엄마. 나 그 애 좋아해.’
‘맞아야 정신차릴 거야? 자꾸 장애 있는 애들 하고 어울리고 하니까 널 만만하게 보고 개나 소나 다 들러붙는 거 아니야. 이대근이도 초반에 싹을 잘라버려!’
‘이대근?’
‘그래. 그 애도 멍청한 게 지 주제를 모르고 네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거 엄마가 다 알아. 지 애비도 같은 히로시마 출신이라고 좀 잘해줬더니 분수를 모르고 말이야. 절대 엮이지 마. 내가 가만히 두나 봐라.’
‘나는 태민이….’
‘얘가 고집 피울 거야?’ 원장의 다그침에 소녀의 울음소리가 공간을 가르고 날아와 마음 깊이 파편처럼 박혔다.
그녀가 파묻은 얼굴을 들자 그제서야 태민이 성민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 키링 실매듭 사건이 언제적 이야기인데 한참 후에 사망한 따님의…. 죄송합니다…. 기도 속에서 튀어 나왔을까요?”성민이 태민의 외계어를 멈칫거리며 통역했다.
“저도 처음에…. 그 키링 실매듭이 제 딸 기도에 걸려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슨 얘기인지 이해도 못했었죠. 그러다 과거 대근이 경마장 키링 실매듭이란 이야기를 듣고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주마등처럼 옛 일들이 뒤죽박죽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어요.”
“키링 실매듭 이야기는 말씀하시기 정말 어렵겠지만…. 조금이라도 기억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까?”
“사실 키링 이야기는 제 자신도 잘 정리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경찰에도 진술을 못했어요. 제 기억엔…. 대근이 아버지가 학원에 찾아와서 난리를 부릴 때 그 키링 실매듭을 던졌던 것 같습니다. 확실하지 않지만.”
“그 콩알 만한 키링 실매듭을요?”
“네. 분명히 던졌을 거에요. 엄마를 향해 던졌던 것 같기도 하고 대근이 아버지의 난동을 제지하러 들어온 학원 선생님에게 던졌던 것 같기도 해요…. 아…. 그것도 아니면…. 대근이 아버지가 돌아간 후에 엄마가 제게 베티 선생님 불러와서 재수 없는 저거 멀리 갖다 버리라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럼…. 정황상 키링의 실매듭은 버려진 거로 보이네요….” 성민은 명상에 잠겨있는 태민을 보며 말했다.
태민은 시멘트가 양생 되듯 온 몸이 점점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69
이건우는 검은 비닐 봉지와 종이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오늘 따라 발걸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동네에 있는 작은 교회를 지나 색이 바랜 중화요리 가게 앞에서 잠깐 멈춰서 숨을 돌리며 주변을 살펴봤다. 그리고 도로 가에 주차 된 하얀색 작은 차로 다가가 종이 가방을 뒷좌석에 놓고 비닐 봉지에서 알코올 솜과 물 티슈를 꺼내 차 손잡이와 핸들, 기어, 안전벨트 등 내부 구석구석을 정성을 들여 꼼꼼하게 닦아냈다. 그리고 쓰레기를 비닐 봉지에 싸서 건너편 공중화장실 휴지통에 버렸다. 차로 돌아온 그는 의자를 약간 뒤로 민 다음 새벽에 집에서 쓴 손 편지를 조심스레 조수석에 올려놓고 시동을 걸었다.
한적한 제황산길을 오르다 보니 계단으로 올라올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공원 주차장 한 귀퉁이에 차를 세우고 뒷좌석에 올려둔 종이 가방을 챙겨 들었다. 한 계단 한 계단 전망대 건물로 이어진 계단에 천천히 발을 디디며 나뭇가지 사이로 우뚝 솟은 하얀 전망대를 올려다봤다. 그 순간 한 젊은 남자가 뛰어가는 남자 아이를 뒤쫓아 가는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대근아! 뛰지 마. 다친다.’ 남자가 아이에게 소리쳤다.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두 세 계단 씩 한 번에 뛰어올라갔다.
‘네 이놈! 거기 서지 못할까.’
아이는 뭐가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아이의 허리를 붙잡아 목마를 태웠다.
‘이야. 이야.’ 아이가 남자의 어깨 위에서 신이 나서 들썩이기 시작했다.
‘대근아. 재미있냐?’
‘이야. 이야.’ 아이가 덩실덩실 팔을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대근아, 위험하다. 아빠 손 아프다. 하지 마!’ 남자가 다그쳤다.
갑자기 아이의 큰 손이 남자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으…. 이거 놔 줘!’ 남자는 고목나무 같이 쓰러졌다.
이건우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자신 앞에 나타난 환영을 쫓아 보냈다. 일 층에 멈춘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전망대로 향하는 8층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빈 공간 속으로 스며든 환영이 다시 눈 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아부지!’ 대근이가 말을 했다.
‘이야. 우리 아들 말 잘하네.’ 남자가 싱글벙글 웃었다.
‘내 목표는 여덟 명이야.’
‘여덟 명?’
‘응. 벌써 일곱 명은 죽였어.’ 대근이가 웃기 시작했다.
‘너 누구냐?’ 남자가 새파랗게 질렸다.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인지 말 안해도 알지?’ 대근이가 남자에게 다가왔다.
‘아들아! 아들아! 안 돼! 멈춰!’
아이의 큰 손이 남자의 코와 입을 막았다.
이건우는 환영을 쫓기 위해 주먹으로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8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진해 시내가 파노라마처럼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폐부 가득히 그리움을 들이 마셨다.
‘건우야 인사해라. 예전에 내 첫사랑 선영이 여동생이다. 첫사랑이나 마찬가지지. 이제부터 어머니라고 불러!’ 좋은 향기가 나는 여자를 가리키며 아부지가 내게 말했다.
그녀가 아버지의 팔을 꼬집었다.
‘오라버니는 참 아들 잘 뒀네요.’ 그녀가 내 볼을 살짝 잡아 당겼다. 아련한 분 냄새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걱정하지 마라. 너도 이런 아들 곧 가지게 해 줄테니까.’
아부지와 그녀의 찬란히 빛나던 젊음이 웃음소리와 함께 바람에 실려왔다.
마지막 수업이 없어졌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안 방에서 그녀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선영 언니보다 좋아? 날 더 사랑해?’ 귀를 막아도 그녀의 헐떡이는 신음 소리가 옆방에서 들려왔다.
잠시 후, 아부지가 옆방 문을 열고 지퍼를 올리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아빠, 레슬링 연습 좀 했다.’
‘레슬링….’ 아버지는 그 이후에도 레슬링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눈 앞의 환영을 걷어내기 위해 이건우는 천천히 전망대를 돌았다. 저 멀리 그녀의 집이 보였다. 다시 옛 생각이 마음 속으로 스며들었다.
‘선생님!’ 남자가 그녀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녀가 남자를 끌어안고 침대에 눕혔다.
‘학교에서 처음 보는 순간부터 당신을 원했어요.’ 남자가 서둘러 바지를 벗었다.
남자 위에 올라탄 그녀가 상체를 벗더니 갑자기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네 자식 이대근 때문이야.’
‘선생님!’ 남자가 괴로워했다.
‘네 자식 때문에 내 인생이 엉망이 되었단 말이야.’
‘선생님!’
‘죽어!’ 그녀가 괴물로 변했다.
이건우는 휘몰아치는 환영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아버지!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대근아! 부디 못난 아비를 용서해라.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전망대를 천천히 한 바퀴 더 돈 다음 자신의 집이 보이는 방향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엄마 품 같이 포근한 바람이 눈물 방울을 어루만졌다. 그는 종이 가방을 움켜쥐고 있는 힘껏 난간에 한 쪽 다리를 걸쳤다.
“어허, 이거 참!” 그 때 옆에서 김 영광 형사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우는 난간에서 다리를 내린 후 종이 가방을 가슴에 안고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아니 왜 그러셔?”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형사가 핵심 용의자를 미행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닙니까?” 그가 선글라스를 벗고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이건우가 난간으로 다시 뛰어오를 자세를 취했다.
“독한 마음은 그렇게 먹는 게 아닙니다. 좀 건설적으로 하셔야지. 아들도 자폐증에서 회복되고 했는데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랬습니까? 좀 물어봅시다.” 그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 유서에 전부 남겨두었으니까 긴 말 안 하겠습니다.”
“제가 사람 잘 못 봤나 봅니다. 진짜 강한 분인 줄 알았는데 왜 그래요? 연구소에 면책각서까지 쓰고 아들까지 지옥 불에 던져 넣었던 분이 이제 와서 왜 그래요. 네?”
“저는 아이스크림 원장같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뭘 또 용서를 하고 말고 그래요. 이 복잡한 세상에. 또 은혜는 뭐예요? 아 담배 땡 기네.” 그가 입맛을 다셨다.
“제가 지은 죄!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이건우가 종이 가방을 부서질 듯 끌어안았다.
멀리 들려 오던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게 결국 죽을 짓을 왜 했어요? 당신 아들 겨우 회복됐는데 단란한 가정 꾸미는 것도 보고 손자하고 놀아주고 그렇게 살아야지. 왜 쓸데없이 은혜고, 용서고 그런 짓을 하느냐고. 난 제니퍼가 범인이 아닌 줄 진작에 알았어. 사건 당일 엉뚱한 외국인한테 자기 연구 기술 빼돌리려 접촉했더라고. 그러니 알리바이가 있어도 그동안 전전긍긍 말을 못했지. 그래도 이젠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밝혔잖아요? 그럼 어째! 남은 용의자가 당신 말고 또 있겠어?” 김 형사가 목을 돌렸다.
“형사님, 역시 명성대로 똑똑하십니다.” 이건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그 정도야 기본이지요. 그 가방 내려놓고 좋은 말 할 때 이 쪽으로 오세요! 당신이 타고 온 차는 벌써 우리가 다 털었으니까.” 김 형사가 손을 까딱거렸다.
“명석하신 형사 나으리! 저는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이건우는 불편한 손에 온 힘을 주어 절룩거리는 발을 난간으로 힘껏 들어 올렸다.
“어…. 그러지 말라니까!” 김 형사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두 손을 뻗어 노인에게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건우는 비틀거리며 난간 위에 우뚝 섰다.
순간 김 형사가 날쌘 동작으로 이건우의 발목을 붙들었다.
이건우는 절름발이 발로 있는 힘껏 난간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아들아…!”
노인이 외치는 소리가 제황산 전체를 휘감아 돌며 메아리쳤다.
70
“이건우가 죽어 버렸습니다. 정말 기분이 묘하네요.” 김 형사는 맥주 캔을 단번에 들이켰다.
“한 캔 더 사올까요?” 성민이 김 형사의 눈치를 살피며 당장이라도 편의점 안으로 뛰어 들어갈 기세다.
“아닙니다….” 김 형사는 아몬드 하나를 입에 넣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되면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일가 사망사건은 흐지부지 되는 겁니까?” 성민이 태민의 말을 통역했다.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이건우가 자신의 범행동기와 방법을 유서에 자필로 상세히 밝히고 자살을 해버렸으니까요.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종결 사건이 될 것 같습니다.”
성민은 태민의 숨소리가 크게 들려 신경이 쓰였다.
“그러면 시냅스 연구소 생체실험 건도 흐지부지 되는 건가요?”
“연구소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연구소가 장애아들을 납치해 생체실험을 벌여왔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면 납치와 생체실험을 밝힐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없지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생체실험을 주도한 연구소의 마틴 소장이나 제니퍼 부소장도 있고 생체실험 피해자인 이대근도 멀쩡히 살아있지 않습니까?” 성민이 맥주 캔을 땄다.
“연구소 인간들이 우리가 장애아들 납치해 생체실험 했소 하고 순순히 실토할 것 같습니까? 때려 잡아다가 입 열라고 고문을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가 탐정 형제님들이니까 수사기밀도 좀 알려 주는 거지만 면책각서도 아무 의미가 없어졌어요.”
“면책각서….”
“이건우가 이대근을 연구소에 자발적으로 보낼 때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하고 서명한 각서 있잖아요. 연구소에서 별 짓을 다해도 이대근이 상태가 나빠져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 그런거. 기억 안 나요?”
“그럼 이대근은 더더욱 증인으로써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태민이 외계어를 더듬거렸고 성민이 통역했다.
“죽은 이건우가 문제지요. 자신이 학원 원장 가족을 죽인 것은 사적 감정 때문이지 연구소와 아무 연관이 없다. 오히려 감사한다는 식으로 유서에 구구절절이 써놨단 말입니다. 생체실험이라는 말은 아예 나오지도 않아요. 자신이 모든 것을 떠안고 일종의 방어막을 쳐버렸다고 할까요…. 이건우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유서를 썼건 간에 일이 이렇게 돌아가면 연구소를 건드리는 건 힘들어지는 겁니다. 게다가 이대근은 말입니다. 제니퍼에게 원장 사망 사건의 모든 죄를 떠넘기려는 수작까지 부렸죠? 집 화장실에서 펜타닐 나온 것도 그렇고 일본 노인들이나 옆 집 남자가 가스통 맞고 다쳐서 병원 간 것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습니다. 여러모로 그 친구의 진술에 신뢰도가 떨어져요. 태민씨에게 협박 소포를 보낸 것만 해도 그래요.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지 않아요? 자기 아버지가 범인인데 어떻게 태민씨에게 범인을 잡아 달라고 소포를 보내는 돌아이가 있을까 싶네요. 물론 등잔 밑이 어두워 아버지의 살기를 몰랐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이대근은 실종 전부터 장애 1급으로 등록이 되어 있고 아직도 그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지금 상태가 좋아졌다해도 팩트가 제정신으로 보기 어렵다 그런 얘기에요. 이대근의 말은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혹시 이건우씨의 유서는 본인이 직접 수기로 작성한 게 맞습니까? 조작의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태민의 말을 성민이 통역했다.
“그렇죠. 그런 문제가 항상 있기 때문에 제가 제황산 전망대에서 이건우씨가 뛰어 내리기 직전까지 저와 나눴던 대화를 녹취했고요 유서의 필적도 검증했습니다. 결론은 바뀌기 어렵습니다.”
“아…. 외통수네요. 이건우씨는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보통 심리적 마지노선이 붕괴되었을 경우에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죠. 수사망이 본인을 향해 점점 좁혀오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형사님은…. 혹시 이건우씨를 범인으로 특정하고 있었습니까?” 태민의 말을 성민이 통역했다.
“사실…. 이대근이 범인일 수 있겠다는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었죠. 하지만 워낙 예측이 불가능한 친구라 상식선에서는 접근이 어려웠습니다. 더 이상 말해봐야 뭐합니까? 이젠 끝난거죠. 뭐….”
태민은 교복을 입은 남녀 한 쌍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여학생이 한 손으로 판다 인형을 꼭 안고 있었다.
“한창 좋을 때죠…. 아…. 그리고 이건우가 제황산 전망대에서 바닥에 추락했을 때 가슴 속에 꼭 품고 있었던 게 있었습니다.”
“추락할 때 그게 가능합니까?”
“뭐, 저도 그런 경우는 처음 봐서…. 종이 가방 속에 들어 있었는데 샴푸 통만한 인형이었어요. 목재 부엉이 인형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