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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08번뇌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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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2. 2024

패밀리 히스토리

(58~64)

58


  침대 위에서 가만히 눈을 감으니 지하 깊이 봉인되었던 지난 시간들이 어제의 일처럼 하나 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 마! 하지 마라고 이 바보 병신 같은 녀석아!” 아이스크림 원장의 따뜻한 미소는 아버지가 사라지면 순식간에 마귀할멈처럼 사납게 바뀌었다. 

  '원장님 저도 하기 싫지만 잘 안됩니다. 저도 모르게 이빨을 두드리고 깨물고 싶어요.' 내 마음이 말했다.

  “너는 구제불능이야. 그거 이리 줘!”

  '원장님, 그건 제가 제일 아끼는 물건이에요. 돌려주세요.'

  “나이가 몇 살인데 아무거나 입에 처 물고 지랄이야. 이런 거는 또 어디서 났어? 이거 승마 키링이네. 너 말 타?”

  '맞아요. 저는 말 타는 걸 좋아해요.'

  “승마 좋아하시네. 가만히 보면 쥐뿔도 없는 것들이 꼭 쓸데없는 짓을 시켜요. 승마가 누구 개 이름이냐? 너 같은 애들이 말을 타게. 너에게 안 어울려! 이런 것도 버려!” 원장이 승마 키링을 칠판 아래 쓰레기통에 쳐 박았다. 

  '원장님, 그건 제가 제일 아끼는 물건입니다. 돌려주세요.' 나는 쓰레기통으로 달려갔다. 

  “하지 마라고 했지!” 원장이 나를 있는 힘껏 밀쳤다. 

  “엄마! 차라리 이거 잘라 버리면 돼요.” 원장 딸이 가위를 들고 와 키링의 끝 매듭을 잘라버렸다. 

  '안 돼요!' 나는 잘라져 떨어져 나간 둥근 매듭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소중하면 여기에 보관하면 되겠네.” 원장 딸이 내 손에서 둥근 매듭을 뺐어 내 콧구멍 속으로 집어넣으려 했다.

  '하지 마세요. 제발!' 내 마음이 울부짖었다. 

  그 때 원장이 움직이지 못하게 내 머리를 꽉 움켜잡았다. 원장 딸은 능숙하게 강낭콩 같은 키링의 둥근 실 매듭을 내 콧구멍 속에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이거 빼기만 해봐. 다음부터 절대 수업에 못 들어올 줄 알아!” 원장은 무서운 눈으로 흘겨봤다. 


  나는 콧구멍 깊이 둥근 실 매듭이 박힌 채로  근 한 달을 버텼다. 그러다 감기로 방문한 동네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콧구멍 속 키링을 발견했다. 

  “대근이 아 해봐! 그렇지! 목은 괜찮고. 어디 보자, 코 한 번 들어 봐! 그렇지! 어….” 소아과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선생님, 뭐 잘못된 거 있습니까?” 아버지가 말했다.

  “이게 뭐지?” 

  “뭐 요?”

  “아버님, 이리 좀 와보세요.”

  아버지는 선생님의 전등이 비추고 있는 내 콧구멍 속을 금광 캐듯 들여다봤다. 

  “음…. 처음엔 코가 부은 줄 알았는데 이게 이물질 같네요.”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

  “그럼 빼겠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그렇게 내 콧구멍 속에서 근 한 달을 버틴 둥근 실 매듭을 기다란 핀셋으로 빼냈다. 

  “아버님, 이거 제가 보관해도 되겠습니까?”

  “왜 그러시죠?”

  “이런 거는 중요한 치료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교육할 필요도 있을 것 같고.”

  “네….”

  “이 정도 크기면 잘못해서 기도가 막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그 정도로 위험한 겁니까?” 

  “그럼요.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은 인절미 같은 거 드실 때 조심하셔야 되듯이 대근이 같은 아이들은 이런 거 코나 입 속에 안 들어가게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선생님 죄송한데 이거 제가 집에 가져가서 확인 좀 하고 돌려 드려도 될까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세요.” 의사 선생님이 아버지의 불편한 기색을 살폈다.

  “이게 왜 대근이 코에 들어 갔는 지 좀 알아보려고요.”

  “아버님,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장난치다 들어갔을 수도 있지만 대근이 스스로 집어넣었을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이 큰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은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며 내게 수십 번은 넘게 반복해서 묻고 또 물었다. 콧구멍에 누가 매듭을 넣었냐? 스스로 장난치다 들어 갔냐? 그래도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만약 아버지가 내 눈만 보고 눈치를 챌 수 있었다면, 만약 아버지가 그 매듭을 병원에 돌려주기만 했더라면….  


  이 기분은 뭐지. 시냅스 연구소에 잡혀 들어온 이후, 어느 때부터 머리에 피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가 멎어버리는 느낌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그리고 내 머리 속의 상태에 따라 마틴 소장의 기분도 좋았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잡혀왔던 남자 아이들이 자신의 방에서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비릿한 밤꽃 향이 숙소 곳곳에 베어 나왔다. 나는 물론 손장난을 칠 필요가 없었다. 마틴 소장이 퇴근한 후 제니퍼가 틈만 나면 내 방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녀 덕분에 나는 사춘기 내내 꿀잠에 살도 찌지 않았다. 

  어느 날, 제니퍼가 멋진 탈출 계획을 알려줬다. BP001로 특별대우 받는 것도 모자라 연구소를 벗어나게 해준 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내가 탈출한 이후의 계획도 세워 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내가 떠나기 전날 팔뚝에 절대 잊어서 안된다며 작은 문신을 새겼다. 우리가 다시 만날 날짜와 시간은 로마자로, 장소는 등대 그림으로 정성스럽게 작업을 했다. 

  탈출은 대성공! 찢어진 짐 볼에서 빠져 나오던 순간 내 손을 잡아주던 짐 볼 회사의 그 남자의 환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는 나보다 훨씬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마주했을 때 굳어버린 아버지의 표정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당연히 말을 한다는 사실 말고 얼마나 머리가 좋아졌는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부자상봉의 기쁨도 잠시, 아버지는 내가 돌아온 지 딱 이틀이 지난 이후부터 겁에 질려 살기 시작했다. 바람에 현관문이나 창문이 조금만 흔들려도 잠에서 깨어났다. 이 층에서 일 층으로 내려오는 내부계단도 손수 만들어 수시로 들락날락했다. 연구소의 부소장인 제니퍼의 도움으로 탈출했다는 스토리는 그를 안심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나는 제니퍼의 부탁대로 탈출 시 그녀가 내 백팩 속에 가득 채워둔 물건에 대해서는 아버지에게 밝히지 않았다. 


  일층에서 올라오는 계단 소리에 과거로 날아갔던 타임머신이 순간 이동해 현실로 돌아왔다. 

  “대근아 눈 좀 부쳤냐?” 

  아버지의 말투 속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 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여러가지 일들이 생겨 마음이 좀 복잡하네. 그 형사 놈이 화장실에서 꺼내 왔던 거는 뭐냐? 우리 집에 있던 거 아니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악질 놈의 형사가 말이야. 어디 하다 하다 안 되니까 엄한 곳에 와서 그런 분탕질을 쳐!” 

  “또 연락이 왔어요?”

  “아니, 제니퍼 인지 그 연구소 여자가 잡혀간 뒤로는 연락이 딱 끊겼지. 이 놈들이 가만히 보면 일단 찔러보고 아니면 말지 그런 심산이야. 아주 못된 것들이야.” 

  예상했던 대로 돌아가고 있다.

  “그 탐정이라는 애들이 끈질기게 연락이 왔었다.” 

  “왜요?”

  “그냥 감사 인사하러 온다고 그러더라. 저번에 괜히 모질게 대한 게 미안하기도 해서 한번 오라고 그랬다. 꼭 너 한 번 보고 싶다고 그러네. 그 탐정이 자폐증이 있어서 그런지 네게 관심이 많더라.”

  귀찮은 일이 발생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내가 말이다.”

  무슨 말을 하려고 뜸을 드리시나…. 미안하다는 말이라면…. 노 땡큐다! 

  “방법이 없었다. 앞이 꽉 막힌 상황에서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이 좋은 제안을 했어. 너를 평소에 잘 챙겨주던 사람이라서 믿음이 갔지.”

  역시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 보는 눈이 없다. 

  “네가 많이 고생한 거는 알지만 지금처럼 좋아 진 것도 다 그 연구소 덕분이다.”

  “아버지! 제가 연구소에서 그동안 어떤 일을 당했는 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고생한 거를 안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알지. 왜 몰라. 여러가지 임상실험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냐? 미안하다. 사람이 항암치료 몇 번만 받아도 엄청 고통스러운데. 그래도 대근아! 나는 결과적으로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너는 말이다…. 어릴 때 네가 어떤 상태였는지 기억을 못할 거다.” 그가 빨개진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뇌는 이미 굳었다. 

  “이제 나는 욕심 없다. 아들하고 같이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면 된다.”

  그렇게 안되겠습니다. 아버지! 


59


  태민은 협박상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대근은 하필 내게 왜 이런 어리숙한 짓을 했을까. 초등학교 동창…. 초등학교…. 태민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최면이 걸린 것처럼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어느새 몸이 하늘로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인사했다. 그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내가 왼쪽 팔에 왠지 뭔가 있어 보이는 완장을 차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어린 것들을 두고 왜 그런 짓을 했을 까 모르겠네. 강아지들 불쌍해서 어떻게 하냐.” 모르는 아줌마가 나타나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런 짓이라니!” 구석에서 무리를 지은 사람 중에 누군 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죽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힘들어도 견뎌야지! 왜 거기서 뛰어내려? 발달 장애아 부모 야유회에서 그럴 이유가 티끌 만큼도 없지 않아? 간만에 비슷한 처지의 부모들끼리 만나서 친목 도모하고 콧바람도 쐬러 간 자리라고 하던데 이상해.”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했겠지. 죽을 사람이 시간 장소 가려가며 가겠어?”

  “에이. 모진 소리 하지 마라! 내 생각에 실족사 같아. 오랜만에 산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그런 경우가 종종 생겨. 바위 같은 데 올라가서 멋진 풍경에 넋을 놓고 있다가 실수로 발을 헛디디는 경우가 있다니까. 특히 술이라도 한 잔 걸치면 오락가락 할 수 있어. 태민 엄마, 아빠가 평소에 산에 다닐 시간이나 있었겠어?”

  “새벽에 그랬다 던데.”

  “새벽에?” 

  “부부가 같이 새벽에 떨어졌어.” 

  “세상에. 그렇게 밝은 사람들이….”

  “그래서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사람이 겉으로만 웃고 있지 속은 시꺼멓게 타버린 사람들이 부지기수거든.”

  “그렇긴 하지. 겉으로는 입에 발린 소리를 잔뜩 지껄이면서 속에 무시무시한 칼을 품고 틈만 보이면 등 짝에 꽂아버리려는 인간들도 많으니까. 경찰은 완전히 자살로 결론 낸 거야?”

  “그런 것 같더라. 타살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까.”

  “자기 애들 같이 안 데리고 간 것만 해도 다행이에요. 요즘은 죽을 때 꼭 지 새끼들을 데려가는 사람들이 많더라.”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유서도 안 남겼고 애들도 잘 크고 있었는데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저기 큰 애도 많이 좋아지고 있는 것 같더니만. 저 애 한 번 봐봐! 인물도 그냥 영화배우 뺨치게 좋지 않아?  도대체 무슨 고민이 있었을까….”


  천천히 눈을 떴다. 마치 다른 문을 열고 나온 것처럼 뒤돌아보면 손 끝에 닿을 것만 같던 시간이 기차가 출발하듯 서서히 멀어져 갔다. 엄마, 아빠는 야유회를 떠나던 그 날, 활짝 웃고 있었다. 잘 다녀오겠다며 냉장고의 김밥도 잘 챙겨 먹으라고 얘기했다. 경찰은 동생과 내게 돈 문제 때문에 부모님이 다툰 적이 있는 지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나 때문에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건 알았지만 돈 문제로 부모님이 죽이네 살리네 싸웠던 기억은 맹세코 없었다. 그리고 경찰관 아저씨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못한 말이 있다. 엄마, 아빠는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이다. 

  검은 옷들 사이로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왔던 장면이 한 장의 사진처럼 불쑥 떠올랐다. 그녀는 엄마, 아빠의 영정사진을 향해 잠깐 머리를 숙인 후 옆에 서 있던 내 손을 꼭 움켜 쥐었다. 표정은 슬픔을 뒤집어쓴 것처럼 보였지만 손은 차갑고 까칠한 감촉이었다. 그녀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턱을 치켜든 채 개선장군처럼 뒤돌아 갈 때 중얼거리던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온 몸이 감전된 듯 등줄기에 강한 전류가 흘렀다. 


  “형! 또 무슨 생각 삼매경에 빠졌어?” 성민이 눈 앞에서 손을 흔들어 댔다. 

  빨간 옷의 그녀는 수영과 펜싱을 같이 다니며 친하게 지냈던 특수반 친구 이종호…. 그친구의 엄마다.  

  “이종호? 그 형의 엄마가 갑자기 생각났어? 언제 적 사람인데 형도 참 희한해…. 형사 앞에서 이제껏 이대근이 형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게 들통나서 자존심 꽤나 상했나 보구만. 까맣게 잊고 지내던 초등학교 친구들이 이제야 하나 둘 떠오르나 보지?”

  왠지 이종호의 엄마가…. 떠올랐을 뿐이다.

  “뜬금없지만 사실 나도 그 아줌마는 진짜 기억이 나. 종호 형과 형이 학원 같이 다닌다고 그 아줌마가 우리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해줬지. 집이 엄청 부자였던 것 같고 그 아줌마 은행 다녔던 것 같은데 상당히 미인이었던 것 같았어.” 

  그렇지…. 어렴풋하지만 초등학생도 느낄 정도의 인형 같은 외모의 소유자…. 그런데 이상하게 종호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엄마, 아빠 장례식 이후로 못 봤으니까 엄청 오래된 거야. 형이 지금 갑자기 그 아줌마 얼굴이 기억난다는 것 자체가 정말 이상한 거지. 근데 갑자기 왜 그래? 엄마, 아빠 꿈 꿨어?”

  그 때, 이종호의 엄마가 엄마, 아빠의 빈소에서 돌아서며 중얼거리던 그 말이 어디 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시공간을 넘어 초음속의 속도로 날아왔다. 

  “무슨 말인데? 형도 참 진짜 사람 아니다. 정말. 그런 걸 기억한다고?”

  [씨발년] 증오로 가득한 빨간 입술의 속삭임을 나는 엿듣고 말았다. 

  “그걸 왜 이제 얘기해? 욕한 거 진짜야?” 성민이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 때는 그 말의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왜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지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야 [씨발년]이란 화살이 내 가슴의 정 중앙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럴 이유가 없지 않아? 형이 정확하게 들었다고 해도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 우연히 빈소에서 그 아줌마가 중얼거린 말이 형은 설마…. 돌아가신 우리 엄마 영정 사진에 대고 내뱉었다 고 생각하는 거야? 아…. 형도 정말…. 잔인한 생각을 하네.”

  가슴을 관통한 씨발년의 화살을 단번에 뽑아 버리자 눈 앞의 택배상자가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두 번째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시공간을 넘어 무섭게 날아왔다. 어…. 이런…. 피하려는 순간 큰 소리를 내며 가슴을 다시 꿰뚫었다. 으아…. 네가 얼마나 잘난 지 보자! 잘난 척하지 마! 씨발놈아! 이대근이 쏜 [씨발놈]의 화살이 가슴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형, 괜찮아? 상태가 심각한데. 자폐증 최강자를 가리는 대결이야? 형들만의 리그도 아니고 왜 이대근이 형에게 억하심정이 있어 그런 짓을 하겠어? 김 형사 말처럼 아이스크림 학원 사건의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만만해 보이는 형에게 협박한 거 같아.”

  알리바이…. 태민은 일어서려 했지만 가슴의 통증이 심하게 느껴져 다시 주저 앉고 말았다. 

  “어디 가려고?” 성민은 가슴을 부여잡은 태민을 부축해 일으켰다. 


  태민이 사무실 근처 장애인 복지관에 주차를 했다.

  “저기 휠체어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성민이 구석에 있는 검은 뿔테 안경 남자 직원에게 문의했다. 

  남자 직원은 친절한 설명과 함께 일반형과 고급형을 안내했고 태민은 프리덤에서 제조한 일반 수동 휠체어를 서류접수 후 절차에 따라 빌렸다. 

  “휠체어 무게만 해도 만만하게 볼 게 아니네. 역시 무엇이든 직접 경험해 봐야 돼.” 성민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실으며 말했다. 

  태민은 소나무가 우거진 한적한 초등학교 담장 옆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열었다. 

  “내가 조수석에 있을 테니까 형이 나를 휠체어에 먼저 옮겨봐!”

  태민이 있는 힘껏 용을 써도 조수석에 기절한 척 하고 있는 성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 봐. 쉽지 않지?”

  김 형사가 이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제니퍼를 단독 범인으로 단정할 리가 없다.

  “형! 교대하자!” 성민은 낑낑거리며 태민의 상반신을 겨우 끌어내더니 휠체어에 겨우 앉혔다. 그리고 잠시 어깨를 몇 번 돌린 후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뒤에서 밀기 시작했다. 

  무게가 꽤 나갈 것 같은 데 생각보다 잘 굴러갔다. 

  “결론은 차에서 꺼내는 게 문제네.” 성민은 휠체어 속력을 올리다 서서히 멈췄다. 

  태민은 휠체어에 앉아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올려다봤다. 

  “형은…. 지금 제니퍼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있지?” 

  서서히 바람이 바뀌고 있다. 태민은 휠체어를 돌려서 멈춘 후 일어섰다. 

  “형 고집이 어련하겠어. 옛날에 롯데리아인가 어디서 옆자리 고등학생 감자튀김 하나 주어 먹었다가 맞아서 피가 철철 나고 아빠가 그 놈 두들겨 패서 경찰서까지 갔다 왔는데도 아직도 패스트푸드 타령이지. 형은 그런 사람이야. 난 아직도 패스트푸드 가게에 트라우마가 있는데.”

  태민은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넣었다. 

  “김 형사가 생긴 것과 다르게 여우 같이 간사하긴 해. 겉으로 하는 말만 믿었다가 큰 코 다치겠어.” 

  김 형사가 아무리 제니퍼를 겁박해도 자백을 받아내기 힘들 것이다.

  “범인인걸 뻔히 알고 있는데도 증거가 없어 못 잡는 일도 비일비재하지. 제니퍼도 미친 척하면 김 형사도 별 수 없긴 하겠어. 그런데 형이 이종호 얘기해서 생각났는데 이대근에 대해서는 진짜로 기억 나는 거 하나도 없어?”

  이대근은…. 어렴풋이 어딘 가에서 본 기억만 떠오를 뿐이다. 

  “그러니까. 나도 이대근은 도무지…. 참! 종호 형 엄마와 우리 엄마가 친했던 이유가 사실 종호 형이 형을 엄청 따라다녔어. 원래 발달장애 애들은 보통 애들과 어울리지 못하니까 형 뒤만 졸졸 쫓아다녔을거야. 형이 학습능력도 좋고 잘 생겨서 그랬겠지만. 그런데 이야기하다 보니까 이대근을 초등학교 다닐 때 어딘 가에서 본 것 같기도 한데….”

  태민은 갑자기 유키에가 만났던 이대근 동창이 떠올랐다. 

  “맞아! 거 좋은 생각이네! 그 사람이라면 잘 알 수도 있겠다. 잠깐만….” 성민은 폰을 꺼내 들었다. 


60


  이성준으로 자신을 소개한 사람은 태민을 보자 길고양이처럼 검은 눈동자가 커졌다. 태민도 마찬가지였다.

  “야…. 낯이 익네요. 혹시 여기 초등학교 졸업하지 않았어요?” 그가 태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태민은 앞머리를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형이 장애가 있어 말을 잘 못합니다.” 성민이 양해를 구했다.

  “아…. 맞아! 이제 보니까 기억이 나네요. 혹시 종호하고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그 친구 아닙니까? 이름이….”

  껌딱지라…. 태민은 순간 덩치 큰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왜소한 이대근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대근….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성민이 말했다.

  “기억하고 말고요. 제가 대근이 놈하고 친했으니까 특수학급 애들은 대부분 잘 알고 있었지요. 아마 그 때 특수학급이 두 반인 가 있었을 겁니다. 초면에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당시에 태민씨가 인기 짱! 그 자체였죠.” 그가 엄지를 곧게 치켜들었다.

  “에이 그럴 리가요….” 성민이 헛웃음을 지었다. “저보다 형을 잘 아는 사람이 있겠어요?”

  “어? 농담 아닙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저는 제가 인기 최고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착각을 태민씨가 깨 버렸다니까요. 요즘으로 따지면 태민씨는 학교 아이돌이었어요.”

  성민은 얼굴을 찡그리며 태민을 쳐다봤다. 

  “말은 못했어도 초등학생들은 어디 그런 거 따지 나요. 일단 얼굴 하나로 먹고 들어갔지요. 또 이상하게 공부도 제법 했고. 일반 학급에 있었어도 아무 지장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종호 엄마가 시도 때도 없이 태민씨에게 비싼 장난감도 사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랬을 겁니다.” 

  레오파트 독일전차, 이스라엘 미라지 전투기 모형 장난감이 태민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웃긴 이야기지만 그 때는 제가 줄을 잘 못 섰나 싶었어요. 대근이 아버지가 잘해주길래 그 맛에 그만 대근이 데리고 다녔더니 이건 젠장. 알고 보니 종호 엄마는 은행 다니고 아빠는 버스회사 사장이었는데 집에 저런 연못도 있었습니다.” 그가 황금 물고기가 유영하는 연못을 가리켰다. 

  그의 말에 태민의 머릿속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파릇파릇한 잔디 냄새가 나는 넓은 정원에서 고깔 모자를 쓴 종호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많이 먹어라! 우리 천사들! 종호 엄마가 쓰다듬던 그 따뜻한 손길이 태민의 뒷머리에 싸늘하게 느껴졌다. 

  “너무 저만 신나서 떠들었네요.”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닙니다! 형과 저는 선생님처럼 기억력이 안 좋아서요. 말씀을 들으니까 새록새록합니다.” 

  “대근이 찾았다면서요?” 

  “아…네.”

  “이름이 유키에인가…. 어떤 일본 여자분도 그렇게 노력하더니 결국은 찾았나 보네요. 저도 다음에 한 번 찾아갈 겁니다. 대근이 이 자식 어떻게 변했는지 정말 궁금하거든요.”

  “네….” 

  “그런데 태민씨는 그동안 한 번도 종호와 연락 안하고 지내셨나 봅니다. 둘이 정말 친했는데. 소식도 못 들으셨나 보네요.”

  태민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저도 우연히 초등학교 친구에게 들었는데 종호가 장애인 전문 시설에 들어갔답니다. 경기도 이천인지 여주인지 그 근처에 아주 고급 시설이 있다네요. 거기는 모기업 회장 막내 아들도 숨어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아….” 성민은 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요즘 다 그렇겠지만 무엇이든 집에 돈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애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안타까울 때가 많거든요. 공부시키는 것도 그렇고 애가 아프면 더더욱 돈이 절박하지요.”

  엄마,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형사가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던 첫마디가 돈 얘기였다.

  “지금 대근이 상태가 어떤 지는 모르겠지만 좀 좋아졌으면 종호 얘기도 해줘야 할 것 같네요.” 

  “그게 무슨 말씀 이세요?” 

  “솔직히 일반 학생들도 평생에 친구는 몇 명 없지 않습니까? 하물며 발달장애 학생들은 오죽하겠어요? 또 대근이 이 놈이 종호하고도 코드가 잘 맞았어요. 서로 의사소통도 못하면서 한참 동안 말없이 모래판에서 머리 맞대고 놀고 그러더라고요. 땅굴 파고 그림도 그리고. 대근이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고 나서 종호가 많이 슬펐을 겁니다.”

  태민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도 헷갈리는데 태민씨는 언제부터 종호와 멀어진 거예요? 대근이 실종된 이후로는 태민씨하고 붙어있는 것도 못 본 것 같은데…. 종호가 완전히 외톨이로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가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태민을 쳐다봤다.

  태민은 이대근이 쏜 씨발놈의 화살을 가슴에서 뽑았다. 


  “형 초등학교 다닐 때 진짜 인기 많았었네. 나는 어려서 그런지 그 때는 기억이 잘 안 나….” 성민이 태민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랬었나…. 그 당시는 여학생들이 쳐다보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잘 생겼단 칭찬을 아무리 들어도 무감각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형은 진짜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어. 특수반도 꼴랑 두 학급 밖에 없었다며? 이대근하고 같은 학교 다닌 것도 이제껏 기억을 못할 정도면…. 휴…. 말 다했다. 다했어.” 성민이 자동차에 앉은 후 레몬 캔디 하나를 입 속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자동차가 해변도로에 접어들자 성민이 차창을 내렸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태민의 옆 머리를 나부꼈다. 

  “이 세상은 정말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것 같네.” 성민이 차창에 팔을 걸쳤다. 

  태민의 눈 앞에 햇살 속에서 반짝이던 검은 자동차가 나타났다. 몸에 붙는 빨간 원피스를 입은 종호 엄마의 설레는 향기가 부드러운 바람결에 코 끝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뒷좌석의 종호와 내게 빨대가 꽂힌 음료수를 건넸다. 종호가 차창을 내렸다. 

  태민아, 종호야. 서로 의지하고 잘 지내거라. 알았지? 알았지? 알았지…. 그녀의 목소리가 연기처럼 흩어지며 멀리 사라져갔다. 


61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오르자 하얀 건물 두 개 동이 보였다. 김 형사는 버버리 코트를 휘날리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마틴 소장님. 어떻게 결심이 좀 섰습니까?”

  “형사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참 이상하죠. 이건우 부자에게 시냅스 연구소 관련 면책각서를 내밀었는데 꿈쩍도 하지를 않아요. 자기네들은 연구소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아들이 연구소에 있다 잘 돌아왔으니 과거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뭐 그런 식으로 중언부언하고 있어요. 연구소 얘기만 나오면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다니까요.” 

  “용건만 말씀해 주세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제니퍼가 입 열게 협조해 주시죠!”

  “알겠습니다!” 

  B병동에 들어서자 곳곳에서 철판 식기가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소리와 동물의 울부짖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김 형사와 마틴은 직원 두 명의 호위를 받으며 305호실 문을 열었다. 

  “이제 왔어?” 헝클어진 머리칼의 제니퍼가 풀린 눈동자로 그들을 노려봤다. 

  “제니퍼! 우겨봐야 소용없어. 이대근이 벌써 다 불었어.”

  “뭐를 불었단 말이야? 그 배은망덕한 자식이 도대체 내게 왜 그러는 거야? 너도 그 자식도 모두 은혜를 모르는 놈들이야.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러니까 알리바이를 대라고. 연구소에서 잘 나오지도 않던 사람이 왜 원장이 사망한 날은 외출한 거야? 어디서 누구를 만났는지 얘기하면 될 거 아니야.”

  “그건…. 나도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

  “누가 몰라서 그래? 그러니까 말을 하라고! 왜 얘기를 못해? 알리바이 얘기 못하면 넌 끝장이야.”

  김 형사는 흥분한 마틴을 제지했다. “자! 자! 그런 얘기가 아니고. 제니퍼! 왜 원장 가족을 죽였습니까?”

  “이런 미친 놈들이…. 으아…. 으아….” 그녀가 사자처럼 포효하기 시작했다.

  “정신차려! 제니퍼. 난 널 도와주려는 거야.” 마틴이 그녀의 팔을 꽉 붙잡았다.

  “평생을 부려먹고 내 젊음을 다 보냈는데. 너 같은 인간에게 속은 내가 죽일 년이다. 지옥에서도 널 저주할 거야. 으아…. 으아….”

  “펜타닐은 어디 유통 시킬 목적으로 그렇게 대량으로 제조했습니까?” 김 형사는 창에 붙은 쇠창살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으아…. 으아….”

  “펜타닐을 제조하고 판매하다 발각되어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가족을 죽였습니까?” 김 형사가 그녀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이거 놔!”

  “제니퍼! 원장 가족이 죽던 날, 그 시간에 어디서 누구를 만났냐고? 말해! 그게 너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왜 말을 못해?” 마틴은 그녀의 헝클어진 앞 머리를 본 순간 미국 대학원 시절 연구에 몰두해 있던 어린 그녀가 스쳐 지나갔다. 

  “널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버릴 거야!” 그녀의 풀린 눈망울에 맑은 빛이 스쳤다. 대학원 시절 차가운 밤 공기를 스치며 연구실을 함께 나설 때 빛나던 그 눈망울이다. 

  “원장이 탔던 렌터카는 벌써 세탁되어 팔려 나갔던데 당신 손 기술이 대단해. 언제 차를 손 본거야?”

  “무슨 소리야?”

  “당신 자동차 정비 자격증도 있던데?” 김 형사가 콧방귀를 꼈다. 

  “제니퍼! 이대근 가방에 달려있던 키링은 왜 잘랐어? 정말 그 녀석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그랬던 거야?”

  “키링이 뭐가 어쨌다고?”

  “이대근은 연구소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방에 달린 키링이 안 달려있었다고 털어놨어.” 

  “이런 개 자식!” 

  “가만히 보니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마틴 소장님! 이대근 연구소에 데려간 이후 가방 같은 소지품은 누가 보관하고 있었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제니퍼라고 그러던데 맞습니까?”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아…. 으아….”

  “미친 척해봐야 소용없어!” 김 형사는 그녀를 다그쳤다. 

  “제니퍼, 이제 알리바이를 말해! 어서!” 

  마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자가 영양을 사냥하듯 그녀는 그에게 몸을 날렸다. “이 개 자식아! 너 나를 죽이려고 그러는 거지? 너는 내가 원장이 죽던 날 누구를 만났는지 알고 있는 거야? 맞지? 기어이 내가 회장님에게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야. 그렇지. 이 개 자식아!”

  “어허, 이러면 안 되지!” 김 형사는 마틴의 목덜미를 움켜잡은 그녀의 손목을 단번에 비틀어 꺾었다.

  “아…. 아파! 이거 놔!”

  “당신! 이렇게 약해 가지고 무거운 시체들은 어떻게 옮겼어? 공범이 있는거야?”

  “아프다고! 흑…. 흑….” 그녀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병실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김 형사는 마틴을 먼저 돌려보낸 후 오래 전에 끊었던 담배를 사서 두 개비를 연거푸 피웠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건우 집으로 향했다. 수염이 지저분한 이건우가 그를 맞았다.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건우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외출은 가끔 하시는 편입니까?”

  “그건. 왜 물어봅니까?” 노인의 표정이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워졌다. 

  “별건 아니고 의례적으로 조사하는 거니까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외출이라고 해봐야 아침, 저녁으로 운동하러 다니고 가끔 장 보러 가고 그 정도밖에 더 있겠습니까?” 

  “아침, 저녁으로?”

  “어떤 때는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갈 때도 있고 컨디션 좋으면 하루 두 번도 가고 그럽니다.”

  “어디서 운동하세요?”

  “여기서 가까운 제황산 공원에 주로 다닙니다.”

  “혼자서 다니세요? 아드님은 빼고?”

  “그럼요. 혼자 다니죠.” 

  “아드님은 운동 안하고?” 

  “그렇다니까요.”

  “그럼 이 날도 운동 가셨습니까?” 김 형사는 수첩을 빼서 달력 날짜를 가리켰다.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저녁에는 보통 몇 시쯤 하세요?”

  “아홉 시 전에 나가서 열 시쯤 돌아옵니다. 약 한 시간 정도.”

  김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로 산책하십니까? 

  “뭐 대중없습니다.” 

  “그 손은 불편하지 않습니까?” 김 형사의 시선이 그의 손에 멈췄다.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그러시군요. 다리가 불편하셔서 그런 지 팔이 상당히 탄탄해 보이십니다.”  

  “형사님! 다른 질문은 없습니까? 이건우는 벽시계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번에 말씀하신 거 말고 아드님 관련해서 추가적으로 하실 얘기 없습니까?”

  “제 아들 얘기는 더 이상 드릴 말씀 없습니다.” 

  “아드님 얼굴 좀 볼 수 있을까요?”

  “지금은 조금 힘듭니다.”

  “선생님,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형사님께서 제니퍼도 잡아 주셨는데 제가 왜 피합니까? 적극 협조해야 지요.” 갑자기 이대근이 이 층에서 계단으로 천천히 내려오며 목청을 높여 말했다. 

  “마침 잘 오셨네. 그 한정 판으로 만들었다는 경마공원 키링 말인데 조사를 해보니까 색깔 별로 열 개씩 총 백 개가 만들어졌더라고. 보라색 실 매듭도 마찬가지지. 당시 프로그램 수강생들에게 나눠줬는데 진해에서 온 사람은 자네가 유일했네.” 

  “그래서요?”

  “제니퍼가 자네 증언을 부인하고 있어. 자기는 자네를 실험실에 데려왔을 때 가방에 그런 키링이 달려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군. 어떻게 생각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이건우가 떨리는 손을 감췄다. 

  “형사님은 제니퍼의 말을 믿으십니까?” 

  “물론 그렇지 않지. 그냥 자네 생각도 들을 필요가 있어 온 거야.” 김 형사는 이 대근의 팔을 힐끗 쳐다봤다. 

  “그 키링은 저에게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저 당시에 말 타는 사람이 어디 흔했나?” 김 형사는 이대근의 말 타는 사진을 쳐다봤다.

  “재활 승마 프로그램이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지원했던 겁니다.” 이건우가 끼어 들었다. 

  “그래요?”

  “네. 당시에는 아들에게 좋다는 것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을 때라 할 수 있는 건 다 시도했습니다.” 이건우의 눈빛이 빛났다. 

  “그래서 시냅스 연구소에 면책각서까지 쓰면서 아들을 사지로 보냈습니까?”

  “형사님!” 이건우가 버럭 소리쳤다. 

  “자네는 운동 해?” 김 형사는 이 대근의 팔을 힐끗 쳐다봤다.

  이 대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일 집에서 뭐하고 지내? 날도 좋은데 산책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하면 좋지 않아?” 

  “개인 취향입니다.” 

  “취향이라…. 그 탐정에게 협박 소포 보내는 것도 취향인가?”

  “부탁할 사람이 그 친구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경찰에 신고부터 하는 게 상식 아닌가? 물론 살해된 피해자의 기도 속에 제 가방 키링 매듭이 들어있었습니다. 뭐 그런 말 먼저 꺼내기는 어려웠겠지.”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그 탐정에게 제니퍼가 범인이라고 미리 제보하지 않았나? 그게 훨씬 사건 해결을 앞당겼을 건데. 왜 쓸데없이 소포 따위로 장난을 쳤나?” 

  “키링 매듭 하나 가지고 제니퍼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 없었습니다. 형사님이 구체적인 것을 알려 준 이후에야 그녀를 범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테면?”

  “피해자들을 펜타닐로 자동차에서 질식하게 만든 다음, 휠체어를 이용해 집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겠지. 연구실에서 탈출해 집으로 돌아올 때, 제니퍼가 자네 가방에 펜타닐을 넣어서 보냈다고 했지? 자네 집 화장실에 감추어뒀던 그거?”

  이 대근은 김 형사의 눈을 흔들림 없이 똑바로 쳐다봤다. 

  “에메랄드 갤러리 회장이야 당연히 연구소 출입이 자유로웠을 거고 프로포폴 반출도 껌 이였겠지. 그런데 자네는 가방에 펜타닐을 넣은 상태로 연구소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었나? 아무리 제니퍼가 도와줬다 해도 그런 곳은 경비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텐데.”

  “그건….” 

  “김 형사님! 저희 아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연구소에서 시키는 데로 했을 뿐입니다.” 이건우가 끼어들었다. 

  “말 안해도 돼! 당연히 제니퍼가 수를 썼겠지. 그 정도는 추측이 가능해. 그런데 말이야. 까딱 잘못하면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는 마약을 너를 통해 미리 빼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되거든. 혹시 남아있는 마약은 없겠지?” 김 형사가 한 숨을 크게 내쉬었다.

  “당연하죠!” 이대근이 뻔뻔하게 양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슥거렸다.

  김 형사는 습관처럼 돌아갈 제스처를 취하다 이대근을 향해 뒤돌아봤다. “이제부터 자네의 증언이 아주 중요해.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묻는 말에 가능한 구체적이고 진실 된 마음으로 답해 줘야 해.”

  이대근은 오른손을 떨고 있는 아버지를 시야에서 가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 형사는 집 문을 나선 후 곧바로 폰을 들었다. “진짜 사자가 나타났다!”


62


  유키에는 은행 잔고를 반복해서 들여다 보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잔금은 물론 아직 중도금도 입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귀국행 비행기 티켓을 확인했다. 벌써 내일이다. 회색 가발 노인은 거의 회복했고 판다 노인의 혈색도 훨씬 좋아졌다. 늦은 저녁 싱숭생숭한 마음에 홀로 병원을 나섰다. 조금 걷다 보니 미팅대상 1호를 만났던 제황산 공원의 전망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빨간 조명을 받은 전망대가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모노레일 탑승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마감시간이 훌쩍 지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365계단으로 향하는 길은 열려있다. 한 계단씩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어둠이 짙게 내리고 인적까지 드물어 으스스한 기운이 온 몸을 감쌌다. 그녀는 절반도 못 올라 그만 발걸음을 아래로 돌렸다.

  그 때, 유키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지표면 아래에 도사리고 있던 감정이 용암이 터지듯 북받쳐 올라오는 바람에 그만 가로등 불빛 아래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오사카에서 엄마 고향인 히로시마로 이사 왔을 때, 안심이 되었던 것은 아빠 성에서 엄마 성으로 바뀐 걸 새로 사귄 히로시마 친구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후에 새로운 아빠가 나타났는데도 다행히 내 성은 바뀌지 않았다. 히로시마 아빠는 오사카 아빠와 달리 자주 집을 비웠지만 주말이면 가끔 승마장에 데리고 가거나 놀이동산에도 데리고 갔다. 그는 내게 매번 똑 같은 장난을 치는 걸 좋아했는데 동네 귀퉁이 작은 디저트 카페에서 파르페를 다 먹은 나를 유심히 지켜본 후, 자신의 바지 주머니를 탈탈 뒤집어 보이며 돈이 없다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곧장 울상을 지었고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뭐가 웃긴지 그는 껄껄 거리며 한참을 웃곤했다.

  식자재 마트에서 계산원을 했던 엄마는 밤이면 집에 돌아와 가격표가 덕지덕지 세 개쯤 붙어있는 포장음식을 뜯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나를 보고 웃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파르페 아빠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거리에 어둠이 내리고 작은 방 안에서 홀로 엄마를 기다릴 때면 어딘 가에서 아빠가 내 이름을 부르곤 했다. ‘유키에!’ 정다운 그의 목소리…. 갑자기 그 목소리가 거친 남자의 숨소리로 바뀌었다. 유키에는 머리를 몇 번 흔들었다. 

  어둠이 내린 계단 아래쪽에서 남자 한 명이 빠르게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유키에는 그가 지나가도록 일어서서 가장자리로 재빨리 붙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그의 흰 장갑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잠깐 올려다 본 후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때, 가죽점퍼를 입은 남자가 그녀 앞에 불쑥 나타났다. 유키에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는데 그가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멈칫하더니 앞의 남자를 뒤좇듯 빠르게 뛰어올라갔다. 

  유키에는 쫓고 쫓기는 남자들의 이상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병원으로 돌아갔다. 회색 가발 노인의 병실로 들어가니 그가 판다 노인과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침실 옆에는 못 보던 큰 검정 가방 두 개가 놓여있었다. 

  “면목이 없네요.” 회색 가발 노인이 유키에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니에요…. 저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니 젊었을 때 많은 일이 있었죠….” 

  유키에는 혹시라도 노인네의 푸념이 구구절절 늘어질까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땐 무엇이든 죽을 각오로 했더니 일이 술술 풀렸지요.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까 그런 결기 같은 게 없어져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도 일어나는군요.”

  “네….”

  “유키에상은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셨어요?” 

  이 일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묘해 유키에는 순간 망설였다.

  “무슨 이유가 되었든지 간에 항상 몸조심하세요.”

  “네….”

  “우리 일이 성공하면 한 번에 큰 돈을 만질 수 있지만 나중에는 보는 눈이 많아져서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결국에는 스스로 움츠러들고 말죠. 그리고 이 일은 실패하면….”

  유키에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의 노인이 무슨 의미심장한 말을 하려 준비하는 느낌을 받았다. 

  “큰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나이 먹고 의지만 앞섰다가는 저희처럼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하고 말지요.”

  “실수요?” 순간 언어 스위치가 꼬여 일본어 대신 한국어가 튀어 나오려 했다. 

  “그래요. 제가 큰 피해를 끼쳤네요.”

  “누차 말씀드리지만 선생님께서 잘못한 거는 없는 것 같은데요. 저에게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회색 가발 노인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마지막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어떤 부탁인지….” 

  “앞으로는 의뢰인에게 연락이 오더라도 다시는 이 일에 손도 대지 마세요!” 그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변했다. 

  “그렇지만….” 유키에의 얼굴이 붉어졌다. 

  “보아하니 유키에상을 앞으로 또 찾을 것 같아서 미리 말해두는 겁니다.”

  “누가요?” 

  “당신을 고용한 사람이지요.” 

  “선생님들도 그러면….”

  판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경험자로써 당신에게 얘기하는 겁니다. 부디 당부를 잊지 마세요. 유키에상은 이런 일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

  “선생님 저도 질문하나 드려도 될까요?”

  회색 가발 노인이 침대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방문 밖을 두어 번 살펴본 후 돌아왔다. 판다 노인은 명상하는 사람처럼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 일의 진짜 목적은 무엇입니까?” 

  “음….” 판다 노인이 물가의 악어처럼 슬그머니 눈을 떴다. “유키에상은 그 목걸이 용도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아…. 이거요?”유키에는 별 생각 없이 목에 걸려있는 물체를 내려다 봤다. 

  “그건 고성능 마약 탐지기입니다. 전문용어로는 라만 분광기라고 하지요. 유키에상의 목걸이는 특히 펜타닐 탐지용으로 개조되었을 겁니다. 기가 막힌 성능을 가지고 있죠.” 

  “네? 펜타닐요? 그게 무슨 말씀….”

  “이건우씨의 집에는 시냅스 연구소에서 빼돌린 엄청난 분량의 펜타닐이 숨겨져 있습니다. 한국사람 전부에게도 투약 가능한 분량일겁니다. 그 중 일부가 화장실 천장에 숨겨져 있다는 것도 저희가 확인했지요.”

  “그걸….” 유키에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이대근은 보통 내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지요.”

  “선생님들은 어떻게 이런 내막을 잘 알고 계십니까?”

  “내막이라…. 다시 한번 질문 드리지만 유키에상은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그냥 제 이메일로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 같은 게 왔길래 지원한 것 뿐입니다.”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이메일 공고요?”

  회색 가발 노인과 판다 노인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헤드헌팅 업체 같은 데서 저를 관리할 리도 없고….”

  “의뢰인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신은 이 일에 최적화된 사람으로 찍혔던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한국어도 좀 하고 이 도시에 친구가 있어서 의뢰 받은 일을 하기에 확실히 수월한 면이 있긴 하네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조건이 있었어요.”

  “뭐죠?”

  “2분 동안 숨 참기 테스트가 있었는데 사실 계속 실패했거든요.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통과되었습니다.”

  회색 가발 노인과 판다 노인이 음흉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건 가스 같은 형태로 펜타닐 흡입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펜타닐은 볼펜 끝에 묻을 정도의 극소량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유키에상! 우연처럼 느껴지는 모든 일에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겁니다. 앞으로 이 일도 충실히 잘 하다 보면 신뢰가 쌓일 테고 또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보수도 넉넉히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방금 얘기했듯이….”

  “잠깐…, 화장실 좀.” 긴장감이 몰려온 유키에는 배를 부여잡고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속에 있는 걸 거의 다 게워내고 지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갑자기 복도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상황 파악에 시간이 지체된 유키에가 허겁지겁 화장실을 뛰어 나왔을 때는 이미 먹구름 같은 연기가 복도 가득 뭉게뭉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메스꺼운 전선 타는 냄새에 그녀는 헛구역질을 하며 왼쪽 소매로 코를 막았다. 유키에는 자세를 낮추고 오른 손으로 벽을 짚어 가며 복도 끝으로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여기가 비상구인가…. 그녀는 문을 열었다. 아…. 이런. 천장의 스프링 쿨러 때문인지 바닥이 축축했다. 공간에 쌓인 쾨쾨한 약품 냄새에 순간 정신을 잃을 정도로 눈 앞이 혼미 해졌다. 안돼! 절대 안돼! 지금은 아니야! 유키에는 기운을 내서 앞으로 끝까지 기어가 창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누군가 빠른 속도로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희미하게 어딘 가에서…. 들어본 목소리가 가까워졌다가 점점 멀어져 갔다. 유키에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유키에! 살아야 한다.’ 

  활활 타오르는 낯선 영화관의 불길 속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린 소녀가 나타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할머니! 할머니!’ 유키에가 외쳤다. 

  어린 소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년의 손에 이끌려 안개처럼 자욱한 잿빛 공간을 헤치고 나갔다.

 ‘할머니! 할머니!’ 유키에가 다시 외쳤다. 

  한 번도 본적 없는 젊은 남자가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밟고 성큼성큼 다가가 입을 크게 벌리며 젊은 여자를 일본도로 베었다.


  ‘유키에. 살아야 한다.’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거리에서 위태롭게 장바구니를 둘러맨 어린 소녀가 나타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엄마! 엄마!’ 유키에가 외쳤다.

  하얀 트럭이 빠른 속도로 다가와 반백의 중년 여자를 하늘로 날려버렸다.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포장된 음식들이 폭죽 터지듯 공중으로 솟구쳤다.


  ‘유키에. 살아야 한다.’

  배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중년 남자가 붉게 물든 손을 내게 내밀었다. 

  ‘아빠! 아빠!’ 유키에가 외쳤다.

  검은 양복의 스모선수 같은 남자가 다가와 피가 흘러 내리는 중년 남자의 배에 칼을 다시 꽂았다. 


  순간 유키에의 감은 두 눈 위로 번쩍하고 섬광이 비췄다.


  “괜찮아요?” 

  유키에는 촉촉이 젖은 눈을 떴다가 어지럼증이 몰려와 다시 감고 말았다. 

  남자가 유키에를 가볍게 들춰 업고 연기 속을 헤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유키에는 노인들이 걱정되었지만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의 등에 업힌 채 다시 눈을 떴을 때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하얀 운동화와 앞 코에 찍힌 작은 분홍색 점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기억이 암흑속으로 사라졌다.


  “유키에. 일어났어?”

  그녀는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렸다. 

  “나, 알아 보겠어? 성민이야. 그래도 대단한 걸. 내 전화번호를 다 외우고 있고.” 그가 활짝 웃었다. 

  태민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의 까만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정말 큰 일 날 뻔했어. 광화 병원에서 불 난 거는 기억나?”

  유키에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너 병원 건물 앞 벤치에 쓰러져 있던 걸 간호사가 발견해서 여기로 옮긴 거야.”

  유키에는 그 남자의 하얀 운동화와 흔들리던 분홍색 점이 또렷이 기억났다. 

  “무슨 이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네. 이번에는 한국에 와서 너무 고생만 한다. 진짜. 십년감수했어. 정말.”

  “지금…. 몇 시?”

  “새벽 두시. 너 내일 비행기라고 했지. 아니 오늘이구나. 그래 가지고 일본 돌아갈 수 있겠어? 경찰에서 무슨 조사 같은 거 받을 수도 있을텐데….”

  유키에는 병원에 두고 온 손 가방과 캐리어가 생각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너 소지품은 내가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폰도 주머니 안에 들어 있을거야. 불이 크게 났었는데 네 소지품이 있던  일층 가족실은 멀쩡해.”

  “성민아 고마워…. 그런데 그 사람들은?”

  “누구?” 성민은 태민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유키에의 눈을 피했다. 

  “혹시….” 유키에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나 봐. 사망자 명단에 일본인 세 명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아.” 

  유키에는 흐느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두 명이 아니고 세 명이야?”

  “그래. 외국인은 중국국적 한 명, 일본국적 세 명이래.”

  유키에는 눈물을 훔치며 폰을 꺼내 비행기 티켓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63


  우여곡절 끝에 히로시마로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났다. 아직도 한국에서 있었던 지난 일들이 꿈만 같지만 유키에는 화염 속에서 살아 남으라고 외쳤던 낯선 할머니가 머리 속에서 빙빙 맴돌았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가족관계와 관련된 질문은 아예 원천차단했다. 본인의 과거에 대해 조금이라도 질문을 할라 치면 부모없이 고아원에서 컸다고 성의 없이 대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부모처럼 평소에 자식에게 살가운 면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런 무심한 대답도 거짓말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친가, 외가 가릴 거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 얘기만 나와도 얼굴이 새파래지며 경기를 일으켰다. 사실 엄마라는 존재는 그런 자신의 과거 따위를 차분히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마트에서 퇴근 후 가격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유통기한이 임박한 포장식품을 뜯을 때가 제일 행복한 그런 사람이었다.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시지만 않았더라도…. 엄마 옆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물어보고 싶다. 화염 속에서 쓰러졌던 내 앞에 나타났던 그 할머니가 누구인지. 따뜻하지 않아도 잘해주지 않아도 상관 없으니 그저 예전처럼 집에 돌아왔을 때 무표정하게 쳐다봐 주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옆에만…. 그녀는 손수건을 꺼냈다.

  유키에는 아르바이트 중도금이 입금되었는지 은행잔고를 다시 확인했지만 역시나…. 맺고 끊는 거는 확실하군. 판다 노인의 말은 진짜일까. 펜타닐…. 고용인은 정말 처음부터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일까…. 두 노인들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유키에는 갑자기 생각난 듯 이메일을 열어 지난 번에 지원했던 아르바이트 공고를 검색했다. 하지만 역시 없는 페이지로 나온다.  

유키에는 의자에서 일어나 거의 들어가지 않던 안방으로 들어갔다. 불단 위의 어색하게 웃고 있는 엄마 사진을 향해 합장한 후 오랜만에 시간을 들여 고개를 숙였다. 방안 구석구석 베어 있는 엄마의 체취가 스며나왔다. 갓 난 아기였을 때부터 맡아왔을 그 냄새가 아직도 코 끝에 느껴졌다. 그녀가 남긴 것이라고 해봐야 이 작은 집과 한 눈에 보이는 옷가지들과 이 방의 얼마 안 되는 물건 밖에 없다. 유키에는 불단 아래 지저분한 스티커들이 붙어있는 중간 서랍을 열었다. 당연히 반짝이는 보석 따윈 있을 리가 없다. 싸구려 다이어리 한 권만 덩그러니 보인다. 대충 넘겨봐도 서툰 글자체에 엉성한 표현들. 볼만한 내용이 있을 리 없다. 

  [오사카 생활이 힘겹다. 아이에게 미안하지만 그만 히로시마로 돌아가고 싶다.]

  [오빠에게 한 번만 도와달라고 부탁해볼까. 자존심이 상한다. 너무 비참한 심정이다.]

  유키에는 다이어리를 덮으려다 오빠라는 말에 시선이 멈췄다. 엄마에게 오빠가 있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그녀는 다이어리를 한 장 더 넘겼다. 

  [우리는 근본이 다르다고. 씨 자체가 차이가 난다 이 말이야. 네 하찮은 조선인 아버지가 뼈대 깊은 무사 가문의 내 아버지를 죽였어! 너희 집으로 돌아가! 오빠라는 사람이 내가 제일 증오하는 말을 서슴지 않고 또 내 뱉았다. 이 가슴 깊이 사무치는 억울함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친할아버지라는 인간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내가 당신 집안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면 왜 엄마와 아빠가 죽었을 때 오빠만 거두면 될 것을 나까지 데리고 와서 그렇게 괴롭혀야 했을까. 차라리 외가로 보내줬으면 이런 모욕과 굴욕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내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오빠의 마음은 모두 친할아버지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이제 서야 깨닫는다.]

  유키에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마다의 외가 친척들은 왜 나를 지옥에서 구해주지 않았을까. 이 세상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태산이라 걱정이 많아진다. 요즘 들어 왼쪽 눈이 잘 보이지 않고 말도 어눌해지는 것 같다. 아이에게 괜히 짜증을 내서 미안하다.]

  [언제 시간을 내서 병원을 가야겠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왼쪽에서 나타난 여고생을 칠 뻔했다. 조심해야겠다.]

  유키에는 고개를 떨구었다. 다다미 위로 눈물 방울이 이슬처럼 슬프게 맺혔다. 다이어리를 덮으려다 마지막 커버 페이지에 세로로 흘겨 쓴 일본어와 한글이 보였다. 

  [다나카 가츠타다, 히로시마시 미나미구 미도리 4초메. 3455-….]

  [이 중신, 경상남도 진해시 광화동….] 

  [하세가와 미오, 시마네현 하마다시 덴마초….]

  이 중신…. 이 한국 사람이 엄마의 친아빠…. 유키에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다음 날 오전 열 시, 유키에가 안 방에서 엄마 물건을 뒤적이고 있을 때 아르바이트 업체로부터 연락이 왔다. 의뢰 요청이다. 유키에는 떨리는 손으로 그들이 보낸 파일을 클릭했다. 

  전용 앱에서 지시한 장소로 이동해 물건을 수취하고 그 물건을 이건우씨에게 선물하기만 하면 끝난다는 내용이다. 정말 쉬운 일이다. 하지만…. 유키에의 머리 속에 판다 노인의 얼굴이 아른거리더니 빠른 속도로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주의사항: 선물의 투명 비닐 포장지는 개봉불가!]

  유키에의 머릿속에 빨간 경고 등이 울리기 시작했다. 의뢰인은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수락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절대로…. 안 된다…. 유키에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아르바이트 전용 앱을 삭제하려다 그들이 제시한 금액을 보고 순간 밝은 미래가 펼쳐지는 듯한 착시현상을 느꼈다. 5000만엔. 거기다 이번 일을 잘 해내면 지난 아르바이트 때 못 받은 중도금과 잔금까지 입금한다는 조건이다. 5000만엔이면…. 그저 선물 하나만 전달하면 된다…. 딱 한번이다. 유키에…. 눈 딱 감고 딱 한 번만…. 유키에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까지 어렵게 살면서 이건우라는 사람이 내게 무얼 하나 도와준 적 있었나? 망설일 가치조차 없다. 그저 남남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일 뿐이다. 유키에는 떨리는 두 손으로 폰을 꼭 쥔 채 엄마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힘껏 수락 버튼을 눌렀다. 


  고급 주택가 단지의 여유와 잘 어울리는 세련된 카페로 들어가자 넓게 펼쳐진 정원 구석의 큰 파라솔 밑에 앉아있는 백발의 노신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별 기대 없이 연락했지만 그는 엄마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오히려 내게 만남을 재촉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나카 가츠타다입니다.” 노신사가 몸을 숙이며 파라솔 밑에서 나왔다. 

  유키에는 퉁퉁 부은 눈을 가리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엄마 닮아서 배구선수처럼 키가 크네.” 노신사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유키에는 의자를 뒤로 밀었다. 

  “너 오사카에서 히로시마로 이사 왔을 때,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나?” 

  유키에는 고개를 저었다. 

  “세월이 정말 빠르구나. 우리 집 손주들도 벌써 다 컸지.” 노신사가 활짝 웃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그가 종업원을 향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저는 엄마에게 가족관계에 대해 들은 적이 없습니다. 혹시 기억나는 게 있으면 조금이라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우스 커피?” 

  유키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어디 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가 삼촌이란 거는 알고 있지?” 그의 말투가 삼촌처럼 바뀌었다. 

  “네.”

  “다 지난 일이니 서운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이후에 아니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내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이후에 너희 엄마와 내가 친가 쪽, 그러니까 친할아버지 집에 맡겨졌어.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함께 놀고 그랬던 기억은 없지만 너희 엄마가 좀 많이 겉돌았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적응을 못했다고 봐야 지.”

  “엄마가 왜 그랬을까요?”

  “음…. 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하고 너희 엄마의 아빠가 달라서 그랬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드네.”

  유키에는 몸을 조금 더 뒤로 젖히고 다리를 꼬았다.

  “네 엄마의 아빠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되었건 간에 당시에는 조선인이라면 일단 색안경을 쓰고 봤으니까 네 엄마 입장에서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겠지.”

  “그 조선인이라는 분이 제 외할아버지가 되겠네요.”

  “그런 셈이지. 당시 내 친할아버지가 더 괘씸하게 생각했던 건 네 외할아버지 되는 사람이 조선인인 것도 모자라 이미 가정을 가지고 있었던 유부남이라는 사실이었지. 거기에 히로시마 원폭으로 일본이 연합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후 쥐도 새도 모르게 조선으로 줄행랑을 쳐 버렸어. 남의 가정을 풍비박산을 내고 네 엄마까지 싸질러 놓고서 말이야.” 

  “엄마도 많이 힘들지 않았을까요?”

  “글쎄…. 외가 친척들도 한 번도 네 엄마를 데려가고 싶다 거나 그런 연락조차 없었어. 시집간 딸은 이미 남의 집 자식으로 생각했는 지 모르지. 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에 얼마나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았는데 네 엄마라는 사람은 내 할아버지가 거두어 줬으면 철이라도 빨리 들어야지. 말만 하면 대들고 틈만 나면 가출이나 하고. 내가 죽은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네 엄마는 엉망진창이었어.”

  유키에는 사춘기 엄마의 마음 속으로 자신이 들어가 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친할아버지가 네 엄마를 싫어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상아색 커피 잔을 들었다.  

  유키에도 커피 잔을 들었다.

  “네 조선인 외할아버지가 내 아버지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란 사실이야.” 

  그가 엄마가 가장 증오했던 말을 내 앞에서 다시 내뱉았다. “그러면 삼촌은 외할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세요? 삼촌 엄마요.”

  “그거야 원자폭탄 때문이지.” 그가 당연한 듯 얘기했다.

  “아니에요! 삼촌의 아버지가 삼촌의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남편이 자신의 부인을 죽인 거죠.” 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지체 높으신 무사 가문 답게 일본도로 가족 상잔의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해!” 그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호통쳤다.

  역시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이야기만 하려는 경향이 있다. 감추고 싶은 것, 부끄러운 것은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나는 맹세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 너! 분명히 알아 둬라. 원자폭탄 희생자 명단에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어, 명백한 팩트라고! 그리고 내 아버지는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심하게 얼굴이 으깨져서 피투성이로 집에 돌아왔어. 네 조선인 외할아버지를 죽이러 간다고 칼을 차고 시내에 다시 나가지만 않았어도 변을 당하시진 않았을 거다. 안타깝게 어머니는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어.”

  역시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생각도 말투도. 유키에는 엄마가 살아 돌아와 자신에게 빙의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가짜 뉴스에 현혹되면 안 된다.” 노신사가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파냈다.

  다시는 볼 일 없을 것이다. 굿 바이! 삼촌이라는 사람! 유키에는 커피 잔을 단번에 비웠다. 


64


  풍림화산! 빠른 것은 바람과 같이, 고요한 것은 숲과 같이, 공격은 불과 같이, 수비는 산과 같이. 움직일 때와 움직이지 않을 때, 그 간극의 차이가 클수록 머리 싸움에서 상대를 이길 확률은 높아진다. 대근은 다시 숲과 산의 세계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옷이 이게 뭐 야? 응? 엄마가 빨래도 안 해줘?’ 눈 화장이 진한 사 학년 담임이 교실 앞에서 신경질을 내며 내 멱살을 잡고 당겼다 밀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왜 엄마 없는 내게 엄마 얘기를 꺼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가 장애가 있으면 옷이라도 깨끗하게 입혀서 보내 야지. 어. 학교가 무슨 거지 놀이터도 아니고. 장난해?’ 담임이 나를 힘껏 내팽개쳤다. 

  아이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 옆 반에 태민이 본 좀 받아라. 응? 다 너 같지 않지? 항상 단정하게 다니는 거 몰라? 내 말 뜻은 알아듣기나 해?’

  머리 속에서 말 풍선이 커지다가 펑 터졌다. 말 풍선을 다시 불었지만 또 터졌다. 

  ‘너 같이 멍청한 애들이 지저분하기까지 해봐라. 일반 학급 어느 부모가 좋아하겠냐? 자기 애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걸 반기겠어? 그래? 안 그래?’ 

  억하심정이 온 몸에 퍼져 나갔다. 

  ‘머리도 이게 뭐 야? 물이라도 묻혀야지. 까치집도 아니고 아침에 너희 엄마 뭐하냐?’ 그녀가 내 머리를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쥐어 박았다.

  왜! 왜! 집 나간 엄마를 계속 들먹이는 지 얘기하고 싶었다. 당신이 내뱉었던 말이 평생 내 가슴 깊이 멍울로 맺혀 있을 것이라 말해주고 싶었다. 과거와의 전쟁에서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에 승리했다. 과거는 승자의 역사다.


  ‘야! 앉아! 가만히 있어!’ 파란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녀석이 다가와 나를 책상에 바싹 당겨 앉혔다. 책상에 밀착된 배가 답답해 의자를 뒤로 빼면 그 녀석이 다시 다가와 의자를 세게 밀어붙였다. ‘움직이지 말라고!’

  답답하다는 말 대신 괴성이 튀어 나왔다. 

  아이들이 모두 뒤돌아보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있는 힘껏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그 녀석이 넘어졌다.

  ‘야! 잡아!’ 담임이 교실로 들어와 소리치자 애들이 날 잡으러 달려왔고 나는 그들에게 죄수처럼 포박되었다. 

  ‘참 구제 불능이네. 너는 특수학교로 전학 가는 게 맞아! 여기 있을 수준이 안 돼! 알았어?’ 담임이 소리쳤다. 

  나는 그녀를 흘겨봤다. 

  ‘꼴값한다. 정말. 너 때문에 지금 수업을 못하고 있어. 얼른 자리에 돌아가 앉아!’ 

  나는 그들이 괴성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내며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 지 넌 모르지? 너희 부모님 학교로 오라고 해야지 안 되겠어. 민원 때문에 살 수가 없어. 살 수가.’ 

   민원. 내가 만든 민원이라는 것이 그녀를 그토록 화나게 만드는 것인가.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그 녀석이 내 의자를 뒤로 뺐다. 나의 엉덩방아 찧기에 모두가 행복해졌다. 웃음 가득한 행복한 교실이 되었다.


  나는 무수히 찧은 엉덩방아 덕분에 지금도 훈장처럼 불룩 튀어나와 있는 꼬리뼈를 만지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아들아….” 이건우가 머리맡으로 다가와 상처투성이인 대근의 정수리를 투박한 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대근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김 형사가 얘기했던 그 경마공원 키링 말이다. 넌 기억날 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그 실매듭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거든. 니 콧구멍 속에 박혀있던 걸 빼내서 누가 내 아들 콧구멍에 이런 짓을 했냐고 내가 학교도 발칵 뒤집어 놓고 학원에 가서도 난리를 쳤었다. 그런 실매듭이 죽은 아이스크림학원 원장 손녀 기도에서 발견되었다니까…. 솔직히 겁이난다. 난 도무지 모르겠어. 그게 어떻게 거기로 흘러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못하겠어.” 

  이대근의 목 울대가 움직였다. 

  “아무래도 실매듭 같은 건 어디 던져 버렸을게다. 화가 나서 학교에서 내팽개쳐 버렸거나…. 아니면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면상 에다 던져 버렸거나…. 그 오래된 걸 어떻게…. 정말 믿기 지가 않는다.” 

  이대근은 과거의 자신이 천장에 거꾸로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은 천벌을 받아도 싸지. 우리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지 마음 내키는 대로 가지고 놀았어.”

  대근의 감은 눈꺼풀이 떨렸다. 

  “너는 아무 말 말거라.” 이건우가 상처투성이인 대근의 머리를 부둥켜안고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상처 곳곳에 뜨거운 액체가 떨어졌다. 

  “지금부터는 절대 밤에 운동 나가지 말아라. 알았지?”

  대근은 아버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저번에 우리 집에 일본 노인들 데리고 왔던 젊은 여자 알지? 모래 인사하러 오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대근은 눈을 번쩍 떴다. 

  “사람이 참하고 괜찮더라. 네 각시 삼으면 딱 좋겠어.”

  “아버지. 안 됩니다! 그 여자는.”

  “노파심에 말하는데 그 여자는 그냥 내버려둬라.”

  “내버려 두라니요? 사람을 그렇게 볼 줄 모르십니까? 그러니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에게 농락 당한 겁니다. 아버지가 호의적으로 생각한 그 일본 노인네들도 죗값을 달게 받은 겁니다.”

  “그만해라! 광화병원에만 가지 않았어도 죽지는 않았을텐데…. 너는 미안한 마음도 들지 않는 거냐?” 

  “고집 그만 피우고 제 말 좀 들으세요! 제 말 안 들을 거면 저도 아버지 말 듣지 않겠습니다.”

  “아들아….”

  “지금 돌아가는 거 보고도 정말 모르겠습니까? 왜 그 여자를 만나야 됩니까? 왜! 왜! 자꾸 그 여자를 집으로 들이려 하는 겁니까?” 대근은 이불을 걷어차며 몸을 일으켰다. 

  “알았다.” 

  “아버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거예요?” 

  딩동! 딩동! 일층 현관 초인종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대근은 순간적으로 이건우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잠깐만요!” 대근은 살금살금 창문 쪽으로 이동해 밖을 살폈다. 김 영광 형사가 보였다. 이건우는 아들을 이층에 남긴 채 일층으로 내려와 현관으로 나갔다.

  “연락도 없이 죄송합니다. 급한 용건이 있어서.” 김 형사가 머리를 긁적였다. “간단한 거니까 여기서 바로 얘기하시죠.” 그가 현관 앞에 걸터 앉았다.

  이건우는 그의 매서운 일자 눈썹을 보자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며칠 전에도 운동하러 나가셨습니까?”

  이건우는 나갔던 기억이 없었다. “뭐. 습관적으로 하는 거니까요. 왜 그러시죠?”

  “몇 시쯤 나가셨습니까?”

  이건우는 대근이 나갔던 시간을 떠올렸다. “한 여덟 시 전후였던 것 같습니다.” 

  “몇 시에 돌아오셨습니까?”

  평소보다 대근이 한 시간 정도 늦게 들어왔던 것 같다. “열 시 전후쯤 인 것 같습니다.”

  “저번에 운동은 주로 한 시간 정도 하신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 날만 특별히 길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살다보면 그때 그때 조금씩 다르지 어떻게 칼같이 시간을 맞추고 그러겠습니까?” 이건우는 짜증을 냈다.

  “운동은 제황산 공원에서만 하시는 건가요?”

  “주로 거기서 하죠.” 

  “얼마전에 광화 병원에서 불이 나서 인명피해가 컸습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까?”

  “뉴스에서 본 것 같습니다.” 

  “뉴스라…. 일본인이 무려 세 명이나 죽었어요.”

  이건우는 고개를 숙였다. 

  “아주 공교롭게도 이 분들이 선생님 댁 방문차 입국했던 사람들입니다. 맞습니까?”

  “그게 어쩠다는 겁니까?” 이건우의 주먹 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고인들과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과 인연이 있는 분들 이라 인사 차 방문했던 겁니다. 저희라고 이런 일이 발생해서 마음이 좋겠습니까?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병원에는 요즘도 다니십니까?”

  이건우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예전에 손 때문에 가끔 다녔지요. 그건 왜 물으십니까?”

  “참고 사항입니다. 지금은 괜찮으시고요?”

  “나이도 있으니까 이제는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살아야지 않겠습니까? 남의 손 진료기록도 캐고 다니십니까?” 

  김 형사가 목을 돌리기 시작했다. 

  “병원 화재 원인은 나왔습니까?”

  “별다른 게 있겠어요? 방화 가능성이 없다면 시설물에서 발생한 거겠죠. 그렇지 않은 게 문제지만.” 김 형사는 손가락 관절을 딱딱거리며 이건우를 째려봤다.

  이건우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이 사건도 그냥 넘어가려고 해도 넘어갈 수가 없어요. 같은 층에서 연기를 흡입한 대부분의 입원실 환자들은 다른 병원으로 이송된 사람은 있어도 죽지는 않았거든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형사님! 처음부터 참고 있었는데 왜 그 화재 이야기를 우리 집에 찾아와서 제게 따지듯이 빙빙 돌려가며 유도합니까?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어떤 기분이 들지!”

  “다 이유가 있으니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좋은 말로 하니까…. 맛 좀 보고 싶어요?” 김 형사가 미간을 험상궂게 찡그렸다.

  “이 사람이! 형사면 다야? 어디서 지금!” 

  “제 말 끝까지 다 듣고 얘기하세요. 후회하지 말고! 화재발생 직전에 흰색 모닝 자동차 한 대가 병원 주차장 CCTV에 잡혔습니다. 검은 오토바이 헬멧에 흰색 운동화를 신은 남자가 한 손에 배달음식으로 보이는 종이가방을 든 채 로비 CCTV에 나타났고요.”

  “아니! 그게 어땠다는 건데요?”

  “그러다 갑자기 그 남자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불이 났고요.”

  “지금. 그 남자가 화재를 냈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의심이 가지만…. 단정할 순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말을 자꾸 빙빙 돌립니까? 그 남자가 저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네? 저에게 왜 그럽니까?” 이건우는 언성을 높였다. 

  “화재 이후에는 병원 CCTV 확인이 어렵기도 하고…. 혹시 운동하고 집에 돌아오실 때 흰색 모닝 자동차는 못 보셨습니까?”

  이건우는 귀찮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거 경찰 양반이 견적 나오는 자동차를 가지고 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그럽니까? 이 근처에도 보면 교통정보 수집하는 CCTV도 많이 설치되어 있던데 형사님이 의심되는 곳 딱 찾아서 그거 돌려 보시면 잘 아실 것 아닙니까? 그런 걸 왜 저에게 물어보시냐고요?.... 지금 이 상황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돌려봤지요. 흰색 모닝이 선생님 댁 근처를 지나가는 게 잡혔습니다.”

  택시를 그만둔 이후로 운전대를 잡아 본지도 오래다. 흰색 모닝…. 이건우는 어느새 축축 해진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차량조회 안 됩니까? 형사님은 그런 간단한 걸 왜 엄한 사람 붙잡고 협박하십니까?”

  “당연히 저희도 여러 각도로 조사를 하고 있지요. 겸사겸사 확인 차 왔던 거니 괘념치 마시고 잘 알겠으니까 그럼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김 형사는 이건우의 어깨에 두드리듯 손을 올린 후 돌아섰다.

이건우는 그의 뒷모습에서 호랑이 가죽 옷을 입고 사냥감을 찾아 떠나는 동화책 속에 서나 나올 법한 그 옛날 포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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