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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08번뇌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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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2. 2024

사자 사냥

(49~57)

49


  언제는 천천히 공을 드려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으라 더니 왜 이제 와서 압박하는거야…. 실험을 하다 보면 108명으로 부족할 수도 있는 거야…. 왜 숫자에 집착해… 젠장! 누군 마무리 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건 줄 알아…. 연구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 인간들이 누구 마음대로! 마틴은 일본에서 온 텔레그램 메시지를 확인한 후 폰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인생을 바쳐 연구한 것들을 그렇게 쉽게 빼앗길 수 있다고 생각해? 허튼 수작 부리지 마! 이 놈들아. 마틴은 키보드를 힘껏 내리쳤다. 삼중 보안 장치에 걸려있는 실험 파일 자료들이 쇠사슬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것만 같다. 이를 악물고 제니퍼를 호출하는 스위치를 눌렀다.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어. 내가 뭐라고 그랬냐? 응?” 그녀가 팔짱을 낀 채 마틴을 흘겨봤다. 

  마틴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진작에 내 말 들었으면 보상이라도 톡톡히 받았을 거 아니야? 이 세상에는 자폐 치료 약도 없고 자폐 유발제는 더더욱 없어. 우리가 세계 최초라고 최초! 대충 만들어도 지들이 어떻게 알겠어? 뭐가 어떻게 되는 지 검증조차 불가능 하다고. 알아? 우리가 선발자로서 누릴 수 있는 충분한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다고. 고생은 죽도록 했는데 이제 발가벗겨져서 쫓겨나는 거야. 아니지 쥐도 새도 모르게 우릴 죽일 수도 있어. 자…. 기분이 어때?” 그녀가 비웃 듯 소리쳤다. 

  “우리가 아니면 이 연구는 절대 이어 갈 수 없어. 회장님도 우리를 함부로 대할 순 없을 거다.” 

  “이래서 나이를 먹으면 생각이 콘크리트처럼 굳어지는 거야. 착각도 유분수지. 지금 AI 기술이 얼마나 진화하고 있는 지 알고 나 하는 소리야? 생명과학이나 의료 분야는 AI 기술이 무지막지하게 산업 전반에 스며들고 있다고. 이 사람아! 유전자 기술도 장난이 아니야. 알츠하이머 같은 경우는 미국하고 일본이 거의 완치 단계로 신약을 만들고 있어. 벌써 대박 났다고! 우리처럼 골방에 틀어 박혀서 구역질 나는 생체 실험 안 해도 말이야. 이게 뭐 야? 난 당신과 허비한 내 라이프 타임에 대해 비용을 청구할 생각이야. 아주 혹독하게.”

  “우리가 일본 회장님하고 맺은 고용 계약서는 자세히 살펴봤어?”

  “이 답답한 사람아,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계약서는 종이 쪼가리일 뿐이야. 모든 주도권은 회장님이 다 가지고 있다고. 우리가 이제 와서 이러 쿵 저러 쿵 해봐야 통하지도 않아.” 

  “그래도 모든 결과물은 이 곳에 있어!” 마틴은 검지로 머리를 두드렸다.

  “그렇게 까불다가는 저 세상 간다고. 마틴! 그렇게 자신 있으면 차라리 기술을 팔아먹고 외딴 섬에서 여유롭게 노후를 보내는 쪽이 현명했어.” 

  “일본 회장님 쪽에서 서두르는 진짜 이유가 있어?” 

  “진짜 몰라서 물어? 지금 경찰들이 움직이고 있지. 탐정 나부랭이가 흙탕물 만들며 돌아다니지. 다른 정보기관에서도 덩달아 춤을 추니까 당연히 서두르겠지. 최대한 빨리 증거 다 없애야 할 거 아니야? 자료도 사람도.” 제니퍼가 화장지를 뽑아 눈가에 댔다. 그 때 무엇인가 바닥에 떨어졌다. 

  마틴이 떨어진 물건을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마세라티네. 언제 바꿨어? 주차장에 안 보이던데.”

  “내 맘이야. 나도 억울해서 안 되겠어.”

  “자동차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이래서 난 당신이 싫어.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했어? 내 생일 한 번 챙겨 준 적 없으니 내가 자동차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도 당연히 모르겠지. 웬만한 자동차 정비는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도 물론이고. 난 연구소에서 해방되면 앞으로 자동차 관련 일을 하고 싶어. 세일즈도 좋고 정비도 좋고.”

  “다른 건 몰라도 당신 월급 통장은 내가 잘 알지. 너무 무리한 거 아닌가. 마세라티, 그것도 스페셜이면?” 

  “당신은 그냥 낚시나 하면서 사셔. 남의 프라이버시 침해하지 말고.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차 못 사면 누가 사? 이제 곧 남남인데 뭘 상사처럼 간섭하려는 거야? 오늘 이건 내일 이건 두고 봐. 우리가 잠든 사이에 연구소 자료는 모두 사라질 거야. 당신과 나는 끝났어. 그런 거나 걱정해.” 

  마틴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108명이 뭐라고…. 연구소에 남은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인물 났네, 인물 났어. 실험할 때는 아주 애들을 잡더니만. 벌서 잊었어, 당신 스타일? 실험 대상의 고통 따윈 안중에도 없이 극단적으로 약물을 투입하는 냉혈한! 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 애들 걱정하는 거야? 입장 바꿔 생각해봐. 당신이 회장님이라면 어떻게 할 지.” 

  마틴은 바닥에서 폰을 주워 회장으로부터 수신한 텔레그램 메시지를 다시 열었다. 메시지는 십오 분 후에 사라진다는 경고 문구가 깜빡였다. 이십사 시간 이내에 어떤 것도 소지하지 말고 직원 모두 연구소를 빠져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내용이다. 공동 수신인은 제니퍼다. 

  “재활체육 직원들은 일본에서 직접 고용한 애들이니 각자 제자리로 돌아갈 거고 우리는 다른 일 준비해야 지. 난 더 이상 약 장수로 살고 싶지 않아. 마틴, 당신 덕분에 IT 세계에서 신약의 신세계로 발을 잘못 들여서 이 꼴 났지 뭐. 평생 알지도 못했을 온갖 약들을 다 만들어 보고 그것도 모자라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도 자행하고 말이야. 우리가 무슨 일제시대 때 737 부대야? 이 참에 마약이나 제조해서 돈이나 벌까?”

  “제발 그만해!” 마틴이 소리쳤다.

  “아깝지 않아? 솔직히 내 머리 속에는 자폐 관련 약들 말고도 수많은 제약 기술이 들어있어. 냄새 한 번으로 증거도 안 남기고 인간 중추신경계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여러가지 기술이 있단 말이지.” 그녀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입술을 살며시 벌렸다

  “제니퍼! 제발 정신 줄 놓지 말고 살아. 일본 회장님 아니더라도 우린 충분히 다른 데서 투자 받고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있어. 절대 저들은 우리 기술을 가져가서 한 발짝도 진전시키지 못할 거야.”

  “내가 속을 줄 알아? 당신이나 프로젝트에 집착하다 자살이나 당하지 말아. 당신은 연구는 잘 할지 몰라도 조직의 수장으로써 빵점이야. 리스크를 알려줘도 무시! 대안을 가져와도 무시! 배가 침몰하면 우선 직원들 살 길부터 열어줘야지. 끝까지 침몰하는 배를 붙들고 만세 삼창 시키는 태도는 최악이야! 여길 떠나는 순간부터 다신 연락하지 마!” 그녀가 차갑게 돌아섰다.

  그때, 마틴이 외쳤다. “너! 이대근 빼돌렸지?”

  그녀가 움찔하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누구를 빼돌렸다고?”

  “빼돌린 건 사실인가?” 

  “지금 말 장난할 기분 아니야!” 그녀가 인상을 썼다. 

  “BP001 왜 빼돌렸어?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야.” 마틴이 주먹 쥔 손을 떨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지금 뭐하는 거야?” 그녀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조금만 참으면 승리의 순간이 눈 앞에 오는데 왜! 왜! 그걸 못 참아!” 마틴이 제니퍼의 멱살을 잡고 세게 잡아당겼다. 

  그녀의 두 눈이 왕눈이처럼 튀어나오려 했다. “좋은 말 할 때 이거 놔!” 

  마틴은 그녀의 멱살을 비틀어 잡고 앞뒤로 흔들어 댔다. “지금 이대근 그 새끼 어디 있어? BP001 어디 있냐고?” 

  “내가…. 어떻게 알아?” 그녀가 새 빨개진 얼굴로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너를 믿은 게 잘못이다.” 마틴이 멱살을 놓았다. 

  그녀가 등을 구부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잘 가라! 제니퍼. 너를 순순히 보내 주는 건 내 마지막 배려다. 그동안 고마웠다.”

  “배려 좋아하시네. 넌 끝까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그녀가 분이 안 풀린 듯 바닥에 발을 반복해서 세게 찧으며 나갔다. 

  마틴은 벙거지 모자를 챙겨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다 그의 비서와 마주친 후 아무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차를 몰아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향했다. 


  “엄마, 막내 왔어요.” 마틴은 누워있는 노인 앞에서 벙거지 모자를 정성스레 썼다. 

  처음엔 본채 만 채 하던 노인이 그의 벙거지 모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노인이 촉촉한 눈망울로 마틴의 손을 덥석 잡더니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틴은 폰으로 능옥란의 [안개 낀 밤의 데이트]를 재생했다. “엄마, 저 잠깐 미국에 다녀오겠습니다. 영상통화 하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노인이 몸을 일으켜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가 노인을 보물 다루듯 살며시 안았다. 

  “철아!”

  “네. 엄마.”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한 게….” 그녀의 눈빛이 혼탁 해졌다.

  마틴이 벙거지 모자를 벗었다. “엄마!”

  “건우 오빠 고마워. 우리 아들 미국에서 성공하면 이 은혜는 꼭 갚을게!” 노인이 반복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은 먹먹한 가슴을 감싸 쥐었다.

  “건우 오빠도 넉넉하지 않을텐데…. 매번 면목이 없다. 딱 이번이 마지막이다. 우리 아들 졸업하면 좋은 데 취직하고 성공할 거니까 딱 한 번만 도와줘. 제발 부탁이야.”

  마틴은 눈을 감았다. 파란 빛의 전류가 감은 두 눈 위를 타고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가 빵집에 우리 둘이 모아 놓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씀하신 게 엊그제 같네. 자상하신 우리 아버지….”

  마틴은 벙거지 모자를 다시 쓰고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자신을 바라봤다. 

  “철아, 미국에서 고생 많지? 내 욕심이 과했다. 어린 너를 너무…. 미안하다.” 

  마틴이 노인을 세게 부둥켜안았다. 

  여기 모자가 헤졌네. 노인이 마틴의 모자를 벗겼다. 

  “건우오빠, 내가 죽기 전에 꼭 은혜를 깊을 게!” 노인이 중얼거렸다.

  “어머니, 최근에 그 분 만나 보셨어요?”

  노인은 말없이 시선을 떨구었다. 

  “건우라는 그 분 사는 곳은 어디예요?” 

  노인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쳐다봤다. “누구?” 

  “어머니 이복 오빠요. 방금 건우라고 불렀던 사람.” 마틴은 어머니 손에 들린 벙거지 모자를 살며시 가져가 다시 썼다. 

  “아…. 아버지 집 앞에 있던 빵집에서 자주 만났어.” 

  “어디 빵 집요?”

  “사라다 빵이 맛있는 집.” 

  “제가 그 분 한번 찾아 뵐게요. 어머니 마음의 짐도 덜어 드릴 테니 이제 그만 편히 지내세요.” 

  “감사합니다.” 노인이 순한 양처럼 옆으로 누웠다. 

  마틴은 폰에서 반복 재생되던 능옥란의 음악을 껐다. 

  “오셨어요?” 요양병원 간병인이 뒤에서 나타났다.

  “식사 시간도 아닌 데 고생하십니다.” 

  “우리는 수시로 들락날락 해요. 어머니 잘 계신 지 확인도 하고 필요한 것 미리 챙겨 놓고. 그게 우리 일인 데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저는 화장실만 한 번 확인하고 금방 나가겠습니다.”

  “저기 혹시….” 

  “뭐 물어볼 거 있으세요?”

  “빵 좋아하세요?” 마틴은 머리를 긁적였다. 

  “빵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녀가 웃으며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을 비웠다. 

  “옛날에 진해에서 사라다 빵이 맛있는 가게가 있었어요?”

  그녀가 손 등으로 이마를 닦으며 허리를 폈다. “그야 사라다 빵하면 딱 두 군데가 유명했죠. 한 군데는 지금 없을 거고 나머지 한 군데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거기가 어딘 가요?”

  “중원 로터리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금방 보여요. 진해에서 제일 오래된 빵집이거든요. 거기서 사라다 빵 먹으며 미팅도 하고 그랬죠.” 그녀가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냈다. 

  마틴은 지갑에서 오 만원 권 두 장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 줬다. “당분간 못 올 거니까 저희 어머님 좀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치다 마지못해 돈을 받았다.


50


  쿠로미 캐릭터 모양의 앱을 깔았던 기억도 한국에서 위험에 빠졌던 기억도 희미해 질 무렵 아르바이트 업체에서 다시 연락이 왔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지원을 했더니 운명처럼 지난 번과 똑 같은 장소에서 똑 같은 형식으로 면접을 봤고 똑같이 합격 통보를 받았다. 채용 담당자라도 볼 수 있었다면 호흡 참기 테스트는 왜 하는 지 따져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컴퓨터로 진행되었고 모니터 속 담당자는 여전히 빨간 머리 앤이었다. 계약서가 도착했고 최종 수락 여부를 묻는 채용 동의서를 두고 잠깐 이나마 고민을 했지만 유키에는 동의 버튼에 저절로 손이 가고 말았다. 이번 미션은 이건우씨에게 일본 손님들을 안내하고 통역만 하면 되는 지난 번보다 더 간단한 일이었다. 일본 손님들도 이건우씨 아버지가 히로시마에 있을 때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라고 하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예상된다. 이건 거저 먹는 일이 아닐까…. 거기에 진해에는 친구인 성민까지 있으니 불안한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인생이 이렇게 흘러갈 줄이야…. 다시 쿠로미 모양의 아르바이트 앱을 폰에 깔았다. 기본적인 주의사항과 업무 목록도 저번보다 대폭 줄었고 매뉴얼 내용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래도…. 천사와 악마가 서로 양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아이처럼 들떴다가 도 이내 설명할 수 없는 걱정이 몰려왔다. 불안한 잿빛 공기가 스물 스물 목 뒤를 감아 돌기 시작하더니 심장 쪽으로 다가와 멈추자 자기 합리화의 균형 추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창 너머로 히로시마 시민구장이 있던 자리에 히로시마 홈 축구경기장이 들어서고 있다. 도쿄 돔이나 오사카 교세라 돔처럼 히로시마에서도 블랙핑크의 공연이 있다면 밤을 세서 라도 줄을 설 텐데…. 아쉽다….

  “유키에상 되십니까?” 회색 머리에 남색 콤비 정장을 입은 칠십 대 남자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판다처럼 다크서클이 있는 남자가 유키에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유키에도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유키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도 되고 왠지 경력자로 인정받는 기분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저희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고모를 불길에서 구해 주신 생명의 은인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꺼내곤 했습니다.” 판다 아저씨가 발음 하나에도 힘을 주어가며 말했다.

  유키에는 연출 된 것처럼 부담스러운 그의 시선을 피했다.

  “고모가 원폭으로 일찍 돌아가시지만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판다 노인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문득 저들이 아르바이트로 고용된 노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 노인들이 나를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기가 서툰 나를 보고 그렇게 못 느끼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눌한 한국말 덕분에 어색한 연기가 오히려 묻혔을 수도 있지만…. 유키에는 노인들에게 궁금한 점이 떠올랐지만 상호 사적 질문 금지라는 주의사항이 떠올라 입을 굳게 다물었다. 

  “K-POP 좋아하시죠?” 판다 노인이 해맑게 웃었다.

  유키에는 뜬금없는 질문에 눈동자가 커졌다.

  “요즘 일본 젊은이들에게 대유행이지요. 저희 손녀는 르세라핌과 아이브를 좋아합니다. 저도 소싯적에 음악을 참 좋아했습니다. 일본에서도 70년, 80년대에는 시티 팝이란 장르가 대유행이었지요. 그 때는 저도 한창 춤을 추러 다녔어요.” 판다 노인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들은 내게 거침없이 사적 질문을 한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아르바이트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계획된 시나리오고. 이런 방식으로 상대의 관심사를 끌어내어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는 전략이다. 

  “저는 드럼을 좀 쳤습니다. 요즘 K-POP 중에 뉴진스라는 그룹이 있던데 곡이 너무 좋아 저도 자주 듣고 있습니다.”

  “예? 뉴진스요?” 할아버지가 뉴진스를 듣는다는 말에 유키에는 얼어버릴 것 같았다.

  “250이라는 멋진 프로듀서가 아주 세련되게 곡을 뽑아내고 있어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흥이 나는 곡들이 많습니다. 특히 한 템포 빠른 비트에 아련한 멜로디가 일품이에요.” 회색 머리 노인이 엄지를 들어 올렸다. 

  어색한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던 노인들에게 갑자기 호감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뭔가 술술 말을 풀어내는 게 역시 사전에 열심히 공부를 하고 온 느낌이 들었다.

  “춤도 일품입니다.” 판다 노인이 거들었다. “일률적으로 통일 시킨 군무를 넘어 멤버들 각자가 다른 동작을 하는 듯 하면서도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가는 동작들이 많아서 좋습니다. 저도 한 때는 뉴잭스윙에 푹 빠져 있었죠.”

  기가 막혔다. 일본 할아버지들과 K-POP 삼매경에 빠질 줄이야. 그것도 아르바이트로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 이상한 흐름이다. 역시 유키에의 머릿속에 경고 등이 켜졌다. 

  “제가 한국에 간다고 하니 손녀가 같이 가자고 계속 졸라요. 결국 다음에 서울에 같이 가기로 약속까지 해버렸어요.” 

  “피곤하시겠어요?”

  “전혀 안 피곤합니다. 손녀와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지요. 오히려 신난다는 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판다 노인이 밝게 웃었다. 

  “할아버지 덕분에 손녀가 행복하겠어요.”

  판다 노인은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우리 세대는 아직 한국이라고 하면 한 수 아래로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K-POP이니 드라마 같은 것이 인기를 끌고 있어도 사람의 경험치라는 게 쉽게 변하지는 않지요.” 회색 머리 노인이 말했다. 

  그들이 본심을 드러냈다. 유키에는 그들의 패션 스타일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진해라는 곳이 예전 전쟁 시절에 일본 해군 본부가 있었던 곳이죠. 여기 히로시마 근처에 있는 구레 해군기지와 거의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한 번 가봤는데 말씀대로 그런 것 같습니다. 혹시 현역 시절에 군인이셨습니까?” 유키에는 자신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뭐. 비슷하다면 비슷하지요.” 회색 머리 노인이 얼버무렸다.

  “우리 때는 이런 일 저런 일 많이 했으니….” 판다 노인이 어설프게 수습했다. 

  어중간한 돌려 치기 화법에 속지 않는다. 무언가를 감추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한 번 직장에 들어가면 뼈를 묻는다는 시절의 사람들이 어설프게 거짓말을…. 노인들의 얼굴이 위장 가면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연세도 많으신 것 같은데 굳이 한국까지 찾아가시는 게 번거롭지 않으세요?”

  판다 노인이 손사래를 쳤다. “죽기 전에 꼭 봬야 죠.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습니다.” 

  이해가 안 된다. 이제 와서 고모의 생명을 살린 은인에게 감사한다…. 아무리 고모와 친해도 그런 형식적 인사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나.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혜택을 주는 것도 아닌데. 유키에는 판다 노인의 말이 작위 적으로 느껴졌다. 

  “유키에상은 한국에 친구도 많습니까?”

  “네. 조금.”

  “진해에도 친구가 있습니까?” 회색 머리 노인의 의뭉스러운 눈빛이 빛났다. 

  알고서 물어보는 듯한 눈빛이다. 유키에는 머뭇거렸다.

  “말 안 해도 괜찮습니다.” 회색 머리 노인과 판다 노인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렇게까지 말 맞추고 해야 하는 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유키에상을 소개해 준 곳에서 주의사항이라고 몇 가지 알려주던데 유키에상도 마찬가지인가요?” 

  유키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일찍 들어가 푹 쉬시고 내일 오전에 비행기 시간에 맞춰 후쿠오카 공항에서 만납시다.” 두 노인이 공손히 인사한 후 밖으로 나갔다.

  남은 커피를 마시며 창 밖을 내다보니 영화에서 나올법한 커다란 바이크 두 대가 굉음을 내며 도로로 빠져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아무 생각 없이 한국에 가려는 계획이 어긋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 회사는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일까…. 가짜 대학원생에 가짜 노인들까지…. 유키에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51


  “저런데 길이 있었어? 와…. 좁다 좁아. 생각지도 못했네.” 성민이 작은 꽃집 옆에 붙어있는 틈새 골목길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형은 여기 있어 봐. 내가 한 번 보고 올 게.” 성민이 차에서 내려 미로 같은 틈새로 걸어 들어갔다. 

  태민이 이쪽저쪽 자세를 바꾸다 보니 골목길 끄트머리 주택 사이로 이건우의 집이 보였다. 새벽에 옥상으로 올라가려다 머리 위로 가스통이 떨어진 남자. 이게 그냥 우연이라고…. 이건…. 이 층에 살고 있는 이대근이 벌인 짓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이대근은 어떻게 이런 황당한 짓을 벌일 수 있었을까. 가스통…. 남자가 이동하는 속도와 가스통이 남자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각도와 속도를 정확히 계산했다는 말이다. 보통 머리가 아니다. 아니 이건 머리로만 되는 일이 아니다…. 

  “오늘 햇빛이 쨍쨍하네. 이건우씨 집 뒤편을 보니까 옛날에 많이 보던 구조인 것 같은데. 외부에 목욕탕 인지 창고인지 작은 공간이 두 개 정도 따로 있고 그 옆에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

  태민은 바로 감을 잡았다. 전면 부에서 보면 그냥 이 층 집이지만 후면 부에서 보면 옆 집들과 함께 사용하는 마당 같은 공용 공간이 만들어져 있는 구조다. 외부 화장실이나 창고, 세탁 실로 쓰이는 공간이 마당 옆 켠에 따로 있고 그 공간의 바로 위가 옥상일 것이다. 태민은 귀마개를 끼고 성민과 교대하여 차에서 나왔다. 길가 틈새로 들어서자 우중충한 시멘트 집들이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지그재그로 꺾고 들어가자 모퉁이 전봇대 위에 CCTV가 두 대나 달려있다. 태민이 애를 써봐도 이건우씨 집 옥상은 잘 보이지 않았다. 태민이 두리번거리고 있던 때 번쩍하며 공중에서 빛이 났다. 태민이 고개를 돌린 순간 무엇인가 다시 번쩍거렸다. 옥상이다. 옥상은 이건우씨 집의 이 층 뒷문을 열면 바로 연결된다…. 태민은 차로 되돌아왔다. 

  “덥지? 우리도 초보 긴 초보다.” 성민이 김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이건우씨의 집도 제대로 파악 못하고 집 앞쪽에서만 서성였으니 당연히 이건우씨가 뒷문으로 움직이는 거는 다 놓쳤겠지. 아 형이나 나나 헛똑똑이다 진짜.”

  아파트에서만 자랐으니…. 

  “그러면 그 때 도둑놈들은 왜 사람들 다니는 집 앞쪽으로 정면승부했지? 여기 뒤쪽 골목이 외져서 훨씬 눈에 덜 띄겠구만.”

  어두컴컴한 골목길일수록 경찰들이 순찰도 자주 다니고 CCTV도 잘 설치되어있다. 

  “하긴. 이런 골목길은 CCTV 없으면 밤에 다니기도 무섭겠다. 형은 저런 집에 들어갈 자신 있어? 들어가다가 가스통 머리에 떨어지면 엄청 아프겠다.” 성민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태민은 이대근이 가스통을 떨어뜨린 장면을 상상했다.

  “오늘 유키에가 손님들 모시고 김해공항으로 들어온데. 저녁 때 형도 같이 만나자.” 성민이 폰을 보며 말했다.

  태민이 헛기침을 했다.

  “또 뭐 때문에 그래? 일본 손님들? 유키에 말로는 이건우씨 아버지가 예전에 일본에 있을 때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데 뭐 믿거나 말거나 지. 중요한 거 아니지 않아?”

  태민은 보이지 않는 손이 서서히 이건우 부자의 목줄을 죄러 오는 느낌이 들었다. 

  “휴…. 형 고집을 내가 어떻게 꺾겠어? 미행 한 번 해보지 뭐.” 성민은 포기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키에, 오랜만이다. 얼마 안 된 것 같은데도 많이 변했네.” 성민의 노골적인 시선이 그녀의 머리와 발끝 사이에서 롤러코스터처럼 움직였다. 

  “에이 뭐 하는 거야? 너도 그새 살 많이 빠졌어.” 그녀가 성민을 살짝 밀쳐내며 말했다.

  “둘 만의 오붓한 데이트를 기대했다면 미안해. 형도 너 보고 싶다고 해서.” 성민이 싱글벙글 웃었다. 

  “당연히 괜찮아 난.” 유키에는 곁눈질로 태민의 눈치를 살폈다.

  “같이 오신 손님들은 어디에 가셨어?” 

  “창원 호텔에.”

  “넌?”

  “나도 근처 호텔.”

  “저번에 택시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여기서 묵는 것은 불안했구나….” 성민이 주변을 둘러봤다.

  유키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얼마나 머물 거야?” 

  “삼박 사일. 짧긴 해도 일정이 빠듯한 건 아니야. 내일 손님들에게 이건우씨 인사만 시켜 드리면 그 이후에는 별다른 일정은 없어.” 

  잠자코 있던 태민이 성민에게 외계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논문은 잘 되고 있어? 우리 형이 궁금한가 보다.”

  “응. 논문도 잘 마무리 중이고 진해를 또 방문해서 좋아.” 유키에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자신에게 놀랐다.

  “일본 손님들은 이건우씨하고 무슨 관계야?” 

  “진해 대 화재 사건 때 이건우씨 아버지가 일본 손님들의 고모 목숨을 구해줬다고 그래. 근데 안타깝게 고모분은 히로시마 원폭으로 젊을 때 돌아가셨다고 하네.”

  “그래? 여기까지 직접 찾아올 정도면 그 손님들은 고모를 무척 좋아했나 보다.”

  “그런 것 같아. 아무래도 그 시대 사람들은 요즘보다는 가족 간의 애정이나 유대가 더 깊겠지.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견뎌서 그런지 대대로 인연을 소중히 지키려는 모습이 보기 좋기도 하고.”

  “아무래도 요즘보다는 그렇겠지. 이번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지 않고 일본 손님들 자녀들과 이건우씨 아들까지 대대로 좋은 관계가 쭉 이어지면 좋겠다.” 

  순간 유키에의 눈이 반짝였다.

  “그 손님 분들 자식은 있어?”

  “글쎄….” 그녀가 레모네이드에 꽃인 빨대에 입술을 댔다.

  “이건우씨 외동 아들이라도 빨리 회복되면 좋을 텐데. 그 분도 걱정이 많을 것 같아. 나이는 많아지고 몸은 계속 약해지는데 아들 걱정은 끝나지 않고.”

  그녀가 입술을 오므리다 멈췄다.

  “갑자기 우리 부모님 생각나네.” 성민이 아이스 커피를 마시며 태민을 봤다. “항상 형 걱정을 했거든. 형 잘 돌봐야 된다. 형한테는 너 밖에 없다. 정말 듣기 거북했는데 듣고 또 듣다 보니 희한한 게 세뇌가 되어버리더라.” 성민이 웃었다.

  유키에가 지겨운 듯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사실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게 아픈 자식을 둔 부모가 먼저 눈을 감을 때, 진짜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는 거. 그게 제일 개탄스러운 일이거든. 가족 친지들이 있다 해도 서로 먹고 살기 바빠서 제대로 교류도 안 하는 마당에 고모 생명의 은인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인사까지 하러 오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 그거는 정말 대단한 마인드야. 내가 만약 이건우 씨면 그 손님들에게 아들 소개는 꼭 시키겠다. 그 손님들이 뭐 꼭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어도.”

  유키에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일정 끝나면 내가 숙소 쪽으로 한번 넘어갈까?” 

  “그래도 되고.” 그녀가 다른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다.

  성민은 대화 주제를 유키에의 유튜브 댄스영상으로 바꿨다. 그제서야 그녀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52


  “어여 먹어. 우리 아들.” 이건우는 김이 나는 고슬고슬한 흰 밥에 먹기 좋게 김을 싸서 대근의 입에 집어 넣었다. “어이쿠 잘 먹는다. 깨끗하게 한 그릇 싹 비웠네.” 이건우는 죄책감을 삭여 내듯이 아들에게 공양하듯 밥을 먹였다.

  아버지 눈에는 내가 아직도 어린애로 보이는가…. 하기야 그의 기억에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사라졌던 그 날, 그 모습으로 남아있겠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치게 되었다. 신약성경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 정도의 자신감이라고 할까? 내 눈 안에서 신을 볼 수 있는 자는 나를 재창조한 시냅스 연구소의 마틴과 제니퍼 뿐일 것이다.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시니까 대근이도 인사하는 게 좋겠다. 그게 사람의 도리다. 기억나는지 모르겠지만 네 할아버지가 옛날 어렸을 적에 불길 속에서 일본인 소녀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었거든. 대단하지?” 

  이대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지. 그 일본인 소녀의 친척들이 지금까지 할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않고 일본에서 인사를 드리러 우리 집까지 찾아온다는 거다. 대근아, 사람은 말이다…. 이런 인연은 소중히 지켜 나가는 게 좋다.” 이건우는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 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다. 아버지! 은혜라는 것은 오랜 시간 잊고 지냈다가 어느 순간 뚝딱 생각나는 것이 아닙니다. 밝은 빛을 내는 생명체처럼 은혜를 입은 사람의 마음에 항상 빛을 내며 살아 숨 쉬는 것입니다. 죽을 때가 다 되어서 야 마음의 짐을 덜어 내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필히 다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수상하지도 않습니까? 어리석은 아버지! 할아버지의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는 저 잡것들을 부디 심판하소서! 

  이건우는 새 수건과 속옷을 꺼내 아들 옆에 챙겨 놓고 빈 그릇들을 쟁반에 옮겨 닮았다. 

  “아버지….”

  “어?” 이건우는 일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수동으로 내리다 멈칫했다.  

  “일본에서 오는 손님은 몇 명 입니까?”

  “글쎄…. 많아야 2~3명 아니겠냐? 저번에 우리 집에 방문한 적 있는 여자 대학원생 한 명하고.”

  “그 사람들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듭니까?” 

  “그럼! 나는 그 분들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네 할아버지는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셨다.”

  “죄책감요?”

  “화염속에서 그 일본 소녀를 구하지 않았었다면 자기가 좋아하던 한국 소녀를 구했을지도 모르지. 그거 야 하늘이 정한 거였겠지만 어찌 됐건 골든 타임을 놓쳐 결과적으로 좋아했던 여자를 죽게 내버려 두게 된 거야. 이상하게 네 할아버지가 느끼는 그 감정이 내 가슴에도 그대로 전해 내려오더라. 괜스레 네 할아버지가 좋아했던 그 여자 주변 사람들에 게 내가 더 신경이 쓰이고 미안하기도 하고 뭐 하나라도 잘해주고 싶고 그랬지.”

  “할아버지가 좋아했던 그 여자 주변 누구 요?”

  “그 여자 분에게 여동생이 한 명 있는데. 사실 나는 종종 그 여동생분의 딸하고 연락도 하고 그랬다.”

  “연락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대근아…. 사람 사는 게 꼭 그렇게 생각대로만 되는 게 아니다. 내가 형편이 좋았을 때는 가능한 많이 도와줬어. 미안해서 인지 이후에 그 쪽에서 연락이 뜸해져도 서운해하지 않으려 노력도 했고. 그러니까 이번에 일본에서 오는 손님들도 이해해라. 가야지, 가야지, 그렇게 마음만 앞서다 겨우 마음 다 잡은 때가 온 걸거다. 사람이 원래 그렇다 대근아.”

  그건 순전히 아버지 생각입니다. 인지상정이라지만 사람마다 편차라는 게 존재하고 강물에 빠진 사람 건져 올리면 가방까지 훔쳐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엄밀히 따져보면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성공하신 것도 그 분들이 주변에서 많이 도와줘서 가능했던 거다. 그 어렵던 시절에 혈혈단신 히로시마에 건너가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셨겠냐? 아무리 똑똑해도 사람이 혼자서는 한계가 있는 거다. 그 분들 덕에 네 할아버지가 성공해서 귀국 후 창원에서 떵떵거리며 살게 된 거 아니냐? 사실 그만큼 했으면 됐지.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뭐 하러 자신들 고모를 대신해 먼 길 마다하고 별 볼일 없는 내게 인사까지 하러 오겠어? 안 그래?”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도 볼 이유가 있으니까 오는 건 맞습니다. 

  “대근이도 나이를 먹으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당장 만나지 않으면 영원히 못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거든. 인연이 그래서 소중한 거다.”

  인연이야 소중하지. 하지만 그 속에서 악연을 솎아내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인연의 덫에 걸리고 만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는 나대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면 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죄책감을 공감하기 전에, 일본 손님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식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대근은 샤워기를 틀었다. 뜨거운 물줄기가 소나기처럼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버지…. 대근은 뿌연 거울을 주먹으로 닦았다. 


  회색 머리에 잔뜩 기름을 발라 올 백으로 넘긴 노인과 눈 밑에 두터운 다크서클이 보이는 노인 그리고 목선이 긴 여자가 이건우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오랜 세월 그리워했던 친구를 만난 것 같은 이건우의 환한 표정에 긴장하던 노인 두 명이 어색하게 웃었다. 두 노인은 손에 든 종이 가방을 내려놓았다. 유키에의 가슴 중앙에서 빛을 숨기는 듯한 은색의 둥근 물체가 반짝였다. 

  “실례지만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회색 머리 노인의 말을 여자가 통역했다. 

  “저기 끝에 문 보이시죠?” 이건우가 화장실을 가리켰다.

  회색 머리 노인이 꾸부정하게 일어섰다.

  대근은 노인의 뒷 모습을 보며 속으로 다섯 번을 천천히 셌다. 

  “헉!” 노인이 화장실을 지척에 두고 한 발이 미끄러지며 공중으로 몸이 떴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건우 부자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근의 눈에 이마 아래까지 흘러내린 노인의 회색 가발이 보였다. 노인이 재빨리 가발부터 매만졌다. 

  “다치신 데 없으십니까?” 이건우는 반 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망연자실한 노인의 팔꿈치를 잡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바닥에 앉은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계산대로라면 오른쪽 손목, 허리와 엉덩이, 고관절 전반에 충격이 가해졌을 것이다. 이 정도면 전투력의 절반 정도는 상실된 것이다. 회복되기 전에 깔끔하게 녹 다운 시켜야 된다. 

잠시 후 노인이 허리를 부여잡고 엉거주춤 화장실로 들어갔다. 

서두르는 것을 보니 볼일이 급하구만. 당연히 생리 현상은 아닐 테고 자신들이 준비한 작당을 꾸미기 위해서겠지. 대근은 자신이 노인을 부축하겠다며 아버지를 손님들이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다. 대근이 그가 나오길 기다리며 동선을 머릿속에 그려보다 의뭉스러운 판다 노인의 시선을 느꼈다. 대근은 아무렇지 않게 목을 시계 방향으로 한번, 반대로 한번 천천히 돌렸다. 

회색 머리 노인이 화장실 문을 천천히 열고 나왔다. 대근은 회색 머리 노인의 왼쪽 팔꿈치를 부축하고 각도를 맞추듯 오른쪽으로 조금씩 움직인 후 앞으로 천천히 걸었다. 카운트! 대근은 보폭을 줄이며 속으로 천천히 다섯을 셌다. 노인의 오른발이 바닥에 표시해 놓은 작은 점들을 밞았다. 순식간에 천장에 접혀 있던 계단이 노인의 뒷머리를 향해 빠르게 떨어졌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노인이 그대로 엎어졌다. 사람들이 놀라서 전부 달려왔다. 

  “죄송해서…. 어떻게 이게…. 떨어지나. 왜 이렇게….” 이건우는 안절부절 못하며 천장에서 펼쳐진 계단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빨리 병원으로 모셔야 되지 않을까요?” 유키에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회색 가발이 날아간 노인은 스포츠형 머리를 움켜잡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기절은 하지 않았다. 유키에가 굳은 표정으로 구석으로 날아간 그의 가발을 주워 들고 왔다. 이건우가 폰을 꺼내 구급차 버튼을 누를 때 판다 노인이 만류하려는 듯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순간 판다 옷으로 위장한 맹수 같은 눈빛이 살짝 드러났다. 

  “인사 드리러 왔는데 불상사가 일어나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판다 노인의 일본어를 유키에가 힘없이 통역했다. 

  “아닙니다. 저희 불찰입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많이 안 다쳤으면 좋겠습니다.” 이건우가 죽을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땅에 닿을 듯 굽신거렸다.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갑자기 이대근이 판다 노인의 다크 서클을 송곳으로 찌르듯 쳐다보며 말했다. 

고개를 든 이건우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판다 노인이 유키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와 친했습니까?” 이대근의 리듬감 없는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럼요. 고모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유키에가 판다 노인의 말을 통역했다.

  “고모는 원폭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지요?” 

이건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질문하는 대근을 향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판다 노인의 눈알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흔들렸다. 

  “선생님은 몇 년생입니까?” 

  “그건…. 왜?”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한 판다 노인의 대답을 유키에가 기다렸다. 

  “1950년생입니다.” 유키에가 통역했다.

  “당연히 히로시마 원폭 이후 태어나셨겠지요. 어디에서 사셨습니까?” 이대근은 사전에 질문이 입력되어 있는 로봇 같이 거침없이 말했다. 

  “히로시마 외곽의 작은 곳인 하마다시에서 살았습니다. 저희 아버지 고향입니다.” 유키에가 판다 노인의 굴절된 목소리에 불안을 느낀 듯 그만 질문하라는 눈치를 보냈다. 

  “그렇지요…. 하마다시…. 제 할아버지 또한 히로시마 원폭이 떨어졌을 때, 당신의 아버지와 함께 하마다시에서 같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운명의 장난 아닙니까? 왜 그 때, 제 할아버지는 당신 아버지와 함께 하마다시에 있어서 목숨을 건졌고 당신의 고모는 히로시마에 있어서 목숨을 잃었던 거죠? 제 할아버지가 일하던 곳은 원폭이 떨어졌던 곳에서 멀지 않은 오토바이 공장인데 말이죠. 저는 그게 너무 궁금했습니다.”

  판다 노인이 유키에의 통역에 실눈을 뜨며 귀를 기울이다 점차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쓰러졌던 회색 가발 노인이 머리를 감싸 안으며 일본어로 외쳤다. 

  “그건 바로 당신들이 고모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 원폭이 떨어지기 직전, 1945년 8월 4일에 갑작스레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할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가 모두 당신의 고모 장례를 논의하기 위해 고향인 하마다시에 모여 있었던 겁니다.”

  머리를 움켜쥔 노인이 단호한 명령 투로 악을 썼다. 

  “그렇다면 왠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왜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을까? 당신들의 고모가 원폭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정보 말입니다. 그 이유는 그날 하마다시에 모여 있던 사람들 이외에는 당신 고모라는 분의 죽음의 비밀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할아버지한테 들어서 잘 알고 있는데 궁금하면 살짝 얘기해 드릴까요?” 이대근은 으르렁거리듯 이빨을 보였다. 

이건우는 돌발적인 대근의 행동을 제지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유키에의 통역이 진행되자 판다 노인이 이글거리는 눈을 감았다. 

  “사건의 발단은 제 할아버지와 당신들이 고모라고 부르는 분이 서로 사랑했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을 건진 소녀와 생명의 은인인 소년이 서로 사랑에 빠질 확률은 아주 높으니까요. 둘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그 불꽃이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당신의 고모부 되는 사람이 눈이 뒤집혀 일본도로 당신의 고모를 베었고 그 업보로 제 할아버지한테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게 이 모든 것을 히로시마 원폭이 순식간에 덮어버렸지요. 어때요? 당신들도 이쯤에서 어울리지 않는 가발도 벗고 가면도 벗는 게 좋을 겁니다. 순순히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책임 못 집니다!” 

  “바카!” 판다 노인이 눈이 튀어나올 듯 고함을 쳤다. 

  그 때 삐뽀 삐뽀 구급차 소리와 함께 문이 쿵쾅 거리 더니 대원 두 명이 들것을 싣고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판다 노인은 들 것에 실려 나가는 회색가발 노인을 뒤따라 나갔다. 유키에도 엉거주춤 인사를 하고 그들을 따라 달렸다. 

  이건우는 천장에서 떨어진 계단을 만져 보며 아들을 노려봤다. “아까 했던 말 전부 사실이냐?”

  “사실입니다. 저 일본 손님들은 우리 할아버지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할아버지가 너에게 그런 것도 말해줬어?” 

  “제가 어릴 때, 자폐증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해서 못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하셨는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틈만 나면 반복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구해줬던 여자가 죽음으로써 원폭으로부터 자신을 구했다고.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지겹도록 하셨습니다. 제 손을 붙잡을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졌어요.”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럼요. 할아버지의 일본 연인이 죽음으로써 할아버지를 구해 주셨다는 건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이 안 됩니다. 할아버지 오토바이 공장이 원폭투하 지점과 얼마 떨어져 있지도 않다고 했어요. 거의 그 공장을 타깃으로 원자폭탄이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너는 정말 할아버지 말씀을 아직 까지 기억한다는 말이냐?” 

  “그럼요. 아버지가 철길 모퉁이에 몰래 숨어서 제가 낯선 차에 실려 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었던 것도 기억합니다. 아주 똑똑히!”

  “이 녀석!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건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다.

  “아직도 아버지는 내가 어디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른 척하는 겁니까?” 이대근은 그에게 머리를 들이밀며 정수리를 가리켰다. “잘 보세요 여기를! 얼마나 많이 찢고 기워 댔는지. 똑똑히 보란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을 잘 하게 된 것도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합니까? 게다가 아주 똑똑하지 않습니까?”

  “대근아, 너 오늘 왜 그러냐? 귀한 손님들이 우리 집에서 다쳤는데도 험한 말을 쏟아내고. 난 널 모르겠다. 정말.” 이건우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제가 이렇게까지 진실을 이야기했는데도 아들보다 저 사기꾼놈들 말을 더 믿는 겁니까? 저놈들은 우리 목숨을 노리고 온 겁니다.”

  “우리를 뭐 때문에 노려?” 이건우가 소리쳤다.

  “시냅스 연구소의 정체를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 같으면 살려 두겠습니까? 아버지도 그것 때문에 저를 꽁꽁 집에 숨겨두고 있는 것 아니었어요?”

  “아들아. 여기서 그 말이 왜 나와? 저 분들은 할아버지의 손님 들이고 앞으로 너 와도 좋은 인연을 오랫동안 이어 나가야 될 사람들이야. 저 사람들이 시냅스 연구소와 무슨 관계가 있냐?”

  “제가 가짜라는 걸 증명했잖아요? 할아버지 인연으로 위장한 가짜들입니다. 옛날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아버지를 무장해제 시키려는 의도지요. 아버지의 마음 깊은 곳에 가장 약한 고리를 노리는 것을 보면 아주 사악한 놈들입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노인들은 헷갈릴 수 있다. 내가 느끼기에 그냥 인사하러 온 거다. 좀 있다 병원에 찾아가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거라.”

  부자 관계라고 해도 이해와 사랑으로 충만할 수만은 없다. 그건 이상에 불과하지. 의견도 수시로 엇갈리고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도 갈라진 마음은 도무지 봉합 되지 않을 확률도 크다. 이대근은 계단을 손으로 짚어가며 천천히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건우는 폰을 들었다가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폰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53


  김 형사는 어깨를 들썩이며 양옆으로 목을 한 번 씩 꺾었다. 뒤따르던 후배 형사는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김 형사 옆으로 바싹 들러붙었다. 

  “이야, 선배님! 이번에 이거 해결하면 최소 두개 급은 특진 되시겠습니다. 앞으로 저 좀 잘 봐주세요!” 

  “자식이. 평소에 좀 잘하지 그랬어.” 김 형사는 이건우 집 초인종을 눌렀다가 기다리지 않고 연이어 문을 세게 두드렸다. 한 숨을 내쉰 후, 안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들었을 때 문이 열렸다. 이건우는 언짢은 표정으로 덩치 큰 형사 두 명을 집으로 들였다. 

  “저번보다 얼굴이 핼쑥한 데요. 무슨 걱정 있으세요?”

  이건우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요즘 휠체어는 안 타고 다니시나 봅니다.”

  뜬금없는 휠체어 얘기에 이건우가 순간 멈칫거렸다. 

  “잠깐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또 화장실….” 이건우는 형사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구급차 안 실려 가려면 조심해서 다녀오겠습니다.” 김 형사는 과장된 제스처로 두리번거리며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같이 온 후배 형사가 거실을 한 바퀴 죽 둘러봤다. 

  “잠깐 앉으세요.” 이건우는 젊은 형사에게 방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은 운동을 꾸준히 하시는 지 연세에 비해 몸이 참 실하시네요.” 젊은 형사가 이건우의 팔을 힐끗 쳐다봤다. 

  “그냥 조금씩 합니다. 오늘은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그게….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젊은 형사는 잠깐 머뭇거리다 시치미를 땠다. “아드님은 위에 있습니까?”

  “그런데요?” 형사를 노려보는 이건우의 눈빛이 돌변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김 형사가 능청스러운 말투로 손에 든 자그마한 비닐봉지를 이건우 눈 앞에서 흔들어 댔다.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이건우가 버럭 화를 냈다. 

  “이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고 있나 묻지 않습니까?” 

  “내가 어떻게 압니까? 왜 그런 걸 지금 내 앞에서 보여 주는 겁니까? 엉뚱한 짓거리 벌일 생각 하지 마세요. 형사님!” 

  김 형사는 작은 비닐봉지를 손바닥 위에 올린 후 주먹을 쥐었다가 천천히 주먹을 폈다. “이건 펜타닐 이란 겁니다.”

  젊은 형사가 게임 끝이라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 이게 왜 화장실 천장 위에서 나왔는지 설명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김 형사는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화장실 천장?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이건우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아드님 이 층에 있습니까?” 김 형사가 천장 쪽을 쳐다봤다

  그 때 천장에 접혀 있던 계단이 천천히 아래로 펼쳐지며 뮤지컬 무대의 주인공처럼 이대근이 등장했다.

  “초면에 실례가 많겠습니다.” 김 형사는 계단에서 내려온 이대근의 팔을 위압적으로 덥석 붙잡았다.

  이대근은 신경 쓰지 않는 듯 한 쪽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김 형사는 재빠른 동작으로 이대근의 오른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보통 약쟁이들이 이런 흔적을 남깁니다.” 이대근의 팔뚝이 주삿바늘 자국으로 가득했다. 

  “우와, 아버지 팔뚝보다 더 굵네! 이것 봐! 손도 퉁퉁 부었고.” 후배 형사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대근의 근육질 팔과 손을 보며 감탄사를 내질렀다.

  이대근은 김 형사의 팔을 뿌리치며 소매를 내렸다. 

  “갑자기 찾아와서 우리 아들에게 왜 행패를 부리시는 겁니까?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에게.” 옆에 있던 이건우가 상기된 얼굴로 고함쳤다.

  “아이스크림 원장 가족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당신과 당신 아들을 잡아가려고 왔지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잡아가다니? 이 사람들이…. 어허 어디서 생사람을 잡고 있어? 증거 있습니까?”

  “이게 증거 아니고 뭐입니까?” 김 형사는 비닐 봉지를 흔들어댔다. “증거야 차고 넘칩니다!” 

  “그 증거 한 번 대보세요!” 이대근이 김 형사를 노려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원장 가족 사망 사건이 벌어졌던 현장에서 족적만 나온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집 앞 정원에서 현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바닥에 자전거 바퀴 같은 줄이 발견되었지요. 그것도 두 줄이 말이죠.”

  “그래서요?”

  “당신이 타고 다니던 휠체어는 어디에 버렸습니까?” 김 형사는 이건우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버리긴 그걸 어디에 버려요? 저기 밖에 세워 뒀지.” 이건우는 뒷문 쪽을 가리켰다.

  “그렇습니까? 살인 사건 현장에서 사용했던 물건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된다는 걸 선생님이 직접 보여주게 될 겁니다.”

  “또 있습니까?”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팔을 꼭 붙들며 이대근이 담담히 말했다. 

  “여기서 다 밝힐 이유가 없지요.”

  “형사님은 원래 그렇게 촐싹대십니까?” 

  김 형사는 양팔을 허리춤에 올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

  젊은 형사가 비스듬히 앞으로 나와 김 형사와 이대근 사이를 가로 막았다. 

  “수사는 말이지 이렇게 증거가 차고 넘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젊은 양반! 포물선을 그리면서 차곡차곡 증거를 모으느라고 시간이 좀 걸렸는데 너 한 번 잘 걸렸다! 이제야 정곡을 찌를 타이밍이 왔어. 칼 춤이 촐싹 거리는 것으로 보일 정도면 자넨 아직 인생을 더 살아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형사님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그런 조작을 합니까?” 이건우는 김 형사가 들고 있는 비닐봉지를 쳐다봤다.

  “조작이라…. 어이가 없네. 무슨 제가 선생님이랑 원수 졌습니까? 남의 집 화장실에서 이런 걸 발견한 것처럼 일부러 속이게. 저는 합당한 제보를 받고 당신 집 화장실에서 증거를 확보한 겁니다.” 

  “제보요?” 

  “그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할 의무는 없고 한 가지만 더 확인하겠습니다.” 김 형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드님이 예전에 승마를 하셨죠?” 

  “그런데요?” 이대근이 먼저 대답했다.

  “어린 아이 피해자의 기도에서 뭐가 나온 지 아십니까?” 김 형사가 검지로 코를 두드렸다. “콩알만한 실 매듭이 나왔어요.”

  순간 이대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게 조사를 해보니까 오래전에 승마장에서 홍보용으로 제작한 말 모양의 키링 끝 부분에 매달려있는 전통문양 매듭이더라고요. 이거는 한정 판이라 구하려 해도 어디에서도 구할 수가 없고요.”

  “너무 오래 전 일이라 키링인지 인형인지 그런 걸 받았는 지 조차 기억도 안 나고 형사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 이건우가 언성을 높였다.

  “보통 키링을 어디다 다는 지는 아시죠?” 김 형사는 눈을 크게 치켜 뜨며 이대근을 쳐다봤다. 

  이대근은 시선을 내리 깔았다.

  “아이들은 책가방 지퍼에 달아요. 저렇게 말이죠.” 김 형사가 진열장 안 맨 끝 액자를 가리키며 진열장의 유리문을 열었다. 

  “손대지 마세요!”

  “멋진 백마를 타셨네요.” 그는 이대근이 말 위에서 찍은 사진을 가리켰다. “그리고 고생한 말에게 당근도 챙겨주네요. 이 사진 여기 한번 보세요.” 김 형사는 말에게 당근을 주고 있는 어린 대근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책가방에 달려있는 이거 보이죠? 말 인형 밑에 달려있는 동그란 실 매듭 끝부분, 이거. 잘 보이죠?” 김 형사가 말하는 사이에 젊은 형사가 진열장 사진에 폰을 가까이 들이대며 사진을 여러 번 찍었다. 

  이건우의 눈이 석양처럼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피해자의 기도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입니다. 참 희한하죠?”  

  이대근의 목 울대뼈가 움직였다. 

  “아드님이 오랜 시간 실종되었다가 집에 돌아왔으면 그 동안 못해 봤던 거 다 하고 싶을 거 아닙니까? 당연하죠. 근데 왜 집에만 틀어박혀 지냅니까? 이 좋은 세상에. 왜 숨어 지냅니까? 경찰서에 출두하실 때는 마음 단단히 먹고 오세요. 거짓말하거나 잡아 땐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아들 정신병력으로 정상 참작할 수 있는 것도 완전 도루묵 되니까. 아시겠습니까?” 김 형사는 차례대로 이건우와 이대근의 눈을 맞췄다. 

  “김 형사님!” 이대근이 진열장 유리문을 닫는 김 형사에게 말했다. 

  “할 말 있습니까?”

  “아버지와 제가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가족을 죽일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거 아니야? 우리도 검찰수사관들하고 옥신각신 하기 싫으니까 조서 쓸 때 협조 잘 부탁한다 이 말이야!”

  “형사님. 우리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차고 넘친다고 하셨는데 아니라는 알리바이도 차고 넘칩니다. 얼마든지 조목조목 반론해 드리겠습니다.” 

  젊은 형사가 이건우에게 목례를 한 후 김 형사 옆에 붙었다. 

  “잠깐만, 사진 하나 찍고 가자.” 김 형사는 빠른 동작으로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젊은 형사가 뒤따라갔다. 김 형사가 두리번거리더니 젊은 형사에게 윙크를 하며 구석에 세워 진 휠체어를 가리켰다. 젊은 형사가 접혀 진 휠체어를 펴서 방향을 바꿔가며 사진을 찍었다.

  이대근은 뒷문에서 형사들이 장난치듯 휠체어 사진을 찍는 것을 바라봤다.

  “다음에는 경찰서에서 뵙겠습니다! 너무 떨지 마시고!” 김 형사는 이대근의 단단한 팔을 다시 한 번 꽉 붙잡았다 놓았다.

  이건우는 충혈된 눈을 애써 감추며 형사들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54


  마틴은 연구소 곳곳을 천천히 걸었다. 젊음을 갈아 넣은 프로젝트가 속절없이 부서져 바람에 쓸려 가는 모래알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실험실은 서재와 창고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실험의 흔적들은 모조리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귀에는 짐승처럼 울부짖는 아이들의 소리가 시간을 거슬러 메아리처럼 살아 울려왔다.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고 문을 열었다. 유일하게 희망의 빛을 보여줬던 그 아이가 물끄러미 옆 눈으로 흘겨보는 것만 같다. 갑자기 바닥이 눈 앞으로 솟아오르는 것 같아 재빨리 벽을 짚고 몸을 웅크렸다. 눈 앞에서 그 아이가 흐느끼는 모습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BP001이 세상을 구원할 힘을 나에게 쥐어 줄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너희들의 신이다! 찬란한 미래를 온 몸으로 느끼며 환희에 몸부림치던 모습이 눈 앞에 스쳐 지나가 무릎을 꿇었다. “용서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마틴이 절규하기 시작했다. 

  짝! 짝! 짝! 희미한 불빛 속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안내 데스크에 있던 사람들 다 어디 갔어요? 건물이 휑하네. 앞에서 붙잡는 사람도 없고.” 김 형사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가왔다. 

마틴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역사와 전통의 연구소가 무슨 일로 갑자기 폐허로 바뀐 겁니까? 무슨 일 있어요? 또 소장님은 왜 그래? 몸도 안 좋아 보이네요.”

  마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군사작전 하듯이 일사천리로 밀어버렸네. 이거. 아…. 이러면 우리가 의심을 안 하고 싶어도 안 할 수가 없지.”

  마틴은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얼굴을 올려다봤다. 

  “소장님! 내가 용건만 간단히 물을게요! 이대근 알아요? 몰라요?”

  마틴은 현기증이 연기처럼 몸 속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모릅니다. 여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소장님이 모른다는 이대근 때문에 왔지. 왜 왔겠습니까?”

  “정말 모른 다니까요!”

  “용의자 수사를 해보면 백의 구십은 처음에는 딱 잡아떼요. 그러다 나중에는 울고불고 용서를 구하죠. 왜?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 그가 마틴이 서 있는 방으로 좋은 모임에 초대 받은 손님처럼 사뿐히 한 발을 내딛었다. 

  “형사님! 여전히 그 애송이 탐정 말 듣고 그러는 겁니까?”

  김 형사가 검지를 흔들어 댔다. “노! 노! 노!”

  “그럼 왜 자꾸 이대근을. 왜! 왜!” 마틴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어허. 소장님. 왜 그러세요? 이건우는 모르는데 확실히 이대근은 아시나 보군요. 천하를 발 밑에 둘 야망을 가졌던 분이 이렇게 심약해서 쓰나.” 김 형사가 방의 벽면을 손으로 만지면서 천천히 벽을 따라 걸었다. “갤러리 회장이 말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인간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렇게 많은 돈을 꾸준히 후원한다는 거, 절대 믿지 않거든. 물론 그 회장 외동 딸아이가 자폐증으로 유명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 알고 나서는 뭐, 아픈 아이가 있는 집이니 이심전심 동정심이 남보다 많겠 거니. 그렇게 좋게 생각해 주려고 했지. 그런데 이 회장이 말이요. 알고 보니 약쟁이 더라고. 한 두 번 투약한 게 아니야.” 

  “제가 아는 회장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소장님은 스마트 하기로는 특급 열차인데 세상 물정 파악에는 완행열차 같습니다.”

  “회장님에 대해 무얼 안다고 그러세요?”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기껏해야 프로포폴 같은 거를 투약하셨더라고. 물려줄 돈은 많은데 아이가 아프고 그러니 얼마나 잠이 안 오겠어. 충분히 이해가 가지.”

  마틴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이 약 구입 경로가 심상 치가 않아요. 우리가 마약 수사반하고 연계해서 패키지로 일망타진! 그런 큰 건 한번 해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를 겁니다. 그런데 수사망에 걸린 마약 공급책들이 이 회장을 전혀 몰라. 그렇다고 약이 병원 같은 경로로 흘러나오지도 않았어. 그래서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지. 이 쥐새끼 같은 놈을 어떻게 잡아 족칠까 고민하느라고.”

  “마약을 할 분이 아니니 공급책이 있을 리 없지요.”

  김 형사가 멈춰 섰다. “자네는 진짜 모르고 있었나? 내가 왜 이런 얘기를 자네에게 미주알 고주알 풀어 놓겠나?”

  마틴은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자네가 지금 짐작하는 사람이 맞네. 그 사람이면 주위 도움이 뭐가 필요하겠나 그 정도 난이도의 마약들은 충분히 자급자족이 가능한 사람이지.”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는 엇나갈 사람이 아닙니다.”

  “탐이 나도 사자는 애완동물로 키우는 게 아니야. 성체가 되면 풀어줘야지. 왜 끝까지 데리고 있으면서 화를 자초해? 그래서 말인데 갤러리 회장을 조사하다 보니 희한한 사실을 알게 되었어.”

  마틴의 얼굴에 조금씩 초조함이 묻어났다.

  “단순히 자신의 약을 받기 위해서 연구소에 거금을 후원했다? 이건 말이 안 되지. 갤러리 회장 정도 레벨이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고 말고. 결론적으로 자폐증 걸린 자기 딸을 치료하기 위해서 후원을 했던 거야. 왜? 제니퍼가 자폐증 치료제를 연구하고 있었거든. 그렇게 해서 당신 연구소와 오랜 인연이 시작된 거라고. 그런데 이게 참 기가 막혀. 세계적 석학들도 자폐증 치료제를 못 만들고 있는데 한적한 지방 구석에서 연구원 두 명이 죽으라고 연구에 매진한다고 이게 만들어져? 물론 당신과 제니퍼가 워낙 학벌이 좋고 스마트하다는 건 익히 들어 잘 알고있어. 하지만 이 회장이 그런 걸 찰떡같이 믿고 그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그건 아니지. 그럼 뭐 다?”

  마틴은 김 형사의 능청스러운 시선을 피했다

  “확실한 걸 보여줬겠지. 혼을 쏙 빼놓을 만한 혁신적인 거 말이야. 그건 뭐 다?”

  “형사님, 그만 하세요!”

  “생체 실험! 이다 이 말이야.”

  “형사님! 비약이 심합니다.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생체 실험을 합니까? 도대체 그런 상상은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김 형사는 벽면에 손을 대고 다시 벽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자네는 나를 바보로 아나?” 

  마틴은 글썽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아이스크림 학원이야 자기들이 후원한 연구소가 하루 아침에 폐허로 변한다고 해도 잃을 게 없겠지? 왜? 지금까지 자네가 죽도록 노력해 쌓아 올린 기술이 다 자기네 거가 되니까. 그럼 입장 바꿔서 자네가 에메랄드 갤러리 회장이라고 생각해 봐. 자네와 제니퍼가 약속했지? 자폐증 치료제 만들어 주기로. 근데 피트니스 센터 망해서 고객들 돈 때 먹고 야반도주 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 아침에 나 몰라라 해 버리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나? 엄청 배신감 느끼겠지? 당신은 그런 구멍을 생각하지 못한 거야.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꼼꼼한 아이스크림 학원 사람들이 생각은 했을 거야. 그렇지만 우리가 한 수 빨랐어. 이런 경우는 우리가 경험이 많거든. 자살 당하기 전에 미리 갤러리 회장 신병 확보를 해 둔 것이 신의 한수지.” 

  “갤러리 회장의 진술로 어떤 것도 증명이 되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까? 진술하는 사람들이 하나가 아니라면? 그것도 증거 효력이 없을 것 같나? 애송이 탐정과 이건우, 이대근 부자가 직접 나선다면 효력은 차고 넘쳐. 이 사람아.” 

  마틴은 머릿속으로 미국 행 비행기 시간을 떠올렸다. 필요한 서류와 카드가 든 가방, 노트북. 빠뜨린 것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제니퍼는 어디 있나?” 김 형사는 검지로 허공을 찔렀다. 

  “저도 모릅니다.” 

  “사자가 풀을 뜯고 살 수 있나?”

  “그게 무슨 말인지….” 마틴은 짜증내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오늘 푹 쉬어 둬. 그리고 행여 노파심에 경고하는데 국외로 도망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게!” 김 형사는 마틴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듯 검지로 그의 심장을 눌렀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가다 갑자기 멈춰 섰다. “사자와 연락이 되면 안전한 우리로 돌아오라고 전해줘.”

  “형사님, 왜 자꾸 제니퍼를 사자로 부릅니까?”

  “별 의미 없어. 이번 미제 사건 수사 명이야. 사자 사냥!”


55


  태민이 은박지를 쥐고 마지막 김밥을 입에 넣으려 할 때, 성민과 김 형사가 함께 들이닥쳤다. 

  “영양가 많은 것 좀 먹어요. 볼 때마다 김밥이야! 그거 제일 싼 김밥이지? 젊은 사람이 기력 떨어지게. 가끔 씩 불고기나 참치 들어간 김밥도 좀 먹어주고…. 저기 요 앞에 가면 장어 덮밥 맛있는 집 있어. 저녁에 가요. 나도 은혜에 보답 한번 해야지.”

  태민은 듣는 둥 마는 둥 마지막 김밥을 야무지게 씹어 먹었다. 

  “사무실도 좀, 명탐정 답게 꾸며요, 꾸며! 이 계란 판 같은 거나 벽에 다가 덕지덕지 붙여 놓고 칙칙하게 아….” 김 형사는 한 숨을 크게 내쉬었다. 

  태민은 자신의 루틴대로 녹차를 마셨다.“아 답답하네. 태민씨는 이 동굴 같은 데서 돌 깎는 석공도 아니고 세상과 단절한 채 혼자서 무슨 궁리를 해요?”

  “형사님이 드디어 원장 사건 범인을 잡을 것 같다 네. 우리가 주인공이래.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성민이 태민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태민은 녹차 페트병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태민씨에게 범인 잡아 달라고 협박한 사람은 찾아 냈어요?” 김 형사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태민과 성민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보니까 이대근이 왼손잡이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손목 한번 잡아보면 금방 알죠. 아무래도 계속 쓰는 손에 힘이 들어가니까. 그리고 요전에 이대근 옆집에 사는 사람이 새벽에 옥상에 올라가다 가스통을 머리에 맞은 사건이 발생했어요. 워낙 사람들 말이 많으니까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호기심이 생겨 겸사겸사 이대근 집 후문 근처의 CCTV 두 대를 한 번 쭉 돌려봤어요. 그런데 아주 그냥 딱 걸렸지 뭐 야.”

  “뭐가 걸려요?”

  “집 밖에 아예 나가지도 않던 이대근이 혼자 외출하는 모습이 찍혔어요.”

  “이대근이 외출을 했다고요? 혼자요?”

  “그래요. 희한한 게 이대근이 조금 걷다가 점퍼 안에서 작은 택배 박스를 꺼냈어. 이게 신의 한 수지. 그리고 한 번 훑어보더라고. 자세히 살펴보니 태민 씨가 받았던 것과 동일한 박스였지요.”

태민은 눈을 감고 목을 뒤로 젖혔다. 

  “빙고!” 그가 미소를 띠며 윙크했다.

  “그럼 우리 형 협박범이 이대근이란 말씀인가요?”

  “당연하지! CCTV에 찍혀서 빼박이라니까. 그런데 한 번 물어봅시다. 만약 이건우나 이대근이 진짜 범인이라면, 이대근이가 범인 잡아달라고 탐정을 협박할 이유가 있습니까?” 

  태민은 눈 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나 잡아봐라 게임도 아니고 범인이 유명하지도 않은 탐정한테 그런 장난을 칠 수 있겠냐고요?” 

  “형사님은 그럼 이대근이 저희 형에게 왜 그런 협박을 했다고 생각합니까?”

  “글쎄…. 이 부분에서 사실 나도 좀 애매하긴 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대근이 미래를 내다봤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말씀 이세요?”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할 것을 예측했겠지요. 일종의 알리바이 같은 걸 미리 구축해 놓았다고 도 볼 수 있지. 머리 좋은 사람들에게 자주 보이는 패턴이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 건 태민씨 같은 사람을 알아보는 선구안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애초에 태민씨에게 협박을 하지 않았다면 원장 사건이 여기까지 진행도 안 되었을 테고 그러면 당연히 사자사냥이 실패했을 테니까. 이대근, 이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태민씨만큼 머리가 비상한 친구 같습니다.” 

  태민이 심각한 얼굴로 성민에게 외계어를 시작했다. 성민이 고개를 끄덕인 후 통역했다. “형사님은 지금 원장 사건 범인이 이건우, 이대근 부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얼마 전까지도 그 부자들을 타깃으로 잡고 있지 않으셨습니까?” 

  “아….” 김 형사는 살짝 입술을 벌였다. 

  “그럼 범인이 누구입니까?” 성민이 형사의 입을 주시했다.

  “아직도 짐작을 못합니까? 명탐정 자존심 다 구기겠네.” 김 형사가 목젖이 도드라지게 웃었다. 

  태민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건 나중에 알려 드릴 게. 궁금할 거 같아서 미리 알려 주는데 내 후배가 그 이건우 집 잠복 중에 어떤 일본 손님들이 그 집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서 구급차에 실려갔다고 보고를 했어요. 성민씨 일본인 여자친구도 구급차를 함께 타고 갔다고 그러던데. 구급대원들에게 확인해 보니 천장에서 계단이 떨어져서 머리에 맞았다고 그래. 광화 병원 중환자실에 있을 거야.” 

김 형사의 폰이 울렸다. “그럼 또 봐! 명탐정 형제님들!” 그가 바쁜 듯 서둘러 나가다 습관적으로 멈춰 섰다. “한 가지 잊을 뻔했네. 태민씨는 이대근 정말 모릅니까?”

  태민은 그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다.

  “한 번 잘 생각해봐요. 서로 아주 잘 아는 사이일거야. 그럼!” 김 형사가 계단으로 뛰어내려 가는 소리가 울렸다. 

  “형이 이대근을 어떻게 알아? 저 양반 속을 모르겠어.”

  이대근…. 태민은 눈썹을 찌푸렸다. 

  “형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애초부터 이건우 부자는 아닐 것 같았어.”

  태민은 뒤죽박죽 꼬인 머리를 흔들어 댔다.

  “김 형사가 오랫동안 사건을 추적하고 있었던 것 같지? 생긴 것처럼 진짜 연기를 잘 하네. 마치 잊어버린 듯, 신경도 안 쓰고 있는 사건처럼 여기는 것 같더니 그게 아니었던 거야. 완전 속임수였어.”

  김 형사가 던진 이대근이라는 화두가 태민의 머릿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빙빙 돌았다. 

  “이건우씨 집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무사 하지를 못하네. 완전 거기 블랙홀이야. 그나저나 김 형사는 갑자기 이건우 부자를 왜 용의 선상에서 제외했을가…. 어렵다 어려워. 이참에 우리 같이 유키에나 만나러 가 볼까?”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광화 병원 안내 데스크에서 간호원이 전화기를 들고 성민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다. 태민과 성민은 잠시 기다리란 안내를 받은 후, 대기실 구석 의자에 앉았다. 몇 분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유키에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미리 연락 못해 미안해.” 

  “아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일이 발생했어?” 성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너무 안됐어. 참 우울해….” 

  “많이 안 다쳤어?” 

  “한결 나아졌어. 일본으로 돌아가서 정밀 진단을 또 받아봐야 될 것 같지만.” 

  판다 같이 보이는 노인이 복도에 나타나 태민을 슬쩍 흘겨보며 지나갔다. 

  “잠깐만….” 유키에가 성민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성민이 이야기를 들으며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형, 이 병원에 입원한 가스통 있지? 그 가스통 맞은 사람과 방금 저기 지나간 판다 같은 일본 손님이 한 통속이래.” 성민이 태민에게 속삭였다.

  역시 예상한 대로다. 

  “유키에 넌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야?”

  “돌아가는 일정은 연기해야 할 것 같아. 별 수 없지 뭐.” 유키에는 손님들과 함께 대기하라는 연락을 아르바이트 업체에서 받았다. 

  “먼데까지 와서 자꾸 이런 일이….” 성민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손님들 퇴원하면 연락할 게. 나는 여기 병원에 가족 대기실 빌려서 있을 거야.” 

  “알았어. 너도 몸 조심하고. 그리고….” 성민이 잠깐 머뭇거리다 유키에의 손을 힘을 주어 꼬옥 잡았다. 태민은 먼저 병원을 빠져나갔다. “혹시 있잖아…. 정말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한 게 있으면 그냥 마음 편할 때 얘기해줘. 알았지?.” 성민이 잠깐 서성이다 살며시 그녀 손을 놓으며 어색하게 윙크했다.  

  유키에가 슬픈 눈망울을 한 채 웃었다. 

  성민은 병원 입구로 걸어 나가며 자동문이 열릴 때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56


  마세라티 스페셜이 굉음을 뿜은 후 멈췄다. 빨간 구두를 신은 제니퍼가 오렌지색 버버리 코트를 휘날리며 힘차게 다가와서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바다 바람에 긴 머리가 춤을 췄다. “이대근! 역시 최고다!” 

  이대근은 그대로 먼 바다를 바라봤다. 

  그녀가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헝클어진 이대근의 앞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너만 있으면 돼. 네가 바로 내 연구의 살아있는 증거 자체니까.” 

  그녀의 장미 향기는 아직도 변함없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고통에 울부짖을 때 공기 중에 퍼지던 그 향기다. 

  “너를 연구소에서 탈출하게 했을 때부터 이 날만 꼬박 기다려 왔어.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네가 안 와주면 어떡할까 걱정도 쌓여갔지만 난 널 믿었어. 넌 내 인생이고 내 노력의 결과물이니까.”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어디로 가긴 같이 가야지. 먼 나라로.” 

  이대근은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나에게 누명을 씌웠습니까?” 

  “뭐라고? 무슨 누명? 얘가 지금….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 아이스크림 원장의 손녀 코 속에 제 책 가방에 걸려있던 경마공원 키링을 잘라서 넣었습니까? 그런 짓은 왜 한 겁니까?” 

  “너…. 무슨 그런 말을…. 내가 안 그랬 어! 누가 그래?” 

  “내가 그랬다!” 갯바위 밑에서 김형사가 확성기를 들고 나타났다. 그가 제니퍼와 이대근이 있는 곳으로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 인간은 누구야?” 

  “사자 사냥꾼이라고 합니다. 김 형사는 도청 이어폰을 손으로 만지며 확성기를 입에 대고 크게 외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수작이야. 도대체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나하고 둘이 서만 만나기로 약속을 했어? 안 했어?”

  이대근은 웃음을 참으며 먼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웃어? 내가 너를 지옥에서 꺼내 줬는데 나를 배신한 거야?”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배신은 무슨 배신입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에게 자기 죄를 덮어 씌우려고 한 사람이 배신한 거지? 안 그래요?” 확성기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다가왔다.

  “당신 누구 야? 우리 대화를 어떻게 저기서 듣고 있어? 왜 내 인생에 함부로 끼어들어?” 그녀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있는 힘껏 외쳤다. 

  “나? 사자 사냥꾼이라니까!” 확성기에서 어흥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랄하지 마!” 그녀가 바로 앞에 다가온 김 형사를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김 형사는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휘어잡고 꺾었다. “어허, 이렇게 성격이 더러우니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이 싫어하지. 당신 히스테리만 들어봐도 스트레스 받았을 것 같은데.” 

  “이거 놔! 그녀가 손을 빼려 발버둥쳤다. 

  김 형사는 그녀 팔목을 더 강하게 잡아 비틀었다. “컴퓨터 프로그램, 약물제조, 자동차정비, 당신 할 줄 아는 게 너무 많은데. 이건 완전히 삼위일체 트리니티 수준의 인재야. 너무 아까운데 말이지.” 

  “아. 아파.” 그녀가 손을 내리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처음이라 적응이 잘 안 될 거야. 근데 다행히 두 번 경험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요? 이거 놔요!” 

  “그러게 사실 당신은 이대근이 당신 죄를 뒤집어써서 이곳에 나타나지 못할 것을 기대했으면서. 맞지? 그런데 왜 나타나 가지고 이런 일을 당하냐고, 혹시 라도 이대근 나타나면 죽이려고 했지?” 김 형사가 그녀 버버리 코트 주머니에서 가스총을 낚아챘다. “당연히 분사 액은 펜타닐 이겠지. 독하다 독해.” 

  그녀가 악을 쓰며 손을 빼내려 이리저리 휘둘렀다.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풍경 좋은 곳에서 당신 입으로 직접 듣고 싶은 게 있어. 딱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난 아무 잘못 없어!”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이야 당신 눈에 가시처럼 사사건건 당신을 깎아내렸겠지. 하라는 연구는 열심히 안 하고 에메랄드 갤러리 회장에게 마약을 팔지 않나, 이대근도 탈출하게 하지 않나, 틈만 나면 자폐증 치료 기술을 빼내려 했으니까. 내가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이라도 그랬겠다.”

  “아니야!”

  “뭐가 아니야? 어디 물주에게 덤벼. 원래 투자하는 사람들 말을 잘 들어야 목숨 부지하는 거야. 당신이 세상물정 몰랐던 거지. 연구소에서 빈털터리로 내쫓기기 전에, 아니 죽기 전에 가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이판사판 가슴속에 쌓인 원한을 풀었다고 치자. 그래서 원장을 죽였어! 좋아. 그런데 원장의 남편과 손녀는 왜 죽였어? 후한이 두려웠던거야?” 

  “으아…. 으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녀의 사자후가 파도를 타고 크게 퍼졌다. 

  “내가 그래서 이번 사건을 사자 사냥이라고 붙였지. 사자는 말이야 먹잇감 무리에서 제일 어린 새끼부터 공격하거든. 초원의 왕, 라이온 킹이라는 놈이 비겁하게 말야. 가장 약한 놈을 제일 먼저 노린다고. 당신도 어린 애를 인질 삼아 원장과 그의 남편을 차례대로 죽인 거 아니야?” 

  “난 아니야! 그 사건과는 상관없어! 이거 놓으라고!”

  “그 날을 잘 떠올려봐. 내가 기억나게 말해 줄게. 일단 당신의 해박한 자동차 지식으로 원장 차 문을 고장 낸 다음 아이를 인질로 삼아 차에 원장과 남편을 강제로 태워 기절하게 했어. 트렁크에 펜타닐을 넣어서 말이지. 그리고 휠체어를 이용해서 차 안에서 기절한 그들을 집 안으로 차례대로 이동시켰어. 마치 집 안에서 질식사한 것처럼 위장한 거야. 그런데 말이야 너무 리스크를 생각하다 보니 마지막에 실수를 했어. 당신! 왜 피해자의 콧구멍 속에 이대근 책가방의 키링 끝 부분을 잘라서 넣었냐고, 도대체 그런 불필요한 짓은 왜 한 거야? 왜 자기무덤을 자기가 팠어? 이대근 책가방에 달려있으니 이대근에게 누명을 씌울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생각한 거야? 정말?”   “그만해! 제발 그만해! 난 아니야!” 그녀가 휘날리는 머리칼로 사물놀이 하듯 상모 돌리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틴은 공항으로 떠나기 전에 이건우씨 집 앞 베이커리로 향했다. 아몬드 머핀과 커피를 들고 이층에 올라가 이건우씨 집이 잘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이른 아침이라 새소리만 정겹게 들려온다. 마틴은 무릎을 꿇고 이건우 집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고개를 들다 가슴 깊은 곳에서 마그마처럼 부글거리는 것이 쏟아지려 했다. 

  “죄송합니다…. 삼촌…. 은혜를 못 갚고 죽을 죄만 지었습니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닦았다. 이 층으로 누군가 올라오는 계단 소리가 들려왔다. 마틴은 얼른 의자에 앉았다. 

김 형사가 먼 길 떠나는 친구를 배웅하러 온 것처럼 반갑게 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소장님, 아침부터 울었습니까?” 그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틴은 재빨리 소매로 눈물을 마저 훔쳤다.

  김 형사는 폰을 만지작거리더니 테이블 위에 탁하고 올려놓았다. 능옥란의 안개낀 밤의 데이트가 흘러나왔다. 

  “어디 멀리 가시려고?” 김 형사는 마틴의 캐리어를 쳐다봤다. “사랑하는 어머니까지 버리고 가면 안 되겠지요?” 

  바닥에 한 방울, 한 방울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살다 보면 별 일이 다 생기죠?” 김 형사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김 형사는 딱지처럼 접혀 진 종이 한 장을 그의 손에 쥐어 줬다. 

  마틴은 종이를 천천히 펼쳤다. [면책계약]. 마틴은 두 눈을 부릅뜨고 내용을 살폈다. [이대근은 자발적으로 실험에 참여한다. 실험과 관련된 모든 위험을 감수한다. 실험과 관련된 결과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 마지막에 이건우씨의 서명도 보였다. 

  “에메랄드 회장이 시냅스 연구소는 이건우씨의 제안으로 여러가지 실험을 하게 되었다고 진술을 했어요. 원래부터 시냅스 연구소는 생체 실험 같은 것을 하는 곳이 아니라고 주장을 격하게 뒤집고 있네.”

  “제니퍼는?” 

  “사자가 우리에 갇힌 뒤에 미쳐버린 것 같아. 진술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날뛰어서 일단 우리 정신병원으로 이송했지.” 김 형사는 하품을 하며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이건 어디서….” 마틴이 손에 쥔 종이가 떨렸다. 

  “제니퍼를 체포했을 때 주머니에서 슬쩍 했지. 당신에게 이렇게 중요한 물건일 줄 몰랐네.” 김 형사는 마틴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틴은 무릎을 꿇었다. “그럼 이건우씨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김 형사는 그를 보며 쭈그려 앉았다. “자네에게 달려있네. 이제 삼촌한테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나?” 김 형사는 종이를 안 주머니에 집어넣고 베이커리를 나왔다.


57


  “팀장님. 이 물건 이건우 집 화장실에서 발견된 거 맞습니까?” 후배 형사는 하얀 봉지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럼. 그거 조심해! 까닥하다 냄새 조금만 맡는 순간 자네 저 세상 갈 수 있어!” 김 형사는 건물 사이로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에 넋을 놓고 있었다.

  “팀장님은 도대체 이런 거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자네는 나하고 그 탐정 친구하고 공통점이 뭐라고 생각하나?”

  후배 형사는 실실거리며 웃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 말에 귀를 잘 기울인다는 거지.” 김 형사가 주머니에서 도청 이어폰을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우 집에서 쓰러졌다는 일본 노인네들이 의심스럽지 않겠나? 그래서 그들의 대화를 도청했지. 병원에서 자기들끼리 일본어로 떠들어 대도 토일렛이나 펜타닐 정도는 귀에 저절로 쏙쏙 박히는 거 아닌가.” 

  후배 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팀장님은 그렇게까지…. 그러면 왜 이건우와 이대근이 진짜 범인이 아니란 걸 알면서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셨습니까? 너무 연기가 리얼해서 살짝 당황했습니다.” 

  “음…. 이건 영업 비밀인데….” 김 형사가 슬며시 가지런한 이를 드러냈다. 영화 속 멋진 형사가 사건을 해결한 후 보이는 여유가 느껴졌다. “내가 펜타닐과 휠체어 얘기를 꺼냈을 때 이대근 표정 봤나?”

  “글쎄요…. 자신이 범인이 아니니까 어리둥절하고 있었겠지요.”

  “노! 노!” 김 형사는 검지를 좌우로 흔들어 댔다. “자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봐. 이대근은 어릴 때부터 연구소에 잡혀 가서 약물을 투여 받고 의식을 잃고 쓰러져 휠체어로 실려 가는 것을 수도 없이 반복했을 거야. 보통 사람들이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 일거란 말이지. 그런 이대근에게 펜타닐과 휠체어 하면 자동으로 누가 제일 먼저 떠오르겠어?”

  “글쎄요….”

  “제니퍼지. 이대근은 자신이 코너로 몰리면서 누명을 쓰던 그 순간, 진짜 범인을 알아채 버린 거라고.”

  “이대근이 정말 그런 걸로 제니퍼를 범인으로 떠올렸을까요?” 

  “자신이 범인으로 몰리는데 당연하지. 결정적인 증거 잊었나?”

  “아이의 기도 쪽에서 발견된 키링 실매듭 말입니까?”

  “그래. 그건 분명히 이대근 가방에 달려 있던 거지? 그걸 잘라서 살인 현장에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후배 형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가지 더! 시냅스 연구소가 애국심은 있어서 다른 것들은 전부 일본에서 공수했어도 휠체어는 우리 지역업체에서 구매를 했더라고. [프리덤]이라고 주로 요양병원에 휠체어를 납품하는 유명한 업체 지. 이건우 집에 있던 것도 연구소와 동일한 그 업체 거란 말일쎄. 혹시 자네 휠체어 밀어봤나?” 

  후배 형사가 머리를 긁적였다. 

  “한 쪽 손이 비정상적으로 큰 이건우 같은 사람은 손잡이를 잡고 똑바로 밀기가 힘드네. 조심해서 밀더라도 바퀴 자국이 일직선으로 나지 않고 곳곳에 중심을 잡으려는 삐뚤삐뚤한 흔적이 남기 마련이지. 원장 집 현관 앞에서 발견된 매끄러운 일직선의 바퀴 흔적은 이건우가 휠체어를 밀었던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지.”

  “발자국은요? 그건 위장입니까?”

  “한 발에 두 번씩, 시체를 올린 휠체어를 잡고 밀면서 장난치듯이 뛰었지. 왼발 두 번, 오른발 두 번. 반복해서. 그런데 꼭 맞는 신발을 신지 않고 뛴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중간에 족적이 뭉쳐 진 곳이 있어. 신발이 벗겨졌다는 흔적이지. 범인의 신발 사이즈는 적어도 270보다 작단 이야기야.”

  후배 형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놀랄 것 없어. 이번에도 그 젊은 탐정 친구들이 주인공이야. 인력도 장비도 없고 제대로 된 사건현장과 정보도 가지지 못했는데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줬어.” 김 형사는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명탐정님 먼저 와 계시네.” 김 형사는 벽에 붙은 옷걸이에 갈색 체크무늬 코트를 걸었다. “각자 먹고 싶은 거 주문하세요.” 그가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태민과 성민은 나고야식 장어 덮밥인 히츠마부시 큰 사이즈를 주문했다. 

  김 형사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도 똑 같은 걸로!”

  “형사님, 이번 사건도 결국은 해결하셨네요.” 성민도 그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일단 탐정 님들 신변보호는 계속 할 테니까 걱정 마시고.” 그가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태민씨가 잘 알 것 같은데…. 한 가지 좀 물어봅시다.”

  태민이 김 형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제니퍼가 이대근을 괴물이라고 하던데 왜 그럴까요? 이대근을 데려가 실험도 하고 자기 죄까지 덮어 씌우려 했다면 미안해서라도 그런 말을 못할 거 같은데 말이지. 병원에서 하루종일 미쳐 날뛰면서 이대근은 괴물이라고 부르짖고 있어요. 혹시 자폐증 치료 중에 괴물로 바뀔 수 있는 그런 심각한 부작용 같은 게 있습니까?”

  이대근은 행운의 열쇠를 거머쥔 극소수의 케이스다. 대부분의 환자에게 자폐증은 앞이 보이지도 않는 터널을 지나는 긴 여정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터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일부는 나가지만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그렇지요? 태민씨는 아주 예외적인 케이스라고 짐작은 했습니다. 혹시 태민씨보다 훨씬 더 스마트해질 수도 있습니까?”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성민은 질문의 의도가 애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 형사는 만족할만한 답을 얻은 듯 활짝 웃었다. 

  태민은 형사가 알고 싶은 것이 이대근의 현재 상태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형사님, 저희도 질문이 있습니다. 저번에 저희 형에게 이대근을 아는지 물어보신 것 같은데요?” 성민이 태민을 슬쩍 본 후 말했다.

  “그거 진짜 아직도 몰라요? 세상 참 각박하네. 각박해…. 두 사람 초등학교 동창이던데요.” 

  태민은 냉수를 마시다 사래가 들려버렸다.  

  “아…. 저희 형은 보통 사람들과는 기억하는 방식이 달라서….” 성민은 넋이 반쯤 나가버린 태민의 등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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