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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08번뇌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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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2. 2024

의심하는 남자

(32~40)

32


  오전 열 한시를 막 넘은 시각, 성민은 댄스 팀 신규 인원을 충원하는 회의 중에 급히 만나자는 선배의 전화를 받고는 얼떨결에 오후 세시에 제황산 공원 부엉이 놀이터에서 그를 만나기로 약속해버렸다. 그리고 회의 내내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검은 빨대만 멍하니 바라보다 지원자 세 명 중 두 번째 사람을 찍기 하듯 팀원으로 선택했다.


  선배는 약속 장소를 기가 막히게 잘 골랐지만 패션 코드는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산 중 어린이 놀이터에서 선배의 듬성듬성한 헤어는 선보러 가는 사람처럼 반들반들했고 얼굴에는 뽀얗게 윤기가 흘렀다. 

  “모노레일 타고 왔어?” 성큼성큼 걸어오는 선배를 보며 성민이 말했다.

  “차로 올 수 있어.” 선배가 뒤쪽으로 난 길을 가리켰다. 

  “누가 보면 IT연구원이 아니라 007에 나오는 본드인 줄 알겠다.”

  “평소에는 외출도 잘 안 하는데 햇볕 볼 때라도 옷 좀 갖춰 입어야지. 사시사철 내내 면 티에 반바지만 입을 순 없지 않아?”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인지 저번보다 그의 목소리도 한층 커진 느낌이 들었다. 

  “여기 앉아서 얘기 좀 하자.” 그가 나무 그늘이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또 그 얘기하려고?” 성민이 팔짱을 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더 이상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닥을 드러내는 은행 잔고가 아른거렸다. 

  “날짜가 잡혔어. 제발 부탁한다.” 선배가 성민의 손바닥 위에 천천히 손을 포갰다가 떼자 손바닥 위에 자그마한 물체가 올려져 있었다. “모레 독일 베를린에서 한국 친척 방문 차 의사 한 명이 올 거야. 저녁 여섯 시 삼십 분, 진해 외곽에 있는 한우명가 라는 고깃집에서 식사를 하니까 너는 거기에서 식사를 하다가 일곱 시 정각에 그 사람과 이 층 화장실에서 물건을 교환하면 돼.” 선배가 조곤조곤 말했다.

  “이층 화장실에서 어떻게?”

  “그 쪽에서 먼저 주사위를 굴려봐! 라고 중얼거릴 거야. 그러면 너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라고 중얼거리면 돼. 그게 전부야.”

  “한국어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중얼거리면 돼?” 성민이 피식 웃었다.

  “한 번으로 말을 끊지 말고 반복해서 중얼거려야 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계속.” 

  “한국인이야?” 

  “한국인 피가 섞인 독일인. 딱 보면 느낌이 올 거야.” 그가 뒤를 슬며시 돌아봤다.  

  “선배 아는 사람이야?”

  “전혀! 그 연구소 누나에게 전해 들었을 뿐이야.” 

  “누가 나하고 같이 가? 그런 식당에 혼자 가기 뻘쭘한데.” 

  “배달 관련된 건 절대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믿을만한 사람이라면 같이 가도 돼. 같이 가서 소고기 실컷 먹고 와!” 그가 두툼한 봉투를 성민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돼! 운전해야 하니까.” 

  “그 독일인에게 받은 물건은 어떡해?” 

  “한우식당에서 여덟 시 정각에 계산을 한 다음 카운터 옆에 진열된 전통 양갱 한 박스를 사서 차에 타! 그 다음 양갱 하나를 빼서 빈 갑에 받은 그 물건을 넣어. 개별 포장된 양갱 갑 하나 크기가 물건 크기보다 조금 커서 쏙 들어갈 거야. 그런 다음 열리지 않게 조심해서 박스를 다시 닫고 종이 봉투에 넣어. 그리고….”

  “그리고?”

  “곧바로 진해역으로 가! 반드시 동승한 사람은 미리 내려줘야 해. 진해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아홉 시 정각에 한 여자가 차로 다가와 말을 걸 거야.”

  “내 차로 어떤 여자가 온다고?”

  “그래. 내가 너 차종하고 차 번호 누나에게 공유할 게.”

  “헐…. 무슨 말을 거는데?”

  “양갱 가지고 오셨어요? 오로지 그 질문만 할 거야.”

  “섬뜩하다. 야밤에 여자가 몰래 다가와 그렇게 말 걸면…. 그 여자한테 양갱만 주면 끝이야?” 성민은 아쉬운 듯 뒷말을 흐렸다.

  “누나가 양갱 받은 다음 비타 500 열 개 들이 한 박스 줄 거다. 무슨 말인지 알지? 그 안에 든 거는 네가 가지면 돼!” 선배가 성민에게 주먹 인사를 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까먹지 마!” 선배는 용건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약속 있어? 왜 이렇게 서둘러?”

  “원래 이런 대화는 짧게 끝내는 거야.” 그가 뒤편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성민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성민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손에 있는 물건을 꽉 움켜쥐었다. 


  태민의 사무실에 도착한 성민은 의자에 털썩 주저 앉으며 주머니 속 물건을 꺼냈다. “형, 나 사고 쳤어!” 

  태민은 성민의 표정에서 동생이 심각한 일을 저질렀을 때의 분위기를 느꼈다.

  성민은 선배가 부탁한 배달 일에 대해 이미 물을 엎질러 버렸다고 털어놨다. 

  태민은 당장 돌려주라고 소리치려다 배달 물건에 대해 기묘한 궁금증 때문인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시냅스 연구소와 관련된 비밀 자료 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나도 형과 같은 생각이었어. 시냅스 연구소 자료가 궁금했거든. 그런데 배달 대가로 너무 큰 돈을 받는 다니까 은근히 살 떨리는데….” 성민이 오른발을 심하게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태민은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성민에게 내밀었다. 

  성민은 손바닥 위의 물건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 놨다. 

  미니 초콜릿 바 크기다. 저 속에 시냅스 연구소 자료가 담겨 있다고 생각을 하니 태민의 가슴도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태민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형 보아하니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절대 저 물건은 우리가 먼저 열어 볼 순 없을 거야.” 

  암호화를 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사전에 비밀번호를 서로 주고받지 않으면 받는 쪽도 파일을 열 수 없긴 매한가지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비밀번호를 암시하는 메시지도 접선할 때 주고 받을 것이다. 분명히!    

  성민이 콜라를 마신 후 손의 물기를 바지에 닦았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그 고깃집에서 독일인과 주고받는 말이 진짜 웃긴 데 만약 누가 화장실 변기에서 응가 하다가 듣게 된다면 진짜 까무러칠 거다.” 

  주고받는 말…. 

  “그 쪽은 주사위를 굴려봐! 나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태민은 주저하지 않고 책상 위에 놓인 물건을 집어 들고 컴퓨터에 꽂았다. 


33


  하루 종일 느려 터진 학원 버스를 몰고 다녀서 인지 운전의 반응 속도가 예전만 못하다. 빅터는 미행하던 포르쉐 카이안을 놓치고 나서 한 동안 멀리했던 담배 연기를 한 껏 내뿜었다. 미꾸라지 같은 놈! 제니퍼를 만나는 것을 목격한 이상 저 포르쉐 놈은 반드시 제니퍼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둘을 한 통속으로 엮어서 단번에 내쳐버린다! 드디어 시냅스 연구소의 분열인가…. 그래. 마틴과 제니퍼가 바이 바이 할 때도 됐지. 이번에 잘만 하면 일본 회장님이 내 지난 과오를 덮어버릴지 모른다. 아이스크림 학원의 문지기로써 원장 가족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과오의 시간…. 이제 그 시간을 단번에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역시 마틴은 진정한 친구다. 한 번의 실수로 찌그러져 있던 내게 단단히 한 몫 잡을 건수를 제시한 것이리라. 제니퍼 기다려라! 너를 딛고 내가 우뚝 서리라!

  빅터는 아이스크림 학원 주차장 맨 안쪽에 자신의 자동차를 넣고 노란 버스로 갈아탔다. 이 놈의 버스는…. 청소는 해도 해도 끝이 없어! 그가 구시렁거리며 청소 도구를 챙겼다. 진공청소기로 바닥의 과자 부스러기를 치우고 물 티슈로 좌석 뒷면의 발바닥 자국과 얼룩을 꼼꼼히 닦아낸 다음 사무실로 올라갔다. 

  “베티! 시간, 장소 잘 체크했지?” 그가 눈을 부라렸다.

  “그럼요. 오랜만에 새 식구를 맞이하는데 당연히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어요?” 베티가 태블릿을 확인했다. “시냅스 연구소에서도 기대가 큰 것 같은데 오랫동안 새 식구가 안 들어와서 그런지 제니퍼가 이것저것 많이 묻더라구요.”

  “제니퍼가 어쨌다고?” 그가 그녀 가까이 바싹 붙었다.

  “제니퍼가 실질적인 연구 총괄이니까 어떤 애를 데려오는지 당연히 관심이 가겠지요.” 그녀가 부담스러운 듯 옆으로 살짝 비켜났다. 

  “시냅스 연구소에서 우리가 하는 일에 관여하는 건 월권행위야. 제니퍼는 자기 연구에만 전념하면 되는 거지. 우리가 어떤 아이를 공급하든지 말든지 간에 신경 끄라고 해!” 그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생각할수록 열 받네! 그동안 우리가 연구소에 애들을 한두 번 보냈어? 자그마치 백 명이 넘는다고. 백명이! 어? 이제 와서 무슨 짓이야. 싸가지 없게. 베티! 앞으로 제니퍼가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오면 나에게 즉시 알려줘!” 빅터는 시간을 확인한 후 탁자에 발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베티는 그의 감은 눈을 면도날로 주 욱 그어버릴 것처럼 째려본 후 사무실을 나갔다.  


  깊은 산중에서 엄마와 아이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아이가 천방지축으로 뛰다, 서다 반복하다 긴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산책로의 코너 부분에 도착하면 아이는 있는 힘껏 달려간다. 아이가 내리막길의 끝 지점에 다다랐을 무렵, 바로 그 때가 모자 간의 거리가 가장 벌어지고 엄마의 시야에 아이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다. 빅터는 내리막길 끝에 있는 바위 뒤에 숨어서 아이가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산책로의 CCTV 방향과 아이를 데려갈 동선을 반복 적으로 그려봤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나이도 있고 깜빡깜빡하는 일도 많아져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오후 네 시 삼십 분, 이제 곧 아이가 나타날 것이다. 그는 전기 충격기를 꽉 움켜쥐었다. 드디어 아이가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이윽고 아이가 바위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슬며시 뒤로 붙어 아이를 단번에 쓰러뜨렸다. 더블 백 속에 아이를 구겨 넣고 메어보니 이십 킬로 정도의 무게가 느껴졌다. 엄마의 시선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는 좁은 산길을 빠르게 달렸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벗어나야 한다. 다행히 맞은편에서 망을 보는 동료가 경고 메시지는 보내지 않았다. 얼굴에 쏟아지는 땀을 닦을 때 멀리 욱아! 욱아!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드디어 산불조심 현수막이 보인다. 이제부터 CCTV를 조심해야 한다. 사각지대로 가기 위해 산책로 끝자락에서 산 속으로 방향을 꺾어서 내려갔다가 산책로로 다시 올라왔다. 아이가 든 더블 백을 비탈길 구석에 세워 뒀던 쉐보레 트렁크에 넣었다. 그는 출발하면서 자신이 타고 왔던 익스플로러의 동료와 눈 인사를 했다. 꼬불꼬불 산길을 내려가다 도로 바깥 면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제네시스로 다시 갈아탔다.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유령처럼 쫓아오는 것 같아 그는 급경사의 내리막길에서 액셀과 브레이크를 빠른 속도로 옮겨 밟았다. 


  빅터는 인적이 드문 재개발 지역 도로 가에 차를 세워 두고 낡은 철공소를 지나 골목 안쪽에 있는 삼계탕 집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일 다운 일을 마치니 허기가 졌다. 뚝배기에 끓고 있는 닭 다리를 뜯어 입천장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부모 곁에 있어봐야 어차피 평생 짐만 될 인간이다. 택시 기사 외 벌이 가정에서 아픈 아이에게 해봐야 얼마나 투자할 수 있겠어. 매일 산에서 산책이나 한다고 아이가 좋아 질 거라 기대하면 오산이지. 어리석은 중생들이야. 평생 동안 짊어질 고생문이 열리는 게 뻔해. 하늘에서 해결이 안되는 숙제를 내줬는데 도움을 받아야지 혼자 끙끙거린다고 답이 나오겠냐고. 관점을 바꾸면 이건 납치가 아니라 부모에게 아이가 병에서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거야. 오히려 우리에게 큰 절을 올려도 모자랄 판에 말이야. 부랑아 수용 시설도 아니고 최고급 호텔 같은 시설에서 먹여주지, 입혀주지, 재워주지, 건강하게 지내도록 케어까지 다 하는데. 어디 가서 이런 호사를 누리겠어. 능력 없는 부모들은 아이를 평생 챙겨 줄 수 없다고 봐. 연구소 가는 것도 특혜를 받는 거지. 물론 후유증으로 중간에 죽지만 않는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는 뚝배기를 들어 남은 국물을 마저 들이켰다. 

  빅터는 가게를 나오며 이쑤시개 하나를 집어 물었다. 재개발 발표한 지가 언제 적 얘기인데…. 그는 쓰러진 집들 사이에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를 지나치며 혀를 찼다. 아직도 조용한 거 보니 피곤했나 본데. 트렁크를 두드려 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서 굴러먹던 근본 없는 종자가 주차를 이 딴 식으로 한 거야. 그가 바짝 붙어있는 산타페의 앞바퀴 휠을 있는 힘껏 발로 찬 후 제네시스에 탔다. 아…. 이건 또 무슨 냄새야. 동네가 후져서 그런가 재수없게…. 그가 안전벨트를 맨 후 갑자기 역겨운 듯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환기를 하려 해도 차창이 열리지 않는다. 차 문도 열리지 않는다. 조수석도 마찬가지다. “이 개새끼들이!” 갑자기 뜨거운 액체가 코에서 흘러내렸다. “야이 개새끼들아!” 그는 있는 힘껏 악을 쓰며 조수석 헤드 레스트를 뽑아 창 아래 모서리를 힘껏 내리쳤다. “깨져라 씨발!” 실핏줄이 터지고 피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해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상태에서도 그는 악착같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점점 몸이 늪에 빠지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의식이 흐려져 갈 때 뒷좌석 문이 열린 것 같다. 누구? 살려줘 제발…. 갑자기 마른 오징어 같은 것이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헉…. 빅터는 곧 중력이 없는 신비한 우주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34


  “안 왔다고?” 마틴은 제니퍼의 얘기를 듣고 빅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다. 낌새가 좋지 않다. 

  “아이스크림 학원 쪽 얘기로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하던데.” 제니퍼는 무심한 듯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빅터 전화가 안 돼.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봐!” 

  “산에서 타깃을 잘 데리고 내려갔다고 했어! 그 뒤로는 나도 몰라!” 그녀가 크게 하품을 했다. 

  마틴은 다시 폰을 들었다. 역시 먹통이다. 빅터는 이스라엘 민간 군사기업 출신의 베테랑이다. 나이가 있지만 연구소에 아이를 데려오는 일은 그만한 사람이 없다. 그동안 그가 주도해서 연구소에 아이를 아무 문제없이 공급해왔다. 더군다나 빅터는 아이스크림 학원을 수호하는 기둥 같은 역할도 하고 있다. 그만큼 일본 회장님 입장에서는 빅터가 믿고 맡길만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가 사고를 쳤을 가능성은 당연히 낮다. 마틴은 슬리퍼를 벗고 구두를 바닥에 찧으며 방을 뛰쳐나갔다. 


  “참견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친구가 연락이 안되어서.” 마틴은 엘리제를 위해서 멜로디를 내며 후진하고 있는 학원 버스 운전석을 향해 소리쳤다. 갑작스레 먹구름이 끼더니 예보도 없던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베티가 백미러를 좌우로 살펴보며 성의 없이 입을 뻥긋거렸다.

  “당신은 빅터의 비서 아니었습니까?” 그가 크게 소리쳤다.

  “우린 계획대로 할 일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조금 있다 애들 태우러 나가야 하니까 비켜 주세요!” 그녀가 무지개 모양 우산을 신경질적으로 펼치며 버스에서 내렸다. 

  마틴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 일을 아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저희 말고 또 누가 알겠어요? 이리저리 떠벌리고 다녔다면 아이스크림 학원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냐고요?” 그녀가 우산으로 밀치며 지나가려 했다. 

  마틴은 그녀 앞을 재차 가로 막았다. “명심하세요!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머리 위로 세차게 떨어지는 빗줄기에 그는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채 외쳤다.

  “잘 모르시나 본데 원장 가족이 죽었을 때, 우리 회장님이 어떻게 대응했나요?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어요? 아직 까지도 조용하지 않나요? 만약 빅터가 정말로 사고를 당했다면 우리와는 그 길로 연이 끊어지는 겁니다. 그게 이 세계의 방식이니까. 더 이상 찾아오지 마세요. 새로운 아이를 공급하게 되면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108명까진 공급할 의무가 있으니까….” 그녀가 기울인 우산 옆으로 그를 째려보며 지나쳤다.


  마틴은 와이퍼를 가장 빠르게 동작 시키며 외곽으로 차를 몰았다. 속도계가 140km를 넘어가고 있다. 스피커에서 X-JAPAN의 Endless Rain이 흘러나왔다. 그는 후렴구를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Endless Rain, 나의 마음에 상처를 적시고 나의 모든 증오와 비애를 잊게 해요.] 사십 분 정도 걸려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조용한 숲 속 마을로 들어섰다. 그는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는 단층 목조 주택 중 세 번째 집 앞에 차를 세웠다. 비와 함께 흙 냄새, 풀 냄새가 올라와 편백나무 향과 묘한 조화를 만들어냈다. 

  “엄마! 막내 왔어요.” 마틴은 신발장 앞에 비치된 손 소독제를 꼼꼼히 비비면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평온한 표정의 노인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식사는 입맛에 잘 맞으세요? 여기 영양사들이 건강을 생각해서 균형을 잘 맞춰 주니까 끼니 제때 잘 챙겨서 잡수세요.” 그가 침대 옆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저씨 누구세요?” 노인이 토끼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엄마, 막내 철이예요.” 그가 합장하듯 두 손으로 노인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노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우리 철이는 미국에 있어요. 내가 막내 뒷바라지는 하고 죽어야 되는데….” 노인의 초점 없는 눈망울이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마틴은 떨리는 손으로 가냘픈 노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철이 외할머니가 영특하다고 철이 참 좋아했어요. 우리 철이가요 어릴 때부터 너무 똑똑해 가지고 학교 선생들도 혀를 내둘렀지요. 오죽하면 미군부대에 아는 분이 미국에 있는 영재 학교를 추천했겠습니까…. 고생을 너무 시켰지. 내가 죄인이야.”

  “엄마! 저 고생 별로 안 했습니다.”

  “형편도 안 되는 주제에 핏덩어리를 외국에 보내서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하고. 어린 것이 낯선 땅에서 얼마나 배를 곯았을까….” 노인이 눈물을 글썽였다.

  “고기하고 우유 많이 먹어서 지금 이렇게 건강하잖아요?”

  “철이 외할머니가 애지중지 아끼던 걸 철이에게 줬어요.” 노인이 탁자 위에 놓여있는 빨간 모자에 털옷까지 입은 부엉이 인형을 소중하게 받쳐 들었다. 

  “엄마, 이 노래 좋아하죠?” 그는 창을 조금 열고 유튜브로 능옥란의 [안개 낀 밤의 데이트]를 재생했다. 

노인은 음악을 듣는 듯 눈을 감더니 금세 졸기 시작했다. 

그는 노인이 붙들고 있는 부엉이 인형을 탁자 위에 되돌려 놓고 노인의 가슴까지 이불을 살며시 덮었다.

  “어머. 오셨어요?” 요양병원 간병인이 중국집 철가방처럼 생긴 물건을 들고 나타나 활짝 웃었다. 

  “안 무거우십니까?” 그가 철가방을 보며 말했다.

  “여기는 전동 카트가 있으니까 편해요.” 그녀가 음식을 선반 위에 하나 씩 내려 놓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왔을 때 요구르트 아줌마 전동차처럼 생긴 것이 돌아다니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이 곳은 사실 선생님처럼 수시로 드나드는 보호자 찾기 힘들어요.”

  “왜 그렇습니까?”

  “이런 요양원이 대한민국에 어디 흔합니까? 최고급 실버타운도 여기에 비할 바가 안되지요. 제가 요양원은 전국 방방곡곡 안 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인데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 수준이면 베스트 오브 베스트입니다. 이거 한 번 보세요! 방마다 버튼 하나로 보호자와 영상 통화로 직통 되는 카메라 달려있지, 식사 최고급 영양식으로 잘 나오지, 경관 좋은 숲세권에서 고급 리조트 같은 주택에서 새소리 들으며…. 솔직히 말이 필요없지요. 뭐. 여러모로 최고급이죠. 금액적으로 부담이 없다면 저 같아도 이런데 부모님 모셔놓으면 마음이 푹 놓이겠습니다.” 그녀가 비닐 장갑을 끼고 식사를 침대 쪽으로 이동시켰다. 

  “네….”

  “솔직히 다른 분들은 뭐가 어떻네 잔소리가 많은데, 우리 여사님은 반찬 투정 한번 안 하시고 얼마나 잘 드시는지. 그러니 미국에 계시다는 선생님 같은 훌륭한 분을 키우셨겠지요. 성품도 좋으시고 능력도 출중하시고.” 그녀의 웃음이 꽃무늬 자수의 핑크색 앞치마와 잘 어울렸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가 뒤돌아 벙거지 모자를 쓰자 자는 줄 알았던 노인이 갑자기 소리쳤다.

  “우리 아들, 밥 먹고 가야지!” 

  “제가 식사 더 가져오면 되니까 어머니와 천천히 드시고 계세요.” 마틴이 사양하기도 전에 그녀가 빠른 동작으로 밖으로 나갔다.

  “자, 어여 먹어라.” 노인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굴비와 옥돔을 발라서 그의 입으로 갖다 댔다. 

  그가 둥지 속 아기 새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받아먹었다. “어머니도 많이 드세요.” 

  “옛날에 내가 철이 생선 먹일 때 목에 가시 걸린다며 조심하라고 너 외할머니가 어찌나 잔소리를 해대던지. 생선만 보면 생각이 나네.” 노인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폰을 확인하니 오늘이 외할머니 기일이다. 역시…. 마틴은 고개를 숙였다.

  “철이 너 외할머니는 너무 못 잡수셔서 뼈밖에 없었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마음이 안 좋아.” 노인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할아버지는 안 계세요? 한 번도 못 들어본 것 같은데.”

  노인이 시래기 된장국을 떠 먹은 후 숟가락을 놓았다. “할아버지가 계셨지. 일본 히로시마에서 건너온 분이야.”

  “히로시마요?” 

  “그래, 원래 고향이 진해인데 일제시대 때 히로시마로 가셨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셨어. 원래 너 할아버지가 진해 계실 때 할머니와 친한 오빠 동생 사이였는데 일본으로 떠난 후에 결혼해서 부인과 자식도 있었다고 하더라…. 그 당시에는 전쟁 통에 뭐, 그런 건 흔한 일이니까.” 노인이 목을 축였다.

  “그래서 그동안 말씀이 없으셨군요. 그럼 외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는 아니네요. 저쪽에…. 배다른 집 사람들과 연락은 안 하고 지내시죠?” 

  “예전엔 가끔 씩 했었다. 그래도 네 할아버지가 고마운 게 일본에서 돈을 많이 벌어와 우리 공부도 다 시켜주고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셨다.”

  “그렇군요.”

  “네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오토바이 공장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왔어. 젊을 때는 얼마나 땅 부자였는지 모른다. 저기 아남에 땅을 많이 가지고 계셨어. 대지주였지.”

  “아남 요?” 

  “그럼. 지금은 창원에 저기 성주사가 있는 쪽이지 아마. 사람들이 할머니를 아남댁 마님이라고 불렀어.”

  “그런데 그 땅은 어디로 사라졌어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헐값으로 국가에 전부 몰수 당했어.”

  “몰수요?”

  “해방이 되었을 때 아남에 있던 일본 지주가 할아버지와 친분이 있어 그 땅을 급히 팔아치우고 일본으로 도망갔는데 그게 화근이 되었는지 신 정권이 토지 정책을 밀어붙일 때 할아버지도 손을 쓸 수 없었다고 그래. 그 당시에는 친일파 척결 같은 걸로 워낙 시끄러웠던 때라서…. 할아버지가 사기를 당했다는 말도 있고.” 

  “그런 일이 있었군요.”

  “네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유언이 뭐였는지 아냐?”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화장을 꼭 해달라. 육신의 가루를 장복산 전망대 쪽에서 바람에 날려달라고 하셨다.” 노인이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 때문 에요?”

  “아니. 언니와 같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싶다고.” 노인이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마틴은 휴지를 뽑아 노인에게 건넸다. “외할머니 언니요?”  

  “그래. 살아 계셨으면 네 이모 할머니가 되겠네.” 노인은 목각 인형의 옷과 모자를 벗겼다. 곳곳에 까맣게 그을린 흔적이 보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간병인이 철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여사님, 아들 식사도 많이 가져왔으니까 꼭꼭 씹어서 많이 잡수세요.” 그녀가 철가방에서 김이 나는 고슬고슬한 밥과 갓 구워 온 생선을 선반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예전에 들었던 적이 있는 지 처음으로 듣게 된 얘기인지 헷갈리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러브 스토리는 마틴의 어두운 마음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빅터의 죽음을 어느새 몰아내 버렸다. 그리고 물끄러미 바라본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타인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35


  네모머리 남자가 시애틀 카페에 도착한 후 세모머리 남자가 뒤따라 들어왔다. 곧이어 마술처럼 커피 기계가 돌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학원 버스 기사 죽은 것 맞아?” 네모머리가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 하고 상관도 없는데 괜한 오해 생길까 봐 걱정입니다. 무슨 일인지 하나 둘 자꾸 죽어 나가니까 찜찜하네요.”

  “그 멋쟁이 학원 버스 기사 놈 말이야, 맨날 벙거지 모자만 쓰고 다니는 연구소 놈하고 친해서 본격적으로 조사 좀 해보려고 했더니 그새 또 어디 가서 뒤져버린 거야?” 

  “며칠 된 것 같은데 밝혀진 거는 우울증 어쩌고 하는 것 같습니다.” 세모머리가 들어오는 손님을 힐긋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병신들 육갑하고 있네. 툭하면 우울증이야. 우울증으로 왜 그렇게 사람이 많이 죽냐? 자살률 1위 좋아하시네. 적게 잡아도 그 중 절반은 타살이다. 어 휴….”

  “그런 건 우리 형님이 잘 아시겠네요?” 세모머리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 이런 걸 업계 전문 용어로 뭐라는 지 알아? 묻지마 우울증이라고 하지. 우울증으로 죽었다 하면 시비 걸기 쉽지 않거든. 그래서 타살 혐의를 찾지 못하면 무조건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 되어 버리는 거야. 세상에 로켓 만들고 암 고치는 사람만 있는 줄 알아? 자살로 위장하는 숙련된 기술자들이 부지기수로 널렸어.” 그가 커피 잔을 들었다. 

  “아이스크림 학원 쪽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긴 합니다. 시냅스 연구소와 무슨 작당을 벌이는 건 지도 모르겠고.” 

  “서로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건데, 애초에 그 쪽에서 자꾸 우리 일을 간섭하니까 이런 사단이 발생한 거 아니야. 그 여자 원장이 매일 우리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우리 일을 염탐한 게 시작이지 안 그래?”

  “그럼요. 그런데 그 버스기사 놈 말입니다. 죽기 전에 산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팔자도 좋네. 산에나 다니고. 마셔! 마셔!” 네모머리가 세모머리 옆으로 가까이 붙었다. “자네에게 나중에 알려 주려 했는데 그 버스 기사 놈 미행하다 보니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어떤 겁니까?”

  “그 버스 기사 놈이 다른 놈을 미행하고 있더라 이거 야.”

  “정말입니까?” 

  “그래. 왠지 구미가 당겼지. 버스 기사 놈이 미행하던 놈은 젊은 친구인데 포르쉐를 몰아서 눈에 확 띄었지. 그 기사 놈은 애들 학원 버스를 몬다는 사람이 운전 실력이 형편없어. 포르쉐를 제대로 쫓아가지도 못하길래 내가 대신 추적 좀 했지. 참 희한한 건 이 포르쉐 놈이 구린내가 아주 진동하는 거야.” 네모머리가 살짝 이빨을 드러냈다. “이 놈이 누구 랑 접촉하고 있었을까?”

  “글쎄요.” 

  “어떤 늘씬한 모델 같은 중년 여자와 자주 만나더라 이거 야. 어디서? 아주 으슥한 데서.”

  세모머리가 입 맛을 다셨다.

  “야 임마! 왜 침을 꿀떡 삼키고 지랄이야? 그런 건 아니고. 그 여자의 정체가 시냅스 연구소 부원장이었다. 이 말씀이야. 그럼 답 나왔지?” 

  “전 무슨 말씀이신 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세모머리가 허리를 곧추 세우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단순해. 그 포르쉐 젊은 놈이 시냅스 연구소와 비밀스런 관계가 있었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그 버스 기사 놈이 미행한 거 아니겠어?” 

  “저도 모르게 언제 그렇게 진도를 빼셨습니까?”

  “위치 추적기 뒀다 뭐하냐? 슬쩍 붙이면 동선이 쫙 나오지. 아니 그 놈들 흘러가는 인생이 한 눈에 보이지. 그러면 게임 끝!” 

  “그럼 버스 기사를 죽인 범인은 미행하던 그 젊은 놈과 관련이 있을까요?” 

  “그건 아직 몰라. 그 기사 놈이 없어졌으니 포르쉐 놈이라도 쫓아야지 별 수 있어? 그래야 시냅스 연구소에 대해 뭐 라도 건질 수 있을 거 아니야. 우리도 숙제 제대로 안 한다고 압박 받고 있는 거 몰라? 이번에도 제대로 안 하면 이 카페도 한의원도 문 닫아야 돼. 이 프로그램 깔면 그 포르쉐 놈 추적 가능하니까 내일부터 네가 쫓아다녀!” 그가 짜증을 내며 폰을 내밀었다.

  “네!” 세모머리가 군인처럼 절도 있게 답했다.

  “조용히 얘기해!” 

  “한의원으로 이동 어떠십니까?” 

  “아까 들어올 때 못 봤어? 노인들 침 맞고 있어서 더 불편해. 특별한 일 없어도 그 놈 동향 하루 단위로 정리해서 보고해!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지원 요청하고.” 

  네모와 세모머리 남자들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통로를 지나 한의원으로 들어갔다. 침을 맞던 노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개량 한복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에 굵은 힘줄이 보이는 남자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생하세요!” 네모머리가 근육질 남자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 뒤를 세모머리가 종종걸음으로 뒤따라갔다. 

  “저기! 이상한 탐정 한 놈 알고 있습니까?” 근육질 남자가 사각 턱의 근육을 씰룩거렸다.

  “무슨 탐정 요?”

  “시내에서 조그만 개인 탐정 사무실을 하는 놈인데 예전에 우리 한의원 한 번 둘렀을 때 행동거지가 수상해서 조사를 해봤지요.”

  네모와 세모 머리 남자는 근육질 남자의 두터운 목을 주시했다. 

  “병이 있는 건지 말을 잘 못한다고 들었는데 희한하게 탐정 사무소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름은 부엉이 탐정사무소, 남동생을 데리고 다니면서 통역하듯이 의사소통을 맡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호…. 그건 원장 님이 참견할 바 아닌 것 같은데요. 허접한 탐정놀이 하는 놈이랑 우리가 무슨 상관이요?”  

  “그 탐정이 말이지. 당신이 감시하고 있는 춤 꾼의 형이란 말이야. 일본에서 보냈던 그 일반인 여자와 춤도 같이 추고 다니던 바로 그 놈의 형이라니까! 그리고….”

  네모와 세모머리가 시선을 주고 받았다. 


36


  태민은 성민이 가져온 파일을 들여다보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복잡한 의학 용어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무엇보다 곤란한 건 파일 내용이 전부 영어로 되어있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번역기를 돌리고 사전을 찾아가며 따라갈 수 있는 부분은 맨 앞에 나오는 두 장의 요약문이었다. 한 장은 자폐증을 발생 시키는 약물의 원리, 나머지 한 장은 자폐증을 치료하는 약물의 원리였다. 그래도 전반부는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약으로 자폐증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렇게 되면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것처럼 자폐도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퍼뜨릴 수 있다는 논리다. 이건…. 내용 자체가 사기일 가능성도 있다. 뻣뻣이 굳은 뼈가 꺾이는 소리를 들으며 목을 몇 번 돌렸다. 이 정도 파괴력이 있는 거라면…. 까딱 잘못하다 간 동생이 위험한 상황에 빠져들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혹시…. 이것으로 뭔가 부족하다. 숨겨 진 파일이 있을지 몰라 한참을 뒤적거리던 태민의 예상은 적중했다. BP001이라고 적혀있는 폴더 속에 감춰져 있던 동영상이 여러 개 나타났다. 첫 번째 동영상을 재생했다. 터치 패드를 누르는 손에 따라 모니터 속 그래프 수치가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영상이 나타났다. 이건 실제로 실험을 진행하는 상황을 편집한 것처럼 보였다.

순간 왼쪽 흉부가 극심하게 쪼여오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건…. 틀림없이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 영상이다. 오른손으로 통증이 있는 곳을 누르며 왼손으로 명함 집을 찾아 빠르게 뒤적거렸다. [김영광] 예전에 우연히 사건 하나를 제보하며 알게 된 형사다. 폰을 들어 명함을 찍으려 했지만 초점 잡기가 힘들다. 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오른쪽 다리부터 시작해 왼쪽 팔까지 온 몸이 감전된 듯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을 힘껏 뻗어 가까스로 폰을 잡아 성민의 번호를 터치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성민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모습이 뿌옇게 보였다.

  “형! 왜 그래?” 성민이 쓰러져 있는 태민을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이거 왜이래? 부딪혔어?” 성민이 휴지를 뽑아 피가 흘러내리는 태민의 이마를 닦았다. 

  아직도 한 쪽 다리가 부들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여기 찢어졌네. 와. 조금만 잘못했으면 병원 갈 뻔했어.” 성민이 휴지로 상처 부위를 세게 눌렀다. “요즘 너무 무리한 거 아냐?”

  태민은 이마를 만지며 자신이 본 파일의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진짜야? 완전 큰 일 났다.” 성민이 얼굴을 찡그렸다.

  태민은 쥐고 있는 명함을 책상 위에 올려 놨다. 

  “이 형사 저번에 형이 미제 사건 의견 제보했을 때 고맙다고 중국집에서 한 턱 낸 사람 맞지? 그 때 상다리 부러지도록 포식해서 잊을 수가 없네.”

  태민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달일을 부탁한 선배도 이 연구소 파일의 내용을 모르고 있었을 리 만무해. 그러니까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말이 틀리지 않네. 어쩐지 돈 많이 준다 했어. 아…. 나쁜 새끼.” 성민은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 열받아. 형은 형사한테 연락할 생각이지?” 

  너무 큰 사건이다. 달리 방법이 없다. 

  성민은 노트북을 자신의 방향으로 돌려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혹시 이 영상의 실험 대상이 원숭이나 쥐일 수도 있지 않아?” 성민이 노트북 스피커 무음 버튼을 끄자 음악 소리가 들렸다. 베트남어 같기도 하다. “이건 무슨 옛날 노래 같은데. 와 이 인간 노래를 흥얼거리네. 아주 즐겁게 생체 실험을 하는구나. 변태 같은 놈! 하기야 나 군대에서 맹장 수술할 때도 수술실에 들어가니까 군의관들이 메스를 들고 크리스마스 캐롤 틀어 놓고 웃고 있던데. 의사가 아니라 요리사 같더라니까.”  

  태민은 형사에게 만나자는 문자 메시지를 찍기 시작했다. 중요한 제보 거리가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잠깐만! 우리가 형사에게 이 파일을 넘겨준다고 치자. 그동안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도 소상히 알려주고. 그런다고 해서 시냅스 연구소의 전말이 밝혀질 수 있을까? 이건우씨 아들에 대한 이야기와 원장 가족 살인 사건도 전부 해결될 수 있을까? 솔직히 난 개인적으로 경찰을 안 믿어.”

  전송 버튼 위 태민의 손가락이 머뭇거렸다. 일견 맞는 말이다. 지금 연락하는 건 장점보다 단점이 많아 보인다. 우선 파일의 입수 경위를 밝히기가 어렵고 파일이 시냅스 연구소에서 만들어졌다는 것도 증명하기 힘들다. 거기에 사건이 공권력으로 넘어가 버리는 순간 우리 형제의 손에서 사건이 벗어날 가능성이 크다. 복잡한 절차를 타고 가느라 시간도 많이 지체될 것이다. 

  “형사에게 연락하는 건 옵션으로 남겨두고 일단 우리 둘이 할 수 있는데 까지 한 번 해보는 건 어때?” 성민이 코를 한 번 훌쩍였다. “처음엔 돈 좀 벌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그냥. 형하고 함께 끝까지 가보고 싶네. 재수 좋으면 미제 사건을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시냅스 연구소의 전말을 파헤칠 수도 있고.”

  태민은 잠시 머뭇거리다 명함 집을 덮었다. 적어도 시냅스 연구소를 압수수색할 수 있을 만큼은 증거가 확보되어야 한다. 그래야 경찰도 움직일 것이다.

  “진해역에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여자에게 양갱을 준 다음 형이 그 여자를 쫓아가보는 건 어때?”

  만약 그녀를 놓친다면…. 태민은 왼 손으로 턱을 괴었다. 

  “나 돈 욕심 내는 거 아니야. 아깝긴 하지만 어차피 일이 해결돼도 배달 대가는 가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대신 우리 형제는 더 큰 것을 얻겠지.” 성민은 활짝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태민은 이마의 따끔거림도 잊은 채 생각나는 것들을 화이트보드에 촘촘하게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37


  성민은 와인 색 세미 정장을 갖춰 입고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옷이 사람을 만든다고 방금 전까지 찌질하게 느껴졌던 취업준비생에서 모니터 속에서 금방 이라도 튀어나온 주인공이 된 듯한 우쭐함이 느껴졌다. 물론 착각이겠지만 참 이상하다. 큰 일을 앞두고 왜 이리 기분이 좋지. 안 주머니 깊이 찔러 넣은 기다란 물건을 다시 한번 만져본 후 형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출발했다. 진해역에서 약간 떨어진 마트 뒤편의 공터 주차장에 들어가자 긴 머리를 휘날리며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태민 형이 보였다.

  “형,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던 말던 우리 오늘 소고기나 실컷 먹고 오자!” 성민이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민은 대학 시험을 앞둔 수험생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여섯 시 정각을 알리는 라디오 소리가 들리자 의식을 치르듯 귀마개를 빼서 전용 상자에 넣었다.

  “이마는 좀 어때?” 성민이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태민을 향해 힐끗 고개를 돌렸다.

  묘한 긴장감에 다친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성민이 음악을 틀었다. 베트남어로 부르는 노래가 나왔다. “안개 낀 밤의 데이트라고 알려진 곡인데 1963년에 일본에서 영화 주제곡으로 나와서 히트를 쳤어. 이 노래는 프랑스 샹송을 능옥란이란 베트남 가수가 베트남어로 불렀던 거야.” 성민이 볼륨을 조금 낮췄다.

  태민은 구슬픈 목소리를 들으며 실험 당하는 소년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상상했다.

  “동영상에 나온 놈이 나이가 많은 지 이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어. 그것도 베트남어로. 형이 귀가 엄청 좋으니까 이 놈의 목소리를 잡아내는 건 문제도 아닐 거야.” 성민이 목 캔디 하나를 태민에게 내밀었다.

  태민은 고장 난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목 캔디를 입 속에 넣었다. 

  “시냅스 연구소가 설립된 지 자그마치 이십 년은 넘었으니까 그 세월에 잡혀간 애들도 무수히 많았을 거 같아.” 

  그렇지. 소리 소문 없이 시냅스 연구소로 빨려 들어간 아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파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지만 스위스에서 이런 걸 사려는 걸 보면 실험이 성공했다는 거 아니야? 어떻게 보면 노벨상 감인데 이거. 그래도 대단하다 정말.”

  연구의 힘은 자본의 힘이다. 에메랄드 갤러리처럼 물심양면으로 뒷받침 해주는 든든한 뒷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형과 내가 물밑에서 열 일하고 있는 거 사람들은 알까? 솔직히 이런 기분은 처음인데 형과 같이 있으니까 점점 자신감이 생기는 건 뭐지 싶어. 평소에는 춤 출 때나 행복했지, 이렇게 속이 뻥 뚫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막 몸에 칭칭 감겨 있던 쇠사슬이 두둑 두둑 끊어져 나가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희한하게 해방감이 드네. 아주 좋아!”

  태민은 성민의 들뜬 마음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 떨리는 오른발 뒤꿈치를 다른 발로 꾹 눌렀다.

  “엄마, 아빠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형 걱정만 하는 거 보고 난 마음이 진짜 무거웠거든. 형은 아는 지 모르겠지만 어린 나이에 내가 꼭 가장이 된 것처럼 앞날이 두려웠어. 형의 상태가 이렇게 좋아 질 줄 알았다면 당시에 그런 부담감도 전혀 느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어찌 되었건 일어나지도 않을 앞날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가 싶다.” 성민이 음악을 라디오 방송으로 바꿨다.

  태민은 위험한 일을 앞두고 동생이 마음에 담아뒀던 속내를 꺼내는 게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실수하지 않으려면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처리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신호등 타이밍이 좋아 몇 번의 교차로에도 빨간 불에 걸리지 않고 예상보다 식당에 빨리 도착했다. 고급식당 답게 주차를 도와주는 유니폼 차림의 사람이 수신호로 위치를 알려줬다. 내부에 들어서자 무전기 같은 것을 차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양 볼에 보조개가 들어가는 여자가 다가오더니 Room 7 이라고 적혀 있는 방에서 가까운 홀 좌석으로 안내했다. 메뉴판을 들춰보니 첫 페이지부터 평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심상치 않은 가격대의 음식들이 펼쳐졌다. 성민은 중간 가격대 고기를 삼 인분 주문했다. 벌써 홀 내부에 가득 찬 최고급 한우 냄새에 침샘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태민은 차가운 보리차를 마시며 시력 테스트 하듯 멀리 떨어진 벽시계를 확인했다. 여섯 시 삼십 분. 

  성민도 폰을 한 번 꺼내 보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약속한 사람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기가 나온 후 성민은 보조개가 들어간 여직원보다 먼저 집게를 잡아 불 판에 버섯부터 올렸다. 

  주방과 홀 소음 때문인지 태민이 아픈 사람처럼 중간 중간 미간을 찌푸렸다. 

  성민이 불 판에 고기를 올렸다. 잠시 후 출입구 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태민이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후 성민과 날카로운 시선을 교환했다. 태민이 집게를 들어 고기를 뒤집었다. 

  “먼저 먹고 있어.” 성민은 보리차를 단번에 다 마신 후 티슈로 입가를 닦았다.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성민의 여유 있던 표정이 전쟁을 목전에 둔 전사처럼 비장해졌다. 

  태민은 핏기가 사라진 고기를 성민의 접시에 옮겨 닮았다. 방금 몰려온 무리들은 적어도 스무 명은 넘게 느껴졌다. 맞은편 방의 시끌벅적한 소리에 집중력이 흐려지지 않게 태민은 온 신경을 키 큰 외국인에게 맞췄다. 

  성민은 안 주머니에 손을 한 번 넣어 보고는 곧바로 일어났다. 그리고 계단이 보이는 홀 끝으로 앞만 보며 걸어갔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걸음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졌다. 엘리베이터가 옆에 있었지만 타지 않았다. 계단을 천천히 딛고 이 층에 올라가니 바로 옆에 남자 화장실이 보였다. 폰을 확인하니 여섯 시 오십 팔분. 성민은 최대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쉰 후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변 기 다섯 개, 대변 기 세 개, 세면대 두 개의 평범한 구조가 한 눈에 들어왔다. 세심한 면이라면 소변기 한 대가 로봇 모양의 어린이용이고 기저귀 교환 거치대도 한 쪽 벽면에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잠시 후 키가 족히 190센티는 되어 보이는 사람이 꾸부정한 자세로 들어와 웃는 표정으로 시선을 맞췄다. 친근한 영어학원 선생님 스타일이다. 저 사람이겠지.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세면대 앞에서 천천히 손을 씻었다. 그가 소변을 본 후 세면대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다. 귀를 열고 주사위 얘기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가 티슈를 두 장 뽑아 손을 닦았다. 그리고 두 장 더 뽑은 채 나란히 선 성민을 거울로 쳐다보며 말했다.

  “주사위를 굴려 봐!” 

  성민은 잠시 주춤했다. 

  뜸을 들이던 그가 했던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성민은 반사적으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를 중얼거렸다.

  그의 입가가 고장 난 자동문처럼 아주 천천히 벌어졌다. 그리고 쥐고 있던 티슈 두 장을 성민에게 건넸다. 안에 딱딱한 물건이 만져졌다. 성민도 티슈 안에 든 물건과 안 주머니 속 물건을 바꿔서 그에게 건넸다. 

  “굿 럭!” 그가 거울에 비친 성민을 향해 윙크 한 후 성큼성큼 등을 보이며 나갔다. 

  성민은 안 주머니 물건을 다시 한번 만져본 후 동일한 동선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먼저 좀 먹지 그랬어.” 성민은 주변을 둘러보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태민은 개선 장군 같은 성민의 표정을 보고서야 고기 두 점을 집어 참기름 장에 찍었다. 

  “부지런히 먹자. 또 가야 되니까.” 성민도 접시에 놓인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고기가 다 없어졌다. 성민은 차돌박이 이인 분을 추가했다.

  태민이 파김치를 입에 넣었다. 그 때, 홀 앞쪽에서 영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 층에서 계단을 내려와 출입문 쪽으로 남자의 목소리가 이동하고 있었다. 태민은 신경을 집중하려 해도 소음이 겹쳐져 쉽게 들리지 않았다.

  “왜 그래?” 성민은 불안해하다 태민의 눈빛을 보고서야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영어가 들리는 쪽으로 따라 나갔다. 키가 큰 남자가 통화를 하며 주차장 구석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더 이상 쫓아가지 않고 입구에 서서 폰을 보는 척 그의 대화에 청각 주파수를 맞췄다. 

태민의 귀에 이해할 수 없는 빠른 영어와 독일어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 하나가 귀에 박혔다. [KILL]. 낌새가 좋지 않아 슬며시 자리로 돌아가 성민에게 위험할 수 있다고 신호를 보냈다.

  차돌박이를 굽는 성민의 손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일곱 시 삼십 분. 예정대로 빠져나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 “형!” 성민이 고기를 태민의 접시에 담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마트 주차장에 형 내려주고 삼 분 정도 있다 출발할 게. 내 뒤에 누가 따라오는 지 형이 꼭 체크해줘!” 

  태민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더 이상 고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경찰서로 바로 가버릴까?” 

  태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찰서로 가면 계획이 틀어진다.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시간 끌 이유는 없다. 태민은 성민에게 가자는 손짓을 했다.

  성민은 계산서를 챙겨 카운터로 갔다. 옆에 놓인 선반 위로 차곡차곡 포개어 놓은 양갱 박스가 보였다. 

  “후식은 안 드시고 가십니까? 여기 양갱 맛있습니다.”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양갱 박스를 쳐다봤다. 

  성민은 대꾸하지 않고 계획대로 양갱 한 박스를 포함해 현금을 지불했다. 매니저는 지폐 감별사처럼 오만원권 현금을 위아래로 뚫어져라 관찰했다. 

  식당을 나온 성민이 시동을 걸었다. 주변은 특별한 움직임이 없다. 그는 양갱 한 개를 꺼낸 후 그 자리에 안 주머니의 물건을 끼워 넣었다. “형, 양갱 좀 들어줘. 하나 뺀 거는 형이 먹고.”

  태민은 양갱 박스를 받아 들고 식당 입구를 경계했다. 당장이라도 키가 큰 남자가 뛰쳐나올 것 같은 낌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가자!” 예상보다 십 분 이르다. 어, 저거, 언제 왔는지 까만 고양이가 전조등 불빛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 차를 조금 움직여봐도 꿈쩍하지 않는다. “잠깐만.” 성민이 차에서 내렸다. 

  태민은 고양이를 직접 만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성민에게 말했다. 성민이 저리 가라고 허공에 발길질만 하고 있다. 고양이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먹을 거 없지? 아까 뺀 양갱이라도 줄까?” 성민이 차로 되돌아왔다.

  태민이 손으로 엑스 자를 긋고 주차 관리인을 가리켰다.

  성민이 입구 근처에 서 있는 주차 관리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태민은 슬며시 물건이 들어있는 양갱 하나를 다시 꺼낸 다음 물건은 주머니에 집어넣고 양갱은 원위치 시켰다. 

  주차 관리인이 성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뛰어오더니 망설임 없이 고양이를 두 손으로 살며시 안고 식당 쪽으로 되돌아갔다. 

  태민은 관리인이 돌아가는 모습에 애써 놀란 표정을 감췄다. 자신이 준비한 장난감 고양이를 그는 아무렇지 않게 진짜 아기 고양이 다루듯 소중히 대했기 때문이다. 저 관리인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뭐가 잘못된 걸까? 설마 저 꺽다리가 우릴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성민이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비밀 협상일수록 깨질 확률이 높다. 예나 지금이나 속고 속이는 역사가 비일비재하니까. 

  “나도 모르겠다. 죽이 됐든 밥이 됐든 간에 일단 끝까지 가보자.” 성민은 전투기 조종사라도 된 것처럼 속력을 내며 수시로 전후 좌우를 확인했다. “마트 앞에서 내려 줄게. 아까 얘기한 거 알지? 내 뒤에 미행하는 차 있는 지 잘 봐줘.”

  마트 앞에 도착한 성민의 차에서 내린 태민은 뒤편 공터 주차장까지 걸어가서 자신의 차에 탔다. 심호흡을 크게 한 후 핸들을 천천히 꺾으며 마트 앞에 정차 중인 성민의 차 뒤로 넉넉히 간격을 벌리고 붙었다. 성민이 비상등을 끄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태민이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진해역에 도착한 시간은 여덟 시 사십 오분. 성민이 진해 역 광장 중앙에 차를 대고 태민은 역사 옆 큰 소나무 앞에서 시동을 껐다. 고개만 살짝 돌리면 성민의 차가 잘 보이는 위치다. 어딘 가에 만나기로 한 여자가 숨어있을 수 있다. 

  성민은 양갱 박스를 다시 열어 보려다 그만뒀다.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슴이 크게 쿵쾅거렸다. 굿 럭! 속을 알 수 없는 키 큰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떠올랐다. 

  나 폐쇄된 역이오 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어둠이 내린 역사와 정면에 있는 주차장은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태민에겐 귀마개 없이도 지낼 수 있는 천국 같은 환경이지만…. 태민은 주차 된 차량 주변의 어두컴컴한 구석구석을 세심히 살펴봤다. 어린 시절 느꼈던 암흑의 두려움이 순식간에 헐떡이는 사람 숨소리로 바뀌었다. 여자가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는 소리다. 태민은 성민에게 카톡을 보냈다.

  태민의 카톡 메시지를 확인한 성민은 자신의 뺨을 몇 차례 두들겼다. 잠시 후 모자, 마스크부터 레깅스까지 어둠의 보호색으로 전신 무장한 여자가 성민의 차 쪽으로 닌자 같이 달려와 거침없이 창을 두드렸다. 성민이 창을 내렸다. 

  “양갱 가져오셨어요?” 모자를 눌러쓴 그녀가 숨을 고르며 또박또박 말했다. 

  비스듬히 몸을 비틀어도 닌자 같은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성민은 무릎 위에 올려 놓았던 양갱을 창 밖으로 내밀었다.

  그녀가 양갱 박스를 받아 들고 백 팩 안에서 물건을 꺼냈다. 들었던 대로 비타500 박스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어 성민의 얼굴을 쳐다봤다. 순간 시선이 교차했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눈길에 성민은 반사적으로 눈을 깔았다. 

  그녀는 물물 교환이 끝나자 레이디 버그처럼 날렵한 동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성민은 태민에게 배달이 끝났다고 카톡을 보냈다. 

  태민은 시동을 걸고 천천히 그녀가 달려가는 방향으로 우회전했다. 그녀는 북원 로터리까지 전력 질주 한 후 우측으로 돌아 오 분 정도를 더 뛰었다. 그리고는 하천 변 주택가 부터 여유 있게 걷기 시작했다. 태민도 길가에 차를 세운 채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 때 골목 귀퉁이에서 큰 그림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았다. 순간 놀란 그녀가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녀와 그녀를 쫓는 추격자가 태민의 차 옆을 차례대로 지나갔다. 태민은 급히 차를 돌려 그들을 쫓아갔다. 그녀는 근처 지리에 익숙한 듯 망설임 없이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방향을 틀어가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태민도 차를 대충 세우고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그들을 시야에서 놓쳐 버렸다. 태민은 덜렁덜렁 거리는 가스총을 한 손으로 고정하고 그들의 거친 호흡 소리에 의존하며 전속력으로 뛰었다. 다행히 멀리 보이는 지하보도 안 쪽으로 연이어 뛰어가는 여자와 남자가 보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그들을 쫓아갔다. 지하 보도를 빠져나왔을 때 다시 시야에서 그들이 사라졌다.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걷다 좌측 귀퉁이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프로방스풍 공방에 시선이 멈췄다. 공방의 쇼윈도 너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여자의 굳은 표정이 한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거리를 둔 채 등을 보이고 서 있는 거구의 손님은 그녀를 뒤쫓는 사람이 틀림없다. 백 팩을 맨 검은 옷의 여자와 거구의 남자! 정지된 화면처럼 공방 내부의 시간은 멈춘 것처럼 보였다. 태민은 성민에게 SOS를 쳤다. 여자가 공방 중앙에 있는 진열대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돌자 술래잡기 하듯 남자도 따라서 돌기 시작했다. 등을 보이던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밖에서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태민과 그들의 시선이 충돌했다. 남자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출입문 쪽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태민은 출입문을 활짝 열었다. 푸른 눈동자에서 거구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상황 파악을 한 듯 여주인이 벽 구석을 가리키며 CCTV!라고 외쳤다. 거구가 입꼬리를 올리며 태연하게 밖으로 빠져 나왔다. 태민은 안 주머니 속의 가스총을 잡은 채 멀찌감치 뒤로 물러섰다. 거구는 태민을 한 번 째려보고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보도를 따라 그대로 걸어갔다. 공방 안에서는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여주인을 검은 옷의 여자가 어색한 웃음으로 만류하고 있었다. 보도를 따라 걷던 거구가 코너를 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성민의 차가 굉음을 내며 가게 맞은편에 멈췄다. 공방 여주인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검은 옷의 여자가 쇼윈도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양갱 드린 사람입니다. 일단 제 차를 타고 여기에서 벗어나시죠.” 성민이 검은 옷의 여자에게 외쳤다.

  검은 옷의 여자는 공방 주인을 안심시킨 후, 순순히 성민을 따라 나섰다. 태민은 거구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며 보조석에 탔다. 성민은 미행이 붙지 못하도록 차들이 많은 대로로 합류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성민이 룸 미러로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

  “글쎄요…. 신뢰가 깨졌다고 봐야겠죠.” 그녀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조금 전의 긴장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는 여기서 좌회전해서 도로 가에 세워주세요.”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조심하세요.” 성민이 좌회전 지시 등을 켰다. “전 선배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이거는…. 성민이 다리 밑에 둔 비타 500박스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당신들 잘못 아니니까 그건 가지고 가시고 어찌 됐건 오늘 일은 잊어 주세요.” 그녀가 가방을 움켜쥐고 내릴 준비를 했다. 

  “근데 양갱 속 물건은 확인해 보셨어요?”

  “확인할 필요도 없겠죠.” 

  “무슨 말씀이신 지요?”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그녀가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돌변하며 차 문을 던지듯 닫고 내렸다. 

  태민은 성민이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잘 대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무단 횡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이제 어떡하지?” 성민이 비타500 박스를 보며 말했다.

  비타500 박스는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돌려주지 않는 게 안전하다. 태민은 그녀의 모습이 녹화된 차량 블랙박스를 가리켰다.

  “알았어. 블랙박스 영상 빼서 잘 보관할 게. 그런데 돈은 나중에 돌려주면 된다고 쳐도 이 사단은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겠다.” 성민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갑자기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태민이 머뭇거렸다.

  “갑자기 불안하게 왜 그래?” 성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태민을 바라봤다. 

  태민은 주머니에 있던 물건을 꺼내 성민에게 내밀었다. 

  “아니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양갱 속에 있던 거 형이 빼돌린 거야?” 성민이 고함을 쳤다.

  태민은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죽이 되든 밥인 되든 부탁을 받았으면 배달은 제대로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형은 나에게 말도 한마디 안하고 멋대로 일을 꾸민 거야?”

  태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게 어떤 일인지 알고도 그랬던 거야? 만약 들켰으면 내 목숨도 위험했다고. 역시 삶의 신조라는 것은 지키라고 있는 것 같아. 옛날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쭉 형하고 경찰은 절대 믿으면 안 되겠어.” 성민은 분을 참지 못하고 거칠게 핸들을 꺽었다.

그리고 태민의 집 앞에 차가 멈출 때까지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38


  이제껏 형제 관계가 지금의 사태처럼 틀어진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태민은 마음 상한 동생을 달래기 위해 과거의 좋았던 추억까지 모두 소환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태초부터 이어진 굳건한 형제 관계가 끊어졌을지도 모른다. 그건 세상에서 나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성민은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모양인지 전화도 카톡도 불통이다. 화이트보드를 옆으로 밀어 계란 판 모양의 방음지 한 쪽을 살짝 벗겨낸 후 벽 속 작은 공간에서 초코 바 모양의 물건을 쥐어 봤다. 이게 진짜 비트코인이라면 전 세계 어디를 가든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그냥 이대로 비행기를 타고 먼 섬나라로 훌쩍 떠날 수도 있다. 다른 초코 바 모양의 물건도 꺼내 들었다. 여기에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폐증 연구 자료가 들어있다. 물론 사기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양 손의 물건을 월드컵 우승 트로피마냥 높이 들어 올리며 환희의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상상 속의 스포트라이트를 끈 후 성민에게 전화를 재차 시도했다. 역시 받지 않는다. 그는 화이트보드 오른편 상단에 붙어있는 형사 명함을 가운데로 옮겼다. 


  “어이쿠 오랜만입니다. 신수가 훤하시네요.” 김 형사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능글맞게 웃었다. 

  촌스러운 말투와 가래 낀 목소리만 아니면 형사 라기보단 형사를 연기하는 배우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제가 태민씨 개인 사정은 잘 알고 있으니까 이거 준비해왔거든요. 개떡같이 두드려도 찰떡같이 알아듣겠습니다.” 그가 태블릿과 무선으로 연결된 미니 키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놨다. 

  멋을 잔뜩 부린 여주인이 하이 톤의 목소리를 내며 시키지도 않은 음료를 들고 나왔다. 형사의 단골 가게가 틀림없다. “오늘 만든 수정과인데 한 번 드셔 보세요. 갈증이 싹 가실 거예요.”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의 몸보다 큰 파티션까지 가지고 와서 테이블 앞쪽을 병풍처럼 둘렀다. 구석 자리가 시선이 차단된 요새로 변했다.

  “사실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가족 사건은 장기 미제로 분류되어 있어요. 우선순위에서 한창 떨어져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상하게 관심이 많이 가더라고요.” 그가 수정과를 단번에 마신 후 소주를 마신 것처럼 감탄사를 내뱉았다. 

  태민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 생각엔 말이죠. 그 동안 공공연하게 인터넷 같은데 떠도는 내용은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정확하기도 하고 약간 부풀려졌다고 해야 할까….”

  태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 많은 사람들이 떠드는 거 보면 사인을 전부 질식사로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외 질식사. 태민씨도 그렇게 알고 있죠?”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 개인적으로 내 질식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태민은 외 질식과 내 질식의 차이를 설명해달라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음…. 쉽게 말해서 외 질식은 외부의 강한 압력에 의한 질식입니다. 목이 졸려서 사망했다, 호흡기가 막혀 질식했다 그렇게 볼 수 있고 내 질식은 약물 같은 걸로 인해 신체 내부에서 호흡기 이상이 발생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실 강한 외력에 의해 일가족 세 명이 거의 동시에 질식되는 건 좀 미스테리입니다. 물론 어린 아이가 외 질식 사인으로 제일 먼저 사망했지만, 혈관 검사 결과 나 몸의 흔적 등을 종합해 볼 때 의문이 들 수밖에 없어요.”

  태민은 형사에게 구구절절 모든 것을 밝히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태민씨도 같은 생각 아닙니까?”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침입자가 남긴 270미리의 신발 족적, 어린 아이의 기도에서 발견된 완두콩 크기의 실 매듭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태민씨가 저번 미제 사건에 대해 제보하셨을 때도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 자체에 의문을 가지시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이번 사건도 그렇게 보시는 것 같네요.” 그가 손가락 관절을 차례대로 꺾었다. “근데 절 보자고 한 다른 이유가 있다고….” 

  태민은 단도직입적으로 원장 가족 사망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이건우 부자 같다고 말했다. 키보드 치는 손이 빠르게 넘어갈 때 마다 김 형사의 눈동자가 왕눈이 곤충처럼 부풀어 올랐다. 더 이상 키보드를 두드렸다가는 그의 눈동자 실핏줄이 터질 것만 같았다. 

  김 형사는 빈 수정과 잔을 탈탈 털어 마신 후 태민의 의사도 묻지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이건우 부자라….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아서 다른 사람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거든요. 그런데 묘하게도 태민씨 이야기는 뭔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뚫어져라 태민을 쳐다보며 말했다. “도대체 이 사건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겁니까?” 

  태민은 사무실 출입문 앞에 협박 카드가 놓여 있었다고 솔직히 얘기했다. 

  “아이고…. 선생님! 그런 거는 꽁꽁 마음에 묶어 두면 병 납니다. 그렇게 좋은 머리를 가지고 협박이라니요.” 뒤이어 그의 입에서 밥풀 같은 쌍시옷의 욕설이 튀어나왔다.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아이스크림 원장 살인 사건에 도대체 이건우라는 사람과 그 아들은 왜 튀어나온 겁니까? 희한한 접근 방식이네요. 이건우 부자는 이 사건 조사할 때부터 수사 선상에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된 건가요?” 

  태민은 차분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선생님 상상력은 여전히 경이롭네요. 그러니까 요약하면 이건우라는 사람의 아들이 실종되었는데 그걸 아이스크림 원장이 계획적으로 주도한 거다. 그리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이건우가 원장에게 복수를 했다. 이거 죠? 우와…. 이거 대박인데!” 주인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가 목젖을 몇 번 움직이며 커피를 단번에 다 들이 킨 후 또다시 소주 감탄사를 내뱉았다. “이건우 아들이 아이스크림 학원에 다녔습니까?”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우라는 사람이 방귀 좀 뀌는 사람입니까?”

  태민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 돈 좀 있습니까?”

  이건우씨 집 사정은 넉넉한 편이 아닌 것 같다. 

  “명망 있는 학원 원장이나 되는 사람이 자기 학원 수강생을 납치할 이유가 돈 아니면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애 자체를 탐냈던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학원 원장이 인신매매 할 것도 아닌데. 있는 집 자식 담보 삼아 한 밑천 잡아보려 했을 가능성은 있겠죠. 그런데 그 사람 그리 여유 있지 않다면서요?” 그가 비아냥거렸다.

  키보드의 손이 자폐증까지 치다가 순간 멈췄다. 

  “자폐증이라…. 이건우씨 아들이 자폐증까지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가 얼음을 오물거리다 소리 내며 깨 먹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상하지 않습니까?” 

  태민은 시냅스 연구소에 대해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곳은 이십 년이 넘은 자폐 연구소이며 불법적인 생체 실험도 자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바로 그곳으로 이건우씨 아들이 잡혀갔던 것이다. 

  생체 실험이란 말에 그의 볼에서 얼음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지금, 저 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태민은 그의 불신감에 잠시 멈칫거렸다. 

  “제가 태민씨를 신뢰 안 하는 건 아닌데 이건 좀 너무 앞서 나간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무슨 근거라도 있어야지 어디 비비기라도 하지.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살인 사건 조사하다가 난데없이 자폐 연구소에 생체 실험까지 나오면 우리 수사가 산으로 가버리지 않겠어요?” 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댔다. 

  수사가 산으로 간다…. 예상대로 회의적인 반응이다. 태민은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동생이 신변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실토했다. 

  “좋습니다. 워낙 중요한 사건이니까 충분히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해하니까 신변 안전 이런 거는 걱정 안 하시도록 제가 조치 하겠습니다.” 그가 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할 얘기도 많은 것 같은데 지금 선생님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그가 답변도 듣지 않고 태블릿을 챙기기 시작했다.

  태민이 키보드를 그에게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계산대 앞에서 손사래 치는 여주인에게 만원 권 두 장을 쥐여줬다. 


  “세상에! 이게 다 뭐하는 겁니까?”김 형사는 사방이 계란 판 모양의 방음지로 막힌 사무실로 들어서며 절규했다. 

  태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참 선생님 독특합니다. 여기에 해리포터 마법학교로 통하는 비밀 문이 있다고 해도 믿겠습니다.” 그가 실제 비밀 문을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태민은 화이트보드를 미리 닦아 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가방에서 태블릿과 키보드를 꺼내 태민에게 내밀었다. “태민씨 취향이야 있겠지만 두 가지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외부로 소리가 나가는 걸 싫어하던지, 외부에서 소리가 들어오는 걸 싫어하던지.”

  둘 다 맞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후자다. 태민은 그에게 귀마개를 보여줬다. 

  그가 귀마개를 자신의 귀에 끼워봤다. “혼자 일하십니까?”

  태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떻게 하다 탐정 같은 일을 하게 되었어요? 아직 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돈이 안되지 않습니까?” 그가 의자에 앉아서 태블릿을 만지며 말했다. “태민씨 능력이야 제가 잘 알지만. 차라리 법조계나 경찰 공무원 쪽으로 도전해 보시지 그랬습니까?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는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키보드를 태민 가까이 밀었다. “만약에 태민씨 말이 진짜라면 이건 대한민국, 아니 전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고도 남을 특종입니다. 미제 살인 사건 해결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아시겠어요? 그 뭐냐, 선생님 죠리퐁 같은 과자 먹습니까?”

  태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죠리퐁이라고 오래된 과자가 있어요. 봉지 뒷면에 보면 실종 아동 사진들이 실려 있거든요. 그런 것만 딱 보더라도 사라지는 애들이 예나 지금이나 엄청나게 많다는 반증 아닙니까? 자폐 장애아들도 그런 캠페인에 간혹 나올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사라진 애들이 실험 대상으로 납치되었다고 밝혀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 말하면 잔소리 죠.” 

  태민은 시냅스 연구소를 조사할 방법에 대해 문의했다. 

  그가 입꼬리를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방법이야 여러가지가 있지요. 증거가 확실히 있으면 과격하게 밀어붙이고, 미심쩍기만 하면 은밀하게 숨어들고.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런 건데요.” 그가 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어디 보자. 아 여기 있는 거. 이 연구소 예전에 한 번 가본 것 같은데.” 

  태민이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예전에 장애인 복지 시설에 있는 애들이 여기 가서 운동도 하고 실내 암벽 등반도 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 연구소 오래전부터 시설이 으리으리 했어요. 왠 만한 대학병원 치료실도 비교가 안된다고 그랬지 아마. 거기 책임자가 미국에서 오래 공부한 수재일 겁니다. 천재 뇌과학자라는데…. 글쎄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뭐 고향에서 연구를 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속내야 알 수 없죠.” 

  태민은 왠지 그의 말투가 비꼬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구라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 돈이 많이 들지 않습니까? 거기는 돈 있는 회장들이 꾸준히 후원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래도 세상은 아직 살 만하지 않습니까? 몰라서 그렇지 대단한 분들 참 많습니다.” 

  태민은 시냅스 연구소 편을 드는 듯한 그의 뉘앙스에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이 양의 탈을 쓴 늑대인 경우도 더러 있죠. 만약 이 연구소에서 그런 끔찍한 짓을 했다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때려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폰으로 명함관리 앱을 검색했다. “아, 여기 있네요. 마틴 강! 시냅스 연구소 소장입니다. 제가 당장이라도 만나보겠습니다.”

  태민은 같이 만나고 싶다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안될 건 없습니다 만 처음부터 의심하는 모양새를 보이면 좋을 게 없습니다.”

  태민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때 그의 폰이 울렸다. “어, 그래. 전과 없고 아들은 실종 상태에 출생지는 일본 히로시마, 오케이!” 그가 부하인 듯 보이는 사람과 짧게 통화를 했다. “이건우라는 사람 아들이 전산망에는 아직 실종 상태라고 뜨는데 확실히 찾은 거 맞습니까?”

  태민은 이건우가 아들을 찾았지만 사정 상 집에 은신하고 있을 거라고 타이핑했다.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기 금연이지요?”

  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마시고 제가 직설적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이건우 부자 잡아들일 물증 있습니까?”

  태민은 이건우씨의 비정상적으로 큰 손과 악력을 기르기 위한 이상한 운동, 사건 현장에 남아있던 신발 사이즈와 걸음걸이 등 수상한 부분에 대해 키보드로 상세히 두드렸다. 

  갑자기 김 형사가 목 아랫부분까지 붉어지며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조사는 제법 많이 하셨는데. 그걸로는…. 아 죄송합니다. 웃음이 안 그치네. 어림도 없어요. 절대 안 됩니다.” 그가 달아오른 볼을 위아래로 문질렀다. “미궁에 빠진 사건의 경우, 선생님은 현장을 뒤집어 봐야 된다고 하셨는데 정작 본인이 현장 증거에 매몰되면 되겠습니까?”

  태민은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건 현장에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면 수사에 혼란을 유도하기 위한 범인의 함정일 수도 있다.

  “자 다시 핵심만 정리해보겠습니다. 이건우는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학원 원장이 배신을 하고 자신의 아들을 시냅스 연구소에 팔아 넘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여기까진 좋습니다. 이건우의 범행 동기가 성립하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건우가 아무리 손의 힘이 좋고 족적이 사건 현장에 남겨진 것과 비슷하다고 해도 그건 증거 효력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추론을 이어 나가려면 출발점부터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되거든요.”

  출발점이라면….

  “이건우 아들이 연구소에 잡혀 있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부터 확보해야 합니다.”

  아직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다.  

  “이 사건 협박을 당하셨다고 했는데 뭐 받았다는 거 좀 보여 줄 수 있습니까?”

  태민은 책상 맨 밑 서랍에서 택배 상자를 꺼내 분홍색 카드를 형사에게 건넸다.

  “이게…. 뭐하는 거죠? 초딩도 아니고. 태민씨가 사건 해결 못하면 죽인다는 뜻이네요. 제가 볼 땐 이건…. 위협이 아니고 장난 수준입니다.” 그가 택배 상자를 뒤집어 보고 분홍색 카드도 이리저리 만져봤다.

  태민은 선뜻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 택배 상자부터 한 번 봅시다.” 그가 태민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태민은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앞면하고 뒷면 테이프 붙인 거 보면 알죠. 매끈하게 마무리가 안되어 있죠? 테이프 많이 안 부쳐본 손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 카드도 한 번 보세요. 글자를 잘 보면 자음과 모음이 붙어있긴 한데 무언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건 왼손잡이가 쓴 표식입니다.” 그가 이런 건 기본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마로 흘러내린 김 형사의 앞머리 한 가닥이 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제가 필적도 좀 볼 줄 알아서 말씀드리는 건데 그냥 이거는 장난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런 걸 협박이라고 느꼈으면 저는 일 년 365일 협박에 시달렸다고 감히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가 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무튼 아직 부족하지만 여러모로 감사드리고 일단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외부 공유를 자제하겠습니다. 태민씨하고 동생분 당분간 이 앱 하나 까시고 귀찮겠지만 그냥 켜 놓으세요. 무슨 일 생기면 거기 빨간 거 보이죠? 누르면 어디에 계시던 그 곳으로 우리가 바로 출동합니다.” 

  태민은 그가 알려 준 앱을 설치하며 동생에게도 전달했다.

  김 형사는 와치폰을 확인한 후 사무실에서 나갔다. 


39


  태민 형에게 신변 안전 앱이 도착했다. 성민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바로 설치했다. 아직 제주도 선배와 연락이 닿지 않고 있고 형에 대한 분노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어떻게 동생을 속이면서 까지 그런 위험한 짓을 할 수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잘못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동안 형에게 해준 게 얼마인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라면 동생이 위험에 빠지는 것도 마다 않는 철저한 나르시스트! 성민은 마그마처럼 솟구치는 옛 일들에 주먹으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햇살 좋던 어느 오후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성민은 그냥 지나치려다 얼핏 태민이라는 이름이 들려 그곳으로 달려갔다. 초등학교 건물 옥상에서 형이 검은 우산을 들고 난간 위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부들거리며 떨고 있는 다리가 멀리 서도 보일 정도였다. 누군가 가 뒤에서 형에게 뛰어내리라고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체 없이 건물 입구에 있는 소화기 핀을 뽑고 구경꾼들을 향해 뿌려대며 할 수 있는 한 크게 고함을 질러 댔다. 옥상에서 형을 가스라이팅하던 패거리들이 놀라 도망쳤는지 곧바로 소란은 진정되었고 태민 형은 우산을 들고 추락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게 형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었던 나를 형은 배신으로 되갚았다. 검은 옷의 여자와 독일 거인은 내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지금도 어디 선가 나를 찾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텐데…. 분을 참지 못한 주먹이 계속 떨렸다.

  냉장고에서 사과 한 개를 잡았다가 어디 보관할 지 밤새 고민했던 비타500 박스를 안쪽에서 끄집어냈다. 그 놈의 돈 때문에 괜한 짓을 해버린 것 같은 후회가 몰려들었다. 박스를 열어 지폐 한 다발을 집어 들었다. 이건…. 한 눈에 봐도 다발 옆면의 색이 이상했다. 성민은 끈을 풀고 안쪽 지폐 하나를 빼 보고는 비타500 박스를 집어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런 개 자식! 선배마저…. 내 목숨까지 담보로 잡아야 했어? 이런 쓰레기들 같으니….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형이 아니었으면 사기꾼들에게 철저히 농락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성민은 마스크와 모자로 무장한 후 집을 나섰다. 


  성민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태민이 놀란 토끼 눈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돈 가짜야! 형이 가지고 있는 물건 두 개 다 가짜일 거야. 확인해 봐!”

  태민은 벽 속 비밀 공간에서 물건 두 개를 꺼냈다. 먼저 비트코인 파일을 열어본 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가짜 지? 그럴 줄 알았어. 자폐 치료제 관련 연구 파일도 엉터리 일거야. 이 사기꾼 놈들이 서로 속고 속였던 거지. 하마터면 억울하게 이용만 당할 뻔했어. 형 때문에 복장 터지는 일은 면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좋아하네. 이 죽일 놈들이….”

  태민은 자폐 관련 연구 파일의 요약 부분을 복사해 구글 논문 표절 프로그램에 붙여 놓고 돌렸다. 영어는 모르지만 숫자 99%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이곳 저곳에서 짜깁기한 정보가 틀림없었다. 숨겨 진 실험 동영상을 클릭했다. 

성민이 다가와서 영상을 확대했다. “어짜피 가짜인데 이런 영상은 왜 넣어 놓은 거야? 신빙성 있게 보이려고 별 짓을 다한 거구만.” 성민은 얼굴을 찡그렸다.

  태민은 영상을 앞으로 돌렸다 뒤로 돌렸다 반복했다.

  “내가 괜한 짓 벌여서 미안해.” 영상에 집중하고 있는 태민의 뒤에서 성민이 말했다. “그 형사 만났어?” 

  태민은 형사와 만나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얘기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경찰에 알리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한편으로 걱정도 돼. 자폐 파일도 가짜면 이건우씨 아들이 시냅스 연구소로 끌려가 실험 당했다는 건 어떻게 증명할 거야? 사실 난 자신이 없어졌어. 형한테는 미안하지만 이건우가 범인이라는 것도 동의가 안 돼. 형도 봤지? 다리도 불편하고 기력도 없는 노인이 손만 크다고 사람 셋을 동시에 질식사 시킨다는 게 말이 돼? 실제로 보니까 그렇게 잔혹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고. 거기에 물증도 없고 형 말만 들었지 아직 그 사람 아들도 본 적이 없어.” 

  태민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베트남어를 흥얼거리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노톤의 남자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래. 이 영상에서 노래 부르는 놈 형이 잡아낼 수 있겠지? 넓은 방에서 음악까지 틀어 놓고 혼자 모니터를 보는 거 보면 연구소에서 높은 놈 일거 같은데.”  

  태민은 남자의 목소리를 귀속에 담았다. 

  “그나저나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하지? 그 형사가 도와준다고 해도 불안해 죽겠어. 이거 누르면 경찰 오는데 얼마나 걸릴까?” 성민은 폰에 깔린 앱을 만지작거렸다.

  태민은 책상 서랍에서 동생을 위해 준비한 가스총과 벨트형 가죽 권총 집을 꺼냈다. 

  “우와. 형 준비성이 대단하다. 내가 이래봐도 군대에서 특등 사수 였다니까…. 근데 이거 어떻게 쓰는 거야?” 성민이 서툰 손으로 가스총을 만지작거렸다.

  태민이 설명서를 펴서 보여줬다.

  “세상 참 좋네. 이런 호신 무기 하나 지녀도 마음가짐이 180도 달라지는데. 진짜 든든하다. 심장 박동이 막 미친 듯이 뛰다가 이제 정상으로 회복한 것 같아.” 성민이 심장을 누르며 말했다.

  태민이 빙그레 웃었다.

  “그 독일 거인 놈이 양의 탈을 쓰고 웃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 지를 않아.” 성민은 권총 집 벨트를 차고 셔츠를 내려 가렸다

  김 형사 성격이라면 곧 시냅스 연구소 소장을 만날 것이고 그 즉시 피드백을 전해 줄 것이다.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걸. 내 생각에 그 인간들 예전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 일거야. 하늘이 두 쪽 나도 명명백백한 진실이 끈적끈적한 관계에서는 통하지 않을 수 있는 게 이 세상이거든. 나 같아도 밥 한번 더 사주고 정감 있게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 최고지, 돈도 안되는 진실만 냅다 들이대며 따지려는 인간들은 별로야. 안 그래?” 성민은 서부의 카우보이처럼 당장이라도 총을 뽑을 자세를 취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철부지 동생.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언제나 그래왔지. 그렇지만 언제든지 인간의 마음은 바뀔 수 있다. 풍향이 바뀌는 것처럼. 밥이 다가 아니다.

  “참, 저번에 그 검은 옷 여자하고 독일 거인이 들어갔던 지하도 옆 공방에 CCTV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거 확인해 보는 건 어때? 형사가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금 들여 장만한 내 차 블랙박스에도 검은 옷 여자가 떡 하니 찍혀 있으니 두 개를 조합해보면 그럴듯한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태민은 폰에 메모를 시작했다.

  “검은 옷의 여자가 시냅스 연구소 기밀을 빼돌리려 했다는 건 사실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가짜 기밀이긴 하지만.”

  검은 옷의 여자와 독일 거인이 공방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는 그들의 꿍꿍이 수작을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검은 옷의 여자가 찍힌 자동차 블랙박스 영상과 공방 CCTV 장면을 김 형사와 연구소 소장에게 보여 주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주의를 끌 수 있을 것이다. 태민은 컴퓨터를 끄고 의자를 밀어 넣었다. 


  “예? 해킹요?” 성민이 되물었다. 

  검은 고양이 캐릭터 앞치마를 두른 공방 여주인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요전에 가게 간판 뜯어 간 거는 그나마 이해를 해요. 요즘 너무 살기 힘드니까. 그런데 CCTV 카메라도 아니고 프로그램 해킹은 어이가 없네요.사실 그동안 해킹된 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야밤에 나타난 수상한 여자와 키 큰 외국인이 그랬을 수도 있다고 짐작되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서로 쫓고 쫓기는 상황이었다 치더라도 우리 가게에 들어와서 횡포를 부린 것도 아니고 뭘 훔쳐 가지도 않았으니까요. 굳이 프로그램까지 해킹할 이유가 없지 않아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거 없어진 건 없습니까?” 성민이 진열대를 둘러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없어요.” 그녀가 매장 안 쪽 방향을 가리켰다.

  “현관문이나 열쇠가 부숴 지지는 않았습니까?” 태민의 말을 듣고 성민이 대신 물었다.

  “전혀. 그러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죠.”

  “수상한 손님들은 없었습니까?” 

  “아니요 그런 사람들 없었어요. 우리 가게는 알음알음 입 소문을 듣고 아기자기한 예쁜 공예품이나 액세서리 사러 오는 사람들이 다예요. 여성 손님들이 대부분이고요. 그런데 선생님들은 경찰입니까? 그 사람들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그녀가 안경을 고쳐 쓰며 태민을 힐끗 쳐다봤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성민이 말끝을 흐렸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외국 손님들인 것 같은데, 서너 명이 한 번에 들어와 이것저것 물어보고 정신이 없을 때가 있었어요. 그 날을 제외하면 특별히….” 

  태민과 성민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민이 동백꽃이 그려 진 에코 백 두 개와 벚꽃 문양의 우산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성민은 꾸물거리다 볼펜 두 개를 태민에게 건넸다. 태민이 지갑에서 현금을 꺼냈다. 

  “젊은 분들이 성실하신 것 같은데 항상 몸 조심하세요.” 여 주인은 걱정스러운 듯 문 밖까지 나와 형제를 배웅했다. 


40


  마틴은 비상 가동 시스템 스위치를 눌렀다. 거대한 기계 소리와 함께 실험 대상 아이들이 머무르는 블록형 컨테이너 숙소 전체가 지하로 들어가며 완벽히 외부에서 은폐되었다. 지진이 일어나도 핵 공격을 받아도 끄떡없는 지하 요새로 변신한 것이다. 물론 그런 용도로 만들어 진 것은 아니다. 비상시에는 연구소의 모든 것이 지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컴퓨터 네트워크 시스템의 보안을 이중, 삼중 강화하려는 일본 회장님의 요구를 내가 들어주지 않았다면 이런 최신 하드웨어 시설들도 지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실험 대상을 지키려면 아니 완전히 은폐하려면 이런 철두철미한 시설은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지만…. 일본 회장님은 연구소에서 생성되는 모든 자료들을 내부 망, 외부 망, 통합 망의 3중 구조를 통과하게 만들어 버렸다. 다시 말하면 내부 자료의 외부 반출 자체가 회장님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한 구조인 것이다. 연구 내용에 대해서 사사건건 관리 당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 연구는 회장님이 제안했고 회장님이 돈과 사람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종 결과물은 이미 머리 속에 다 들어있다. 나를 절대로 헌신 짝 버리듯 함부로 내치지는 못할 것이다.  

  사무실 전광판이 삐삐 소리를 내며 깜빡였다. 김 형사가 로비로 방금 들어왔다는 메시지다. 마틴은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짙은 눈썹에 얇고 기다란 눈매가 매력적인 남자가 목례하는 것이 보였다. 

  “건물이 시원시원하네요.” 김 형사는 양 손으로 턱을 번갈아 매만졌다. 새싹처럼 돋아난 잔잔한 수염이 눈에 띄었다. 

  “다음에는 일본 라운드 한 번 가시지 않겠습니까?” 마틴은 안내 데스크 뒤편에 위치한 접견실로 그를 안내했다. 

  김 형사는 안내 데스크의 무뚝뚝한 남자를 한 번 흘겨보고는 접견실로 들어갔다. 

  마틴이 구석에 비치된 커피 메이커 앞으로 다가가 김 형사를 돌아봤다. “커피 하시겠습니까?”

  “좋죠. 소장님께서 직접 타 드십니까? 커피도 셀프가 대세인가 봅니다. 나도 똑 같은 거 하나 부탁합니다.” 그가 소파에 등을 대며 팔걸이에 양팔을 올렸다.  

  “아이스크림 학원 빅터 건은 아직 해결 안 되었습니까?” 

  “예?” 김 형사가 잘 안 들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요.” 마틴은 양 손에 커피를 들고 형사 옆에 와서 앉았다. “아이스크림 학원 버스 기사 있지 않습니까? 빅터 차라고. 그건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 난 또 뭐라고. 타살 혐의 없음으로 종결되었어요. 그 사람은 딱 봐도 우울한 독신 중년의 전형이죠. 극단적 선택을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부류지요.” 그가 커피 향을 음미했다.

  어이가 없다. 유쾌한 빅터 성격이 죽은 후에 우울하게 조작되는 구나. 그래도 마틴은 토를 달지 않았다. 형사가 연구소까지 직접 행차한 용건에만 집중할 필요가 있으니까.

  김 형사가 테이블에 명함 하나를 올려 놓았다. “혹시 이 친구 압니까?”

  “이게 뭐 죠? 흥신소 같은 겁니까?” 마틴은 명함을 눈 가까이 갖다 댔다. 

  “비슷하죠. 거기 그 친구는 좀 특별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그가 말끝을 흐렸다. 

  특별하다…. “그런 게 있습니까?” 마틴은 실눈을 뜨고 명함에 적힌 부엉이 탐정 사무소란 우스꽝스러운 단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예전에 장기 미제 사건 하나를 그 친구의 도움으로 해결한 적이 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말도 못하는 거 보면 나사 하나 빠진 모지리 같으면서도 어떤 면에서 보면 성능 좋은 컴퓨터 같기도 하거든요.”

  그런 건 내 전공이다. 당연히 서번트 증후군의 주 증상이지. 지금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으려는 건가. 자폐 연구를 하다 보면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접하게 되는 유형이다. 자폐 전문가 앞에서 천재 탐정 얘기 따위나 꺼내는 이유가 뭐 야. 마틴은 본론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커피 잔을 들었다.

  “사실은 그 친구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김 형사가 커피 잔을 소리 나게 내려 놓았다.

  “무슨 소리요?” 

  “이 연구소에서 무슨 실험 같은 것을 한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인지 직접 확인해 보려고 왔습니다.” 그가 커피 잔을 들며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마틴은 평온한 표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했지만 눈가가 약간 떨리는 건 제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탐정 나부랭이가…. 틀림없이 연구소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인 탐정 명함이 돋보기로 확대한 것처럼 크게 보였다.

  “저는 사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요. 겸사겸사 박사님 얼굴도 볼 겸 온 거니까 심려 마세요. 말도 안 되는 불법적인 일을 박사님이 할 턱이 없죠. 제가 박사님과 인연이 얼마인데 그 애송이 친구 말을 듣겠습니까?” 김 형사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틴은 머리 속 추리회로를 풀로 가동했다.

  “그런데 말이죠. 그 탐정 친구가 난데없이 이건우라는 사람의 아들 얘기를 꺼내는데 점입가경이더라고요. 실종이 되고 여기로 잡혀오고 실험을 당하고…. 이건 심하더라고요.”

  마틴은 막 시동이 걸린 경운기처럼 덜덜거리는 오른쪽 눈가를 손으로 눌렀다. 

  “내가 볼 때 그 친구는 지구인 같지 않은 면이 있어서 여간해서 거짓말은 안 하는 데 말이죠.” 그가 두터운 어깨를 돌리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많이 당황스럽네요. 어디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답니까? 혹시 그 탐정 친구 제가 직접 만나봐도 되겠습니까?” 마틴은 눈가를 세게 누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거 사진 한 장 찍어 놓으셔도 됩니다.” 그가 검지로 명함을 가리켰다. 

  마틴은 폰을 꺼내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사진을 찍었다. “탐정이라면 그런 가짜 뉴스를 퍼뜨리면 안 된다는 걸 알 텐데. 진짜 모르고 그랬다면 제가 직접 본보기를 보여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기 박사님, 이왕 온 김에 연구소 한 바퀴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혹시나 했던 일은 예고도 없이 일어난다. 마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형사는 마틴의 뒤를 따라 로비 중앙으로 나왔다. 

  “우와, 여기는 애플 본사 같은 느낌이 풍기네요. 넓은 중앙 광장에 파릇파릇한 잔디가 쫙 깔려 있고 내부의 통유리가 중앙 광장을 사면으로 둘러싸고 있는 구조! 개방감이 기가 막힙니다. 동그란 도넛 구조였다면 완전 애플입니다.”

  촐싹대기는. 생각보다 형편없는 형사다. 애플 본사를 가보지도 않은 주제에 어디서 사진 한 번 본 것 가지고 저렇게 아는 척 지껄이는가. 사람이 정교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마틴은 문을 열고 중앙 광장으로 나왔다.

  “완전 항공모함인데…. 밖에서 볼 때와 딴 판이네요. 가만 있어보자….” 그가 갑자기 점프를 하더니 가볍게 착지하며 물었다. “여기 땅 밑에 또 뭘 만들어 놨나 보죠?” 

  “바로 밑에 재활 운동시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저기 중간 중간에 틈새들 보니까 딱 알겠습니다. 빛이 지하에도 잘 들겠어요.” 

  어수룩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관찰력은 날카롭다. 마틴은 몸을 돌렸다.

  “여기 운동 시설은 저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피트니스센터 대중화 안 되었을 때부터 최신 시설로 유명했잖아요? 기구들이 막 광이 난다고 그러던데. 진짜 좋은 일 많이 하시네요. 구경 한 번 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마틴은 그와 함께 다시 건물로 들어와 지하로 연결된 계단으로 내려갔다. 겹겹의 보안 장치를 뚫고 들어간 재활 운동실은 텅 빈 축구장 같이 황량했다.

  “우와. 이렇게 좋은 시설이 텅텅 비어 있습니까?” 김 형사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이것저것 만져보기 시작했다

  “지역의 특수학교, 재활 병원과 연계된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좋은 일 하시는 분들 본받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거 유지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후원하는 사람들도 정말 대단하네요.” 그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줄들을 만져본다. “특이하긴 하네요. 확실히 일반적인 피트니스 센터에서 보던 기구들이랑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운동 목적이 다르니까….”

  “제가 간섭할 건 아니지만 연구소 이름이 재활 연구소가 아니고 왜 시냅스 연구소 입니까? 작명 잘못한 거 아닙니까?” 그가 피식 웃었다. 

  태민은 시냅스가 뇌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만 말했다. 어차피 설명해도 못 알아들을 테니까. 

  “음…. 재활 운동을 통해서 온 몸의 감각을 깨우고 뇌를 좋게 만든다.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잡아 준다. 뭐 그런 취지입니까?”

  “비슷합니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그가 구석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틴이 따라가려 했지만 김 형사가 괜찮다며 혼자 걸어갔다. 

  김 형사는 화장실 바로 옆에 연결된 샤워실 문을 열었다. 여기저기 바닥에 물기가 흥건하다. 공기 속에는 아직 샴푸나 바디클린저의 잔 향이 느껴진다. 그는 샤워실을 나와 화장실 변기에 서서 눈을 감았다. 김 형사의 머릿속에 생체 실험이라는 단어가 둥둥 떠다녔다. 과연 있을 법한 일일까…. 이런 시대에 생체 실험이라니. 만약 사실이라면 어떻게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까. 그는 세면대에서 물기를 이용해 앞 머리를 쓸어 넘긴 후 검지 손가락을 거울에 살짝 대었다. 진짜 손가락과 거울에 비치는 손가락 사이에 간격이 크게 벌어져 보였다. 이건…. 취조실에서 사용하는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거울 안 쪽에서 창을 보는 것처럼 화장실 쪽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의미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핸드 드라이어로 손을 말린 후 화장실을 나왔다. 

  김 형사는 마틴이 있는 입구 쪽으로 걸어가며 큰 소리로 외쳤다. “요즘 연구는 잘 되십니까?”

  “연구라는 게 농사 같은 거라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당장 성과가 나타나고 그러진 않지요.”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그런 훌륭한 연구에 후원하시는 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돈을 많이 투자했다고 연구소에 실력 행사를 한다 거나 따로 대가를 바라거나 하는 것은 없겠지요?” 

  “그렇죠. 그래도 제가 중간 중간 상황 보고는 칼같이 합니다. 행여 형사님께서 후원자에 대해 궁금하신 거라면 그건 저희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마틴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 보셨으면 이번엔 제 연구실 좀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 좋죠!”

  마틴의 뒤에서 계단을 올라가던 김 형사가 갑자기 무릎을 잡고 멈췄다. “아이고. 여기 통로가 이 계단 하나 밖에 없습니까? 엘리베이터도 안 보이고.” 그의 말이 쩌렁쩌렁 공간을 울렸다.

  “반대쪽에 화물용 엘리베이터와 비상 계단은 있습니다. 왜 그러시죠?”

  “별거 아닙니다. 중앙광장 사이즈하고 지하 운동센터 사이즈하고 딱 안 맞는 것 같아 서요. 피자로 치면 지상과 지하가 피자 네 조각 정도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뭐 충분히 구조 상 그럴 수 있지만.”

  피자 네 조각이라…. 은폐 시킨 방들의 면적으로 따지면 얼추 비슷하다. 마틴은 그가 어설픈 육체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틴은 김 형사와 함께 중앙 로비 안 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어! 잠깐만! 잠깐만!” 김 형사가 로비 안내 데스크 앞에서 갑자기 멈춰 서더니 머리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저기 저거! 무엇에 쓰는 물건입니까? 여기서 무슨 전통 공연 같은 거도 합니까?” 김 형사가 데스크 안 쪽 벽에 붙은 선반에서 황금색 탈을 가리켰다. 

  “아…. 가끔 보안 상 필요할 때 방문 손님이 쓰는 가면 같은 겁니다.”

  “보안상?” 

  “그렇지요. 저희 연구소가 워낙 보안이 민감하다보니…. 저거 써도 걸어 다니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부딪히거나 넘어질 위험도 없고. 첨단 가면이라 특정 부분만 가려주거든요….”

  “독특하네요….” 김 형사는 마틴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마틴이 사무실 앞에서 잠깐 멈추자 인증되었습니다 라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이야 보안이 진짜 살벌하네. 안면 인식 시스템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구만,” 그가 마틴을 따라 들어가며 주변을 유심히 살펴봤다. 

  “여기가 제 연구실이자 사무실입니다. 저기 맞은편에 부소장 실이 있습니다.” 

  “사실상 두 분이 여기 브레인 이시죠?”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는 다른 곳에 비해 연구원들이 많지 않거든요.”

  “쪽수로 밀어붙이는 것보다…. 소수의 천재들이 세상을 바꾸지 않습니까? 훨씬 대단한 거죠.”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시뮬레이션 환경이 좋아졌습니다. 저희 연구도 굳이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틴이 왼쪽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렇습니까? 어디를 가나 그 놈의 컴퓨터가 일자리를 다 빼앗는 시대가 도래했네요. 하기야 연구원들이 밤새워서 실험할 일을 AI가 뚝딱 끝내버리는 세상이 왔으니까.” 그는 창가에 서서 중앙 광장을 바라봤다. “고향이 여기라고 하셨죠? 어머니도 여기 계시고.”

  “그렇습니다.”

  “어쩌다가 중학교 때부터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까?” 

  “어머니 아는 분 소개로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교육열이 대단하신가 봅니다. 아직 보살핌이 필요한 자식을 외국에 보내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집안에 여유도 좀 있으셨을 거 같고….” 

  마틴은 손사래를 치며 사무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요즘도 공 자주 치십니까?” 김 형사가 골프채 휘두르는 흉내를 냈다.

  “자주 안 갑니다. 요즘은 물고기 잡는 거 좋아합니다.”

  “물고기요?” 김 형사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럼 언제 라운드 말고 낚시나 한 번 갑시다!” 그가 마틴을 따라 사무실을 나왔다. “저기가 부소장 실이죠?” 그가 지나가며 맞은편 방을 가리켰다.

  “그렇습니다.” 

  “여기서도 중앙 광장이 시원하게 보이네요. 뷰가 정말 좋습니다.”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말했다.

  그러다 엘리베이터가 삼 층에서 멈췄다. “여기는 실험실입니다.”

  “진짜 조용하네. 여기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이네요.” 그는 마틴의 한 걸음 뒤에서 텅 빈 복도를 따라 걷다 BP라고 적힌 흰색 철문을 가리켰다. “여기는 뭐하는 곳입니까?”

  마틴의 머릿속에 BP001의 배시시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연구가 잘 진행된 케이스를 뽑아 놓은 곳입니다.”

  김 형사가 몇 걸음 걷다 급브레이크를 밟듯이 멈췄다. 농구 코트 위 운동화가 바닥에 마찰하는 소리가 공간을 날카롭게 찔렀다. “여기도 잠깐 볼 수 있습니까?”

  “그럼요…. 보안 상 자세히는 못 보여드리니까 양해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그는 마틴을 뒤따르며 한 뼘 이상 될 것 같은 두께의 철문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여기는 쥐 같은 거 없습니까?” 

  마틴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는 시냅스 가소성이라는 분야를 주로 연구하는데 일반적으로 쥐도 실험에 사용됩니다. 해마에 전기 자극을 주는….” 

  “네, 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딴청을 피웠다. “여기 들어오니까 분위기가 꼭 병원 건강검진 받을 때 MRI 찍으러 온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쥐도 MRI 찍습니까?” 그가 기계를 둘러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네?” 

  “아닙니다.” 그는 목 가래를 삼켰다. “장비들이 전부 비싸 보인다는 거 말고는 봐도 잘 모르겠네요.”

  마틴과 김 형사는 실험실을 나와 로비로 내려왔다. 

  “박사님 구경 한번 잘 하고 갑니다. 제가 좋은 데 아니까 언제 물고기 잡으러 한 번 갑시다.” 그가 주먹 인사를 한 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마틴은 그의 뒷모습을 매섭게 째려봤다. 

  문을 나설 것 같던 그가 갑자기 자동 출입문 앞에서 우두커니 멈춰 섰다. 그리고는 뜸을 들이며 천천히 뒤로 돌더니 마틴을 향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부담스러운 눈 웃음을 지으며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숨소리가 들릴만한 거리까지 와서 야 멈춰 섰다. 

  “붐비는 도심 한 복판에서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연인이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눈 웃음 속에 노려보는 눈동자가 날카롭게 반짝였다. 

  마틴은 기괴한 형사의 행동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탐정 친구 말입니다. 저희가 신변 보호 중이니까 혹시 라도 만날 의향이 있으시면 저에게 먼저 연락주세요! 꼭 그렇게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그가 고 연차 민방위 대원처럼 경례를 한 후 로비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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