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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08번뇌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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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2. 2024

문이 고장난 자동차와 함정

(41~48)

41


  성민은 댄스 학원으로 향하다 태민의 연락을 받고 지름길로 방향을 틀었다. 서둘렀지만 도로가 북새통이라 태민의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 사십 분이 넘게 걸렸다. 손잡이를 잡아 던지듯 열고 들어갔는데 럭비 선수 같이 떡 벌어진 어깨가 보여 순간 멈칫했다. 낯선 손님이 고개를 돌렸다.

  “김영광이라고 합니다. 기억 나시죠? 저번에 중국집에서 식사 한번 했는데….” 영화에서 자주 본 듯한 아우라가 공간에 가득했다.

  “네….” 성민은 엉거주춤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태민씨가 동생 분도 함께 만나면 좋겠다고 해서.”

  “예….” 성민은 형의 표정을 살폈다. 벌써 이런저런 것들을 형사와 많이 공유했다는 눈치다.

  “저번에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까 동생 분이 형보다 조금 더 잘 생기셨네요.” 김 형사는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가능성이 제로인 칭찬에 성민이 머리를 긁적였다.

  “신변보호 잘 해드리려면 협조 잘 해 주셔야 합니다.” 그가 형제의 표정을 번갈아 살피더니 갑자기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진지하긴, 농담입니다.” 

  태민이 성민에게 형사와 나눴던 대화에 대해 설명했다.

  “야…. 이거 참 별 일이 다 있네. 두 분은 지금 어느 나라 말로 대화했습니까? 제가 영어는 어쩌다 한 단어 씩은 알아 듣거든요. 그런데 두 분 대화는 아는 단어가 하나도 안 들리네요.” 김 형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형사님, 저희 형제 말을 믿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민이 그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믿어주고 말고 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사기 못 치는 사람은 그냥 딱 보면 알거든요. 사실 제 전공이 그쪽이라.”

  성민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제가 줄을 한 번 놔 드릴 테니까 시냅스 연구소 소장을 한 번 만나보세요. 만나보니까 그 친구, 제가 예전에 알던 그 친구가 아닌 것 같아요. 깜빡이 안 키고 한번 쑥 들어가 보니까 밑천이 확 드러났다고 할까요…. 선생님들 말이 맞을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드디어 저희 편이 생겼네요. 그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근데 그쪽에선 모르쇠로 일관하지 않을까요? 저희가 만나서 자백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무슨 증거를 확보할 수는 더더욱 없을 것 같고요.” 성민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역시 탐정은 형이 하는 게 맞네요.” 그가 다리를 꼬았다.

  성민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뒷수습은 저희가 책임질 테니까 두 분은 송곳같이 정교한 질문으로 상대의 가슴에 구멍을 내고 오면 됩니다.” 

  “왜 그래야 하죠? 괜히 자극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상대가 초조해집니다. 서두르다 보면 허점이 드러나게 마련이죠. 우리가 연구소로 들어가는 것 보다 그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야 승산이 있습니다.”

  “밖으로 끌어낸다는 게 무슨 말씀입니까?”

  “만약 선생님들 말이 사실이면 그 연구소 소장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어떤 수를 쓰더라도 선생님들 입을 막으려 할 거 아닙니까?” 그가 꼰 다리를 바꿨다. “그 연구소 소장 성격으로 볼 때 벌써 소문의 출처와 소문이 퍼진 정도를 파악하려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그 틈을 선생님들이 정신 사납게 휘저어 버리면 소장은 판단력을 잃고 회유책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회유책은 돈을 의미합니까?”

  “그렇지요.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선생님들은 거기에 응하시면 되고. 우리는 함정에 덫을 잘 설치해 놓으면 되고. 일타쌍피죠?”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소의 비밀이 밝혀지면 이건우의 아들이 당했던 생체 실험의 전말도 밝혀진다. 그러면 자연스레 이건우가 벌인 원장 살인 사건도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이번 사건, 형사님도 비밀로 처리하고 계십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것도 없는 상태라서 후배 몇 명하고 만 비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태민은 형사의 옆 얼굴에서 왠지 모를 의심이 느껴졌다. 잘못하면 연구소 측에서 형사를 포섭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지금 그가 말했던 모든 상황이 뒤집힌다. 

  “연구소 소장이 엄청 효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능력에 아직 까지 장가를 못 갔는지 모르지. 아무튼 어릴 때 미국에 혼자 유학가서 부모의 정을 제대로 못 받고 자랐는지 지금은 껌 딱지처럼 어머니 옆을 지킨다고 하네요. 틈만 나면 [브리즈] 라는 요양원에 어머니를 보러 다닌답니다.” 그가 일어섰다.

  자기 부모는 그렇게 살뜰히 챙기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실험하는 그런 잔인한 연구소를 운영할 수 있을까.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제 연구소 소장의 아킬레스건이 어딘 지는 파악하셨죠?” 형사가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붙이며 태민과 성민을 번갈아 쳐다봤다. “저는 연구소 자금 줄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태민은 성민에게 에메랄드 갤러리까지 갔던 이야기를 꺼냈다. 성민이 기억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님, 시냅스 연구소와 에메랄드 갤러리가 관련되는 건 아닌가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파악한 바로도 그 갤러리가 주 자금줄 중 하나지요. 그런데 다른 한 군데가 미심쩍단 말입니다.”

  “어디입니까?”

  “아이스크림 학원입니다.” 

  태민과 성민의 놀란 시선이 교차했다. 

  “그 학원이 전국 체인 망을 가지고 있는 꽤 큰 집단입니다. 거기서 오랫동안 시냅스 연구소를 후원하고 있지요. 수상한 건 그 학원의 지분 구조를 보니까 정점에 마키노 시즈카라는 일본인이 있다는 점입니다.”

  마키노 시즈카…. 태민의 눈이 반짝였다. 

  “얼핏 보면 우리나라 정서상 일본 자본이 운영하는 학원 사업에 대해 반발심 같은 게 있을 수 있겠죠.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 소유주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인지 이 학원이 사회복지사업에 참 열심이에요. 후원 사업을 하는 건 정상적인 기업활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고요.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선한 기업의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 전략이죠. 그런데….” 그가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게 그렇게 단순 하지가 않아요.”

  “무슨 말씀인지요?”

  “시냅스 연구소 지분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을 것 같습니까?”

  태민과 성민은 동시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연구소 소장, 부소장이 다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제3의 누군 가가 그 바지 연구원들을 조종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그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고개를 크게 젖혔다. 

  태민과 성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그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후자입니다.”

  “형사님 말씀은 결국 그 연구소도 아이스크림 학원이랑 관련이 있다. 이 말씀이시죠?” 

  김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님은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평소에는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 필요는 없지요. 저도 월급 받고 사는 사람인데 내 일 만해도 버겁습니다.”

  “아이스크림 학원은 왜 하필 한국에서 그럽니까?”

  “전 세계 곳곳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수도 없이 벌어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다들 먹고 살기 바쁘니까 뉴스로 떠 먹여 주는 것만 받아먹어서 그렇지. 어쨌든 우리는 에메랄드 갤러리와 아이스크림 학원 쪽으로 조사를 집중할 테니까 선생님들은 연구소 소장 만나서 밑 밥 잘 깔아 놓으세요.” 그가 사무실을 나가려다 멈칫거렸다. “참, 그 소장 물고기 잡는 거 좋아한답니다. 진해에서 갈 수 있는 곳이야 뻔하니까…. 소장한테 연락 오면 바로 알려드릴 게요. 신변호보 앱 잘 켜 놓으시고.” 


  태민은 김 형사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금일 저녁 일곱 시 삼십 분에 그가 자주 가는 찻집에서 연구소 소장과 약속을 잡았으니 만나 보라는 것이었다. 태민은 성민에게 메시지를 보여줬다. 

  “진짜 빠르네. 김 형사 성격 바로 나온다 나와.” 성민은 일어서서 화이트보드 주변을 서성였다. “형, 저번에도 형사 그 찻집에서 만났다고 했지?”

  똑같은 장소다. 김 형사의 단골집이면…. 덫을 치고 있을 것이다.

  “진해역 그 검은 옷 여자 얘기 꺼낼 거야? 너희 연구소에 기술을 팔아 넘기려는 배신자가 있는데 그건 알고 있어? 이렇게 약 올리듯 시작해 볼까?”

  연구소 소장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연구소에 내부 첩자가 있다는 미끼를 던지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얘긴 아직 김 형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소장에게 먼저 선전포고 했다 간 김 형사에게 혼선을 줄 수 있다. 

  “하기야 검은 옷 여자가 줬던 연구소 자폐 파일은 가짜지. 얘기해봐야 득이 안될 것 같기도 하네. 일단 이건우와 그의 아들 이야기에만 집중하자.”

  태민은 동의하는 눈빛을 보냈다. 

  “만약 소장이 돈으로 우리 입을 막으려는 게 아니라 진짜로 입 막아서 죽이려 들면 어쩌지? 안 그래도 요즘 불안해 죽겠는데….” 성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럴지도 모른다. 돈을 주는 건 미봉책에 불과하니까. 그래도 김 형사가 자기 단골 가게를 미팅장소로 잡은 데다 두 눈 뜨고 지켜보고 있을 거니까 소장은 부담을 느낄 것이다. 당연히 섣불리 움직이긴 힘들다. 

  “취미가 낚시라면 그 소장 성격을 알겠는데. 쉽게 걸려들지 않을 지 몰라.”

  그래서 김 형사도 연구소 내부가 아니라 외부로 그를 끌어내려 하는 것이다.

  성민과 태민은 약속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화이트보드에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마치 면접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형제는 시나리오를 쓰고 가다듬었다.


  태민은 중원 로터리를 돌아 찻집에서 조금 떨어진 길가에 차를 세웠다. 저녁 일곱 시 정각이다. 성민이 숨을 크게 내쉬자 감염된 것처럼 태민도 덩달아 숨을 크게 내쉬었다.

  “우리 참 대단하다.” 성민이 주먹으로 핸들을 반복해서 두드렸다.

  태민은 가스총이 든 점퍼 안 주머니를 문지르며 감촉을 느꼈다.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형이 좋아하는 올드 팝이네. 이거 카멜의 롱 굿 바이 맞지? 왠지 가사가 지금 상황에 잘 안 어울린다….” 성민이 고개를 숙였다. 

  태민이 시동을 끄고 블랙박스가 잘 켜져 있는 지 확인했다. 차 문을 열기 전엔 안 주머니를 한 번 더 만지작 거렸다. 

  “설마 무슨 일 터지겠어?” 성민도 폰의 신변보호 앱을 다시 터치한 후 차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행인 한 명 보이지 않는 거리를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몇 걸음 만에 도착한 것 같은 착시 현상을 느꼈다. 일곱 시 이십 분. 코너를 돌아 찻집 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제일 안 쪽 구석 자리에 벙거지 모자를 쓴 남자가 보였다. 여 주인은 홀로 카운터 안쪽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란히 걷던 성민이 쇼트트랙 결승선을 앞둔 선수처럼 막판에 태민의 앞으로 어깨를 집어 넣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형제가 벙거지 모자를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앉으시죠!” 그가 벙거지 모자 챙 밑으로 눈을 드러내지 않은 채 딱딱한 손짓을 했다. 어디 선가 들어본 목소리…. 태민은 실험 파일에서 베트남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 목소리를 감지했다. 테이블에는 벌써 빈 커피 잔이 놓여 있었다. 

  태민이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고 돌아왔다. 

  “유명해지고 싶습니까?” 그가 턱을 들어 모자 챙 밑으로 맹수 같은 눈을 드러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희는 사실 그대로 김 형사님과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이게 얼마나 큰 일인지 알고 있습니까? 이건우씨 아들은 지금 어디 있어요? 저와 만나보면 거짓이라는 게 금방 밝혀질 겁니다.”

  “저희도 모릅니다.” 

  “그럼 누구에게 그런 유언비어를 들으셨습니까? 이건우라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벙거지 모자를 벗었다. “지금 장난합니까? 멀쩡한 연구소를 매장하려는 술수를 누가 부리는 겁니까? 지역사회에 오랫동안 공헌하고 있는 착한 연구소를 한 순간에 말아먹을 심산입니까?” 

  “연구소가 지역사회에 무슨 공헌을 했습니까?” 

  “당신들은 관심도 없었겠지만 세상에는 생각보다 아픈 아이들이 많아요. 우리는 그 아이들에게 재활 운동치료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합니다. 제대로 된 대학병원 같은 시설에서 재활 치료 한번 받으려면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고 있어요?” 

  태민이 성민에게 소곤거렸다. “뇌 연구는 실험을 어떻게 하세요?” 성민이 통역했다.

  벙거지 모자가 태민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얘기하면 이해는 합니까?”

  태민이 성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저희 형도 자폐증이니까요.” 

  순간 벙거지 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쥐와 원숭이로 실험하는 것은 한계가 있죠?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성민이 찌르기 공격을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계속 지껄여대면 좋을 거 하나 없어!” 그의 협박이 시작되었다.

  “저희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런 위협에 네! 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입 다물고 가만히 찌그러져 있겠습니다. 소장님 앞에서 그런 다짐하려고 나온 것 같습니까?” 

여자 사장이 조용히 다가와 커피를 테이블에 올려 두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젊은 사람들이 인생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 같은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탐정 일이란 게 돈이 안되지요? 솔직히 말해봐. 내가 조금 도와줄 수는 있어. 혹시 그 가짜 뉴스를 김 형사 말고 또 누가 알고 있어요?” 벙거지 모자가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없습니다.” 성민의 말에 태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합시다!” 그가 여주인이 있는 카운터 쪽을 힐끗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연구소 험담을 누구에게 들었는지 말해주면 한 사람 당 한 장 합해서 두 장 드릴 게.” 

  성민과 태민이 때가 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형이 자폐증이 있지만 청력이 아주 좋습니다.” 

  갑자기 벙거지 모자가 과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우연히 아이스크림 학원 근처를 지나다 통화 중인 버스 기사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버스 기사?” 그가 고개를 돌렸다. “어떤 얘기를 들었다는 말이죠?” 

  “소장님이 알고 계신 내용, 그 험담입니다. 생체 실험 대상을 연구소에 공급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해요?”

  “거짓말해봐야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저희가 알 턱이 없지요.” 

  “김 형사한테는 잘못 알았다고 확실하게 얘기해 두세요. 나도 따로 만나서 잘 얘기할 테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허튼 생각은 일절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명색이 탐정이라는 사람이 우연히 남의 이야기를 엿듣고 그걸 확대 해석해서 아는 형사에게 일러 바치는 거, 이런 행동은 상당히 무모합니다. 나도 그냥 확 무시해버리고 싶지만 워낙 중요한 사안이라 젊은 사람들 도와주는 셈 치는 겁니다. 절대 당신들이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거 명심하세요.”

  말이 구구절절 길어지는 걸 보니 연구소의 실체는 확실하다. 태민은 마무리 찌르기 공격 사인을 성민에게 보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 사람 당 한 장이 아니라 한 사람 당 두 장, 합해서 네 장으로 부탁드립니다. 돈은 삼일 후 밤 열시 정각, 진해 역 앞에 있는 빨간 우체통에 넣어 주시고요. 그 때까지 돈을 안 넣거나 가짜 돈을 넣을 경우, 만에 하나 수상한 일을 벌이실 경우 저희가 알고 있는 사실을 경찰을 포함해 관계되는 모든 이들에게 공개하겠습니다.” 성민은 웃음기 띤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의 입술이 벌레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 날 진해역에는 반드시 여자 부소장이 직접 나와야 합니다.” 성민은 냉정하게 쏘아 붙였다. 

  “너희들 지금 장난해?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것들이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 거야?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여?” 그가 쌍시옷의 욕을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불끈 쥔 주먹이 보란 듯이 허리춤에서 떨리고 있다. 

  태민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판단했다. 연구에 뛰어나다고 심리전에 뛰어난 법은 아니다. 

  “소장님,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희 요구를 무시하셔도 좋으니 알아서 판단하세요.” 성민은 그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커피를 단번에 비웠다. 

  “너희 둘! 김 형사 얼굴 봐서 참는 줄 알아. 쥐도 새도 모르게 뒤지기 싫으면 그렇게 나대지 마!” 그가 급히 벙거지 모자를 쓰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태민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폰 진동이 울렸다. 제대로 미끼를 물었으니 그대로 진행하자는 김 형사의 문자 메시지였다. 


42


  마틴은 중앙 광장 벤치에 앉아 솜털 같은 하얀 구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몰려오는 찌릿찌릿한 통증에 가슴 한 쪽을 세게 압박하며 문질렀다. 싸구려 탐정 주제에…. 어디 비열하게 죽은 빅터까지 이용해. 사기꾼 놈의 새끼들. 그 놈들의 요구대로 돈을 가져다 주는 것은 내 무덤을 스스로 파는 짓이다. 깔끔한 해결 방법은 오로지 하나! 문제의 소지가 되는 놈들을 세상에서 소각시켜 버리는 것이다. 최우선 순위로 이건우와 그의 아들 BP001을 찾아내야 한다.

  “어디 안 좋아?” 제니퍼가 옆에 앉았다.

  마틴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애들 공급 받는데 시간 좀 걸리겠어. 아이스크림 학원에 원장과 빅터 있을 때는 손발이 척척 맞았는데 말이지. 일본 회장님도 서서히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겠지. 뭐 계약 상 108명을 공급할 때까지는 참아주겠지만 말야. 조만간 당신이 됐든 내가 됐든 무엇이라도 결과물을 내야 될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그 얘기 또 할 거면 그냥 가!” 마틴은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언제까지 집착할 거야? 요즘 부모들은 애들이 조금만 이상해도 신경을 엄청 쓴다고. 전세계적인 추세야. 굳이 알약 하나로 자폐 증상을 완벽하게 유발 시킬 필요가 없어.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는 이유가 뭐가 있겠어? 자폐라는 게 당신 생각처럼 딱 데이터로 규정할 수 없다는 반증 아니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거지. 조금만 증상을 유발해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다니까. 애가 학습 장애가 있거나 조금만 산만해도 요즘 부모들은 살림을 거덜 내는 한이 있어도 노심초사 길길이 날뛰는 세상이라고. 당신만 그 놈의 숫자와 데이터에 목매고 있어. 이제 그만하자. 제발!”

  마틴이 벌떡 일어섰다. “과학자는 데이터로 말해. 불완전한 데이터라는 건 곧 실패를 뜻해. 진짜 몰라서 묻는 거니?”

  “그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BP002도 꽝이란 말야. BP001과 마찬가지라고. 알약 하나 정도로 ADHD나 아스퍼거 증후군 정도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게 어디야? 그 정도면 일본 회장님도 설득이 될 거라고.”

  “설득이 되고 말고 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제니퍼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어섰다.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난 내 갈 길을 가겠어!”

  마틴이 고개를 돌렸다. “처음부터 떠날 준비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의 언성이 급격히 옥타브를 높혔다.

  “숨기는 거 있지?”

  그녀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떠나고 싶으면 떠나도 된다. 단, 옛 정을 생각해서 라도 연구소 발목은 잡지마라.”

  “그걸 말이라고 해? 이번 연구가 다 네 거야?” 그녀가 소리쳤다.

  “넌 우리 프로젝트가 회장님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는 거 몰라? 네가 떠난다면 회장님께서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퇴직금 한 몫 단단히 챙겨 줄 테니 앞으로 당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세요. 그렇게 할 것 같냐 고?”

  그녀가 털썩 주저 앉았다. 

  “사실…. 어디서 굴러먹던 작자들이 우리 연구소를 협박하고 있어.” 마틴도 그녀 옆에 다시 앉았다.

  “협박?”

  “어디서 들었는지 미스터리지만 실종된 이건우 아들 BP001이 우리 연구소에서 생체 실험을 당했다고 떠들고 있어.”

  “뭐? 심각한데…. 가만히 두면 안 될 것 같아. 서둘러 회장님께 알려.”

  “당신이 직접 모래 밤 열 시 정각에 진해 역 앞 빨간 우체통에 사 억을 넣어 주면 없던 일로 해 주겠대.”

  “미친. 거기서 왜 내가 나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그 녀석들과 아는 사이야?” 마틴은 그녀의 옆 얼굴을 째려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해!”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소리쳤다.

  “제니퍼! 우리 사이엔 신뢰가 있는 거야. 아무리 의견이 안 맞아도 신뢰 만큼은 흔들려선 안 돼. 우리가 분열되면 파리 목숨과 다를 바 없어.”

  “역시 당신은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몰라. 다 같이 잘 되는 방법을 수도 없이 얘기해도 안 듣더니 일이 터지고 나서야 신뢰 운운하다니.” 그녀가 팔짱을 꼈다.

  “회장님게는 연락 안 할 거야. 아직 때가 아냐.”

  “그럼 그 조무래기 탐정 작자들에게 돈을 줄 거야?”

  “절대! 보다 근원적인 방법을 찾아야지.”

  “설마. 당신 BP001을 제거할 생각이야?”

  “그래. 어떻게 든 찾아야지. 그 방법이 우리도 살고 연구소도 살 수 있는 최선이야. 그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겠어.”

  “어차피 회장님이 알게 될 일인데…. 연구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 무슨 일을 그렇게 벌이려고 해? 이번에는 제발 내 말 좀 들어!”

  “아니야. 너나 딴 생각하지 말고 BP002 연구에만 몰두해줘. 누가 뭐라고 해도 이번 연구의 주인공은 당신이란 걸 난 알아. 노벨의학상 감이지.”

  “그런 입에 발린 말 필요 없어. 네가 자꾸 회장님에게 보고도 그렇게 안 하니까 일본에서 이상한 여자도 보내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건 아이스크림 학원 애들을 감찰하려는 목적 일거야. 우리 같은 연구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야. 그리고 내가 언제 회장님에게 보고를 안 했다고 그래? 하나부터 열까지 감시 당하고 있는 마당에. 연구소 처음 지을 때 내가 관여 안 했으면 우리 여기서 이런 대화도 못 나눠. 여기 기둥이나 보 있지. 이런 데 안 에다가 반영구 도청 장치를 심어 두려고 작당 꾸미는 거 내가 겨우 뜯어 말렸지. 도청 전파는 보안에 취약하다고 겨우 설득해서 그나마 여기가 안전한 거야.” 마틴은 건물 곳곳을 가리켰다. 

  “어련하시겠어? BP001은 어떻게 찾을 거야? 이건우 직접 찾아 갈 거니? 그 방법이 진짜 최악 아니니? 얼빠진 탐정 놈들의 협박 한 번에 어떻게 평생을 바친 최고의 결과물을 없앨 생각을 해?”

  “아무리 고민해도 그 방법밖에 없어….”

  “당신은 연구자가 아니라 회장님 행동대장으로 스카우트 당할 수도 있겠어. 아무튼 난 모르는 일이니까 그 쓰레기 작자들 알아서 처리해.” 제니퍼는 벌떡 일어서더니 뒤돌아 나가버렸다. 

  마틴은 고개를 떨구었다. 평생 헌신한 결과물을 직접 없앤다는 것은…. 게다가 실험 대상의 부모를 직접 찾아가는 것 만은 피하고 싶다. 마틴은 실험실로 들어가 연구소 초창기 시절의 묵은 BP001 데이터를 열었다. 뇌가 말랑말랑 하던 시절부터 성체 뇌로 굳어가기까지의 기록들이 시계열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파일을 하나 씩 열어서 꼼꼼하게 내용을 확인했다. BP001의 특징은 전두엽이 활성화되기 전이나 후나 분노나 공격성의 변화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천적으로 심성이 착한 아이라는 말이다. 단지 변화가 생겼다면 몇몇 유력한 리드 물질을 투여하면서 부터 타인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공감 능력이 현저히 개선되었다는 점이다. 마틴은 맨 아랫부분에 한글로 [이대근]이라는 이름이 적힌 파일을 열었다. 이 대근이라…. BP001의 본명인가. 연구소에 입소할 당시 키, 몸무게 등 기본적인 신체 사항과 좋아하는 음식, 행동패턴, 물건 등도 빼곡히 나열되어 있다. 다른 실험대상들과 특별히 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쭉쭉 빠른 속도로 파일을 내려보다 특이점이라고 빨간 별표가 그려 진 곳에서 마틴의 손가락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자발적 입소]

  마틴은 즉시 제니퍼를 호출했다.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이 열렸다. 

  “불도 안 키고 여기서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야?”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알고 있었어? 모르고 있었어?” 그가 모니터 화면에 삿대질을 했다. 

  “뭔 데 그래? 이거 언제 적 파일이야? 나는 이런 거 기억도 안 나지.” 

  그가 화면을 확대하자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허리를 숙였다.

  “이거 내가 작성한 거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 이 파일은 누가 준 거야?”

  “처음에 애들 아이스크림 학원에서 연구소로 넘어올 때 받았던 기본적인 인적사항 프로필이지.”

  “그러니까 이 파일 누가 보내 준 거냐고?” 마틴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이런 정보는 사전에 나에게 알려줘야 되는 거 아니냐 고. 적어도 네가 잘 파악하고 나 있던 지. 부소장이라는 사람이 이 파일의 원천도 모르고 있다는 게 말이 되냐 고. 어?” 

  “자꾸 이럴 거니?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이 잡아올 아이를 물색하고, 네 친구 빅터가 잡아와서 우리 연구소에 공급하는 거 몰라? 맞아. 넌 데이터에만 몰두하느라 이런 건 신경도 안 썼겠지. 이런 프로필은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이 직접 작성했다고. 알아?” 

  “자발적 입소라면 어? 부모 동의가 있었다는 말 아니야? 이런 젠장! 지금까지 이런 경우가 있었냐고? 이런 건 당연히 알려줬어야지.” 그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되겠어. BP001 집에 당장 가봐야 될 것 같아.” 마틴은 키보드가 부서져라 몇 번 내려친 다음 실험실을 뛰쳐나갔다. 

  휑한 어둠 속에서 제니퍼의 하얀이가 은은한 빛을 냈다.


43


  김 형사는 밤 열 시가 넘어서야 검은 비닐 봉지를 들고 집에 들어가는 이건우를 발견했다. 김 형사는 하품으로 벌어지는 입을 막으며 그의 등 뒤에 붙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놀란 토끼 눈으로 뒤돌아선 그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었다. 

  “잠깐 말씀 좀 나눌 수 있습니까?” 김 형사가 신분증이 든 지갑을 그의 눈앞에 펼쳤다. 

  그가 김 형사의 얼굴과 신분증을 번갈아 대조해 본 후 체념한 듯 현관문을 열었다. 김 형사는 절룩거리는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 발, 한 발, 바닥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마루지만 미끌미끌한 느낌이 광나도록 쓸고 닦은 부지런함이 녹아 있는 것만 같았다. 

  “마실 거라도….” 그가 검은 비닐 봉지를 식탁 한 켠에 내려 놓았다. 

  “괜찮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몇 가지만 문의하고 금방 돌아가겠습니다.” 

  그가 방석이 놓여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긴급히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오래전에 아드님이 실종된 건 우리가 확인했는데…. 아직도 그대로죠? ”

  그가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혹시 지금은 아드님을 찾으셨습니까?” 김 형사의 눈빛이 매섭게 번득였다.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통합 전산망에는 아직 실종이라 뜨던데,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습니까? 왜 그대로 두세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전화도 어디로 해야 할지 모르겠고 관공서도 한 번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바빠서 잊어버렸습니다.”

  김 형사는 뒷 목을 몇 번 주물렀다. “아드님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스스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김 형사는 방금 자동차 접촉사고를 당한 후 차에서 내린 사람처럼 뒷 목을 세게 부여잡았다. “아이고 우리 아버님 정말 쿨 하시네요. 그 오랜 시간 사라졌다 나타난 아들을 찾았는데 마치 며칠 간 여행 다녀온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씀을 하시네요. 아들은 어디 있다 집으로 돌아왔답니까?” 

  그가 주춤했다.

  “하….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형사님은 이해하실 지 모르겠지만 저희 아들이 장애가 있어 오락가락합니다. 아들에게 물어봐도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어디에 있었던 간에 아들이 건강하게 잘 돌아온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 지난 일인데 따져봐야 뭐하겠습니까?”

  “그렇습니까? 대단한 멘탈을 가지고 계시네요. 그러면 그 시냅스 연구소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못 들어봤습니다.” 그는 과장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 형사는 머리를 세게 긁적이며 물었다. “지금 아드님은 집에 있습니까?” 

  “위층에 있습니다.”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그가 머뭇거렸다. “죄송하지만 아들이 지금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아드님이 의사소통이 불편하면 키보드 같은 걸 사용해도 됩니다.”

  “죄송하지만 힘들 것 같습니다.” 그가 힐긋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김 형사가 포기한 듯 일어섰다. “여기 명함 하나 드리겠습니다. 시간 되실 때, 제 번호로 전화 한 통 부탁드립니다.” 

  그가 명함을 받으며 장갑 낀 손을 의식적으로 감췄다.

  “손은 어쩌다가?” 

  “별거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그가 김 형사를 쫓아내는 것처럼 현관 쪽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김 형사는 그를 따라 나가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저기, 이 집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어디 있습니까?”

  “그냥 밖에서….”

  “몸도 불편하신 데 왔다 갔다 하시려면 힘드시겠습니다.”

  “익숙해서요.”

  난처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질문에 당황하는 모습이 석연치 가 않다. 집 내부의 계단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닌가. 김 형사는 집을 나온 후 왼편에 붙어있는 경사가 급한 좁은 계단을 올려다보며 폰을 들었다. “사무실로 급히 모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지금 바로! 네.네.” 


  김 형사가 침침한 골방 같은 탐정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탐정 형제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일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진해역에서 소장 만나는 것은 취소하세요!”

  형제가 놀란 표정으로 김 형사를 향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건우가 본인은 시냅스 연구소도 모르고 실종된 자기 아들도 어딘 가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다 집으로 돌아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시냅스 연구소 소장을 잡아들일 명분이 없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확실히 시치미를 떼는 느낌이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나오면 시냅스 연구소 실체도 밝혀낼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실종된 아들이 몇 년도 아니고 그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제 발로 집에 찾아왔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내가 선생님들을 못 믿는 건 아니 예요. 그런데 이건우가 저렇게 나오는 걸 어찌 합니까? 이렇게 된 이상 내일 계획은 무리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습니까?”

  “우선 이건우의 아들부터 만나보는 게 우선입니다.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 봐야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이왕이면 내일 나가서 연구소 소장이 어떻게 나오는 지 끝까지 부딪쳐 보는 건 어떻습니까? 처음에 돈 얘기를 한 것도 그 쪽 아닙니까?” 성민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시 얘기하지만 이건우가 부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들이 시냅스 연구소를 모른다는 데 어떻게 연구소 소장을 엮을 수 있겠어요? 시냅스 연구소가 생체 실험 했다는 증거 있습니까? 이건 역으로 카운터를 맞을 가능성이 큽니다. 현장에서 공갈 협박범으로 몰릴 수 있어요.”

  성민이 소리 나게 숨을 크게 내쉬었다. 

  태민은 중지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 순간 생각지도 않은 유키에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일단 내일 계획은 취소하고 이건우와 그의 아들부터 조사해 봅시다.” 김 형사가 와치폰을 들여다봤다. “그럼 또 연락합시다. 몸 조심하시고.” 


  김 형사가 낚시터에 도착한 시각은 밤 열 한 시 오분. 가로등 불빛이 희미한 방파제 구석 자리에 벙거지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마틴이 보였다. 김 형사는 팔을 휘저어가며 그에게 다가갔다. “소장님! 여기가 명당입니까? 저기 갯바위 쪽에 사람들 많이 모여 있던데….” 

  모자 챙 아래로 마틴의 입이 움직였다. “다음에 뵈어도 되는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행차하셨습니까?” 

  “밤낮 가리지 않는 게 습관이 되어서. 젊은 탐정 친구하고 오해는 좀 풀렸습니까?”

  “오해라고 할 것까지 없습니다. 그 엉터리 탐정 친구들 형편이 어려워서 좀 도와주려고 했는데 도가 지나치더군요. 형사님 면을 봐서 겨우 참았는데 계속 선을 넘으면 인정사정 봐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네….”

  “형사님도 그런 애송이들 말에 휘둘리면 안 좋을 것 같습니다. 취재원도 좀 제대로 된 애들을 쓰세요. 그 자식들은 형편없는 놈들이 틀림없습니다. 호의를 보이면 그걸 이용하려드는 악질입니다.”

  “우리 소장님, 이렇게 화 내시는 거 처음 봅니다.” 김 형사가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 탐정은 괜찮은 친구인데 참 이상하네요. 소장님을 그렇게 열 받게 하고.” 

  “형사님,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우리 연구소를 아예 말아먹으려는 심산 아니고 서야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릴 수 있습니까?” 그가 멀리 주차장 쪽의 벤츠 차량을 쳐다보며 말했다. 

  “누가 합류하기로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아는 사람 차인 것 같아서….” 

  “소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 아이스크림 학원과 소장님 연구소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가 벙거지 모자를 벗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그 자식들이 얘기하던 가요?”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김 형사는 가만히 파도 소리를 들었다. 

  “아이스크림 학원과 에메랄드 갤러리 두 곳은 우리 연구소에 한해, 두 해 일시적으로 후원하고 생색이나 내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저를 믿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곳이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특수 관계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따지고 흠집 낼 권리는 없다고 봅니다.”

  “에이고 오늘은 낚시가 잘 안되나 보네요.” 김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사님, 우리 연구소는 아무 일 없이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 더 이상 괜한 신경 안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공이나 한 번 치러 가시죠.” 마틴은 돌아서는 김 형사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44


  마틴은 베티에게 연락이 되지 않자 아이스크림 학원을 직접 찾아갔다. 데스크 직원의 안내로 대기실에서 오십 분 정도를 기다리자 베티가 버스 운행을 마치고 피곤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입술이 불퉁한 모습이 왜 또 찾아왔냐고 따지는 것 같이 보였다. 

  “아직도 빅터 얘기하러 오신 건가요?”

  마틴은 손사래를 쳤다. “아이들 공급 건 관련해서 확인하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

  “그건 소장님이 관여할 일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주면 주는 대로 안 주면 안 주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지. 108명은 일정대로 제공할 테니 그만 돌아가세요. 여기가 어디라고 지금 클레임을 걸어요?”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 게 아닙니다. 한 가지만 확인하고 싶은 사실이 있어서요. 혹시 연구소에 공급하는 애들 중에 부모의 허락 하에 자발적으로 데려오는 경우도 있습니까?”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우리가 당신 네들 뒷바라지 하느라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하고 이 일을 하고 있는데 지금 뭐라고 했어요? 자발요? 연구소 기밀이 있는데 어느 부모에게 자발적으로 애를 맡기라고 권유하겠어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리고 그런 사실이 있으면 회장님이 가만히 있겠냐고요?”

  “아이 한 명의 인사 기록에 자발적 입소라고 되어 있어서 확인하러 왔습니다.”

  “여보세요 소장님! 우리도 일이니까 최선을 다하는 거지만 잘못되면 빅터처럼 죽거나 아차 하면 영원히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고요. 그냥 돌아가세요! 이런 얘기 나누는 것도 안 된다는 것 모릅니까? 자꾸 이러시면 소장님 신상도 장담 못합니다.”

  “원장님 가족이 피해를 보신 사건과도 연관이 있을 지 모릅니다. 지금 어떤 피래미들이 애들 생체 실험이 어떻니 하면서 연구소를 협박하고 있어요.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녀는 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후 마틴을 안 쪽 사무실로 안내했다. 

  “타겟이 될만한 애들을 물색하고 인사기록 데이터를 정리하는 것은 원장님이 직접 했고, 목표한 애들을 잡아 와서 연구소에 보내고 나중에 폐기 처리하는 것까지는 빅터와 제가 전담했습니다. 물론 관련 기록은 여기에만 남아 있어요.” 그녀가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럼 아이들의 인사기록 내용은 전혀 모르십니까?”

  “저는 모릅니다. 지금까지 100명 넘는 아이들 중에 제 발로 나 연구소에 잡아 가쇼 하는 애는 없었어요. 한 번에 한 명씩 세심하게 계획을 세우고 빅터와 제가 주도적으로 사냥을 한 거였지요. 여기 학원 직원 몇 명이 지원하는 형식으로 나올 때도 있었고.”

  “혹시 이대근이라고 기억하세요?”

  그녀가 가늘게 실눈을 뜨고 허공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 애 같은데….” 

  “누구?”

  “옛날에 철길에서 데리고 온 아이인 것 같네요. 그 애 책가방 속에 이것저것 메모가 많이 들어 있어서 기억이 나요. 빅터가 그랬거든요. 이 애 부모는 정말 준비성이 많은 사람이라고.”

  “그 애가 맞다 면 원장님은 왜 아무 말도 안 했을까요? 그 중요한 사실을….”

  “인사기록카드에 자발적 입소라고 적혀 있었다면서요? 자료를 건네받은 소장님 쪽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사안이었는데 안 하신 것 아닙니까?”

  마틴은 그녀의 시건방진 태도에 이를 악물었다.

  “탐정놀이하는 어린이들이 어떻게 소장님을 협박하나요? 그런 일 있으면 일본 회장님께 즉시 알려야 되는 거 아니예요? 우리 둘이 속닥거릴 문제가 아닙니다.”

  “저도 정리되면 회장님께 공유할 생각입니다. 우선 소장으로써 사태 파악부터 하는 게 우선일 것 같아서요. 탐정놀이 하는 피래미들이 이대근이 우리 연구소에 납치되어 생체 실험을 당했다고 형사에게 이미 말해버렸습니다. 저에게는 돈을 요구하고 있고요.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까 빅터의 통화를 엿듣고 알게 되었다는 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빅터라…. 형사에게 말했으면 일이 커져 버리는 것 아니 예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잘 아는 형사라 제 선에서 충분히 막을 수 있어요. 그것보다 이 놈들의 꿍꿍이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사라진 이대근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을 것 같고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겁도 없이 막 치고 들어오고 있어요.” 

  “생전에 원장님이 발달장애 아동들 잘 챙겼던 건 아시죠? 그런 프로의식 덕분에 좋은 아이들을 소장님께 원활히 공급할 수 있었던 거고요. 이대근도 우리 학원의 장애아동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가능성은 낮지만 만약 그 당시에 원장님과 이대근 부모 사이에 이런저런 얘기가 오고 갔다면 자발적이라는 말도 성립하겠지요. 물론 그런 일은 둘 다 목숨 내 놓고 벌였다고 봐야 합니다. 저와 빅터, 회장님까지 완벽히 속였으니….”

  “원장님이 죽었을 때, 회장님이 이대근 가족은 따로 조사 안 했습니까?”

  “그런 건 우리가 관여하는 일이 아닙니다. 회장님이 이번에 빅터 사고난 것도 일절 손을 못 대게 하는데요.” 

  “그렇습니까?”

  “당연히 조직에 피해가 퍼지지 않도록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우리 회장님이 얼마나 철저하신지 아시죠? 웬만하면 본인 선에서 다 알아서 조사하고 그래요. 얼마 전에도 일본에서 회장님이 보낸 여자가 왔었다고 그러던데.”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이대근이 어디에 있는 지 모릅니까?” 

  “저희는 당연히 모르죠. 잡아서 가져다 받치고 죽은 애들 뒤처리까지 해주는 것도 모자라 지금 본인들 잘못으로 없어진 애까지 찾아내라는 얘긴 가요? 너무한 거라고 생각 안 하세요?”

  “마음이 앞섰습니다.” 마틴은 고개를 숙였다. 

  “정 그렇다면 이대근 집에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 보세요. 밑질 거 있어요? 지 애를 지들이 자발적으로 맡겼지 않습니까? 애가 집으로 돌아왔어도 그만, 안 돌아왔어도 그만 이예요. 소장님이 그 집에 가도 꿇릴게 하나도 없다 이 말이예요. 그리고 자발적이라면 원장님이 꼼꼼해서 계약서나 면책각서 같은 거는 당연히 없애지 않았을 텐데. 그런 게 있으면 확실할텐데…. 사망하셨으니까 찾을 수도 없겠네요.”

  “면책각서?”

  “원장님과 이대근 보호자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모르지만 어찌 되었건 이대근 보호자가 애를 자발적으로 연구소에 맡겼다는 건 시냅스 연구소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소장님은 상상이 안 됩니까? 소장님 같으면 아무리 신뢰 관계가 두터워도 당신 연구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이대근 보호자를 그냥 방치할 수 있겠어요? 만약 회장님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동안 이대근 보호자를 살려 둔 것이 미스터리란 말이예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장님! 연구에만 집중하시고 앞으로는 여기 찾아오지 마세요. 지금까지 이렇게 학원 분위기가 뒤숭숭한 적이 없었으니까 서로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요.” 마틴은 시끌벅적한 꼬맹이들로 가득 찬 엘리베이터를 타고 학원 건물 밖으로 나왔다. 


45


  성민은 전화를 받지 않는 이건우에게 메시지를 남긴 후 댄스 학원에 들어갔다. 머리가 복잡할 땐 몸을 한번 풀어 주는 게 직방이다. 의욕 넘치는 신입 멤버 덕분에 한 시간 삼십 분 가량 신나게 땀을 흘리고 샤워를 마쳤다. 사물함에서 옷을 꺼내 입으며 이건우씨의 답신을 확인했다. 오후 두 시 이후로 언제든 집에 찾아와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헤어 드라이도 잊은 채 태민의 사무실로 향했다. 

  성민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태민이 심각한 표정으로 작은 상자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형! 또 왜 그래?” 성민은 태민의 곁으로 다가갔다. 상자 안에 핑크 색 작은 카드가 보였다. “이 딴 거 왜 들고 있어?”

  저번에 받았던 것과 동일하다. 택배상자, 핑크 카드와 협박 내용까지 모두.

  “세상에 미친 놈이 이걸 또 보낸 거야? 우리도 문 앞에 CCTV 달아야겠다. 김 형사야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이건 아니야. 우리를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아 찝찝하다 정말.”

  태민은 택배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이건우씨와 연락이 닿았는데 집으로 와도 좋데. 이번에는 아들에 대해 물어보자.”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소 소장 그 자식은 돈 준비해서 진해역에 나타났을까?”

  태민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내 생각엔 처음부터 돈으로 우리 입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야. 김 형사 말처럼 그 쪽도 우리를 공갈 협박 죄로 묶어버릴 묘수를 쓴 거라고 봐.” 성민은 택배 상자를 툭 쳤다. 


  오후 세시 이십분. 성민은 이건우 집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문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문이 반사적으로 열렸다. 그가 이빨을 드러내며 반가운 표정을 보였다. 그를 따라 성민이 먼저 들어가고 태민은 신발장을 힐끔거리며 뒤따라 들어갔다. 

  “오늘은 또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그가 냉장고에서 캔 커피 두 개를 한 손으로 쥐고 내밀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염치 불구하고왔습니다.”

  “나한테요?” 

  “네…. 혹시 아드님이 예전에 실종되었습니까?” 성민은 태민을 힐끗 본 후 말했다. 

  태민은 천장에서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이 요즘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얼마 전에 형사도 다녀갔는데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 이건우의 목에 핏대가 섰다.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탁 깨놓고 얘기하겠습니다.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거 맞습니다. 맞고요! 그게 뭐가 어땠다는 겁니까? 어디서 뭘 했건 간에 그래도 무사히 잘 돌아왔잖아요? 그럼 됐지! 더 이상 뭘 바라겠습니까? 난 복잡한 거 싫습니다. 왜 자꾸 남의 집 과거를 캐려고 그래요?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있습니까? 한 번 물어봅시다! 형사도 그렇고 당신들도 그렇고 도대체 왜 그래요? 우리 부자에게 왜 그러냐고?”

  “선생님 댁 때문은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에 그럽니까? 그 형사도 말이지. 내가 괜찮다는 데 자꾸 말이 많더라고. 우리 아들이 어릴 때부터 자폐증이 있어서 표현도 서툴고 가뜩이나 사람 대면하는 게 힘든데 말이지 자꾸 한 번 보자고 보채고 말이야. 나는 그냥 어느 부잣집에서 우리 아들을 불쌍해서 거둬 줬다가 사정이 생겨서 다시 돌려 보내줬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누구보다 내가 힘들었지. 안 그래요? 애지중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그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제는 더 이상 누가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원망 안 합니다. 원망할 필요도 없고.”

  “아드님은 지금 건강합니까?”

  “그럼요.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지요. 자기 의사 표현도 제법 잘하고. 기적이 일어났다니까. 그러니까 진짜 감사할 수 밖에 없어요.”

  태민이 성민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아드님은 집에 같이 있습니까?”

  “같이 살아야지. 그럼 어디서 살아요? 나는 나이도 있고 우리 아들은 잘 알겠지만 여러 면에서 스스로 생활하기 힘듭니다.”

  성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탐정님은 동생 하고는 의사소통도 되는 가 봅니다.” 그가 태민을 보며 말했다.

  “아드님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인사나 했으면 좋겠는데.”

  “또 그러네. 내가 얘기했잖아요?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듣습니까?” 그가 호통치듯 고함을 질렀다. 

  태민이 그의 반대편 손을 쳐다봤다.

  그가 어색한 듯 장갑 낀 손을 들어 보였다. “이 손 말이요? 나도 우리 아버지께 들었는 데 자세한 건 몰라. 내가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있어 원자폭탄이 떨어졌어. 천운으로 살아 남았지만 대신 이런 훈장을 달았지.” 그가 조각품처럼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장갑을 감안하더라도 눈에 띌 정도로 왕손이다. “얼마전에 일본 여자 하나도 우리 집에 찾아와서 이것저것 묻고 갔어요. 우리 아버지 일본 계실 때 지인 분을 소개하겠다며 명함도 주고 갔다니까.”

  성민과 태민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최근에도 한 번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드문드문 하지만 한국어도 알아들을 수 있게 잘 하드라고. 히로시마로 초청을 했는데 알다시피 내가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상황도 안 되고 해서. 언제 그쪽에서 다시 방문한다고 했지. 이젠 나이가 들어가니까 지난 세월이 하나 둘씩 궁금하긴 해. 옛 일들이….” 그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냥 옛 생각이 나네. 이 놈의 손만 보면.”

  태민의 눈에 그의 왕손과 원장 가족이 숨 막혀 죽던 날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기 탐정 님은 어릴 때 진짜 자폐증이 있었어요? 내가 볼 때 지금은 멀쩡하게 보이는데.”

  위 층의 삐걱거리는 소리에 태민의 귀가 방향을 잡았다.

  “저희 형은 고기능도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이 저는 내팽개치고 형에게 올인 할 정도로 증상이 너무 심했거든요. 양약, 한약 할 거 없이 좋다는 약은 다 먹었고요 좋다는 병원, 학원도 다 다녀보고.” 성민의 말을 가로막고 태민이 외계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도 탐정 님처럼 뭐든 잘 할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그가 태민의 말을 신기한 듯 듣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이상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성민은 태민의 말을 번역했다. 태민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의 낯빛이 조금씩 바뀌었다. 

  “형이 초등학교 6학년때 우연히 부모님이 하는 얘기를 엿듣게 되었는데 충격적이었습니다.” 성민은 태민이 말하는 대로 대본에 없던 내용을 천연덕스럽게 번역했다. “어디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형의 치료를 어떤 연구소에 위탁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성민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지금 날 시험하려 듭니까?” 그가 눈에 힘을 주어 태민을 쳐다봤다.

  태민은 순간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탐정 님은 그래서 부모님이 말하는 그 연구소에 들어갔냐고?” 그가 큰소리로 물었다.

  “두 분이 티격태격하다가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요?” 그의 목소리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작아졌다.

  “자폐증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다 똑 같은 마음이겠지요. 최선을 다하다가 막다른 곳에 다다랐을 때는 그런 제안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까요….”

  “부모님 말을 엿들었다고 하니까 내가 뭐 할 말은 없지만 상식적으로 자폐증을 가진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곳이 있어요? 있다 해도 잘 치료해 준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냥 애를 버리는 셈 치는 거지.” 

  위 층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조금 커지자 태민의 귀가 토끼처럼 쫑긋 섰다. 

  “만약 치료해 주겠다는 사람이 천재 소리 듣는 미국 유명대학 출신의 뇌 과학 박사라면 어땠을까요? 솔직히 우리나라 부모들은 솔깃하지 않을까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가 배가 아픈 사람처럼 앞으로 상반신을 굽혔다.

  태민이 외계어를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성민은 포수의 사인을 거부하는 투수처럼 고개 짓을 했지만 태민은 자신의 말을 얼른 통역하라고 밀어붙였다.

  “아드님은 시냅스 연구소에 잡혀 있었습니다.” 성민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당신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만 돌아가요!” 

  “저희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뭐를 도와줘? 돌아 가라니까!”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태민이 성민의 등을 만지며 일어났다.

  “내가 괜찮다는 데 왜 자꾸 그 얘기를 꺼내? 도대체 목적이 뭐요? 시냅스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니까!” 그가 손의 장갑을 벗어 던졌다. 

  파충류의 비늘처럼 울퉁불퉁한 손을 보고 태민과 성민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절룩거리며 부엌으로 가서 벌컥벌컥 생수를 들이켰다. 위층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그를 따라 이동했다. “우리 가족 잘 지내고 있으니까 행여나 이상한 일에 엮이게 하지 마소!”

  진열장에 백마 탄 이건우 아들 사진이 태민의 눈에 스치듯 들어왔다.

  “아드님 때문입니다.” 성민이 검지로 위층을 가리켰다.

  그가 고개를 돌려 성민을 노려봤다. 

  “시냅스 연구소에서 아드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유는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지요?” 

  그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협조해 주셔야 저희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숨어 지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가라니까! 앞으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마!” 그의 눈동자에 붉은 실핏줄이 터졌다. 

  “아드님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우리 형제 밖에 없습니다. 명심하세요! 그리고…. 시냅스 연구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선생님도 위험해질겁니다.” 태민은 영업 사원처럼 매달리는 성민의 팔을 잡아 끌며 집 밖으로 나왔다. 위층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현관 쪽으로 함께 이동하더니 돌풍이 분 것처럼 쾅 하고 문이 닫혔다. 


46


  아이스크림 학원이라…. 김 형사는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자동문이 열리자 천방지축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 없이 이혼한 지 오래지만 아이를 가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밤 낮 가리지 않고 싸돌아 다니는 성격 상 배우자와 함께 보내는 시간도 부족하고 설령 여유가 있어도 아이들과 자상하게 놀아 줄 자신도 없었다. 물론 그러니까 이혼했겠지. 안쪽에서 똑 소리 나게 생긴 여자가 팔을 앞뒤로 경쾌하게 흔들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이 쪽으로 들어오세요.” 베티가 미팅 룸으로 김 형사를 안내했다. 

  방으로 들어가자 단출한 회의용 탁자와 의자 몇 개가 놓여있다. 김 형사는 문 앞에 놓여있는 손 소독제를 바른 다음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와 교환했다. 

  베티가 그의 명함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요즘 저희 학원에 경찰 분들이 워낙 많이 왔다 갔다 하셔서 헷갈렸습니다.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김 영광 형사님.”

  “전통이 있는 학원에 안 좋은 일이 많이 생겨서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네요.” 그가 앞머리를 살짝 옆으로 넘겼다.

  “아이들 가르치는 곳이라 이런저런 사정이 생겨도 티도 못 내죠.”

  “저는 원장님과 빅터 사망 사건 때문에 온 거 아닙니다.”

  “다른 용건이 있으시다는 말씀인가요?” 그녀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김 형사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뜸을 드리며 그녀를 슬그머니 훑었다.

  “어떤….” 그녀가 버터 기름 같이 흘러내리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에메랄드 갤러리 회장 아십니까?” 

  그녀가 무관심한 듯 고개를 두어 번 가로저었다. 

  “그럼 시냅스 연구소는 아십니까?”

  “저희가 오랫동안 후원하는 곳이죠.”

  “그렇죠. 아이스크림 학원과 에메랄드 갤러리가 시냅스 연구소를 후원하는 양대 산맥인데 말입니다, 서로 교류도 없습니까?” 그가 웃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그녀는 형사의 진한 눈썹을 보자 갑자기 명치가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 “저희는 연구소 후원에 직접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시구나. 이 학원에 장애 학생들도 다닙니까?”

  “다니지 않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레이저처럼 빛났다.

  “예전에 여기서 장애 학생 대상 프로그램도 진행했더라고요.”  

  “그랬었죠. 원장님 돌아가시기 전의 일입니다.”

  “사회 복지관도 아닌데 사설 학원에서 장애 학생 프로그램도 만들고 시냅스 연구소 후원도 하고 대단하시네요.”

  “그래서 우리 학원이 오래 가는 거 아닐까요? 이 업계 사정을 아시는 지 모르겠지만 몇 몇 명문 대입학원을 제외하고 저희처럼 오래가는 학원도 드문 걸로 압니다.” 

  “그렇습니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전산망에 등록된 실종 아동 자료를 쭉 조사해보니까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가 목을 몇 번 가다듬었다. “그 재미있는 사실을 확인 좀 하려고요. 제가 오늘 방문한 목적입니다.”

  그녀가 초원에서 사자와 맞닥뜨린 가젤처럼 겁에 질린 눈을 깜빡였다. 

  “아주 정기적으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정확하게 한 명씩, 여기서 배웠던 장애 아이들이 사라졌단 말씀입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녀가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그동안 실종 아동에 대해 관심이 티끌 만큼도 없었어요. 특히 장애 아동은 더요. 근데 이건 조사를 해보니 뭐라고 할까…. 수학 시간에 배운 등차수열 같다고 할까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거예요?” 

  “선생님은 장애 학생들 담당 아닙니까?”

  “생전에 원장 선생님이 장애 전담 프로그램을 만들고 교육도 직접 시켰어요. 저는 보통 애들 영어 선생님입니다.”

  “그럼 전혀 모르신다?” 

  “당연하죠. 지금 제게 등차수열 같은 얘기는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녀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아이스크림 학원을 전국구로 한 번 까 뒤집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뭐. 다른 형사님들은 딱 필요한 용건만 조사하시고 일도 깔끔하게 처리하시던데, 김 형사님은 제가 모른다는 얘기를 자꾸 빙빙 돌리시네요. 설마 제가 시치미라도 뗀다고 생각하시나요?” 

  “선생님은 말입니다. 왜 그렇게 냉정하세요? 동고동락했던 가족과 같은 선배와 동료가 죽었는데도 일말의 동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나 하고는 상관없는 일인데 왜 자꾸 귀찮게 하느냐는 그런 유체이탈적 사고방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말씀입니다.”

  “그게 잘못된 건가요?”

  “그런 강한 부정과 반발은 말입니다. 제 형사 경험 상 보통 양 극단 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높거든요. 진짜로 공감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범죄에 연루되었거나.”

  “기가 차 정말. 이제는 제 성격까지 탓하세요?” 그녀가 팔짱을 끼고 벽 쪽으로 눈을 흘겼다.

  “신기한 건 많은 실종 아동들 가운데 딱 한 명이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것도 아저씨가 다 되어서.”

  “그럼 그 아이 붙잡고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너 그동안 어디에서 뭐하다가 이제야 나타났냐? 그것보다 정확한 게 어디 있어요? 왜 저에게 심문을 하고 그래요?”

  “물론 그렇게 해야 죠.” 김 형사는 천천히 입가를 올렸다. 

  “형사님, 왜 멀쩡한 학원에 와서 뜬금없이 장애 아이들 실종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 예요? 학원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하기라도 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녀가 벽시계를 쳐다봤다.

  “한 가지만 더 여쭙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녀가 벽시계를 다시 올려다봤다.

  “아이스크림 학원 대빵이 일본 쪽 입니까?”

  “대빵이라니요?”

  “대주주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 건 형사 님이 제게 확인 안 하셔도 다 아실 것 같은데요?”

  “음…. 우리는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습관이 있거든요. 에메랄드 갤러리 회장도 일본 와세다대 상학부 출신이고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님도 히로시마에서 오래 계셨었고 시냅스 연구소의 마틴 소장도 일본에서 체류 경험이 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뭔가 커넥션의 구린 네가 진동하지 않습니까?”

  “넘겨짚지 마시고 확실한 팩트를 가지고 와서 말씀해 주세요. 아이들 영어학원에서 나눌 주제는 넘어선 것 같습니다. 김 형사님. 저는 그럼 이만.” 베티는 문을 열었다.

  김 형사는 그녀를 따라 나가며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혹시 압수수색이라는 거 경험 해보셨습니까?”

  “형사님과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요즘 기술이 하도 좋아서 컴퓨터 건 핸드폰이 건 삭제해도 웬만한 건 다 복원시키더라고요. 세상 참 많이 변했죠?” 김 형사는 얼빠진 표정의 그녀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자꾸 이러실 거예요?”

  “학원에 있는 전자기기 들을 대대적으로 교체하는 헛수고는 하지 마세요. 선생님 핸드폰도 잘 간수하시고. 미리 말해두는 겁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로비로 걸어 나가며 서성이는 아이들과 큰 목소리로 영어 인사를 나눴다. 

  “돈도 많은 학원에서 버스 기사는 따로 뽑아달라고 하세요. 수업하는 것도 힘드실 텐데.” 김 형사는 자동문을 나가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선이나 넘지 마세요! 김 영광 형사님!” 베티는 그의 뒷머리를 향해 외쳤다. 그리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생명선이나….”   


47


  태민이 민수 형을 찾았을 때, 그는 폰을 귀에 바싹 붙인 채 사무실에 들어가 있으라는 수 신호를 보냈다. 예산이 빠듯하지만 자동차를 바꾸면 불안감이 조금은 사라질 것 같다. 중고차 회사 사무실은 텔레비전 한 대, 삼인용 의자 여섯 개, 미니 잡지 대와 정수기가 놓여있는 단출한 구조다. 손에 잡히는 자동차 잡지 하나를 꺼내 훑어보고 있으니 민수 형이 들어왔다.

  “또 무슨 바람이 들어서 자동차를 바꾸려고 하냐. 이쪽으로 와 봐.” 그가 태민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형편은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가성비 높은 걸로 추천해 줄게.” 그가 중형차 사이에 있는 SM5를 가리켰다. 

  태민이 SM5에 다가갔다. 

  “이게 태민이가 타기엔 안성맞춤 일거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출퇴근 용으로 타던 차인데 무사고에 주행 거리도 짧고 특별히 고칠 때도 없어서 당분간 돈 들어갈 일도 없을 거야.” 그가 싱싱한 수박 고르듯 자동차의 앞 유리부터 뒷 유리까지 차례대로 두드려 보며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저번에 성민이는 그 차 잘 타고 다니지?”

  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차는 아무에게나 안 줘. 내가 공을 많이 들였지.” 

  태민은 스마트폰의 메모장에 차에 특이한 점이 많았다고 적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그래. 미안하다. 그런 부분은 내가 미처 신경을 많이 못썼네. 그 차가 아이스크림 학원에서 장기 렌트로 쓰던 법인 차인데 학원 아이들이 많아서 그런 가 문 잠금장치가 그 모양일 줄 몰랐네. 잠깐만…, 그게 아닌데, 그건 원장이 타던 차일 텐데.” 

  순식간에 튀어나온 그의 말에 태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가 차 색깔도 바꾸고 필요한 것 다 손봤으니 그만하면 됐지 뭐. 죽은 사람이 탔던 게 뭐가 중요하냐? 나만 잘 쓰면 되는 거지. 맞지?” 그가 SM5 운전석 문을 열고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태민은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그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민은 SM5를 사기로 하고 필요한 절차를 신속히 처리했다. 그리고 주유소에 들러 새로운 애마에 기름을 넣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뭐라고?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이 타던 차? 오 마이 갓!” 성민이 흥분해 큰 소리를 질렀다. 

  태민은 성민에게 미안했지만 한편으론 중요한 단서를 얻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민수 형도 너무하네.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쪽같이 속이고 어떻게 죽은 사람이 타던 차를 팔고 그래. 친한 사람들끼리.”

  경찰이 원장이 타던 렌터카에 대해 조사한 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다. 원장은 문 잠금 기능이 고장 난 차량을 그대로 방치한 채 타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민이 양 쪽 어깨를 번갈아 주무르기 시작했다. “정말 희한한 일이야. 형이 이번 미제 사건 해결하라고 꼭 하늘에서 계시를 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민수 형도 우리가 말하기 전까지는 자동차 외관만 반듯하게 손본 거 보면 경찰도 원장이 타던 차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거 아냐?”

  그것보단 원장이 사용하던 자동차에 대해 경찰이 조사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사건 후에 자연스럽게 학원에서 처분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일단 원장 가족들은 전부 집에서 질식사로 사망한 거니까 자동차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도 볼 수 있지. 그렇지만 형도 나도 한 자동차 하는 사람으로써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어.” 성민이 일어서서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가 자동차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차로 말할 것 같으면 2013년식 혼다 어코드란 말이야. 일본이 아니라 미국 현지에서 미국인들에게 팔기 위해 덩치를 키워 생산된 차지만 어코드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차란 말이지. 이게 무얼 의미해? 당연히 어코드만의 내구성을 강조했단 말야. 한 번 타면 폐차 시킬 때까지 잔 고장조차 안 안 나는 차. 그거 하나로 지금까지 북미시장의 베스트 셀링카로 자리를 잡고 있단 말이야. 이건 반박의 여지가 없는 팩트라고. 그런 차가 문과 차창의 잠금장치 고장이 뒷좌석, 운전석, 보조석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발생했다는 거는 말이 안 돼. 자연 발생적이라 볼 수 없는 거야. 사람이 손을 댄 거라고 확실히 말 할 수 있지.” 성민이 자동차 그림을 두드렸다. 

  그렇다면 자동차를 고장 낸 이유가 무엇일까. 언뜻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추측은 되지만 연결이 안돼.” 성민이 팔짱을 끼고 화이트보드 앞을 왔다 갔다 서성거렸다.

  태민은 눈을 감았다. 안에서 문이 안 열리는 자동차. 피해자들이 기도하듯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 기도에 박힌 이물질, 질식사 그리고 춤을 춘 것처럼 찍혀 있는 발자국. 온갖 생각들이 눈 앞에 어지럽게 아른거렸다.

  “형은 아직 까지 이건우씨가 범인이라고 생각해?”

  태민의 눈에 이건우씨의 큰 손이 조각상처럼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보였다.  

  “형이 탐정이니까 나보다 더 전문가지만 이건우씨가 어떻게 원장 집에 침입해서 가족들을 모두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까? 손만 징그럽게 컸지 나이도 있으니까 힘도 없어 보이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데.”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건우씨가 원장 가족을 죽일 위인도 못될 뿐 더러 살인 동기도 약한 것 같아. 직접 확인까지 했지 않아? 실종된 자기 아들이 돌아온 것만 해도 그저 감사하다는 데 뭘. 학원 원장이 자기 아들을 납치해 연구소에 넘겼다는 이유로 원한을 품고 가족까지 다 죽인다는 거 이해가 안돼.” 성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이건우씨의 말 자체에만 매몰되면 논리가 흐트러질 수 있다. 그런 손으로 완력까지 기른다면 웬만한 사람은 쓰러뜨릴 수도 있다.

  “오히려 형이 오직 이건우씨에게 집착하니까 그 사람의 일거 수 일투 족이 사건과 연결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태민의 머릿속에 불현듯 이건우의 아들 이대근이 떠올랐다.

  “이대근? 집에 꽁꽁 숨어있는 사람을 어떻게 만나려고? 이건우 태도 봤지? 그런 사람이 자기 아들 잘도 만나게 해주겠다. 설령 이대근을 만났다 쳐도 서로 어떻게 이야기하려고 그래? 혹시 이대근도 형이 쓰는 외계어를 쓴다고 생각하는 거야?” 성민이 킥킥거렸다.

  이대근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 만나려고? 집으로 잠입할 수도 없고 이대근을 밖으로 끌어낼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이건우가 장을 보러 가건 아들을 두고 홀로 외출하는 시간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빈 틈을 타서 집에 들어간다는 말이야? 그 때 좀도둑 놈들처럼. 완전 영화 한편 찍으려고?” 

  이건우는 규칙적인 사람이라 외출도 규칙적으로 할 것이다. 

  “나도 모르겠다. 형. 이건 불법인데. 집에 들어가다 잘못되면 철창 행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해.” 성민이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내쉬었다. 

  아니면…. 밤에 운동하는 이대근에게 접근할 수도 있다.   

  “휴…. 오락가락 하는 형의 특기가 나오네. 그래 뭐라도 해 봐야지. 내가 반대할 처지가 아닌 것 같네. 나도 사고 한 번 크게 쳤으니까 이번엔 형도 한 번 쳐봐.” 성민이 화이트보드 앞에서 다시 매직펜을 집어 들었다. 


  태민은 성민이 집으로 돌아간 후, 밤 열 한 시가 넘어서야 사무실에서 나왔다. SM5는 천장에 머리가 슬쩍 닫는 것만 빼면 오래전부터 타왔던 애마처럼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어둠으로 가득 채워 진 도로에 간간히 뿌려 진 가로등 불빛을 스쳐 지나가며 이건우 집 맞은편의 체리 베이커리에 도착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다행히 SM5가 들어갈 만한 어중간한 공간이 보였다. 기어와 핸들을 이리저리 꺾고 돌리며 차를 상하좌우로 움직여 겨우 차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경건한 의식을 준비하듯 차창을 조금 내린 후 암막 커튼을 치고 앞 유리까지 가리개로 막았다. 귀마개는 빼서 전용 통에 넣었다. 서서히 파도가 밀려오듯 외부 음파들이 귀 속으로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는 굉음에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막았다. 잠시 후 다시 고요의 순간이 돌아왔다. 서서히 이건우 집 방향으로 귀가 열렸다. 사람 목소리는 물론 자그마한 텔레비전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밤이다. 스르르 눈이 감기고 얼마나 지났을까 악! 단발의 외침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연이어 큰 쇳덩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새벽 한 시 사십 오분. 이건우 집 뒤쪽 부근에서 사람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곳곳에 불이 켜졌다. 도둑놈 신고부터 해라! 저 집 사는 남자 같다! 의식이 없는 것 같다! 구급차부터 불러야 되는 것 아니냐는 말들이 뒤죽박죽으로 들려왔다. 차창을 완전히 내리고 신경을 집중했다. 이 새벽에 왜 옥상에 올라가려 다가 괜한 화를 당해 가지고. 목이 쉰 여자의 말이 들렸다. 

  차를 빼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는 이건우 집 뒤편으로 이동했다. 도로 가에 주차 공간은 넉넉했다. 차창 너머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살펴보니 사람 한 두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길이 보였다. 그 길로 미로 찾기 하듯 쭉 들어가다 보면 이건우 집 뒤쪽과도 연결될 것 같은 구조로 보였다. 낮에도 안 보이던 길이 어둠 속에서 가로등 빛을 따라 밝게 나타났다. 잠시 후 구급차가 소리도 없이 빨간 등을 번쩍이며 다가와 태민의 차 앞에 멈췄다. 그리고 유니폼을 입은 사람 두 명이 들것을 들고 골목길 안으로 뛰쳐 들어가더니 사람을 싣고 돌아와 차에 실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귀가 쫑긋거렸다. 

  “살다 보니까 이런 일도 있네요.” 

  “하늘에서 번개 맞는 거랑 비슷하지.”

  “이 밤에 가스통이 어떻게 머리 위로 떨어질까 정말.”

  “이 일 오래하다 보면 무덤덤해 질 거야.” 

  구급차가 출발한 후에도 어두컴컴한 골목길 쪽에서 목이 쉰 여자와 카랑카랑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집, 아저씨 혼자 아들 키우는 데 맞지?”

  “그래. 다리 절고 손에 장갑 끼고 다니는 아저씨. 요즘은 잘 안 보이던데.”

  “어쩌다가 이 밤에 나와서. 무슨 이런 일이 다 생겨? 머리를 크게 다친 것 같은데 어쩌냐. 안됐네.” 

  “다친 사람은 저 집 아저씨 아니야.”

  “아니라고?”

  “그래. 저 집 아저씨 옆집에 원래 할머니가 혼자 사셨는데 얼마 전에 애들 봐준다고 아들 집에 들어갔어. 그 이후에 세 들어온 젊은 남자야.”

  “아이고야.”

  “외제차에 옷도 잘 입고 인물도 좋아서 이 동네 아가씨들이 많이 수군거렸을 거야.”

  “난 그런 젊은 남자 못 봤는데?”

  “아무튼 이 동네 사람은 아닌 것 같아. 평일에 출퇴근도 안 하는 것 봐서 군인이나 군무원도 아닌 것 같고.”

  “그런 사람이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몰라. 입이 무거운 지 말도 잘 안하고 가끔 보면 싹싹하게 인사는 하는데. 발음이 조금 이상하다는 말이 있어.”

  “뭔 발음?”

  “요즘 외국 사람 워낙 흔하지만 그 뭐냐, 일본 사람들 한국말 할 때 티 나는 그런 발음 알지?”

  “그래. 받침이 어색하지.”

  “아무튼 그래. 어찌 되었건 많이 안 다쳤으면 좋겠다. 늦었어. 어여 들어가세요.”

  “그래. 들어가.”

  태민은 시동을 켜고 택시조차 잠들어 버린 도로를 홀로 달리며 깊어 가는 밤의 공기를 한껏 들이 마셨다. 사람들이 나누던 대화가 환청처럼 귀에 웅얼거렸다.


48


  성민은 댄스 학원 구석 의자에 앉아 유키에의 라인 메시지를 확인했다. 얼마 전 그녀가 유튜브에 올린 블랙핑크의 PINK VENOM과 SHUT DOWN 커버댄스 영상에 댓글을 달았기 때문이다. 성민은 [보고 싶어] 라고 외치는 그녀의 이모티콘에 [화이팅]을 외치는 이모티콘을 회신했다. 그로부터 약 삼십 분 후 지하 주차장에서 걸어가는데 라인 메시지 도착 음이 공명하며 크게 울렸다. 운전석에 앉아 폰을 확인했는데 뜻밖에 유키에가 다시 진해를 방문한다는 내용이었다. 잘못 본 건 아닌 지 두 눈을 비벼가며 다시 확인했지만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번 방문은 혼자도 아니다. 이건우 가족과 연관된 일본 손님까지 데리고 온다고 한다. 인연인가 싶기도 하고 이번엔 좀 더 적극적으로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곧바로 깜짝 놀라는 곰돌이 이모티콘을 그녀에게 회신했다.


  북원 로터리를 돌아 큰 벚나무 그늘 밑에 차를 세웠다. 근처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리고 야외 운동 기구에서 홀로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할머니가 보였다. 차 문 네 짝을 차례대로 연 다음 트렁크도 마지막으로 열었다. 그동안 중고차라고 해서 특별히 거부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이번엔 경우가 다르다. 죽은 사람이 탔던 차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온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찝찝하게 느껴졌다. 내기 순환 모드로 에어컨을 최대한 키고 살균 탈취 캔을 뒷자리 발판 중앙에 놓은 후 차 문을 전부 닫고 트렁크도 닫았다.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유키에…. 한 참 연상이지만 묘하게 정감이 느껴지는 여자다. 차라리 이런저런 구실을 만들어 나를 보러 오는 것이면 좋을 텐데…. 그럴 리가 없다.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가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기구에서 허리를 돌리던 할머니가 성민을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갑자기 트렁크에 들어있는 댄스용 운동화 두 켤레가 생각났다. 세탁한 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바로 트렁크를 열어 운동화부터 가방에서 꺼냈다. 집 근처 프렌차이즈 세탁소에 맡기면 금방 뽀송뽀송 해지겠지만…. 트렁크 냄새도 없앨 겸 차문을 열고 뒷좌석 중간에 있는 스키스루를 접어 방향제 연기가 트렁크로 통하게 했다. 오른발 뒤축이 닳아 없어진 운동화를 보니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묘한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져 히죽히죽 웃고 말았다. 허리 운동을 하는 할머니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이제 십분 정도 지난 것 같다. 운동에 집중하지 못하는 할머니의 시선을 느끼며 벤치에서 일어서는데 바람처럼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차문을 차례대로 활짝 열고 마지막에 트렁크도 열었다. 탈취 캔의 향이 강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태민에게 통화한 후 시간을 확인했다. 약 십오 분 경과. 오 분 정도는 환기를 더해야 할 것 같다. 천천히 목과 어깨를 돌리고 팔 다리도 충분히 스트레칭 한 뒤에 차에 탔다. 그 순간, 등골이 오싹하더니 팔 다리에 닭살이 쫙 번져 나왔다. 그리고 차창 곳곳에 원장 가족들의 손이 비쳤다. 남자 손, 여자 손, 아이 손. 성민은 시동을 걸고 사물놀이 상모 돌리기 하듯 머리를 과격하게 흔들어 댔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행히 창문에 붙은 손이 사라졌다. 차창을 모두 열고 액셀을 세게 밟았다. 


  사무실로 뛰어 들어온 성민의 다급한 얼굴을 보고 태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색을 살폈다. 성민은 냉장고에서 콜라 캔부터 하나 꺼내 단번에 들이켰다.

  “형, 아무래도 내가 신기가 있는 것 같아. 내 차 창문에 원장 가족들의 손이 나타나서 기절하는 줄 알았어. 아 찝찝해 미칠 것 같은데. 범인이 원장 가족들을 저 차 안에서 죽이고 집으로 이동시킨 거 아냐?” 성민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 안에 쓰러져 있던 원장 가족들의 모습은 속임수일 가능성이 있다. 경찰은 왜 자동차를 주목하지 않았던 것일까…. 기시감이 느껴진다. 이 사건도 많은 미제 사건들의 전철을 밟고 있다.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내구성의 대명사인 혼다 어코드 차 문이 고장 난 거는 당연히 누군가 의도적으로 손을 댄 거라 볼 수 있고, 그 이유야 딱 한 가지 밖에 떠오르지 않아. 질식사! 차 안에서 연탄가스 같은 유해 가스가 가득 차도 문이 잠겼으니 빠져나갈 수 없었겠지. 누군가 원장 차 안에서 원장 가족들을 모두 질식사 시킨 거야.” 

  일리가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일단 부검 결과는 가스 중독 같은 내 질식이 아니라 외부 압력에 의한 질식사로 알려졌고 설령 차에서 사람들을 질식시켰다고 해도 쓰러진 사람들을 어떻게 집 안으로 이동시켰냐 하는 것이다. 

  “형도 기억  안 나? 그 때 김 형사가 사인이 완전히 외 질식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한 거. 그 말은 차 안에서 유독 가스 같은 거를 마시긴 마셨다는 이야기야. 아이 기도에서 발견된 완두콩 만한 실 매듭은 혼란을 주려는 속임수 같고. 그럼 이건 어때? 차에서 쓰러진 사람을 차례대로 들춰 업고 집 안으로 옮겨 놓는 방법? 가능성이 없을까?”

  차에서 기절한 사람을 한 명 씩 들춰 업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어렵겠지? 특히 이건우씨 같은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가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 같긴 하네.”

 그리고 사람을 들춰 업은 상태에서 깨 금발 뛰기 형태의 족적을 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기에 한 명은 일 층에서 나머지 두 명은 위층에서 발견되었다. 

  “맞아. 차에서 쓰러진 사람을 업어서 이 층까지 옮긴다? 그건 어렵지. 술 취한 사람만 해도 팔 다리가 축축 늘어져서 업고 가는 게 엄두가 안 나는데.” 성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깨 금발 뛰기 족적을 어떻게 남길 수 있었던 것일까.

  “깨금발 뛰기는 보통 아이들이 신날 때 나오는 동작이야. 아무리 범인이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쉽지 않지. 형. 한 번 생각해봐. 죽은 사람을 업고 댄스 동작을 하며 걸었다? 무슨 종교 의식을 치르는 것도 아니고. 이건 명백히 수사에 혼선을 주려고 족적을 마음대로 남긴 거라고 봐.” 

  범인이 한 명이 아닐 수도 있다.

  “말 잘했어. 난 오히려 그게 현실성이 있어 보여. 차 안에서는 정신을 잃을 정도, 딱 해롱해롱할 만큼만 유독 가스로 기절을 시켜. 그 다음에 목을 조르거나 입과 코를 막는 거지. 그리고 공범들이 집 안으로 피해자들을 옮겨 놓는 거야. 어때? 아주 미세하게 흡입한 가스는 시간이 지나면 혈관 검사 시 안 나타나거나 애매하게 나타날 수도 있을 것 같지 않아?” 

  샤프 하지만 불완전하다. 해결사들도 타깃을 목을 졸라 기절 시킨 후 횟집 수조에 담궈 익사로 위장하곤 한다. 하지만 몸에 난 미세한 상처 또는 몸 속에서 발견되는 플랑크톤의 종류와 위치에 따라 교살인지 익사인지 경계선을 구분 지을 수 있다. 범인은 피해자들이 차에서 정신을 잃게 만들 정도와 혈관에 가스 성분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를 동시에 충족하는 교집합을 찾아낼 수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난 시애틀 카페 쪽 김밥머리 애들이 의심이 든단 말이야. 이런 엄청난 일을 일반인들이 할 수 있겠어? 그 자식들은 사람 몇 명 죽이는 거 정도는 식은 죽 먹기 일거야. 나에게 접촉사고 내고 위치 추적기 달 정도면 말 다했지. 택시로 유키에 납치하려 던 놈들도 다 그 쪽 애들 일 걸. 그런 흐름으로 보면 결론이 심플하게 도출돼. 아이스크림 원장이 매일 시애틀 카페에 와서 죽치고 있으니까 신분 확인해서 작업해버린 거야.” 

  과연 그렇게 된 것일까….

  “형이 탐정이니까 나보다 머리가 좋은 건 인정! 초능력 귀까지 인정! 그런데 솔직히 인정 못하는 것이 한 가지 있어.”

  당연히 말로 표현하는 의사소통이겠지.  

  “그게 아니야!” 성민이 검지를 흔들어 댔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 어떨 때 보면 형은 진짜 로봇 같다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다. 내 마음속으로 슬픈 감정과 기쁜 감정이 깊이 스며들지 않는다. 감정의 물은 방수 코팅 된 표면 위로 흘러가다 깔끔하게 증발할 뿐이다.

  “형은 지금 이건우씨 단독 아니면 아들인 이대근하고 공동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 맞지?”

  태민은 팔짱을 끼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래서 안 되는 거야. 형은 아빠가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해? 그것도 세 명이나?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 죄스러움을 안고 살아왔던 아빠가 이제야 아들과 같이 살게 되었는데 살인 현장에 아들을 데리고 나갈 수 있겠냐고? 그건 아빠의 마음이 아니지.”

  사려 깊군. 하지만 이번 사건은 감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결정적으로 이건우가 차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 전문가일까? 문 열림 버튼을 다 고장 낼 정도의 기술이 있는 지 의문이야. 우리 같이 차에 관심 많은 사람도 차 문 안쪽에 뭐가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지 않아? 형을 존중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우씨는 오답이다. 아이스크림 원장 집에 CCTV 같은 거도 있었을 텐데 전혀 증거도 안 남았고 자동차 안에 유독 가스 같은 거 넣었다면 그건 더더욱 일반인이 하기엔 무리야. 청부 살인업자 같은 기술자 냄새가 안 나?” 

  이건우는 장애 아동 교육에 성의를 보였던 아이스크림 학원의 원장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장에게 접근이 용이했을 것이고 원한을 품었다면 전문가가 아니라고 해도 차 문 쯤 고장 내는 건 노력하고 배우기만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볼 게. 시애틀 카페 김밥머리 인간들은 왜 우리와 유키에를 노리는 것 같아? 그런 수상한 부류의 인간들이 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괴롭혀?” 

  그건 그 놈들이 찾고 있는 유키에와 우리가 엮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생각은 달라. 그 놈들 정보력 좋을 거 아니야. 시애틀 카페와 그 옆 한의원 들어간 순간 형은 신상 전부 털렸을 거야. 알고 보니 형이 탐정이거든. 나 같아도 탐정? 도대체 이 녀석은 뭐하는 인간이지? 그런 궁금증이 생길 것 같아. 특히 원장 범행을 기획한 놈들 이라면 당연히 형에 대해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까?”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은 범인이 아니다.

  “아 그리고 잊어버릴 뻔 했네. 유키에 말이야 또 진해에 온다는 데 어떻게 된 걸까?”

  태민은 유키에 얘기를 건너 띄고 지난 새벽 잠복 중 이건우씨의 집 근처에서 일어난 가스통 사건을 이야기했다. 

  “오 마이 갓!” 성민이 박수를 치며 웃기 시작하더니 금세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건우, 그 노인에게 모두들 왜 이리 관심이 많아? 그러면 얼마 전에 이건우씨 집 옆으로 이사 간 남자까지 뭐가 관련이 있다는 얘기야? 하필 새벽에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머리에 가스통을 맞고 쓰러졌다. 이거는 완전 삼류 코미디야!” 성민이 빨개진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이건우 옆 집으로 이사 간 남자도 석연치 않은 냄새가 난다. 

  “그건 그렇고. 유키에가 이번에는 이건우씨 집으로 손님을 데려온데. 이건우씨 아버지와 일본에서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라고 하네. 형. 유키에 귀엽지 않아?”

  유키에는 어쩌면 가스통을 맞은 남자와 한 통속일 가능성이 있다. 

  “가스통 맞은 옆 집 남자는 옥상에서 바람 쐬며 담배 한 대 피려고 했겠지. 그게 유키에 찾아오는 거와 무슨 상관임? 형도 참. 언제 그렇게 상상력이 좋아졌어?” 

  김 형사에게 부탁한 가스통 남자의 BMW 차량 조회 결과가 나오면 그 남자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다. 

  “형은 그 형사와 뭔가 짝짝 궁이 잘 맞는 것 같아. 그래도 형을 존중하는 게 보이네. 차량 조회 해 달라고 요청하면 척척 다 조사해주고.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 도움을 줬으니 은인의 부탁을 귀담아듣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성민이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형 생각은 가스통 남자도 유키에도 모두 같은 통속이다. 그 말이지?” 

  태민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목적은 당연히 이건우씨와 그의 아들 이대근을 죽이려는 거고?” 성민이 손으로 목 긋는 시늉을 했다.

  태민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시냅스 연구소의 잔인한 생체 실험 비밀을 은폐하고 죽은 원장 사건의 복수를 위해서?” 

  태민은 양 손으로 엄지를 치켜 세웠다.

  “너무하지 않아? 이건우씨와 이대근이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일본에서 사람을 보내서 없애려 들겠어?” 성민이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세게 긁적였다. “다리를 저는 할아버지와 자폐증 아들…. 냉정하게 생각해 봐!” 성민이 말문이 막힌 듯 고개를 툭 떨구었다. “이건우씨가 진짜 살인을 저질렀다면 죄 값을 달게 받으면 되고 자기 아들이야 자립이 안되니 시설 같은데 들어가겠지. 그런데 일본에서 유키에나 가스통 남자에게 살인을 사주한 사람이 있을 턱이 없어. 이건우 부자를 통해서는 절대 시냅스 연구소의 비밀이 세어 나갈 수 없는 구조라니까. 왜? 이건우씨가 자기 아들 건강하게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감사하다고 공공연히 떠들어대고 있지 않아? 그런 사람이 무슨 연구소의 비밀을 까 바르겠어? 안 그래? 연구소에서 굳이 그 부자를 죽이려 들 이유가 없지 않아?”

  그래도 이건우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다. 

  “어렵다. 형! 차라리 유키에 오면 솔직하게 물어볼까? 너 정체가 뭐냐 고.” 

  유키에가 진실을 말할 리 없다. 그녀가 데려온다는 일본 손님도 수상하다.

  “형하고 더 얘기하다가는 내 머리가 이상해 질 것 같다. 아무튼, 다음에 김 형사에게 시애틀 카페 쪽 사람들도 수상하다고 차라리 힌트를 주는 게 어때? 사실 우리가 경찰 보호를 받는 것도 시애틀 카페 쪽 인간들이 협박해서 그런 거니까.”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김 형사에게 혼란만 줄 것이다. 

  성민이 매직펜을 들어 집과 자동차를 그리기 시작했다. “형과 내 생각이 접점을 찾지 못하는 것은 확실한 것 같네. 내 결론은 변함없어.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기술자들이 아이스크림 원장의 자동차 문을 고장 낸 다음 몰래 유독 가스 종류를 차 안에 넣었어. 그리고 자동차에 갇혀서 기절한 사람들을 집으로 옮겨와 마무리한 거지. 끝!” 성민이 매직펜을 화이트보드 받침대로 던졌다. 

  왜 굳이 자동차에서 쓰러진 피해자들을 집 안으로 옮겨야 했는 지 설명이 안된다. 전문 기술자들이라면 그냥 자동차에서 가족 동반 자살로 위장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 거야 형이 전문가지. 수사에 혼선을 주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면서?”

  당연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범인의 행동에 의식적인 이유가 녹아 있을 것이다. 원장 가족들은 모두 바닥에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싹싹 비는 자세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피해자가 죽는 순간까지 용서를 구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이것은 범인이 남겨놓은 죽음의 메시지다.

  “기술자 건 아니건 간에 자동차에서 기절한 사람들을 집안으로 어떻게 옮겼을 것 같아?” 성민이 매직펜을 다시 집어 들었다.

  태민은 생각하는 로뎅 조각상처럼 턱을 괴었다.

  “형 말을 듣고 문득 떠올랐는데 한 명이 업어서 옮기거나 두 명이 각각 팔다리 붙잡고 옮기지는 않았을 거 같아. 그래서 말인데. 들 것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들 것! 순간 태민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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