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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08번뇌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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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2. 2024

까맣게 타 버린 부엉이 목각인형

(25~31)

25


  시애틀 카페 구석 자리에 네모와 세모머리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검은 정장을 차려 입은 가르마 남자와 대머리 남자가 화장실 쪽 문으로 들어와 그들과 합석했다. 네모머리가 카운트를 향해 여기라고 외치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가리켰다. 곧바로 커피 머신 기계가 요란하게 돌아갔다.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지?” 가르마가 주먹으로 자신의 턱을 두드리며 말했다. 중지에 낀 은빛 해골 반지가 턱 밑을 스쳤다.

  “갑자기 바이크가 나타나서.”

  “같은 패거리 구만. 그 정도는 예상하고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니야? 만사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 같애. 왕 선생!” 가르마가 눈알을 부라렸다. 

  “옐로우가 마트에서 선물을 준비한 걸 보면 곧 일본으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 옐로우, 우리에게 해꼬지 한 것 없지 않아?” 

  “네, 없습니다.” 

  “굳이 그 애들 잡을 필요 있어?”

  “그렇지만 그 여자가 한국에 들어온 목적을 알아내려면 일단 잡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굳이 일본에서 그 여자를 보냈으면 필연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네모머리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 놈들이 우리 앞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우리가 지레 겁먹고 잡으러 다닌 거야. 그거 이상하지 않아? 그 자식들 여기 들어 온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어? 이제 일본으로 돌아간다며? 내가 분명히 얘기했지만 그 놈들은 아이스크림 원장 가족이 죽었던 거 우리 쪽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에게 복수하려면 벌써 했다고. 왜 그 쪽으로 자꾸 몰고 가? 내가 일본에 직접 찾아가서 우리가 당신 네 원장 가족 작업하지 않았다고 구구절절 해명이라도 할까? 어떻게 생각해 왕 선생?” 

  네모머리가 벌떡 일어서더니 카운터로 뛰어가 커피를 가지고 돌아왔다. 

  “잘 들어! 저쪽이든 이쪽이든 모든 조직들은 다 룰이 있는 거야. 그걸 이해 못하면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가르마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네모와 세모머리가 코를 바닥에 박을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시끄럽게 하지 말고 시냅스 연구소 건에만 집중하라고! 알았어?” 가르마가 뜨거운 커피를 단번에 들이켰다. 


  네모와 세모머리는 가르마와 대머리가 화장실 문으로 나간 후 뜸을 들이다 카페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생각해?” 네모머리가 벤츠 앞 타이어를 툭툭 발로 찼다. 

  “시냅스인가 하는 거는 그냥 연구소 같은데 뭘 또 알아보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세모머리가 고개를 흔들어 댔다. 

  “이사님 말이 맞기는 해. 일본 루시퍼가 잔인한 걸로 악명이 높지 않아? 이번에 보낸 옐로우는 평범한 여자애였어. 딱 봐도 킬러 급이 아니야. 우리가 확실히 헛다리 짚고 있어. 그 애들 일본 루시퍼가 아닌 것 같아.”

  “겉모습은 평범해 보여도 루시퍼에 무시무시한 암살자도 많습니다.” 

  “아니야. 자동차 핸들만 한번 확 꺾어 봐도 몸이 반응하는 데서 느낌이 와. 그 여자는 훈련된 사람이 절대 아니야.”

  “그 오토바이 탄 놈은 내버려 둘 겁니까?”

  “일단은 이사님이 시키는 대로 하자. 오토바이 그 놈은 다음에 잡으면 내가 진짜 전기 통닭구이를 만들어 버릴 테니까.” 

  네모와 세모머리는 벤츠를 타고 아이스크림 학원으로 향했다. 길가에 정차 된 노란 학원 버스 뒤편으로 세모머리가 천천히 접근했다. 아이들이 한 명 씩 차에 오르고 있다. 네모머리는 보조석 의자를 최대한 뒤로 제 끼고 머리 위로 깍지를 꼈다. 아이들이 모두 승차한 후 여자 교사가 머리 수를 확인했다. 잠시 후 버스가 출발하자 벤츠도 미행을 시작했다. 

  “저 학원 버스 기사가 수상하다는 거지요?” 세모머리가 말했다. 

  “그래. 우리가 그동안 아이스크림 학원 쪽 선생들은 잘 커버해왔는데 저 버스 기사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어. 이사님은 귀신같이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걸 지적한 거야. 이 참에 직접 현장 파악 한번 해 보는 거지.” 

  “그러고 보면 저 사람들도 할 일이 정말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지역이 해군기지, 미군 지원부대에다 방산 연구소와 군수 공장이 가득한 곳인데 하필 뇌 발달 관련 연구소라니 생뚱맞긴 하네요.” 

  “그게 바로 우리가 하는 일의 묘미야. 상식 밖의 일을 하는 놈들을 찾아내고 상식 밖의 일을 우리가 저지르기도 하지.” 네모머리가 큰 소리로 웃었다. 

  “저 버스 기사도 일 많네요. 천방지축인 애들 단속해서 데리고 다니려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닐 것 같습니다.” 세모 머리가 비상등을 켠 채 정차하고 있는 버스를 가리켰다.

  “저게 바로 오래가는 조직의 장수 방식이야. 요즘 유행하는 말로 지속가능 기업이라고 하지. 직원 한 명 한 명이 현실에 오롯이 녹아 들어가는 거지. 낮에는 학원 버스 몰고 밤에는 특수 요원으로 변하고. 한 마디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존재야. 아이스크림 학원이 여기서 아무 이유 없이 오래 버티는 게 아니야.” 네모머리가 창을 반쯤 내렸다. “너 정보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냐?” 

  “에이 형님도. 그 정도는 상식 아닙니까? 조직력이죠. 돈과 사람의 힘!” 

  “전 세계 어느 지역에 가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어. 각양각색이지. 그런데 대부분 오래 못 가. 코끼리 다리만 만지다 사라지는 격이지. 정보력은 조직력 보다는 오래 버티는 힘, 축적하는 힘에서 나와. 그러려면 그 지역에서 따로 놀지 말고 스르르 녹아 들어야 한다는 얘기야.” 

  “왕 선배는 다른 데서 오셨죠?” 

  “일본의 작은 해안 도시에 있었지.”

  “어디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구레 시. 히로시마에서 전철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도시야.” 네모머리가 의자를 세웠다. “구레라는 도시에서 내가 어떤 일을 했을 것 같나?” 

  “구레라면 해군기지가 있는 곳이니. 우동집이나, 술 집 아닙니까?” 

  “상식적인 답이군. 정답은 미용실이야.” 

  “미용실요?” 

  “그래. 이유가 궁금하면 스스로 공부하고. 난 거기서 삼 년동안 이발을 했지. 그가 손으로 가위질 흉내를 냈다. 해군 사병부터 영관급 장교들, 군무원까지 단골 고객이 많았어. 그 사람들 영내에서 머리 자르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지겹거든. 그 밥에 그 나물이니까. 그래서 비싸도 밖에서 돈을 쓰는 거야.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해가면서. 실력도 실력이지만 서비스를 끝내주게 했지.”

  “어떤 서비스 말씀입니까?” 그가 입술에 침을 발랐다.

  “자네 조니 워커 블루 아나?”

  “최고 등급의 위스키 아닌가요?”

  “제법이군. 일본에선 히비키라는 위스키가 유명해. 보통 미용실에선 잘 해야 커피나 과자 부스러기 같은 거 주겠지. 난 그런 위스키도 맛보라고 딱 한 잔 스트레이트로 제공했어. 선을 넘지 않는 최고의 서비스지.”

  “우와. 그건 의외네요.”

  “발상의 전환이지. 나중엔 그 술 한 잔 생각나서 내 가게에 올 땐 차도 안 끌고 와. 넌 그런 술 마시면 말이 술술 나오겠어? 안 나오겠어?”

  “못하는 게 없으십니다.” 그가 코웃음을 쳤다.

  “너 지금 내 머리 스타일 보고 비웃는 거지? 네모 김밥, 세모 김밥 생각하냐?” 

  “아닙니다! 선배님.” 그가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으며 허리를 곧추 세웠다. 

  “야 임마! 남의 머리를 자르는 건 공적인 일, 내 머리를 자르는 건 사적인 일. 똑똑히 기억해!” 

  노란 버스는 좁은 주택가 골목골목을 돌아 아이들을 내린 후 작은 카페 앞에서 여자 선생님도 마지막으로 내려줬다. 

  “모두 내렸지? 이제부터 시작이다.” 눈을 감고 있던 네모머리가 말했다.

  예상대로 버스는 학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안 도로로 진입했다. 벤츠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속력을 늦췄다. 버스가 낚시꾼들이 보이는 곳 근처에 멈춰 섰다. 벤츠는 버스가 잘 보이는 정차 된 차 두대 사이로 들어갔다. 톰 크루즈 스타일의 파일럿 선글라스를 쓴 버스 기사가 낚시꾼 여러 명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쳐 구석에 있는 벙거지 모자 남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이 정도 거리면 가능해?” 네모머리가 폰을 만지작거리는 세모머리에게 말했다.

  “같이 들어 보시죠.” 세모머리가 무선 이어폰 하나를 네모머리에게 건넸다. 

  “잡음이 많이 잡혀서 안 되겠는데. 좀 더 가까이 접근해야 돼. 혹시 낚시 장비 없어?”

  “저기서 사서 가실까요?” 세모머리가 낚시용품점을 가리킨 후 대시 보드에서 감청 기계인 검은 철제 박스를 꺼냈다. 

  네모와 세모머리는 구입한 낚시용품을 들고 버스 기사와 벙거지 모자가 멀찌감치 보이는 테트라포트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낚시는 해봤어?” 네모머리가 낚시대에 릴도 끼우지 못하는 세모머리를 놀렸다. “대충 시늉만 하면 안 돼. 오늘 진짜 낚시하러 온 거라고 생각해. 프로 답게!” 네모머리는 낚시 가방을 옆에 두고 귀에 박힌 이어폰 중앙의 버튼을 눌렀다. 


26


  마틴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내려와 건물 중앙 광장 아래의 지하 공간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향했다. 스무 계단 각각에 설정된 발걸음 인식 장치를 지나고 출입구에 설치된 안면인식 시스템까지 통과하자 첫 번째 실험실 철문이 열렸다. 정면에 마주하고 있는 두 번째 철문 앞에 다가가 홍채 인증을 마쳤다. 웅장하게 문이 열리자 투명한 통유리 너머로 머리에 촉수처럼 연결된 전자 장치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BP002가 발버둥 치는 모습과 공간을 가득 채우는 괴성이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히히히, 이히히히. 결박된 다리 사이로 오물이 질척하게 쏟아져 있다. 그가 음악 스위치를 올렸다. [안개 낀 밤의 데이트]가 흘러나온다. 그는 가수 능옥란의 베트남어를 흥얼거리며 줄줄이 연결된 모니터 앞에 앉았다. 어중간하게 할 거면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중앙 모니터에 나타난 그래프를 보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렇게 진행된다면 실패는 예정된 거나 다를 바 없다. 모니터 옆의 빨간 버튼을 누르자 녹색 우주복 차림의 남자 두 명이 BP002의 머리에 붙은 촉수와 결박 장치를 풀고 양팔을 붙든 채 실험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더 이상 시도할 수 있는 약물 조합과 뇌파 자극도 한계에 다다랐다. 

  마틴은 어릴 적부터 레고 조립과 퍼즐 맞추기를 거꾸로 해내는데 자신 있었다. 선생님들이 수학 문제는 절대 답을 보고 풀지 말라고 강조했지만 그는 청개구리였다. 모르면 재빨리 답을 보고 푸는 원리를 이해해 시간을 단축했다. 그런 경험 때문에 자폐 치료제를 개발했을 때 거꾸로 가는 자폐 유발제는 쉽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신의 영역에 도전한 벌을 톡톡히 받는 걸까? 그 대가가 참으로 혹독하다. BP001 파일을 열어 일자 별로 실험 기록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신경세포 성장인자 BDNF와 신경전달 물질이 폭발적으로 증가해버린 BP001을 원상복귀하는 실험을 진행하다 BP001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가 왼손으로 책상을 두드리다 무엇인가 생각난 듯 연구소 CCTV 저장기록 파일을 열었다. 누가 BP001을 빼돌린 것인가…. 아니면 조력자가 있는 것인가…. 설령 BP001이 괴물로 변해버렸다 하더라도 연구소의 촘촘한 감시망을 뚫고 혼자 힘으로는 절대 이런 식으로 사라질 수는 없다. 사라진 시간은 저녁 식사 후 여섯 시부터 여덟 시 사이의 운동시간이다. BP001은 재활운동 센터에서 운동을 마친 후 자신의 숙소로 복귀하지 않았다. 살며시 두 눈을 감으니 문득 자신보다 두배나 머리 회전이 빨라진 초능력 인간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마음 어딘 가에서 체념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재활운동 센터로 빠르게 걸어갔다. 


  재활운동 센터는 중앙 광장의 바로 아랫부분에 위치하고 있지만 지상의 빛이 작은 틈 사이로 촘촘히 들어오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어 지하처럼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틴이 빅 사이즈의 빨강 짐 볼 그림자를 밟고 서 있으니 우람한 삼두박근을 드러낸 남자가 다가왔다. 

  “소장님,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근육 남이 두 손을 모으고 꼿꼿이 섰다. 

  “이 짐 볼은 언제 바꿨나?” 

  “그게 너무 오래돼서요….” 근육 남이 고개를 숙였다. 

  “BP001이 사라졌던 그 날 바꾼 거지?”

  “아….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날 정확히 몇 시에 바꿨나? 그 때 상황을 잘 기억해 봐!”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희 코치 두 명이 이동 장치에 싣고 화물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와 짐 볼 업체의 트럭 앞에 둔 것 같습니다. 시간은…. 업체가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해서 우리 애들 운동 끝날 때쯤 바꾼 것 같습니다.”

  “왜 바꿨지? 정확히 말해!”

  “네…. 옆면이 찢어져서 바꾼 걸로 기억합니다.” 근육 남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옆면이? 이런 게 쉽게 찢어질 수 있나?”

  “뾰족한 물건으로 깊이 긋지 않는다면 쉽게….” 근육 남이 한 쪽 팔을 긁기 시작했다. 

  “이거, 보통 짐 볼보다 훨씬 큰 이유는 뭐야?” 마틴이 눈을 부라렸다.

  “사실 단순한 스트레칭이나 몸의 코어를 잡기 위해서 라면 이런 빅 사이즈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뇌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근육 남이 그의 집요한 채근에 검지로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나?” 

  “제니퍼 최 부사장입니다.”

  “찢어진 짐 볼은 어디에 처분하나?” 

  “주문했던 짐 볼 업체에 폐기를 부탁했습니다.” 근육 남이 대형 짐 볼을 쓰다듬었다. 

  “제니퍼….” 마틴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또각또각 빨간 구두를 신은 제니퍼가 연구소 중앙광장의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흔들의자로 다가왔다. “할 얘기가 있어.” 

  “저번에 했던 얘기라면 끝났어.” 마틴은 눈을 감았다.

  “이번에 개발한 미생물을 유산균과 배합하여 삼 개월만 복용하면 장내 면역 체계에 변화를 일으켜 뇌 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오차 범위도 작아서 안전하게 자폐 증상을 유발 시킬 수 있다고.” 제니퍼가 그의 옆에 앉았다. 

  “네가 만든 유산균인지 뭔 지를 복용하면 자폐 증상이 어느 정도 나타날 수 있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지금?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거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폐 증상이 점점 옅어지는 것도 절대 안 된다는 거 몰라? 그런 타협은 절대 안 된다는 말이야. 내 말 알아들어? 그런 어중간한 효과로는 세상에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 없다고!” 

  “어중간하다니? 이대로 가면 BP002도 결국 BP001의 전철을 밟게 될 거야. 뇌 기능이 멈출 지, 폭발할 지 예측이 안 되는 그런 약물이 세계에서 통용이나 되겠어? 도대체 네가 이 연구를 하는 목적이 뭐 야? 부자가 되려는 거 아니야?” 

  “천만의 말씀! 신념이지. 내가 가진 이 생각의 힘을 보여주려는 거야.” 그가 벙거지 모자를 벗어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신념 좋아하시네. 난 정말 오랫동안 참아왔어. 만약 BP002마저 잘못되면 너와 결별할 거야!” 그녀가 흔들의자를 빠르게 움직였다. 

  “제니퍼! 우리가 같이 일한 지 얼마나 되었지?” 그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자를 위로 던졌다가 받았다. 

  “왜 그딴 걸 물어봐? 당연히 이 연구소 시작부터 지.”  

  “우린 지금 승리를 코앞에 두고 있는데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어. 넌 탈출했던 BP001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거 같아?” 

  “기가막혀 정말! 설마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으니 어디 선가 특급 대우 받고 있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그건 그 애를 수도 없이 실험했던 내가 제일 잘 알지. BP001은 자폐 완치 후, 자폐 유발제를 과도하게 투여해 부작용이 생겨버린 실패 케이스야. 부족한 사회성과 소통 능력의 반발 작용으로 초능력에 가까운 IQ를 악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그것도 엄청난 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BP001이 탈출한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어. 지금까지 BP001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나? 네 말대로 라면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 누출 정도는 일어났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동안 너무 잠잠하지 않아?” 

  그녀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말장난 하지 마!”

  그가 벙거지 모자를 다시 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경고야! BP002는 실험이 끝날 때까지 꼭 지켜.” 


27


  성민이 무사히 유키에를 공항에 데려다 준 후 이틀이 지났다. 태민은 집에서 가까운 단골 미용실에서 퍼머를 했다. 미용실 원장은 너무 잘 어울린다는 지겨운 멘트를 반복하며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어 댔다. 귀마개 노출이 싫어 불가피하게 선택한 장발 스타일이지만 거울 속의 태민도 슬며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기계에서 커피를 내려 마신 후 탁자에 올려 둔 검은 뿔 테 안경을 다시 써보니 이미지 변신 성공이다. 눈썹 시술만 받으면 서울에 아는 연예기획사에 소개해주겠다며 호들갑을 떠는 원장을 뒤로 하고 그는 체리 베이커리로 향했다. 


  이 층 테라스로 올라가 어느새 눈에 익숙해져 버린 맞은편 집을 내려다 봤다. 오늘 따라 시샘하듯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그의 멋진 헤어스타일을 헝클어 놓았다. 눈 앞에 엉겨 붙은 머리칼을 옆으로 정돈하며 스케치하듯 집을 유심히 살폈다.

  잠시 후 BMW SUV가 도로변에 멈췄다. 청바지를 입은 말끔한 남자가 내리더니 이건우씨 옆 집 초인종을 눌렀다. 태민은 귀마개를 뺐다. 옆집 문이 열리자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교차로 보고 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들렸다. 집안으로 들어가는 남자를 보며 집 구조를 살펴보니 이건우씨 집과 판박이 꼴이다. 다른 점이라면 이 층으로 올라가는 외부 계단이 보이지 않는다는 정도다. 

  “크림 빵 좋아! 빵이라면 크림 빵!” 스무 살은 넘어 보이는 거구의 청년이 구석 테이블에서 아이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엄마와 딱 붙어 있는 모습을 보니 한 눈에 봐도 발달장애 청년이다. 청년이 눈을 흘겨 태민을 째려보니 엄마가 “예쁜 눈 해야지” 라며 야단을 쳤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엄마가 두 손으로 청년의 머리를 인형처럼 부여잡고 억지로 돌렸다.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무의식중에 청년에게 시선이 자꾸 돌아갔다. 그가 입에 크림을 잔뜩 묻히며 우걱우걱 빵을 먹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성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성민의 메시지를 확인하려는 데 쿵 하고 큰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청년이 의자와 함께 뒤로 나자빠져 있었다. 엄마가 청년의 팔을 자학하듯 내리치며 그를 힘겹게 일으켜 세웠다. 엄마는 울상이 되어 거구 청년의 뻣뻣한 머리와 몸 이곳저곳을 자기 몸처럼 만지고 살피기를 반복했다. 태민은 가만히 슬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청바지 남자의 인사 소리가 귀에 들어와 건너편 집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청바지 남자를 배웅하고 있었다. 그가 곧 이사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태민이 저녁 식사로 마지막 김밥 하나를 오물거리고 있을 때 성민이 유키에로부터 받았던 메시지를 전달해줬다. 이건우씨의 아들은 초등학생 때 실종되었고 자폐증을 앓고 있었다. 이건우씨가 오랜 시간 아들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태민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유키에의 메시지 결말을 바꿨다. 이건우씨는 실종된 아들을 찾았지만 지금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 간식 바구니에 올려 진 빵, 과자와 함께 탄산수 두 병을 냉장고에서 꺼내 가방에 챙겨 넣고 핸드폰 보조 배터리도 챙겼다. 저녁 여덟 시 이십 분. 태민은 검은 뿔 테 안경에 파란 등산 점퍼를 입고 사무실을 나섰다.   


  예상과 달리 오늘 밤은 체리 베이커리 근처 도로변에 차 댈 곳이 마땅치 않다. 할 수 없이 한 블록을 지나쳐 작은 교회 옆에서 시동을 껐다. 의자를 뒤로 밀어 편하게 발을 뻗고 룸 미러를 조정해 이건우씨의 집을 시야에 아슬아슬하게 잡았다. 멀리 보이긴 하지만 괜찮은 위치다. 밤 아홉 시 정각. 한 대라도 차가 빠지길 바래보지만 차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탄산수 때문인지 소변 신호가 왔다. 아직 빈 페트병을 이용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미리 봐 두었던 근처의 공중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어두컴컴한 변두리라 슬쩍 겁이 났다. 화장실 입구에 다다른 순간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남자 목소리다. 슬며시 몸을 돌려 뒤쪽에 있는 벤치로 도둑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이동했다. 그리고 귀마개를 빼자 수군거리는 두 남자의 목소리가 청각 레이더에 선명하게 잡혔다. 

  “글쎄 조금 있으면 나간다니까.” 허스키 목소리다.

  “나중에 들어가면 안 돼? 아직 사람들도 돌아다니는데.” 코감기 목소리다. 

  “돌대가리야!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들어? 그 사람 운동 나갔을 때 들어가야지. 열 시까진 안 돌아와.”

  “누가 보면 어쩌려고?”

  “저런 집 문 따는 건 십 초도 안 걸린다니까. 이 쪽 라인에는 CCTV도 없어. 걱정하지 말고 망이나 잘 봐!”

  태민은 그들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재빨리 화장실에 다녀온 후 주차 된 자동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어두컴컴한 교회 뒤쪽에서 벽을 등지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들개 같은 그들의 눈길을 피하며 자동차에 타고 급히 문을 잠겄다.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이 자동차 옆을 지나가며 짙은 선탠 안으로 힐끗 눈을 흘겼다. 그들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시동을 걸고 중원 로터리를 한 바퀴 돈 다음 조금 전 다녀왔던 화장실 뒤편으로 차를 이동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체리 베이커리를 향해 걸어갔다. 아홉 시 이십 분. 예감이 맞는다면 도둑놈들은 체리 베이커리 근처에 있는 집을 털 것이다. 모퉁이를 돌기 전에 귀를 기울여 소리를 확인한 후 고개를 살짝 내밀어 주변을 살펴봤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뿐사뿐 체리 베이커리 앞을 지나가며 무심한 척 주변을 살폈지만 도둑놈들의 모습도 온데 간데 없다. 조금 더 걸어가다 도로변에 주차 된 트럭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어디로 사라진걸까…. 귀마개를 도로 끼우려 할 때 맞은편 이 층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잡았다! 이건우씨 집이다! 슬며시 허리를 들고 교회 앞까지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뒤돌아보니 어두컴컴한 곳에서 허둥지둥 거리는 두 사람이 보였다. 차까지 재빨리 뛰어 들어와 창을 조금 열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도둑들의 숨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있었단 얘기야?” 허스키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 할배가 있었다니까. 기절할 뻔했다고!” 코맹맹이가 소리쳤다. 

  “말이 돼?”

  “일층에 내려가서 이것저것 보다가 안 방에 들어갔는데….”

  “빨리 말해 자식아!” 

  “안 방에 할배가 누워있었다니까!”

  “너 그 할배 운동하러 나가는 거 봤어? 안 봤어?”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정말 너 같은 멍청이하고 일 같이 못 하겠다. 꺼져라 제발. 지금부터 바이바이!”  

  “그래도 비싸 보이는 것 가져왔어.” 코맹맹이 목소리다. 

  “이게 뭐야, 아 진짜 돌겠네. 돈 안되는 건 버려.”

  “이 화장실 CCTV 없지?” 

  “겁만 많아 가지고. 그러니까 여기 온 거 아니야. 짭새 뜨면 위험하니까 얼른 가자.”

  그들이 사라진 걸 확인한 후 화장실에 들어와 변기 옆 작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목각 인형을 꺼냈다. 차로 돌아와 하얀 비닐에 인형을 넣고 두 번 묶은 후 보조석에 세웠다. 손 소독제를 듬뿍 비비며 옆을 보니 비닐 속에 갇힌 부엉이의 왕방울 같은 두 눈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28


  성민은 가만히 턱을 괸 채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부엉이 목각 인형을 요리조리 관찰했다. 진품 명품 감별사처럼 눈빛이 제법 매섭게 빛났다. “이 인형 엄청 오래된 것 같은데, 주인에게 돌려줘야 되지 않을까?” 

  동감이지만…. 아직은 아니다.

  “형도 대단해. 도둑놈들이 버린 장물을 다 주워 오고.” 

  누군가 에게 값을 매길 수도 없는 소중한 물건이 누군가 에게 쓰레기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까. 태민은 복숭아 젤리를 오물거렸다.

  “운명적이네. 형이 이건우씨 집 잠복하는 시간에 도둑들도 같은 날을 잡은 거고. 게다가 인형이 부엉이야. 부엉이 인형과 부엉이 탐정. 뭔가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운명…. 도둑과 탐정. 서로의 목적은 다르지만 목표 상대를 주시하는 촉은 비슷하다. 

  “형 말 대로라면 도둑들이 이건우씨 집이 비었다고 생각해서 들어갔다가 안에 사람이 있어 혼비백산했다 그 얘긴 데.” 성민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형 생각은 어때? 도둑들이 집 안에서 봤다는 그 사람 말이야.” 

  도둑들은 할배를 봤다고 얘기했다.

  “할배라면 집에 남아있던 사람이 이건우씨가 되는 거고. 운동하러 나간 사람이 이건우씨가 아니란 얘기지 않아? 그렇다면 둘 중 하나. 도둑들이 사람을 잘 못 봤든지 아니면 운동하러 나간 사람이 진짜 이건우씨 아들이든지. 맞지?”

  도둑들은 밤눈이 밝다. 어둠 속이라 해도 노인과 젊은이를 착각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러면 이야기가 진짜 산으로 가는 거 아냐? 이건우 가족들은 짜증 나게 왜 꽁꽁 숨어살지? 그럴만한 이유도 없을 것 같은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 밖에 낼 수 없는 사연이 구구절절 넘치기 마련이다. 

  성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책상 옆의 화이트보드 앞에 서더니 이 층 주택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통 복잡해서 이렇게 좀 써야지 정리가 될 것 같아. 여기 일 층에 이건우씨가 살고, 이 층에 아들이 산다고 해보자. 외부 현관문 옆에 이 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이 있지만 이건우는 주로 내부에 있는 계단을 이용하지. 어느 날 밤 아홉시경, 형은 이건우가 외부 계단을 통해 홀로 운동하러 나가는 걸 미행했어.” 성민이 매직을 던졌다.  “형이 그 때 제황산 공원에서 봤던 나무 껴안던 사람이 이건우 맞아? 도둑들이 맞을까? 형이 맞을까? 아무래도 형이 잘못 본 거 같은데….”

  시간이 갈수록 기억이 희미해졌다. 흰 장갑과 절룩거리던 다리에서는 노인의 아우라가 풍겼지만 가로등에 비친 얼굴은 노쇠한 얼굴이 아니었다.

  “에휴….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간에 지금 확실한 건 그 집에 아버지와 아들로 추정되는 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거야. 고맙게도 도둑들이 그걸 증명해 준 꼴이 되었지만.”

  태민의 고개가 끄덕거렸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궁금한 건 형이 왜 이건우 그 사람에게 집착하게 되었느냐는 거지. 유키에가 그 사람 잘 만나고 벌써 돌아갔는데 더 이상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 없는 거 아니야? 그 사람은 이제 우리와 아무 관련도 없는데 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태민이 소매를 걷어 붙이며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갔다. 먼저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과 일본에서 온 유키에를 선으로 연결한 후 다시 유키에에서 이건우 방향으로 화살표를 그었다. 

  “그러니까 형은 지금….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살인 사건과 이건우씨가 연관이 되어 있다 결국 이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태민의 눈빛이 빛났다.

  “그 연관성을 파악하러 일본에서 유키에가 여기까지 왔다. 맞지?”

  태민이 엄지를 치켜 들었다.

  “정말 기가 막히네. 유키에가 아무일 없이 일본으로 돌아갔지 않아? 지금도 이건우씨는 잘 살고 있고. 그게 뭐 야? 형 말 대로 유키에가 원장 사건의 범인으로 이건우씨를 노리고 왔다면 진작에 이건우 그 사람 저 세상에 보내야 되는 거 아닌가? 킬러가 누구 개 이름도 아니고. 춤만 좀 추지. 유키에가 무슨….” 성민이 쏘아붙였다.

  반박할 수 없는 팩트지만 유키에는 이건우에게 아직 볼 일이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유키에…. 수상한 점이 많아. 공유 숙박 사이트로 잡았다는 숙소도 거짓말이고 논문 쓴다는 것도 어설프긴 해. 택시에서 납치까지 당한 것도 이상하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우씨 잘 만나고 그냥 돌아갔으니까 우리는 더 이상 그 사람에 대해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봐. 형은 뇌 구조가 어떻게 된 게 이건우하고 아이스크림 원장 죽음이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 거야?”

  직감만 있을 뿐 지금은 딱 잘라 설명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계속 의심이 든다면 어쩔 수 없지. 형은 형대로 나는 나대로. 따로 또 똑같이 노는 거지 뭐.” 성민이 입맛을 다시다 말을 이었다. “난 사실 이건우 말고 그 사람 아들에게 호기심이 생겨, 자폐증을 앓았다고 했는데 실종된 지 거의 이십 년 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긴 있는 거야? 이건 말이 안 돼! 만약 형 말처럼 아들이 그 집에 진짜 있다면 완전 세상에 이런 일이 찍어도 될 정도라니까.” 

  자폐증은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운 병이니 멀쩡히 집에 돌아왔다면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이 있었다는 얘기다.

  “전문시설 같은데 들어갔다 돌아온 거 아닐까?” 

  이건우씨가 오랜 시간 아들을 찾기 위해 수소문하고 다녔는데 전문 시설에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들을 우여곡절 끝에 찾았다고 쳐. 사회생활도 못하는 사람이 건강 상태는 어땠을 것 같은데?” 

  노숙자로 살았다면 몸이 성치 않을 것이고 인간 노예로 착취당했다면 더더욱 건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멀쩡히 돌아왔으니 그런 가설은 가능성이 낮다. 누군가 가 잘 케어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누군가가 케어했다? 형 말 듣다 보면 첩첩 산중이야 이거. 보통 사람들은 형의 머리 구조를 못 따라간다니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아 답답하네.”

  태민은 화이트보드 앞에 다시 섰다. 이건우씨 밑으로 선을 한 줄 긋고 아들이란 두 글자를 적고 동그라미 테두리를 쳤다. 

  “이건 왜? 설마…. 유키에가 찾으려 했던 사람이 이건우씨가 아니고 그의 아들이란 의미야?” 

  태민이 의미심장한 썩소를 날렸다.

  “이유는?” 

  태민은 매직을 들어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밑에 시냅스 연구소를 적은 후 둘 사이에 선 하나를 연결하고 그 선을 굵게 색칠했다. 그리고 굵은 연결 선을 매직으로 두드렸다. 

  “빙고!” 성민은 그 굵은 연결 선 중간에서 화살표를 하나 빼내어 이건우씨의 아들 쪽으로 연결했다. “이제야 형의 시나리오를 알겠어. 그렇게 보니까 제법 그럴듯한 스토리가 나오는데….”성민이 검지를 흔들어 대며 말했다. “그래도 난 그게 아니라고 봐!”


29


  커버 댄스 동영상 조회수가 일 만회를 넘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성민은 콘 후레이크 한 숟갈을 입에 넣고 유키에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영상을 촬영해 준 후배에게도 카톡 선물하기로 아이스 커피와 조각 케이크 세트를 보냈다. 곧바로 유키에에게 춤을 추는 이모티콘이 날아왔다. 이러다가 조회수 일 억 회를 찍는 건 아닐까…. 혼자 키득거리며 실없이 웃어 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유키에에게 걱정하는 얼굴의 이모티콘과  몸조심하라는 메시지가 왔다. 성민은 장면이 바뀌듯 신경이 곤두선 현실로 돌아왔다. 매사에 누군 가를 의식하면서 생활해야 하는 일은 두렵고 피곤하다. 최근 들어 무관심했을 공간들과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사람들에게 귀가 트이고 눈이 트여버렸다. 하루하루 고단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머리까지 얼어버릴 것 같은 콜라를 마시며 어린 시절 겁쟁이 형을 떠올렸다. 

  형은 자폐증이 무색하게 철저히 위험회피형 인간이었다.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은 잘도 피해가고 두려움도 느낄 수 있는 얄미운 사람이었다. 햇살 좋은 그 날도 형의 진면목을 다시금 보고야 말았다. 형과 함께 서점에서 책을 사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길목을 지키던 양아치 두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형과 나를 불러 세우고는 주머니를 뒤져 잔돈을 가져갔다. 시야에 경찰서도 보여서 나는 겁도 없이 그들에게 덤벼 들었다. 그 때, 양아치의 주먹이 가슴팍에 꽂혔고 나는 뒤로 나자빠졌다. 그 순간 형은 100미터 달리기 출발 총성을 들은 사람처럼 빠른 스타트로 뛰기 시작했다. 양아치들은 형을 뒤쫓아 가지도 않고 실성한 사람처럼 비웃기만 했다. 그 뒤 양아치들은 항전 의지를 상실한 내게 발길질을 몇 번 더 하고 사라졌다. 멀리 보초를 서고 있던 경찰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그 때 얻은 교훈은 지금도 살아있다. 형을 믿지 않는다. 경찰을 믿지 않는다. 

  그런 겁쟁이 형이 아이러니하게도 정체조차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조직들과 엮여 있는 미제 살인 사건을 파헤치고 있다. 돈도 안 되는 이런 중압감 속에서도 덤덤한 모습을 보면 사람 일은 참으로 알다 가도 모르는 것이다. 형 걱정만 하던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당연히 놀라셨겠지. 성민은 콜라 뚜껑을 닫고 자동차 키를 주머니에 넣었다. 


  성민은 대로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고층 아파트 단지 옆의 고즈넉한 단층 건물 앞에 도착했다. 넓은 주차장에 윤기가 흐르는 회색 포르쉐 카이엔 한 대만 덩그러니 주차 되어 있었다. 불고기 전골로 유명한 식당이라 긴 줄에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상상했는데 평화롭게 새소리만 짹짹거렸다. 자동문이 열리자 식당 홀 안 쪽에서 선배가 손을 흔들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예전엔 가발을 쓴 것처럼 숯이 많던 머리가 이젠 듬성듬성 어설프게 보였다.

  “성민아, 잘 지냈냐? 여기 고만고만해서 대표 메뉴로 내가 미리 주문했다.” 그가 컵에 물을 따랐다. 

  “선배는 무슨 일 이야? 제주도에 있는 줄 알았는데….” 성민이 물을 마셨다. 

  “볼 일이 좀 있어서 나왔지 뭐. 너 요즘도 춤 추고 다니냐?” 

  “난 뭐, 똑같지.” 성민이 폰을 만지작거리다 내려놨다. “제주도 살이는 어때? 외롭지 않아?”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인 곳이지.” 그가 물컵을 들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거 형 차야?” 성민이 주차장 쪽을 가리켰다. “제주도에서 차 끌고 왔어?” 

  선배가 고개를 끄덕이다 작심한 듯 말을 꺼냈다. “혹시…. 너, 일 좀 도와줄 생각 없냐?” 

  “내가? 무슨 일?” 성민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나는 컴퓨터 잠방이인데.”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 데?” 성민은 땀이 맺힌 선배의 이마를 힐끗 쳐다봤다.

  “배달 하나만 해주면 돼. 물건 하나 전달하고 물건 하나 받아오면 돼.” 선배가 티슈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게 뭐야?” 성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이 직접 하면 되지 않아?” 

  “그게….”

  “마약 같은 거야? 와. 형. 진짜. 요즘 그런 일 하고 살어?”

  “그런 거 아니야. 진짜 믿을만한 사람이 너 밖에 없어서 그래. 내가 나타나면 안 되는 일이라서….” 

  “그러니까 배달하는 물건이 뭔 데?” 

  “USB 같은 거.” 선배는 속삭이듯 말했다.

  “USB?” 성민도 목소리를 낮췄다. “설마…. 거기에 엄청 중요한 파일이 들어있는 거야? 국가 기밀이나 중요한 기술 같은 거?” 성민은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럼 반대로 받아 와야 되는 건 뭐 야?” 

  “마찬가지야. USB 같은 거.”

  “미치고 환장하겠네. 어마 무시한 정보를 주고받는 거 맞아?”

  “받아오는 건 비트코인 비밀 키가 들어있는 전자지갑 이야.” 선배가 주위를 둘러본다. 

  “비트코인? 암호화폐 말이야?” 

  “그래.” 

  “내가 건네야 할 파일은 국가기밀 기술이야? 잘못되면 잡혀가는 거 아니야?” 

  “잠깐만.” 

종업원이 버너를 중앙에 두고 음식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끓기 시작하면 바로 드시면 됩니다.” 그녀가 돌아가자 선배가 집게와 가위를 자기 앞으로 갖다 놓았다.

  “성민이 너는 내가 신뢰하기 때문에 말하는 거다. 다른 데서는 절대 말하지 마라.”

  “당연하지.” 성민이 돌솥 밥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넌 관심이 없겠지만 여기서 외곽으로 빠지면 시냅스 연구소라고 있어.” 선배가 고기와 당면을 저었다. 

  순간 성민의 귀가 쫑긋거렸다. 

  “거기에 일하는 사람 중에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친했던 누나가 있거든. 재미교포야.”

  “그 사람도 IT 계통이야?”

  “인공지능, AI 분야 대가지.” 

  “IT 사람이 왜 그런 곳에서 일해? 잘은 모르지만 시냅스면 뇌와 관련된 것 아닌가?” 

  “나도 자세히 몰라. 그 누나가 개발한 여러가지 AI 프로그램으로 약물을 조합해서 치료제들을 만드나 봐. 근데 자기가 만든 기술인데 매번 남 좋은 일만 시킨다고 불만이 많아.” 선배가 야채와 고기를 먹음직스럽게 잘라 성민의 접시에 옮겨 담았다.

  “그래서 기술을 빼돌리겠다?” 

  “그런 것 보다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은 걸거야. 연구실에 쳐 박혀서 젊음을 다 보낸 게 억울하겠지. 얼마 전에 봤는데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더라.”

  “그게 그렇게 대단한 기술이야?”

  “어떤 건지는 나도 몰라. 그걸 사가려는 애들은 스위스 쪽이고 대리인이 나올 거야.” 

  성민은 청경채와 목이버섯부터 집어 먹었다.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지만 시냅스 연구소라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형은 왜 안 돼? 갑자기 이해가 안 돼서….” 성민은 선배의 안경 너머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IT 업계에서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어서 그 누나가 믿을만한 대리인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한 거야. 누나도 연구소에 발각되면 인생 종치는 거니까. 신중하겠지.” 

  성민은 당면을 단번에 빨아 넣었다. 위험한 일들에 계속 엮이는 것에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일단 태민 형에게 먼저 조언을 구하고 싶다. 

  “성민아, 좀 더 생각해봐. 안되겠으면 거절해도 되니까 절대 부담 갖지 말고.” 선배는 고기를 잔뜩 집어 성민의 접시에 담으며 눈치를 살폈다.

  “형, 진짜 잘 몰라서 그러는데 USB에 비트코인 키를 담아오면 그걸 돈으로 찾을 수 있는 거야?”

  “전세계 어디서 든 그 USB하나로 현금화 할 수 있지. 조심만 하면 100%는 아니지만 익명성이 보장돼.” 

  “세상 참…. 그럼 내가 배달료로 받는 대가는?” 성민은 목이 타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한 장 일거야.” 선배는 억 입 모양을 하며 검지 손가락을 올렸다. 

  성민은 왕방울처럼 커진 눈으로 억 입 모양을 따라했다.

  선배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민은 침을 삼켰다. “시냅스 연구소는 형이 아는 누나처럼 대단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어? 여기 살면서 거기에서 일한다는 사람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거든.” 

  “극소수의 연구원만 있다고 들었어. 그 누나도 어쩌다 한 번 씩 만나도 회사 일은 말도 잘 안 해. IT 전공인 누나하고 재활 치료 일하는 사람 두 명 인가 빼고는 전부 뇌 과학자들이라고 했던 것 같아.”

  “의사가 아니라 뇌 과학자라고…. 그렇게 대단한 연구소가 있는 줄도 몰랐어. 혹시 이런 일도 잘못되면 감옥 가는 거야?”

  “음…. 그렇게 까진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선배는 전기 버튼을 껐다. “뇌 신경망 연구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 분야야. 뇌 속에 셀 수 없이 많은 뉴런이나 시냅스 구조 같은 것들을 파악하고 작동 원리를 밝히려고 연구 중이지. 뇌과학이 우주 개발만큼 정복하기 힘든 분야 거든. 그 누나가 여기서 인생을 바쳤다고 하니까 그만큼 기술유출 방지를 위해 연구소 내부 보안이 철저할 거야.”

  “그런 말 들으니까 더 섬뜩한데.” 성민은 입가를 닦았다. “한 가지만 딱 더 물어봐도 돼?” 

  “궁금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 선배는 눈을 깜빡였다.

  “하필 그런 연구소가 왜 이 도시에 있는 거야? 영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친 것 같거든.” 

  “연구소장 고향이 진해라고 들었어.” 선배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30


  마틴은 호수 같이 평온한 바다를 바라보며 BP001이 연구소로 들어왔던 날을 떠올렸다. 서글서글한 눈망울에 벌어진 앞니로 배시시 웃던 아이. 그 아이를 보며 자폐 연구에서 세계 최초이자 최고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성공해서 아이를 꼭 건강한 모습으로 집에 돌려보낼 수 있다는 신념이 죄책감을 덮었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법. 세월이 흐르고 가장 기대를 많이 했던 그 아이가 사라져 버렸다. 과학이란 것은 0.1%만 모자라도 실패에 불과하다. 90도씨에 물은 끓지 않는다. 하나…, 둘…. 그렇지. 서서히 물고기 입질이 왔다. 잔 입질을 차분히 걸러내고 완전히 걸려들 때까지 기다린다. 연구와 낚시의 공통점이다. 오늘은 낚시가 제대로 받는 날이다. 물고기가 제법 많이 담긴 박스와 낚시 도구를 트렁크에 실었다. 뒤쪽 어디 선가 젊은 남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운전석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 남자가 목이 터져라 고함까지 쳐가며 웃기 시작했다. 병적인 울음과 웃음이 온탕과 냉탕을 오가듯 급격히 변화하는 증상이다. 뇌졸중으로 인한 감정조절장애 가능성이 높다. 무시하고 시동을 걸고 벨트를 맸다. 그 때, 세로토닌! 네 글자가 문득 떠올랐다. 울음과 웃음의 균형을 잡아 주는 신경전달물질! 자폐증상 강화와 약화의 균형을 잡아 주려면…. 남자의 웃음소리가 아직 까지 메아리 치고 있다. 저 남자는 우는 것보다 웃는 시간이 훨씬 길다. 사람마다 뇌 구조가 동일해도 뇌 기전은 천차만별이니 애초부터 뇌와 관련된 문제는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제니퍼 말 대로 우리 연구소는 자폐치료제만으로도 세계적인 명성을 확보한 거나 다름없을 지 모른다. 치료제 투약으로 뇌의 전두엽 기능을 정상으로 회복한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으니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반대의 데이터를 완벽하게 얻지 못하면 치료제의 가치는 시간이 갈수록 추락할 것이 뻔하다. 새로운 변이의 출현이나 병의 반복적 발현 없이 치료제만 있는 병은 반드시 종말이 온다. 이런 시나리오를 일본의 회장님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마틴은 관자놀이를 세게 어루만졌다. 


  [도레미 스포츠] 입구의 밋밋한 고딕체 간판은 평범하다 못해 촌스럽기까지 했다. 공장형 삼 층 건물 앞에는 지게차와 트럭이 어지럽게 멈춰서 있고 측면 주차 구역에 새로 뽑은 듯한 재규어가 불협화음을 뽐내고 있었다. 마틴은 입구에 성의 없게 붙여놓은 고객 접견실을 가리키는 화살표 방향으로 들어갔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처럼 보이는 여자가 두 갈래로 묶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종이컵에 들어있는 녹차를 건넸다. 마틴은 마스크를 눈 밑까지 올리고 벙거지 모자를 푹 눌렀다. 

  “먼 길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영업부 김 한 과장입니다.” 검게 그을린 남자가 두툼한 손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마틴은 손에 힘을 빼고 악수했다. 그의 축축한 손바닥 느낌이 좋지 않다. 

  “앉으시죠!” 그가 주머니에서 지갑과 자동차 키를 꺼내 종이컵 옆에 올려 뒀다. 하얀색 재규어 스마트 키가 눈에 띄었다. “대형 짐 볼은 우리 도레미 스포츠가 제일 알아줍니다. 진짜 다른 데 갈 것도 없습니다.” 그가 옆에 있는 작은 책꽂이에서 팸플릿을 집어 들었다. “탄성도 좋고 내구성도 끝내줍니다.” 

  “잘 찢어지지는 않습니까?” 

  “그럼요. 이게 이태리 PVC 재질입니다. 우리 메가 볼 제품은 수출도 많이 합니다.” 

  “사이즈는 어떻게 됩니까?” 

  “여기 보시면 지름이 150, 180, 200센티미터 세 종류가 있습니다.” 그가 팸플릿을 넘겨가며 손으로 가리켰다. “선생님은 피트니스센터 운영하십니까?” 

  “그건 아니고….”

  “저희는 고객님이 원하시는 데로 전부 맞춰드리니까 부담 가지지 마시고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이거 진짜 잘 찢어지지는 않습니까?” 마틴은 똑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그를 살짝 흘겨봤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진짜 튼튼합니다. 이 재질이 열에는 약해도 찢어졌다는 얘기는….” 그가 코를 한번 훔쳤다. 

  “좋은 차 타시네요.” 마틴은 재규어 스마트 키를 보며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그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아, 뭐 평범한 독일, 일본제 싫어서 영국제로 샀습니다.” 

  재규어 자동차가 오래전에 영국에서 인도 회사로 소유권이 넘어간 지는 모르는 얼뜨기다. “영업을 잘 하시는 것 같습니다. 디테일하게 설명해 주시는 거 보면 답 나오지요. 인센티브도 많이 받으실 것 같고. 남자들은 돈 좀 벌면 딱 자동차부터 바꾸고 싶지 않습니까?” 

  그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우리는 자동차 영업사원처럼 인센티브 같은 거 없습니다. 제가 잘 판다고 해도 저에게 별로 떨어지는 거 없지요.” 

  “그렇습니까?” 마틴은 안타까움을 보여주듯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이 팸플릿 제가 하나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보시고 필요하실 때 저에게 연락 주시면 됩니다.” 그가 팸플릿 표지를 앞 뒤 돌려가며 손으로 한 번 씩 턴 후 명함 한 장을 팸플릿에 끼워 마틴에게 건넸다. 


  마틴은 [도레미 스포츠]에서 나와 한적한 공원 옆에 차를 세웠다. 할머니가 아이의 그네를 밀어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팸플릿을 든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제니퍼는 이 프로젝트의 가장 유능한 조력자이자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그런 사람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녀를 당장 내칠 수도 없다. 그녀의 협조가 없으면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없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가 폰을 부서질 듯 움켜쥔 채 전화를 걸었다. 

  “어이 마틴, 어쩐 일이야?” 

  “시간 돼?”

  “알면서 전화했네. 마지막 차로 방금 학원 애들 내려주고 오는 길인데.” 

  “별 것 아니고 잠깐 만났으면 해서.” 마틴은 폰을 끊고 의자를 눕히자 금방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콜록거리며 눈을 떴을 때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소나무가 멋들어진 초등학교 담벼락 뒤편으로 차를 이동시킨 후 야외 운동기구 옆 벤치에 앉았다. 빅터가 닌자처럼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 슬그머니 그의 옆에 앉았다. 

  “다음엔 공을 치거나 술 한잔하자 진짜. 아저씨 둘이 청승맞게 맨날 이게 뭐냐?” 그가 불만 가득한 다리를 꼬았다.

  “너희 학원에서 BP001은 아직 찾고 있는 거지?”

  “그게 궁금했던 거구만. 당연히 찾고는 있지. 그 녀석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진해 바닥을 다 훑고 다녀도 없고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어도 도대체 보이 질 않아. 그 자식에게 들어 간 돈이 얼마야. 먹여주고, 재워주고, 아프지 않게 건강검진 했어, 운동시켜 줬지. 세상에 그런 데가 어디 있어? 개인적인 생각인데 너희 연구소는 홍보만 그럴듯하게 할 수 있으면 굳이 우리가 애들 납치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 서로 자기 애들 받아달라고 밤샘 줄 설 수도 있다니까. 진짜.” 

  “틀린 말은 아니지. BP001 집은 어디야?” 

  “중원 로터리 근처에 체리 베이커리라고 오래된 빵집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 맞은편이야. 예전에 우리가 너희 연구소에 데려갈 애들 좀 파악하려고 장애아들에게 수업도 시켜주고 소풍도 데려가고 한창 밑 밥 좀 뿌렸을 때 딱 그 자식이 걸려들었던 거야. 아비라는 작자와 학원에 함께 찾아왔는데 희한하게 그 아비가 다 큰 애 손을 꼭 붙잡고 옆에서 계속 붙어 다니고 하도 극성이라 꼴사납더라고. 넌 잘 모르겠지만 그 자식 너희 연구소에 넘기고 나서도 한참 동안 찜찜했어. 왜? 그 집 한번 살펴보게?” 

  “아무래도 느낌이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데는 갈 곳이 없어. 멀리 못 갔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참 고지식하구만. 우리가 그 놈 집을 한 두 번 확인한 것 같아? 그 자식이 집에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 놈 집부터 샅샅이 뒤졌다고. 그 놈 아비 간병인이었던 사람에게 돈도 좀 찔러줬지. 그 놈 아비가 시장에 자주 나타나길래 시장 할머니들 물건도 사줘 가면서 수시로 그 작자의 동태를 살폈지. 그 작자 이름이…. 맞아. 이건우야. 근데 별거 없었어.” 그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래?” 

  “가만히 보니까 너는 BP001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뭐 그런 생각이 확고한 것 같은데?” 그가 꼬았던 다리를 바꿨다. “만약 그랬으면 티가 안 낫겠어? 벌써 소문났겠지. 그 영감 자기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주제에 그런 아들을 혼자 어떻게 돌보겠어?”

  “맞는 말이긴 하지만 BP001 사라진 뒤로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신원 미상으로 죽었다는 얘기도 없어.” 마틴은 벙거지 모자를 손에 쥐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려면 BP001이 꼭 필요해. 내가 좀 움직여봐도 될까?” 

  “알았어. 넌 우리 학원 소속도 아니고 주변에 얼굴도 알려져 있지 않으니 별 문제없을 것 같은데.”

  “고마워. 그리고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부담 갖지 말고 말해 봐.”

  “제니퍼, 조사 좀 부탁해.”

  “누구? 제니퍼? 너의 분신을? 뭐 꿍꿍이가 있어? 예전부터 살아 생전에 우리 원장이 제니퍼 내쳐야 한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를 땐 꿈쩍도 하지 않더니만.”

  “그냥…. 부탁 좀 할 게.” 

  “알았어. 예로부터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그건 역사가 증명해. 내가 건수 물어오면 다음에 술 한잔 사라!” 그가 솔방울 하나를 주워 던지며 일어났다.


31


  엄마의 손을 잡고 좁은 골목길 끝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이상한 냄새가 나는 작은 방에서 무서운 얼굴을 한 여자가 방울을 딸랑거리며 앉으라고 말했다. 눈이 큰 인형들과 형형색색의 긴 종이들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들이 진짜 인물이 좋네. 보기 드문 미남이야.”

  “네. 보살님.”

  “귀한 손님이야. 극진히 대접해!”

  엄마가 머리를 반복 적으로 끄덕였다.

  “사람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뭐라고 생각해?”

  “잘 모르겠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을 훤히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야. 지 인생이라 지 맘대로 될 걸로 착각하지.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서야 비로소 착각 속에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거야.”

  “네….”

  “그래서 나는 당신 아들 인물이 훤하니까 연예운이 핀다. 재물운이 좋다. 그런 아무 말 대잔치를 열 수가 없어. 그러나!” 여자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놀란 엄마가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한 가지는 잘 보여. 환하게 보인다고.”

  엄마가 잘못한 사람처럼 굽실거리며 손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자폐가 아들을 살렸어!” 여자가 눈알을 부라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엄마는 고개를 숙이고 또 숙였다.

  “자폐가 아니었으면 니 아들 이십 대 후반에 교통사고로 요절할 운명이야. 큰 불운을 막았어. 천만다행인 줄 알아.” 

  엄마는 손을 모으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피처럼 붉은 펜으로 기다랗게 생긴 줄 같은 것에 글자를 적어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동그랗게 말아 엄마 발목에 감았다.

  “이 발찌가 끊어지는 날, 이 아이는 자폐의 굴레를 벗게 된다!”

  태민아…. 어느 날 오후 끊어진 발찌를 한 손에 들고 부엌에서 엄마가 울고 있었다. 태민아…. 태민아…. 엄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먼 공간에서 흐느끼듯 들려왔다. 

태민이 눈을 떴다. 바로 어제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한 기억이다. 구글 어스를 켜서 이건우씨의 집과 붙어있는 옆 집, 그리고 집 뒤편을 천천히 살펴보니 이건우의 옆집을 보러 왔던 BMW 남자가 떠올랐다. 멍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은 부엉이 인형을 바라보던 태민은 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십 분 정도 지나자 성민이 사무실로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형, 정면 승부 할 거야?” 

  부엉이 인형을 되돌려 주는 명분으로 이건우와 그의 아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다 도둑으로 몰리면?” 성민이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그건 아니다. 제 발로 물건 돌려주려 찾아오는 도둑은 없다.

  “가만 있어보자….” 성민의 눈알이 부산히 움직였다. 

  일단 이건우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편지함에 간단한 쪽지라도 남기면 된다.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편지함 같은 거 확인도 안 할 수 있으니까 차라리 문틈에 쪽지를 끼워 두는 건 어때? 문을 열면 쪽지가 떨어지니까 금방 볼 수 있어.”

  태민은 곧바로 작은 편지지에 부엉이 인형을 주웠던 날의 일을 우연으로 가장하고 성민의 폰 번호를 남겼다. 

성민은 저녁 여덟 시 십분, 이건우의 집 앞에 도착해 쪽지를 문 틈에 끼워 넣었다.


  다음 날 태민은 출근하기 직전 성민의 부재 중 전화와 메시지를 확인했다. 태민은 부엉이 인형을 종이 가방에 넣고 곧장 성민의 집으로 향했다. 성민이 집 밖에서 서성이다 곧바로 태민의 차에 합류했다.

  “직방이네!” 흥분한 성민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른 건 묻지도 않고 형이 보내 준 부엉이 목각인형 사진만 보여 주니까 그걸로 끝!”

  부엉이 인형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틀림없다. 

  “바로 자기 집에서 만나자고 그러더라. 그래서 형과 같이 가도 되냐 물었더니 당연히 된다고 그래. 일사천리야.”

  태민은 종이 가방 속의 부엉이 인형을 쓰다듬었다.

  “뭔 일 생기는 건 아니겠지? 이건우씨가 되었든 그 아들이 되었든 건 간에 저번에 제황산에서 나무 껴안는 운동한다고 해서 영…. 이상한 사람들 아닐까 께름칙하기도 하고. 노상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들 만난다고 생각하니까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뭐. 유키에도 별 일 없이 만나고 돌아갔으니까 크게 걱정은 안 하지만.”

  의심 살 만한 행동만 안 하면 문제는 없다.

  “무슨 얘기할 지 머릿속이 복잡하네. 우리 커피 한잔 마시면서 가자.” 차가 멈추자 성민이 길가 편의점으로 뛰어가 캔 커피를 사왔다. “이건우씨가 수상하긴 해도 결국 피해자야. 자기 아들이 납치당했으니까. 어찌 되었건 간에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어도 자폐증이 심하니까 말을 못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면 아들이 그동안 어디서 뭘 했든 지 알 방법이 없지 않아? 시냅스 연구소에 잡혀 있었다는 거는 상상도 못할 것 같은데. 만약에 형처럼 운이 좋아서 자폐증이 완화되었다면 모를까.” 성민이 목젖이 도드라질 정도로 고개를 젖히며 커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넣었다. 

  자폐증…. 태민은 이대근에게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우리 말 맞출 거 없어?” 

  태민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역시 우리 형이야. 그 아이디어면 대화가 술술 풀리겠는데.” 성민이 목각 인형이 든 종이 봉투를 챙겨 들었다.

  태민은 귀마개를 빼서 케이스에 넣었다. 


  이건우씨의 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온화했다. 그가 안내한 거실 바닥의 방석에 앉자마자 성민이 그에게 종이 봉투를 건넸다. 그는 봉투 속에서 곧바로 부엉이 인형을 꺼내 들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인형을 살폈다. 

  “대대손손 전해지는 집안의 가보인가요?” 성민이 대뜸 인형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 아버님이 물려주신 거니까 소중한 거지요.” 그가 목각 인형 머리 부분을 애완동물처럼 쓰다듬었다.

  “여기 앞 집 빵이 맛있어서 저희는 가끔 들릅니다. 그 날도 빵 때문에 왔다가 그 도둑놈들을….”

  “어찌됐건 간에 감사합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주세요.” 그가 흰 봉투를 내밀었다. 

  성민은 손사래를 쳤다. “저희도 좋은 일 하고 뿌듯합니다. 사실 저희 형이 탐정이라 좋은 경험이 된 것 같습니다.” 성민이 태민을 향해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탐정?” 그가 태민의 긴 머리를 쳐다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음악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태민은 그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형이 오랫동안 자폐증을 앓아 와서 지금도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잘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제가 중간에 끼지요.” 성민이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은근슬쩍 태민을 보는 그의 낯빛이 구름 낀 하늘이 걷히듯 드라마틱하게 환해졌다. 

태민의 귀가 이 층에서 미세하게 뿌지직 거리는 마루바닥 소리에 반응했다. 

  “어떻게 탐정 일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가 태민의 얼굴에 묻은 티끌이라도 땔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성민이 답변을 머뭇거리는 태민을 힐끗 보며 말했다. “말이 탐정이지. 대단한 건 아닙니다. 사무실을 내고 일을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되었고요.”

  “아이고, 그게 어디예요? 자폐증이면 일반적인 직업 가지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까?” 그가 다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태민의 귀가 이 층에서 미세하게 뿌지직 거리는 소리에 더욱 쫑긋거렸다. 

  “그나저나 이 도시에서 탐정 찾을만한 사건이 있을까 싶네요. 의뢰는 가끔 들어옵니까?” 그가 회의적인 표정을 감추려 목소리에 힘을 주며 물었다.

  “어쩌다 한 번 씩 들어와서. 솔직히 돈은 안 됩니다. 그래도 형이 이 일을 좋아하니까요.” 성민은 태민의 눈치를 살폈다.

  “형제가 씩씩하게 잘 컸네요. 본인들도 힘든 일이 많았을 것 같지만 부모님도 고생 많이 하셨을 텐데…. 존경스럽습니다.” 그가 여운이 남는 듯 시선을 떨구었다.

  “집에 도둑이 들어서 마음이 심란하시겠습니다.” 성민이 대화 주제를 틀었다.

  “사실 집에 훔쳐 갈 거도 없어서 걱정은 안 합니다. 그것 보다는 이 놈들이 오랫동안 우리 집을 관찰했다 생각하니 좀 찝찝한 감이 있지요 뭐. 안 그래도 이번에 위층에 열쇠 좀 튼튼한 걸로 바꿨습니다.” 

  “요즘도 좀도둑이 있나 보네요?”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있지요. 바퀴벌레가 사라지지 않잖아요? 이 동네는 노인들이 많고 밤이 되면 사람들도 많이 안 다녀서 을씨년스럽기는 합니다. 불안한 집들은 방범 창도 많이 하지요. 저희는 그렇게 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서.”

  “일, 이 층 혼자 다 쓰십니까? 일 층에도 방이 몇 개나 되는 것 같은데요.” 성민이 그의 표정을 살피며 침을 삼켰다.

  “보시다시피 그렇게 큰 집은 아닙니다.”

  “저희는 여기 앞에 빵 집 자주 오다 보니까 이 동네가 조용하고 살기 좋은 곳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교차로에 옆 집 세가 나왔길래 관심이 있었는데 벌써 나간 것 같더라고요. 한 발 늦었습니다.” 

  “그래요? 이 동네 집도 알아보고 있어요?” 그가 머뭇거렸다. “나는 세 주기도 뭐하고 그래서 그냥 넓게 살지요. 이 동네는 확실히 다른 데 비해서 조용하긴 할 겁니다.” 그가 엉겁결에 장갑 낀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성민의 시선이 그의 장갑에 멈췄다. “손을 다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장갑 낀 손을 얼른 내리며 급히 말을 돌렸다. “저기 탐정 분은 자폐증 때문에 아예 말을 못합니까?” 그가 눈만 껌벅 거리는 태민을 쳐다봤다. 

  “저하고는 할 수 있는데. 다른 분들은 형의 말을 잘 못 알아듣습니다.” 

  그가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대단한 분들 만나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가 흰 봉투를 다시 내밀었다. 

  성민은 봉투를 사양하며 그의 손을 살폈다. 

  옆에 있던 태민이 그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넸다. 

  “다음에 필요하신 일 있으시면 부담 없이 연락 주십시오.” 성민과 태민은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태민은 위층에서 뿌지직 거리는 소리가 자신들이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현관문 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운동화 옆에 놓여있는 신발에 발을 슬쩍 갖다 대며 신발을 신었다. 270미리, 똑 같은 사이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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