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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08번뇌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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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2. 2024

시냅스 연구소의 사람들

(15~24)

15


  아침부터 억세게 쏟아지는 장대비를 보며 태민은 상념에 잠겼다.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이 시애틀 카페에서 수상한 남자들의 대화 내용을 감청하던 어느 날 들통이 나게 된다. 그런 시나리오면 카페의 남자들이 원장과 그녀의 가족을 죽였다는 이야기로 흘러가게 된다. 하지만…. 따끈한 블랙커피를 만든 후 노트북 앞으로 돌아왔다. 구글 지도를 켜서 성민이 카톡으로 보내 준 시냅스 연구소 주변 지리를 꼼꼼하게 살펴봤다. 산 중에 나 홀로 건물이라 접근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커피 향을 음미하며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인터넷에는 연구소에 대한 정보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철저히 고립된 곳이라고 해도 일하는 직원들은 있을 것이고 그들은 건물 밖으로 나올 것이다. 출퇴근…. 커피를 천천히 마신 후 귀마개를 챙겼다. 


  태민이 국도 변의 주유소 옆 편의점에 차를 세웠을 때 빗줄기가 점차 가늘어졌다. 퇴근 시간이라 주유소로 차들이 서서히 밀려드는 게 보였다. 참치마요 삼각김밥과 녹차 한 병을 사서 차 안으로 돌아왔다. 이제 일 분만 지나면 여섯 시 정각이다. 연구소 직원이 많다면 회사 버스가 다니겠지만 그 정도 규모는 아닐 것이다. 산 속까지 대중교통이 없으니 퇴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차를 몰거나 카 풀을 할 것이다. 삼각김밥 비닐을 뜯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녹차 뚜껑을 열고 있을 때 심해의 상어처럼 유연하게 진입하는 검은색 중형차가 보였다. 자동차 뒷바퀴가 깨끗하다. 저건 아니다.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번에는 하얀색 제네시스가 진입한다. 타이어 휠이 광택으로 반짝거렸다. 모두 패스다. 아직 까지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은 후 편의점을 들르는 사람은 없다. 벌써 사십 분의 시간이 흘렀다. 목을 몇 번 돌린 후 녹차 페트병을 입에 갖다 대었을 때, 푸른 바다 색깔의 렉서스가 진입했다. 태민의 눈에 타이어와 휠에 묻은 진흙이 비쳤다. 그 순간 사래가 들려 콜록거리다 녹차 병을 내려놓고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주유를 마친 렉서스가 편의점 쪽으로 오더니 태민의 차 옆에 나란히 멈췄다. 키가 큰 감색 정장의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잠시 후 뒷좌석 창문이 조금 열렸다. 회색 벙거지 모자 위로 스멀거리는 연기가 새어 나왔다. 이 때다 싶어 귀마개를 뺐지만 대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앞 좌석의 정장 남자는 비서같이 보인다. 전후 사정이야 있겠지만 미리 기름을 넣지 않고 붐비는 퇴근 시간에 그것도 자신이 모시는 분을 태우고 기름을 넣는다….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상식적이지 않다. 잠시 후 차창이 올라가고 곧바로 차가 움직였다. 

  렉서스는 삼십 분 정도를 달려 고급 주택 단지로 들어갔다. 입구에 CCTV와 차단기가 보였다. 태민은 차를 돌려 도로 가에 잠시 멈췄다. 오 분 정도 기다리니 크림색 소렌토 차량이 입구에서 나왔다. 열린 차창 사이로 감색 정장 남자의 얼굴이 스쳐 그를 뒤쫓았다. 소렌토는 한 상가 건물로 들어갔고 태민도 그의 차 근처에 주차했다. 그가 탄 엘리베이터가 오 층에 멈췄다. 태민은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잡아 오 층과 칠 층을 차례대로 눌렀다. 오 층 문이 열리자 피트니스센터의 음악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한 손으로 귀를 막고 문 닫힘 버튼을 빠른 속도로 반복해 눌렀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배에서 나는 요란한 배꼽시계 소리를 참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소렌토 주인이 나타난 시간은 아홉 시를 조금 넘었을 때였다. 그를 뒤따라 오분 정도 달렸을까, 일 층에 샤브샤브 식당이 있는 오피스텔 건물로 소렌토가 들어갔다. 재빨리 위치를 폰에 저장하고 돌아오는 길에 버거킹에서 드라이브 스루로 햄버거 세트를 샀다.  


  다음날 동이 틀 무렵부터 샤브샤브 간판이 보이는 오피스텔 앞에서 진을 치고 대기했다. 일곱 시 삼십 분 정각이 되자 크림색 소렌토가 오피스텔 주차장 출구에서 나왔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쉰 후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소렌토는 어제 봤던 렉서스가 들어갔던 고급 주택 단지로 들어갔고 오분 정도 지난 후 예상대로 렉서스가 차단기를 빠져 나왔다. 거리를 두고 렉서스를 따라가다 보니 어제 저녁 그들과 조우했던 주유소와 편의점을 지나쳐 해안 도로로 접어 들었다. 이제 잠시 후면 연구소가…. 그런데 예상과 달리 렉서스가 연구소로 향하는 비보호 좌회전을 지나쳐 그대로 직진했다. 설마…. 조심스레 차량이 보일 듯 말 듯한 거리를 유지하며 창을 조금 열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포기하고 그만 돌아가는 게 좋을지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할 무렵 사십 킬로를 넘게 달린 렉서스가 그제서야 한적한 숲길로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덩굴 나무로 감긴 짙은 밤색 건물 앞에 멈췄다. 모르는 척 렉서스를 지나쳐 정면에 보이는 카페 앞에 차를 세우고 양쪽 백미러와 룸 미러를 조정해 뒤편에 보이는 렉서스의 동태를 살폈다. 감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뒷문을 열고 밤색 건물로 들어가는 벙거지 모자에게 머리를 숙였다. 폰으로 위치를 검색하니 [에메랄드 갤러리] 라고 뜬다. 그들이 이 곳으로 매일 출퇴근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에서 내려 카페에 들어갔다. 다행히 시끄러운 음악 대신 잔잔한 피아노 재즈 선율만 흐른다. 중년의 남녀 두 쌍이 서로 원수진 사이처럼 한 쌍은 창가에, 나머지 한 쌍은 구석진 자리에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있다. 벽에 붙은 메뉴를 슬쩍 보니 분위기 좋은 곳이라 전체적으로 가격대가 높다. 소금 커피를 주문한 후 진열대 안의 조각 케익을 들여다 보는데 유리에 감색 정장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옆으로 비켜서자 카운터 여자가 그에게 하이톤의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가 슬며시 고개를 돌리자 태민은 귀를 덮은 머리카락이 움직이지 않게 주의하며 출입구 쪽 창가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늦게 주문했던 그가 먼저 쟁반을 들고 안 쪽 자리로 걸어갔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일본어로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상대편 얘기를 듣기보다 주로 자기 말을 하고 있다. 십 오분 정도 지나자 그가 카운터 여자와 인사를 나눈 후 카페를 나갔다. 태민은 그가 렉서스에 타는 것을 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소변기 옆 긴 통 창으로 숲길 산책로가 보였다. 카페를 나와 에메랄드 갤러리까지 길게 이어진 산책로를 걷다 갤러리 근처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귀마개를 뺐는데도 괴로운 소음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청각 주파수를 갤러리 방향으로 맞추고 눈을 감았다. 대화 소리가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마틴 박사님,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원하는 게 심플하다는 거. 자폐를 치료하는 약물, 딱 그 한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절대 변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유념하고 있습니다. 회장님.”

  “일본 쪽 회장님도 저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일본 쪽도 회장님처럼 딱 한가지만 원하는 건 동일합니다. 하지만 관점이 다르죠. 거기는 자폐를 유발하는 약물을 원합니다.”    “그래요? 뭐 그건 입장 차가 있으니까 잘 모르겠고. 아까 얘기했던 변수라는 게 도대체 어떤 겁니까?”

  “이상 증상입니다.”

  “명료하게 설명해 보세요!”

  “뇌 신경전달물질 분비에 이상이 생겨 자율 조정이 안되게 됩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밸런스가 깨지는 것이지요.”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보세요!”

  “쉽게 비유하자면 자동차의 급발진과 급제동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폐라는 병이 원래 그런 것 아니요? 자폐아가 자신을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정도가 훨씬 심각한 것입니다.”

  “심각하다면 어느 정도 인지 감이 잘 안 오는데….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확률 상 미미하게 발생한다면 문제될 건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먼저 원인 규명이 되어야 확률도 따져볼 수 있습니다. 회장님, 대단히 송구스럽지만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라…. 내가 사람을 닦달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이거 해도 해도 너무 한 것 아니요? 더 이상 시간을 소비할 수 없어요.”

  “회장님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 시제품을 보여 줄 수 있습니까?”

  “일본 쪽 회장님과도 일정을 조율해 보겠습니다.”

  “내가 꼭 박사님 힘들게 하려는 건 아니요. 하지만 모든 일에는 선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아무리 완벽한 작품도 선을 넘어 버리면 아무 쓸모 없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사업을 해오면서 수도 없이 봐왔어요. 선을 넘으면 어떻게 되는지. 누차 얘기하지만 나는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은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회장님, 이번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어 허 무릎까지 꿇고 얼른 일어나게! 내가 박사님 아니면 누구를 믿겠나? 마틴 박사님은 스무 살도 안 돼서 미국 박사를 따신 분 아니요. 그것도 스탠포드 박사. 이건 확률 상 나오기가 쉽지 않지. 당신은 이십 만 명 남짓한 이 진해 개천에서 난 용 일세. 진짜 용이라고. 내가 한 마디 했다고 마음 꺾이지 말고 자부심을 가지게. 역사에 남을 대 업적을 이룰 수 있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런데 말이야 다른 건 다 좋은데 딱 한가지가 마음에 걸려.” 

  “말씀하십시오!”

  “생체실험은 꼭 해야 하오? 영 찜찜해서 그래. 그냥 보통 제약회사 같은 데서 하는 거 있지 않아? 그 임상 실험 같은 거 말이야.”

  “안 됩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 합니다. 아니면 글로벌 제약사와의 경쟁에서 도저히 당해낼 수 없습니다. 일본 쪽 회장님도 그 점을 잘 이해하기에 생체 실험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계신 겁니다.”

  “그래요? 일본 회장님은 여러모로 나하고는 생각하는 게 차이가 있구만. 지금까지 해온 거, 내가 이제 와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지 마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거참.”

  “회장님. 인간의 뇌는 소 우주와 같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천지창조의 비밀이 전부 뇌에 들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쥐와 원숭이 같은 동물로 절대 대체될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이 바로 뇌 속에 있습니다. 에이즈나 암을 정복하는 문제와도 차원이 다릅니다. 생체 실험 관련해서는 일본 쪽 회장님께서 문제없이 지원해주고 있으니 회장님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알겠어요. 아무쪼록 지금처럼 만 문제없게 진행하세요.”

  대화가 끝나고 한바탕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태민은 감전된 것 같은 다리를 휘청거리며 서둘러 차로 되돌아 왔다. 렉서스 앞에서 서성이던 감색 정장 남자가 벙거지 모자가 나오자 뒷좌석 문을 열었다. 태민은 시동 버튼을 눌렀다. 


16


  유키에는 폰의 캘린더를 들여다 보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아르바이트가 쉽지 않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매뉴얼대로 사람을 만나고는 있지만 이대로 가면 이건우씨를 찾을 수나 있을 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아르바이트 앱에 매일 일본어로 일지를 저장하는 것 만으론 나머지 돈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의뢰인이 바라는 것, 꼭 그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 다음 미팅 대상에 올라온 사람의 프로필을 확인하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안녕하세요.” 청바지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화장기는 없지만 생기 도는 입술에 피부가 밝아 보였다. 

  “갑자기 연락 드려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유키에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니어요.”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사실 저도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어요. 교직을 그만둔 후 자그마한 무역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했습니다. 일본에도 가끔 다녔지요.”

  일본과의 인연 때문인지 갑자기 그녀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뭐 하시겠어요?” 유키에가 테이블에 세워 진 작은 종이 메뉴판을 가리켰다.

  “저는 그냥 연하게 내린 커피가 좋아요. 요즘 커피들은 너무 써서.” 그녀가 메뉴판도 보지 않고 말했다.

  유키에는 종업원에게 연한 드롭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창문 밖으로 멋있는 남자가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교직은 언제 그만 두셨어요?”

  “대근이가 실종된 이후에 그만 뒀습니다. 그 아이가 좀 특이해서 힘든 점도 많았지만 실종되고 나서는 마음이 빠르게 무너져버렸어요. 이후에 교편 잡기가 무서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그녀가 귀밑 머리를 넘겼다. 

  “혹시 그 학생 아버님은 만나 보셨습니까?”

  “당연히 만나봤죠. 지난 일 이야기해봐야 소용없겠지만 원래 대근이 아버님하고 사이가 아주 안 좋았어요.”

  “어떤 이유로….” 

  “자기 아들 신경 안 써주고 방치한다고 어찌나 극성이던지 제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실 다른 일반 학생 부모님들도 알게 모르게 저에게 불만을 많이 토로했거든요. 대근이 때문에 자기애들 공부에 지장을 많이 받는다, 이상한 행동을 따라 한다 등 하루가 멀다 하고 클레임을 받았습니다.”

  “양 쪽에서 샌드위치 신세였다는 거네요. 얼마나 힘드셨을까 상상이 안 됩니다.”

  “하루는 대근이 아버님이 학교로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대근이는 표현을 못하니까 아버님이 대근이와 붙어 다니는 친구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건네 들었나 봅니다. 그걸 듣고 화가 났는지 직접 찾아왔던 거지요.”

  유키에는 앞머리를 매만졌다. 

  “글쎄 다짜고짜 교실로 들이닥쳐서 대근이 콧구멍 속에 완두콩 만한 실 매듭 한 개가 들어 있었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어요. 애가 표현만 할 수 있어도 아무 일 아닌데, 자기 몸 불편한 거 하나도 제대로 얘기를 할 수 없으니까…. 한동안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계속 킁킁거려 고생을 하다가 우연히 소아과에서 발견했다고 저에게 막 화를 냈지요. 게다가 어떤 놈이 한 짓이냐고 교실에 있는 애들에게 마구 소리까지 치고…. 정말 볼썽사나웠지요.” 

  “학생들이 그런 장난도 치나요? 코에서 금방 안 빠졌나 보네요.” 유키에는 콧구멍을 눌러 봤다.

  “어찌된 영문인지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코 속 깊이 박혀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우리 반 애들은 아무도 안 그랬다고 그랬습니다. 그런 장난은 잘못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데…. 여하튼 그 일을 계기로 대근이 아버님과는 더 멀어졌죠.”

  유키에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얘기할 수 있지만 그 사건 이후로 정나미가 완전히 떨어져 버렸어요. 대근이에게 더 소홀해졌던 건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런데 대근이가 사라진 이후로 마음이 영 안 좋아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용기를 내서 대근이 집에 한 번 찾아갔습니다.”

  “아…. 직접 찾아가셨군요?”

  “네. 그래야 마음이 풀어질 것 같아서 용기를 냈지요. 아직 거기 사시는 지 모르겠는데 처음 대근이 집을 방문했을 때 아버님이 중앙의 다과 탁자 맞은편에서 무릎을 꿇더니 저에게 큰 절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유키에는 어떤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촌지라고 들어 보셨어요?” 

  “모릅니다.”

  “예전에는 자식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 촌지라는 게 횡행했지요. 선생님이 학생 집에 가정 방문 같은 걸 할 때, 학부모가 봉투에 돈을 담아 선생님께 성의를 표하는 인습입니다. 그런데 큰 절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거든요. 오랫동안 악 감정을 공유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행동이였지요. 아무튼 그 이후로 예전에 묵었던 감정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유키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이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놨다. 

  “지금도 기억나는 거는 대근이가 엄마가 안 계시는 걸로 알고 갔는데 집이 너무 깨끗한 겁니다. 보통 선생님이 가정 방문 한다고 하면 부랴부랴 정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집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벼락치기의 흔적이 남아있기 마련이죠. 그런데 대근이 집은 마룻바닥에 광이 날 정도였어요.” 그녀가 커피 잔을 들며 피식 웃었다.

  “굉장히 부지런한 분이시네요.”

  “자식교육도 그렇게 광이 나게 신경을 썼으니 학교까지 찾아와서 그 난리도 피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대근이 아버님이 대학을 안 나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대근이에게는 책도 많이 읽어주고 심지어 학원까지 따라다니며 영어 공부까지 시킨다고 했어요. 솔직히 그 당시에는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이야 그렇다 쳐도 한국말로 친구들과 의사소통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무슨 영어를 한다고 꿈도 야무지다. 안스럽다. 그런 마음이었죠.” 

  “저도 이해가 안 가긴 하네요.” 유키에는 커피 잔을 살며시 입술에 갖다 대었다. 

  “요즘으로 보면 재능 기부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당시에도 간간히 지역사회에 공헌을 하는 학원이 몇 있었어요. 유명한 영어 학원에서 대근이 같은 아이들만 모아서 특강을 하는 겁니다. 학원비도 저렴하게 해서요. 아무래도 보통 아이들과 같이 배우는 건 어려우니까요. 아버님이 그런 수업에도 적극적으로 대근이를 데리고 다녔다고 들었어요.”

  “정말 자녀 교육에 열정적인 분이네요.” 유키에는 구명조끼 하나 붙들고 망망대해에 표류하고 있는 두 사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까지도 미안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녀가 고개를 떨구었다. 

  유키에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눈이 갔다.

  “솔직히 대근이 같은 애들은 그저 성가신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학습 분위기를 망치는 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요. 그 당시에는 애들 한 명, 한 명 다 챙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요. 그런데 대근이 아버님을 직접 뵈니까 생각이 조금 달라졌지요.” 그녀가 핸드백을 뒤적거리더니 봉투에서 사진 한 장을 유키에에게 내밀었다. “오학년 봄 소풍 사진입니다. 대근이 실종되기 전에. 여기, 얘가 대근이 입니다.” 그녀가 가장자리에서 홀로 엉뚱한 곳을 보고 있는 소년을 손으로 가리켰다. 

엉뚱한 곳을 보는 아이의 얼굴이 너무 작아 정확하게 구분이 어려웠다. “일본에서도 아이들 실종 사건이 가끔 일어납니다.” 유키에는 얼마 전 뉴스에서 봤던 여아 실종 사건이 떠올랐다.  

  “그렇죠. 다른 학교 다니는 동료 교사들도 비슷한 이야기들을 합니다. 특히 발달장애 아동의 실종은 더 위험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겠죠.”

  “아무래도 의사소통이 힘들고 돌발성이 강한 성향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니까 발달장애 학생들의 평균 수명이 한국에서 서른 살도 못 넘긴다는 거예요.”

  “서른 살요?” 

  “그 말의 의미는 한국에서 자폐 청년은 있어도 자폐 아저씨와 아줌마는 거의 없다는 얘기입니다. 안타깝지만 대근이 같은 아이들은 실종될 가능성도 높고 여러가지 다른 사건 사고를 겪을 가능성도 훨씬 크거든요.” 그녀는 커피를 천천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폐아가 사라지면 찾기도 힘들고 경찰도 사망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는 겁니다. 대근이 사라졌을 때도 아버님이 끝까지 찾으려고 노력 많이 하셨는데 헛수고로 끝나버렸지요.”

  유키에는 매뉴얼에 나와있는 핵심 질문을 그녀가 먼저 꺼내길 기다렸다. 만약 자발적으로 얘기하지 않으면 매뉴얼 지침대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유도해야 한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실례지만 선생님 자제분은….” 유키에는 매뉴얼의 시나리오를 순서대로 떠올렸다.

  “음…. 제가 아직 아가씨입니다.”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유키에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혹시 사건 이후로도 학생 아버님은 가끔 만나셨나요?” 

  그녀가 찻잔의 바닥을 다른 손으로 받쳐들었다. “가끔….” 그녀의 입술이 뜸을 들이고 있었다. “좋은 분이셨어요. 나보다 더 힘든 상황일 건데 제가 학교를 그만 둔다고 하니까 친절하게 많이 배려해 주셨죠.” 

  시나리오대로 흘러간다.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제가 그 당시에 우울증이 좀 심했어요. 거기에 대근이 사건까지 터지니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 혹시 그 학생 아버님께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글쎄요. 통화가 될 지 모르겠는데 옛날 전화번호라도 알려 드릴까요?” 그녀가 손가방에서 작은 녹색 수첩을 꺼내 뒤적거렸다. 

  “학생 아버님께서 폰이 있나요?” 유키에는 머릿속으로 매뉴얼의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가끔씩 안부 전화가 오곤 했어요.” 그녀가 수첩을 펴서 유키에에게 건넸다. “여기요.” 

  소중한 사람, 정성스러운 글씨다. 잘못 보면 소중한 사랑으로 보인다. 이건우 씨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 회로가 유키에의 머릿속에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17


  마틴은 벙거지 모자를 탁자 위에 올리며 회전의자에 앉아 몸을 돌렸다. 다행히 추가 연구 예산과 시간은 에메랄드 갤러리 회장으로부터 확보했다. 하지만 108명이 다가온다. 죽었다 깨어나도 일본 쪽 회장님은 더 이상의 실험용 아이들을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모두들 오랜 시간 기다려 준건 인정해. 글로벌 제약사들이 하나 둘 임상에 돌입할 준비를 하고 있고 AI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까 조바심이 나는 것도 인정해. 그렇지만 이제 와서 그런 이유들 때문에 날 압박하려 든다면 난 굴복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들이 이제껏 인내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날 대체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지. BP001의 탈출 때문에 트집을 잡아봐야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어. 소용이 없어. 계속 날 궁지로 몰아넣는다면 결국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버리게 될 것이다. 두고보자….

  마틴은 회전의자를 시계 방향으로 세게 돌렸다. 회전하던 의자가 창가를 향해 천천히 멈추자 빨간 하이힐의 여자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헤이 마틴, 굿 뉴스, 베드 뉴스!” 그녀가 왼손 검지와 오른손 검지를 차례대로 들어 보인다. 

  “굿 뉴스?” 마틴은 그녀를 향해 의자를 돌렸다.

  “BP002 실험이 마무리 단계야.” 그녀는 왼손 검지를 올리며 말했다. 

  “베드 뉴스?”

  “회장님이 일본에서 진해로 애들을 직접 보냈어.” 그녀는 오른손 검지를 올렸다.

  “뭐?” 그가 놀란 토끼 같은 얼굴로 의자를 바로 세웠다. 

  “아직 파악 중이긴 하지만 일본 회장님은 아이스크림 학원 쪽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 건 확실해. 따로 사람을 보낼 거면 학원 같은 건 왜 운영해? 거기 사람들도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 아니야? 곧 학원 문을 닫을 것 같은 스멜이 풍겨오는데. 넌 그 학원 버스 기사 친구 볼 날도 얼마 안 남았어.”

  “일본 회장님은 왜 그러는 거야? 우리 프로젝트도 마무리 단계인데 은근히 압박 하질 않나, 이제 와서 왜 초를 치려는 거지?” 그가 탁자 옆 미니 냉장고에서 에비앙 워터를 꺼냈다. 

  “회장님이 직접 사람을 왜 보냈는지 감이 안 와?”

  “짐작조차 안되는 걸.”

  “BP001 탈출 이후 일본 회장님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어. 우리도 살길을 찾아야 할 것 같아. 마틴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녀가 팔짱을 끼며 창가에 기대섰다. 

  “회장님이 우리 프로젝트를 손절 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 거의 마무리 단계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내 생각에는 연구소에서 탈출한 BP001이 향후 문제 소지가 있으니까 직접 찾아보려고 사람을 보냈을 거야. 지금까지도 아이스크림 학원에서 BP001을 못 찾아내고 있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글쎄 올시다. BP001을 잡아 들이려고 회장님이 일본에서 직접 사람을 보냈다? 무슨 허무맹랑한 상상력이니? 특수 체포 조야? 우리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그런 목적으로 몰래 사람을 보냈을까? 만약 당신 말이 맞다 고 가정하면 왜 하고 많은 전문가 대신 일반인 여자를 보냈겠어? 말이 안 돼!” 

  “일반인 여자?” 그가 고개를 뒤로 크게 젖히며 물을 마셨다. 

  “그렇다니까. 회장님이 보낸 일반인이 누구인지, 무슨 의도로 왔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어. 진해로 들어왔다는 건 아는데 그 이외의 것은 제대로 파악되는 게 없으니 참 거시기해. 꼭 우리 목줄을 죄러 오는 저승사자 같은 느낌이 나서 요즘은 불안해서 일도 손에 안 잡혀.”

  “확실한 정보야?” 

  “날 못 믿어?” 

  그가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니퍼! 우린 연구실에서 이 프로젝트 하나에 모든 젊음을 바쳤어. 올림픽 준비도 오 년이면 끝나는데 무려 이십 년의 세월을 견디어 냈다고. 이제 거의 끝나 가는 마당에 다들 왜 그렇게 조바심을 내는 거야?”

  “그동안 꼬박꼬박 월급 챙겨 간 거라도 감사해라 그런 말은 아니겠지? 설마 우릴 죽이기야 하겠어?”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말인데 BP002는 BP001의 전철을 밟아서는 절대 안 돼!”

  “햐…. 그걸 말이라고 해? 네가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치명적인 실수를 한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시켜야 하겠어. 분명히 말하지만 넌 BP001의 자폐증을 완치시켰어. 그건 팩트이고 인정해. 그런데 반대는 실패했지. 자폐증 상태로 원상 복귀시킬 때 시냅스를 과다하게 증폭 시켜 버렸어. 그래서 BP001이 괴물이 되어 버린 거야. 알아? 내가 안전하게 가자고 그렇게 부탁했는데도 넌 내 말을 무시했던 거라고.” 그녀가 희고 긴 손가락으로 마틴의 얼굴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제니퍼! 지금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려는 게 아니야. 회장님이 우리 목을 죄어오고 있으니 꼬투리 잡히지 말자는 거야.”

  “여보세요, 마 소장님! BP002는 자폐증 완치도 실증했고 다시 자폐증으로 원상복귀 시키는 것도 어느 정도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야. 단지 자폐 증상이 조금 약한 상태로 되돌아가긴 했지만 BP001처럼 괴물이 되는 것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해.”

  “노! 노! 노!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해! 우리 프로젝트는 자폐 치료제와 자폐 유발제의 중요도가 50:50이 아니야. 처음부터 일본 회장님이 우리에게 일을 맡겼던 이유도 후자를 더 원해서야.” 마틴은 오른 검지를 흔들어 댔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넌 정보력이 너무 약해. 세상 좀 넓게 보고 살아.”

  “무슨 헛소리야?”

  “그런 목적이라면 회장님이 왜 108명이라는 숫자를 고수하겠어? 자기가 직접 애들 납치해? 응? 100명이고 200명이고 상관없지 않아? 틀림없이 다른 이유가 있는거야. 넌 눈치가 없냐 정말. 짜증나게.”

  “우리 회장님은 명명백백하게 마지노선을 그은 거야. 연구라는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넌 절대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마!”   

  “마틴! 너 정말 이럴 거야? 내 말 못 알아들어? 너처럼 하다 가는 자폐 유발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을 괴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약을 만들게 되는 거라고. 그렇게 되면 자폐 치료제도 듣지 않게 돼! 결국 우리 프로젝트는 반쪽 자리 실패작이 된다고.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들어. 응?” 그녀가 하이힐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BP001이 왜 안 잡히는 줄 알아? 그런 통제 불능한 괴물을 어떻게 잡아? 당신이 만들었으니 누구보다 그 괴물 설명서를 잘 알 거 아냐?” 

  “아무튼 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책임자로서 말하는데 BP002 프로젝트는 종결 단계가 아니야. 자폐 유발제를 투여했을 때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증상이 나타나줘야 해. 어중간하게 자폐가 나타나면 치료제도 의미가 없어. 조금 더 힘내 보자. 거의 끝이 보여.”

  그녀가 충혈된 눈으로 그를 흘겨봤다.   “너, 끝까지….”

  “에메랄드 갤러리 회장에게 자금은 약속 받았어. 일본 쪽에 추가 요청은 불필요해. 시간을 충분히 벌었으니 우린 그냥 실험에만 몰두하면 돼. 마무리 짓자고. 우리가 세계 최초! 최고가 되는 거야.”

  “마틴! 한 가지만 더 상기시켜 주지. BP001이 어떻게 변해 버린 지 당신이 그새 망각해버린 것 같아서 그래.” 그녀가 창가 구석에 놓인 검은 매직을 들어 유리창에 숫자를 적기 시작했다. 

  “뭐하려는 거야?”

  “160+160=320. BP001은 우리 둘의 IQ를 합해도 넘을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린 거야. 알아? 세계 최초 같은 소리 작작해!” 그녀는 매직을 책상 위로 세게 던졌다.


18


  성민은 운전대에서 손을 내린 채 삐걱거리는 목을 몇 바퀴 돌렸다. 오랜만에 형에게 운전 실력을 자랑하니 묵었던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태민 형도 질 세라 자신의 운전 실력을 떠벌렸지만 그 정도로는 내 미묘한 우월감을 지우기에는 어림도 없다. 확실히 형은 내 상대가 안 된다. 중요한 건 장비가 아니라 그걸 다루는 마음이다.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가 입이 닳도록 했던 설교. 아버지! 좋은 차를 타지 않고도 좋은 차를 탄 사람 뒤꽁무니를 잘도 쫓아다녔습니다. 보고 있죠? 성민은 액셀을 힘차게 밟았다. 

  날씨도 좋고 길도 안 막히고 끝내주네. 댄스 연습실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교차로 신호등이 황색에서 빨간색으로 순식간에 바뀌었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타이밍이 안 따라 주는군. 어! 쿵! 뒷부분의 충격에 몸이 들썩거렸다. 룸 미러로 뒤를 확인하니 네모머리 남자가 차량 뒷부분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안전벨트를 풀고 나가려는 데 축지법을 쓴 것처럼 네모머리가 옆에서 차창을 두드렸다. 창을 내리자 그가 난데없이 오만원권 스무 장은 족히 들었을 것 같은 두터운 봉투를 건넸다. 일단 차에서 나와 범퍼를 확인하니 다행히 충격에 비해 실제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차도 낡았는데 이 정도면 보험 처리보다 나쁠 건 없을 것 같다. 오늘은 소고기나 실컷 사먹어야 지. 그리 아프지도 않은 허리를 부여잡고 돈을 챙겼다. 

  댄스 연습실에서 전신 거울을 보다 보면 누구나 마술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엔 비참한 기분으로 시작해 결국엔 자아 도취에 빠져들게 되는 매직! 누군 가를 이기려는 노력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져드는 신비한 마법이다. 뉴진스의 DITTO로 음악이 바뀌었다. 한 박자 빠른 비트에 몸을 맡겼다. 악! 일순간 허리를 끊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런 젠장! 허리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큰 일이다. 뉴진스 노래 몇 곳이 돌 때까지 인상을 쓰고 그 자리에 쭈그리고 있다가 막 치질 수술을 끝마친 사람처럼 엉거주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그 놈의 접촉사고 때문에…. 현금으로 땡 처리, 후회막급이다. 역시 사고도 경험해본 사람들이 대처를 잘 하는구나. 운전만 잘 했지 사고 맷집이 전혀 없어. 넋두리를 하며 겨우 차에 들어와 슬로우 모션으로 블랙박스 칩을 빼서 폰에 끼웠다. 다행히 블랙박스는 아직 살아있다. 폰을 눈 가까이로 올렸다. 네모머리가 사고 후 벤츠에서 내려 차로 다가왔다. 그리고 몸을 숙여가며 뒤 범퍼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것 같더니 차로 다가와 현금 봉투를 건넸다. 마치 미리 반복 연습했던 사람처럼 행동이 일사천리다. 뭐 돈 봉투야 그럴 수 있다.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살짝 부딪힌 것 같은데 왜 이리 아픈 거야, 당분간 댄스 학원에 못 갈 것을 생각하니 부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집 근방에 있는 동네 약국 앞에서 비상등을 켰다. 몸이 보물인데 파스도 제일 효과 좋은 걸로 사야겠지. 약국에 들어간 순간 주머니에 폰 지갑이 없어  약국 문을 다시 열었을 때 멀찌감치 접촉사고를 낸 차와 비슷하게 생긴 차가 시야에 잡혔다. 폰 지갑을 다시 챙겨 들고 허리에 붙이는 약, 바르는 약을 비싼 걸로 하나 씩 구매한 후 차로 돌아와 앉았다. 아무래도 수상한 느낌이 들어 집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유턴한 다음 댄스 연습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지하 일 층에 주차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 삼층, 오 층을 차례대로 눌렀다. 그리고 일 층에서 내려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도록 최대한 안 아픈 척 하며 큰 카페로 들어갔다. 도로와 인도를 둘러봤지만 다행히 벤츠와 네모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태민에게 전화를 걸어 접촉사고 상황을 조곤조곤 설명했다. 폰을 쥔 손이 떨려 귀까지 아파왔다.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태민이 지하 삼 층에 도착했다고 카톡 메시지를 보냈고 성민은 태민의 차를 얻어 타고 탐정 사무실 근처 인도 음식점에 들어갔다. 점심시간인 데도 여유는 있었다. 허리 때문에 의자도 제대로 빼지 못하자 태민이 도와줬다. 태민은 검은 봉지 속 파스 하나를 뜯어 성민의 허리에 인정사정 봐 주지 않고 탁 소리 나게 때리며 붙였다. 

태민이 작심한 듯 자신의 생각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위치추적기로 미행하고 있다고? 나를?” 성민은 물을 마시다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접촉사고 후 미행을 당했다면 돌아가는 상황은 뻔하다. 

  “위치추적기 탐지야 요즘 유튜브 같은데 보면 잘 나와있으니까 내 차 한 번 확인해보면 되는데…. 도대체 왜 날 미행하는 거지?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네. 아 살 떨려.” 

  성민이 누군 가의 눈에 가시 같은 짓을 한 것이 틀림없다. 

  “내가? 그런 건가…. 미행 당하는 기분 거시기 하네. 아 진짜 쫓을 땐 스릴 넘쳤는데 쫓기니 기분 더러워.”

  태민은 성민의 폰에서 블랙박스 영상을 돌려본 후 낯이 익은 네모머리 남자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코끼리 모양의 놋 그릇에 담긴 빨간 탄두리 치킨이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맛있는 향을 퍼뜨렸다. 

  “이 네모 머리 남자가 시애틀 카페에서 본 사람이야, 정말?” 치킨을 찢으려 던 성민의 포크가 쟁반을 긁었다. 

  태민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 네모 머리가 계획적으로 사고를 내고 나를 미행했다 이거지…. 솔직히 믿기지 않아. 내가 지네 들에게 무슨 해코지를 했다고? 겨우 아이스크림 학원과 시냅스 연구소 한 번 얼쩡거렸다고 저 놈 수상하다. 미행하자. 그렇게 된 거라고? 그러면 지네 들은 뭔데 학원과 시냅스 연구소에서 얼쩡거려? 그리고 운전 관련해서는 형도 내 실력 알지 않아? 실수 안 한다는 거.”

  시애틀 카페 김밥모양 머리 놈들의 레이더에 성민이 걸려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상 복잡하다.” 성민은 갈릭 난에 야채와 콩이 버무려 진 카레를 얹어 한입 베어 먹었다. 

  태민은 천천히 음미하며 차를 마셨다. 

  “결론 나왔네. 나왔어.” 성민이 박수를 세 번 쳤다.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일가는 시애틀 카페 김밥머리 놈들이 다 죽였어. 끝! 내가 직접 접촉사고 한 번 당해보니 팍 필이 와. 벤츠 그 네모 머리 보니까 일 처리가 아주 일사천리야. 그런 무지막지한 전문가들이 움직였으니 아직도 경찰이 못 잡는 거 아니야? 휴….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는 이유가 이해가 가는 구만.”

  태민은 사모사를 반으로 갈라 녹색 소스에 찍었다. 아직도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형, 벤츠 네모머리 그 자식은 진해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급 궁금해지네.” 성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정보 수집을 위한 외국 기관일 수도 있고 다른 목적을 가진 사설 용병 기관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정보 수집 같은 거 하려면 서울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조용한 전원 도시에서 서로 감시하고 죽이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세상에 이유 없는 무덤은 없다. 이 아늑한 도시도 그들이 얻고 싶은 정보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갑자기 태민이 무언가 떠오른 듯 성민에게 지인의 중고차 가게에 가는 것을 제안했다. 

  “와, 콜! 전화위복이네. 듣던 중 반가운 말이야. 안 그래도 내 애마가 엄청 후지 긴 했어. 아버지가 장비 탓 하지 말라고 했지만 너무 구식이라 오히려 미행할 때 눈에 잘 띄고 그리고 최소한 시대 흐름은 따라가야 지. 뭐, 돈이 없어 문제지만….” 

  태민은 인터넷 뱅킹으로 은행 잔고를 확인했다. 빠듯한 살림이지만 동생이 위험해지면 일이 꼬일 확률이 높다. 태민은 예산 한도에 들어오는 중고차 시세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유키에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하네.”

  태민은 남은 사모사를 입안 가득 집어넣고 오물거렸다. 

  성민은 갈릭 난을 카레에 듬뿍 찍어 한 입에 다 먹은 후 물을 마셨다. “형, 솔직한 내 심정은…. 우리 너무 멀리 갈 것 같으면 그냥 포기하자. 시애틀 카페 그 김밥머리 남자들 무서운 놈들같아. 덩치도 산 만하고 증거도 남기지 않고 아이스크림 원장 가족을 죽일 정도면 사람 죽이는 거 우습게 생각하는 놈들이지 않겠냐고. 우리 같은 샌님들이 상종할 수 있는 족속이 아니야.”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냥 고집 부리지 말자. 이 사건에 형이 나설 이유가 전혀 없어. 설마 택배 상자로 협박하는 얼빠진 인간이 시애틀 카페 김밥 머리들보다 더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지?” 

  유리컵을 쥔 태민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냥 손 떼자. 처음에는 이런 미제 사건 해결하면 형이 유명해져서 나도 덩달아 폼도 나고 찌질이 생활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적극 찬성했는데, 여긴 우리가 낄 데가 아니야. 형 말을 토대로 추리해보면 이번 살인 사건은 위장 비밀 조직 간의 세력 다툼으로 발생한 게 명백하거든. 시애틀파와 아이스크림파의 전쟁이야. 범인들이 한마디로 거대 조직이란 말이야. 까딱하면 형과 나 쥐도 새도 모르게 다 죽어!” 성민은 손에 든 난을 입 안 가득 쑤셔 넣었다. 

  아이스크림 원장 살인사건은…. 조직들의 영역 다툼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나도 형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아. 굳이 라이벌 조직이라도 가족까지 죽일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겠지. 그런데 그건 우리 같은 일반인들의 순진한 생각이야. 이제 한 번 두고 봐. 아이스크림 학원파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시애틀 카페파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거니까! 복수의 불길이 활활 타오를 거야! 우린 불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자. 제발!”

  원장 일가가 죽은 지가 언제인데 이제 와서 복수의 전쟁을 하겠다는 건가. 논리적이지도 않고 납득도 안 된다. 

  “형 군대 안 갔다 왔지? 그래서 모르는 거야. 원래 전쟁 준비 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해. 까딱 잘못하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니까. 전쟁 속에 휘말려 들어가면 안돼!” 성민이 허리를 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태민은 쫀득한 갈릭 난을 단번에 찢었다. 

  “허리 조금만 다쳐도 이렇게 불편하고 마음도 안 좋아. 형이 결정하는 데로 할 테지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태민은 갈릭 난을 카레에 찍어 꼭꼭 씹어 먹으며 동생의 생각이 왜 틀렸는지에 대해 곱씹어 생각했다. 


19


  0109822…. 유키에는 주의를 기울여 번호를 하나 씩 터치했다. 오후 네 시 삼십 분. 벌써 세 번째 통화다. 발신음이 가는 것을 보면 번호는 아직 살아있다. 포기해야 하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을 때 폰에서 저음의 갈라진 목소리가 불쑥 나타났다. 

  “누구 요?”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를 드립니다. 일본에서 온 유키에라고 합니다. 갑자기 연락을 드려 죄송합니다.”

  “일 없습니다!” 그가 전화를 바로 끊을 기세다. 

  “잠깐만요, 선생님! 잠깐이면 됩니다. 제가 대학원 논문 준비 중인데 선생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선생님 소개 받고 연락 드리는 겁니다.”

  “누가 내 얘기를 한 거요? 보이스피싱 아니요? 연락처는 어떻게. 거참.”

  “선생님 아버님 존함이 이자 중자 신자, 이중신 맞지요? 일본에서 선생님 아버님과 친했던 분으로부터 우연히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유키에는 연습 한대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럴 땐 일본식의 어눌한 한국어 발음이 오히려 경계심을 낮추고 상대에게 안심을 줄 수 있다.

  “그 이야기라니?” 저음의 목소리가 폰 속에서 공명하며 크게 울렸다. 

  “1930년 3월 10일, 진해에서 발생했던 대화재 사건입니다. 그 이야기를 꼭 논문에 담고 싶습니다.”

  “….”

  “미리 뵙자고 인사도 못 드리고 불쑥 한국으로 건너와 부탁 드리는 점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이야기라면 뭐 특별할 게 있나. 알았으니 그렇게 합시다!” 갑자기 목소리가 부드러워지더니 그가 단번에 수락했다. 의외의 결과였다. 

그녀는 허공에 주먹을 힘차게 날렸다. 


  유키에가 그의 집을 찾은 것은 다음 날 오전 열 시 정각이었다. 그녀는 의뢰인의 지시대로 올림픽 메달 모양의 은색 목걸이를 차고 뒷면에 달린 작은 원형 버튼을 눌렀다. 요리조리 살펴봐도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다. 개운하지 않지만 의뢰인에게 질문은 불가능하다. 

그가 삐걱 이는 현관 문을 열었다. 염색 탓인지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한 쪽 다리를 조금 절룩거리는 그를 따라 안 쪽으로 들어가니 거실로 보이는 네모반듯한 공간이 나왔다. 그가 방석이 놓인 바닥을 가리키며 다과 탁자 위의 알로에 음료 한 병을 건넸다. 

  “편하게 앉아요! 무릎 펴고.”

  “무릎을….” 일본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권유였다. 

  그가 표지 비닐이 반쯤 벗겨진 오래된 앨범을 탁자 위에 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우리 아버지가 그래도 생전에 사진을 많이 찍어 둬서 할 말이라도 있네.” 그가 미소 띤 얼굴로 앨범을 넘기다 빛 바랜 사진 한 장을 손으로 짚었다. “이 사진이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에 찍은 사진입니다. 여기 중간에.” 흑백사진이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옆에 계신 분이 아버지가 불길에서 구해 내신 일본 분!” 그가 기모노를 입은 눈매가 긴 소녀를 가리켰다. 

  “아….” 

  “화재가 났을 때, 우리 아버지가 영화관 이 층으로 들어가 이 일본 여자를 구했는데….” 그가 천천히 한 쪽 다리를 뻗었다. “아이고, 내가 몸이 좀 불편해서.”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을까요?” 유키에는 어딘지 모르게 호감이 가는 사진 속 선한 눈망울의 일본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창 겁 없을 때니까 뛰어들었겠지요. 그런데 그 사건 이후에 좀 복잡한 일이 생겨서 우리 아버지가 곤란한 사정에 휘말렸다고 들었어요.” 그가 두 손을 바닥에 짚었다. 

  “복잡한 일이라면?” 

  “우리 아버지가 사람을 구해 놓고도 좋은 소리를 못 들었어. 오히려 화재 사건의 범인으로 모는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물에 빠진 사람 건져냈더니 살인자로 몰린 격이지.”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어요?”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지. 당시 영화 상영회에 초대 받은 조선인 소학생이 단 두 명이었는데 아버지가 그 중 한 명이었나 봐. 그런데 초대는 받았는데 사령부 출입 명부에 아버지 기록이 없어. 당연히 의심을 받았겠지요? 게다가 영화극장 지배인이란 놈이 또 우리 아버지가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끝까지 주장했다고 그래요.” 그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사실 아버지가 개구멍으로 극장에 들어가긴 했어.” 그가 피식 웃었다.” 

  “개구멍으로 극장에 들어가셨다고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버지가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극장에 안 들어갔다고 우겼다 그래요.”

  “왜 그랬을까요?”

  “그럼 더 의심 받을 것 같으니까. 극장에 들어갔다 혼자 몰래 빠져나왔는데 극장 안에서 불이 났다. 그럼 뻔하지. 아버지가 몽땅 뒤집어 썼겠지. 암.”

  “아무리 그래도 당시 영화 상영회에 조선인이 없었으니까 다 티가 났을텐데…. 그리고 어린 학생에게 그런 무서운 죄를 뒤집어 씌우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명백히 화재 원인은 영사기를 돌리던 군인의 실수로 밝혀졌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아가씨 잘 알고 있네. 그렇지만 당시 분위기가 조선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겠지요. 워낙 큰 사건이라 희생양이 필요하기도 했을거고. 그래서 목숨을 빚진 이 일본 소녀 아버님이 우리 아버지가 고맙기도 하고 또 안돼 보였는지 일본으로 데리고 가게 된 거요.” 그가 사진 속 소녀의 얼굴을 두드렸다. 

  “혹시….” 유키에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아니야. 이 일본 분. 제 어머니 아닙니다.” 그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정착하는데 이 소녀 아버지가 도움을 많이 줬지요. 히로시마에서 목재업으로 성공하신 분이랍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가 앨범을 두 장 더 넘겼다. “여기 계시네요.” 그가 한복을 입은 여자를 가리켰다. “여기가 우리 어머니. 한국 사람이지요. 제주도 출신이라고 들었어요.”

  “저기 죄송하지만 화장실 좀 다녀올 수 있을까요? 매운 음식 덕에 한국에서는 화장실 가는 횟수가 일본에서 보다 두 배는 되는 것 같아요.”

  “그럼. 저기서 돌면 됩니다.” 그가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유키에는 화장실로 들어가며 찝찝한 마음에 목걸이 전원을 끄고 싶었다. 하지만 알바 매뉴얼의 주의 사항이 떠올라 이내 단념했다. 아담한 화장실 벽에 걸린 작은 고리에 색이 누렇게 바랜 수건 한 장이 걸려 있었다. 아이스크림이라고 새겨 진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유키에는 손을 씻고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았다. 목걸이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국 음식은 입에 잘 맞아요?” 그가 자리로 돌아온 유키에에게 물었다. 

  “너무 맛있습니다.”

  “다행이네요. 타지에 와서 잘 못 먹고 다니면 몸 상하니까 몸에 좋은 음식 잘 챙겨 먹어요. 음식이 보약이에요.” 그가 아래로 내리고 있던 오른손으로 이마를 긁었다. 하얀색 장갑이 보였다. 

  “선생님 아버님께서는 조선인인데 어떻게 일본인 영화 상영회에 초대를 받았는지요?”

  “아…. 아버지가. 당시에 뭐 좋게 말하면 모범생이었나 봅니다. 그래봐야 구색 맞추기로 초대 받은 거겠지만.”

  “그런데 어떻게 극장에서 몰래 빠져나오신 겁니까?” 

  “초대받은 다른 조선인 여학생 한 명하고 같이 먹으려고 했던 과자를 집에 두고 와서 그거 가지러 갔다고 들었어요.” 

  “운명의 장난이군요.” 

  “뭐, 그렇다고 하네요. 아버지도 많이 힘들고 무서워했을 겁니다.” 그가 앨범 맨 뒷장을 펼쳤다. 한 소녀와 아이 세명이 함께 찍은 사진이 보였다. “이 여자 분이 아버지와 함께 극장에 초대 받았던 조선인 여학생입니다.” 

  유키에는 화염 속에서 불타버렸을 어린 눈망울들에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사실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이었지요.”

  “이 조선인 여자 분 말씀 이세요?” 유키에가 앨범 속 여학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지. 불이 났을 때 건물로 들어간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 위험하니까 당연히 구하러 들어 간 거고.”

  “그런데 결국 이 분은 못 구하셨네요.” 유키에가 고개를 떨구었다. 

  “나도 자세한 내막은 전혀 모르고 살았죠. 돌아가시기 직전에 평생의 한이 되셨는지 아버지가 당시 이야기를 꺼냈어요. 정말 안타까운 건 아버지가 영화관 이 층 창문을 깨고 들어갔을 때 그 조선인 여학생을 구할 수 있었다고 그래요. 칠흑같이 깜깜했어도 그 여학생은 자기 눈 앞에 훤히 보였다고 그러데. 그 말을 계속 반복해서 했어! 선영이라고 했나…. 아무튼 선영이가 분명히 보였다고. 그런데 선영이에게 가려다 바로 아버지 발 밑에 쓰러져 있는 일본인 소녀가 가여워 먼저 밖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고 합니다.”

  “슬픈….” 유키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 지나간 일이지.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방금 얘기한 우리 아버지 얘기는 논문에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아가씨….” 

  “저에게 궁금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일본에서 우리 선친 아는 사람에게 소개를 받았다고 그랬죠?”

  유키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분들 존함과 연락처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유키에는 준비한 연락처를 가방에서 꺼내 그에게 건넸다. 드디어 알바가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20


  짧은 스포츠 머리에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검게 그을린 팔을 흔들었다. 태민과 성민도 팔을 높이 들어 그에게 호응했다.

  “왠 일이냐? 차를 다 바꿀 생각을 하고?” 그가 태민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민수 형! 가성비 좋은 차 있어요?” 성민이 진열된 자동차 주변에서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태민이가 탈 거면 이런 종류가 좋고 성민이가 탈 거면 저기 저런 종류가 좋지.” 그가 손으로 이것저것 가리켰다. 

  “너무 비싸 보이는데 우리 형편 잘 알잖아요. 형. 좀 싼 거 없어요?” 성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내가 너희 들이니까 판다. 잠깐 따라와봐!” 그가 진열된 차들을 지나쳐 모퉁이에 붙은 정비소 쪽으로 걸어갔다. 바닥 여기저기에 낡은 타이어와 녹슨 쇠가 나뒹굴고 있었다. 한 쪽 구석에 너저분한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은 세단이 보였다. “저기 저거. 혼다 어코드. 2013년 출고 차인데 완전 새 거지.” 그가 조수석 쪽 문을 열었다. 대시 보드에 먼지 하나 없고 번지르한 베이지색 가죽 시트에다 발판 매트도 새차처럼 깨끗하다. 

  “민수 형! 싼 거 달랬더니 지금 사람 약 올리는 거죠? 이 정도면 못 살 것 같은데요.” 성민은 쪼그려 앉아 광나는 타이어 휠을 만져보며 입맛을 다셨다. 

  “싸게 해 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그가 성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성민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차의 과거에 대해 묻지 마!” 그가 히죽거렸다.

  “과거요? 대포차 같은 건가….” 성민은 태민과 눈빛을 교환했다. 

  “그냥 말만 맞추고 타고 다니면 아무 문제 안 생길 거야. 내가 다 바꿔 놨거든.” 그가 성민과 태민의 얼빠진 표정을 번갈아 본 후 차 안에서 노란 서류 봉투를 꺼냈다. “이것 봐. 그냥 렌터카였다고 생각하면 돼. 복잡할 거 하나도 없어.” 그가 서류를 앞뒤로 뒤적이며 말했다. 

  솔직히 혼다 어코드는 태민 형의 취향이지만 성민은 광이 나는 타이어 휠에 마음을 뺏겼다. 태민도 불법적인 거래는 사절이지만 민수 형의 말이라 거절하기 어려웠다. 

  “민수 형! 내가 타던 차 조만간 가지고 올 게. 그것도 팔 때 잘 해 줄 거죠?” 성민은 그의 두툼한 손을 잡았다.

  “당연하지!” 그는 자동차 키를 성민에게 건넸다. 


  “차 진짜 조용한 건 인정!” 성민은 어린아이 마냥 싱글벙글 거리며 운전대를 움 켜 잡고 있었다. 태민은 댄스 학원에 주차 된 성민의 차를 빼내는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다. 그 시애틀 카페의 네모머리가 성민의 차에 위치 추적기를 달아 놓았다면 하루 종일 감시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댄스 학원이 열려 있는 점심과 저녁 시간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태민은 손가락 관절을 차례대로 비틀어 가며 소리를 냈다. 

  “형. 유키에한테 연락이 왔어. 다행히 이건우씨와 연락이 됐다 네.” 

  수상한 그녀가 이건우를 만났다….

  “형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물론 형 말대로 유키에가 의심 가는 면이 있긴 해. 그렇다 해도 솔직히 난 모르겠어.” 성민은 주유소 방향으로 우회전하며 말했다. “휘발유라 좀 아쉽지만 나름 도심 주행 연비도 나쁘지 않은데.” 

  태민은 주유 건을 잡고 있는 성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옆에서 학생처럼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이 생수 두 병을 흔들며 창문을 두드렸다. 갈증이 나던 차라 태민은 창 내림 버튼을 힘을 주어 눌렀다. 어…. 창이 내려가지 않는다. 뭐지. 문도 열리지 않는다. 태민은 몇 번을 시도하다 아르바이트 생을 향해 손으로 엑스 자 표시를 했다. 태민은 손을 뻗어 뒷자리의 창과 문도 확인했다. 역시 열리지 않았다. 

  “물 필요한데 생수 받지?” 성민이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차에 뭔가 문제가 생겼거나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차를 인위적으로 조작해 놓은 상태다. 순간 태민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안에서 문이 안 열린다고? 내가 방금 나갔다 왔는데?” 성민은 도어 잠금 방향을 반복해서 바꿨다. “다시 한번 열어 봐!”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태민은 폰을 열어 자동차 문 고장에 대해 검색했다. 

  “잠깐만 있어봐!” 성민은 차에서 내려 조수석 쪽으로 돌아가 문을 당겼다. “어, 열리는데.” 성민은 뒷좌석 문도 당겼다. 전부 열렸다. 

  태민은 인터넷 검색 내용대로 차에서 내려 차례대로 도어 틈새를 확인했다. 뒷좌석은 어린이 보호용 잠금 장치가 걸려있었다. 운전석과 조수석은 별도의 장치가 보이지 않았다. 

  “형, 뒤에 차 기다린다. 일단 가자.” 성민이 재촉했다. 

  태민은 뒤 차에 가볍게 목례한 다음 차에 올랐다. 

  “민수 형에게 전화 한번 해 보자!” 성민은 주유소를 빠져 나가며 스피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민수 형, 혹시 도어 잠금 장치에 문제 있어? 밖에서는 열리는데 차 안에서 문이 안 열려.”  

  “그거는. 차일드 락이 걸렸나 본데. 도어 틈새 보면.”  

  “뒷좌석은 형이 말한 그거 맞는데. 조수석도 안 열려.” 

  “어? 조수석이 안 열린다고?” 

  “그래. 조수석도 안 열리는 데.” 

  “조수석은. 도어래치를 봐야 알 수 있겠는데. 시간 날 때 함 들러. 확인해 볼 게.”

  “오케이!” 

  태민이 윈도우 스위치를 계속 눌러보지만 역시 먹통이다. 

  성민도 윈도우 스위치를 눌러보지만 작동되지 않았다. “와, 민수 형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차가 겉만 뻔지르르 하지 속은 골로 간 것 같은데. 어떻게 창문도 안 열리냐. 옛 속담은 틀린 거 하나 없어. 역시 싼 게 비지떡이야. 이것저것 고치다가 돈 더 들겠어.” 

  민수 형은…. 단지 이 차의 과거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을 뿐이다. 태민은 노란 서류 봉투를 꺼냈다. 


21


  유키에는 아르바이트 중도금이 입금되고 난 후 곧바로 인터넷에서 눈 여겨 보았던 K-POP 아이돌 굿즈를 구매했다. 난생 처음 일일이 가격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쇼핑을 즐겼다. 복잡한 생각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서서히 꿀 알바를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는군. 약속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조금만 더 참자. 그녀는 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망고 에이드에 꽂혀 있는 빨대를 힘껏 빨았다. 톡톡 쏘는 과즙 맛이 시나몬 빵과 잘 어울렸다. 폰에서 텔레그램 메시지가 떴다. 매뉴얼대로 이건우씨와 인터뷰를 잘 끝내라는 내용이다. 어린 애도 아닌데 겨우 그까짓 것 가지고 알림을 몇 번이나 주는거야. 의뢰인도 어지간한 좀생이임에 틀림없다. 일을 시켰으면 좀 그냥 믿고 맡겨 봐…. 그녀는 은색 메달 목걸이를 목에 걸고 전원을 켰다. 


  “다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키에는 체리 베이커리에서 사온 빵을 이건우씨 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런 건 왜 사와요?” 그가 종이 봉투를 받아 들며 지난 번과 같이 안 쪽 거실로 안내했다. 

  “몇 가지 생각난 게 있어서….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유키에는 방석에 앉았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외국에서 먼 길을 왔는데 묻고 싶은 거 있으면 편안하게 다 묻고 가세요.”

  “화재 사건 당시 선생님 아버님께서 목숨을 구해 주셨던 그 일본 여자 분 가족과는 연락해 보신 적이 있나요?” 

  “누구? 우리 아버지가 구해줬던 일본 여자와 그 아버지 말이요?” 

  “네. 그 분들은 어떻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글쎄. 그런 소리는 전혀 못 들었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떨어졌을 때 그 분들이 히로시마 시내에 있었다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거예요. 사실 아버지하고 나는 운이 정말 좋았다고 볼 수 있지. 히로시마 옆에 하마다란 작은 도시가 있어요. 두 도시 사이는 큰 산들로 막혀 있지. 아버지와 나는 천 운으로 그 때 하마다시 근처에 있었다고 해요.” 

  “하늘이 도왔네요….” 하마다…. 어린이 미술관, 아쿠아리움, 여름 해변과 겨울 스키장이 나름 유명한 곳이다. 

  “그 분들이 살아 계셨다면 우리 아버지하고 어떻게 든 연락이 되었겠지.” 그가 불편해 보이는 한 쪽 다리를 뻗었다.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나 몰라라 했겠어요?”

  “실례가 안된다면 제가 히로시마로 돌아가서 조금 도와드려도 될까요?” 

  “뭘 도와줘?” 그가 뻗은 다리를 굽혔다. 

  “어차피 같은 히로시마라 그 분들 찾아보는데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에이 아 서.” 그가 손사래를 쳤다.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안 계신데 이제 와서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요. 기회가 될 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아가씨에게 나를 소개했던 그 사람들하고 인사나 한 번 하면 좋겠네.” 

  유키에는 그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의 유리 진열장 액자 속에 백마를 탄 작은 아이 사진이 보였다. 

  “다 지난 일이지. 그나저나 어쩌다가 이런 걸로 논문을 다 쓸 생각을 했어? 집안 어른들이 한국과 인연이 있는가?” 

  “그런 건 아닌데. 제가 한국 노래와 춤을 좋아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요.” 유키에가 수줍게 웃었다.

  “아가씨, 한국말도 참하게 잘하고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아.” 

  “네…. 그런데 자제 분이 말을 잘 타셨나 봅니다.” 유키에는 진열장 속 말을 타고 있는 아이 사진에 시선이 멈췄다. 

  “저거?” 그가 몸을 돌리며 진열장 속 사진을 가리켰다. “우리 아들이 말은 참 잘 탔지. 아가씨도 말 타봤어요?” 

  “저도 어릴 때 조금은 타봤습니다.”

  “그래?” 순간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드님은 출가했나요?” 

  그가 숨을 길게 내쉬며 뻗은 다리를 오므렸다. 눈빛이 날이 선 것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죄송합니다. 괜한 걸 여쭤봐서….” 

  “또 궁금한 거 있어요?” 그가 유키에의 은색 메달 목걸이를 빤히 보며 말했다. 

  “화재 당시, 영화관에 한국인 아이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영화 시작 전에 모든 문을 봉쇄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피해가 더욱 커졌고요.”

  “그래서요?”

  “저번에 말씀해 주시긴 했지만.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화재가 났을 때 아버님은 어린 나이인데 어떻게 이 층 창문을 깨고 그 화마 속으로 들어갈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저번에 얘기한 것 같은데. 꼭 심문 받는 기분이 드네. 그런 게 논문에 필요해요? 우리 아버지 얘기는 논문에 쓰지 말라고 당부했을 텐데.” 그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오해가 있으셨으면 죄송합니다. 그저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여쭤본 겁니다.” 유키에는 손수건을 꺼내 빨갛게 달아오른 볼과 이마를 닦았다. 

  “집에서 과자를 챙겨 다시 영화관으로 돌아왔을 땐 벌써 영화관 내부에 불이 났던 거 같아요. 나도 그렇게 만 들었어.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도 좋아하는 여자가 위험에 처해있으면 문을 부수든 창을 깨든 어떻게 든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우리 아버지는 충분히 그럴 위인이고. 그 이상은 나도 몰라요. 진짜 몰라.” 

  유키에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출입문을 걸어 잠근 어두운 영화관 내부가 갑작스러운 불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문 소방관도 아닌 작은 소년이 2층 창을 부수고 화염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건 도무지…. 유키에는 알바 매뉴얼에 왜 이런 질문이 반복 적으로 들어있는지 처음으로 이해가 갔다. 의뢰인은 그 상황을 의심하는 것이다.

  “아가씨도 잘 알겠지만 그 사건은 영사기를 돌리던 군인의 실수로 불이 난 거고 한국 아이들의 극장 출입을 막으려 문을 꽁꽁 걸어 잠근 것 때문에 피해가 엄청나게 커져 버린 거요. 그게 일본 경찰의 철저한 수사결과 밝혀진 역사적 진실이란 말이요. 이제 와서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면 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그 사건 때문에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으면 가족과 떨어져 일본으로 떠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지 이해가 안 되오? 자료를 조사하다 보면 궁금한 점도 생기고 하겠지만 더 이상 우리 아버지 얘기를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말았으면 좋겠어!” 

  유키에는 집을 나오며 몇 번이고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볼 일 보다 중간에 나온 듯한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지만 할 일은 모두 마쳤다. 이제 아르바이트도 끝이 보인다. 


22


  어제 오후 네시쯤 태민은 민수 형으로부터 자동차의 도어래치와 윈도우 모터를 수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태민이 그의 사무실로 찾아 갔을 때 그가 웃는 얼굴을 하며 서둘러 교통비 조로 주머니에 만원 권 두 장을 넣어주고 등을 떠미는 바람에 그에게 자동차 과거에 대해 언급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속력을 서서히 높이며 차창을 하나 씩 내렸다 올려 보길 몇 번 반복했다. 신선한 새벽 공기가 폐부 깊이 그리움을 싣고 들어왔다. 옆 자리에 아버지가 앉아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창을 올리고 성민의 댄스 학원 건물 지하 1층으로 천천히 진입했다. 주차 된 차는 총 세 대. 성민의 차가 한 눈에 보였다. 나머지 두 대는 성민의 차와 거리가 좀 있다. 성민의 차를 대각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서 시동을 끄고 주변의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다행히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성민의 차 뒤편으로 다가가 트렁크 쪽에서 GPS 위치 추적 탐지기를 켰다. 얼마 뒤 범퍼 아래쪽에서 신호가 잡혔다. 역시 사람보다 기계가 깔끔할 때도 있다. 전자파 소용돌이 속에서 특정 주파수를 잡아내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범퍼 아래로 손을 넣어 오른쪽으로 조금만 움직여 보니 껌 딱지처럼 자동차에 들러 붙어있는 담뱃값 크기의 물체가 손에 잡혔다. 그 물체를 떼내 건물 기둥 옆에 버렸다. 그리고는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한적한 공터에 성민의 차를 세워 뒀다. 


  “벌써 내 차를 옮겨 놨다고?” 

  이른 아침 태민이 느긋하게 계란 샌드위치를 먹고 있을 때 성민에게 전화가 왔다. 성민은 유키에가 곧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했고 태민은 성민의 차를 옮겨놨다는 얘기와 함께 그녀와 점심 약속을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샌드위치를 다 먹기도 전에 성민에게 바로 만나자고 카톡이 왔다. 블랙커피를 음미하며 그녀에게 질문하고 싶은 사항들을 폰에 꼼꼼히 메모했다. 벌써 오전 열 한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누렇게 색이 바랜 흰 면 티와 카키색 바지를 벗고 캐비닛에 보관된 물 빠진 청바지와 빳빳하게 다림질 된 파란 줄무늬 셔츠로 갈아 입은 후 사무실을 나왔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성민이 다니는 댄스 학원 근처로 가는 버스가 보였다. 


  태민은 새벽에 성민의 댄스 학원 지하 주차장에 세워 뒀던 혼다 어코드를 타고 성민 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우와 말끔히 다 고쳐 놨네.” 태민이 나타나자 성민은 기다렸다는 듯 혼다 운전석에 앉으며 이것저것 눌러보고 확인했다. “이제야 진짜 차 같다.” 성민이 태민을 보며 개구쟁이처럼 활짝 웃었다. “아무튼 형 덕분에 좋은 차도 득템 했으니까 앞으로 딴 지 안 걸고 형 일 많이 도와 줄게.” 

태민은 조수석 차창 밖으로 펼쳐진 호수 같이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다 불쑥 부모님이 떠올랐다. 

  “형, 가리비하고 새우 좋아했던 거 기억나? 이 근처만 오면 난 우리 가족 해물탕 먹으러 왔던 게 생각나네.” 

많이 먹어라. 내 새끼…. 아버지의 말이 윙윙거렸다. 

  “해물탕 먹으러 가면 엄마, 아빠가 형에게 새우 골라 주느라 정신이 없었지. 형이 폭풍 흡입하며 새우! 새우! 계속 외쳤으니까. 형은 조개도 딴 거는 안 먹고 가리비만 먹었어. 나도 가리비 좋아했는데….”

가리비. 먹기 좋게 가위로 반을 잘라 접시에 올려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도 형이 있어서 유키에하고 데이트할 거리는 끊어지지 않네.” 성민이 에어컨 바람을 낮추며 말했다.    “형은 아직 까지 유키에가 일본에서 파견된 특수요원쯤 되는 거라고 의심하고 있겠지만….” 성민이 코웃음을 쳤다. 

  실컷 웃어라. 원래 스파이 같은 사람들은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요란한 모습이 아니다. 있는 듯 없는 듯 물과 같은 존재가 진짜 스파이다. 

  “내 차에 진짜 위치 추적기 붙어 있었어?” 성민은 라디오를 틀고 채널을 바꾸기 시작했다. 태민이 귀마개에 손을 대자 성민은 반사적으로 볼륨을 낮췄다. 

  벤츠 남자가 담뱃값 만한 위치 추적기를 붙였으니 성민을 미행하려 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우와. 황송해서 미치겠다 정말. 취직도 못하고 있는 내가 뭐 대단한 존재라고 이런 관심을 다 받고. 그것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조직에게 말이야. 대기업 면접관들이나 관심을 가져주면 좋을텐데….” 성민은 폰을 확인했다. “약속시간 다 되간다. 슬슬 가자. 어 근데…. 아…. 이 차 블랙박스가 없는데.” 성민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봤다. 

  블랙박스. 왜 생각을 못 했을까….

  “하나 해결하면 또 하나 문제가 터지네. 앞으로 심히 걱정된다. 형.” 성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에어컨과 시동을 차례대로 껐다.


  거친 질감의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로 오른편에 이 층으로 올라가는 하얀 계단이 보였다. 태민은 엉뚱한 방향으로 가려는 성민의 팔을 붙잡고 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층에 올라가니 격자 무늬 창 너머로 바다 뷰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태민은 앞장서서 예약석 테이블 사인이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창가에 놓인 보라색 생화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처음에 형이 어처구니 없는 협박을 받았을 때, 난 사실 별 생각 없었거든. 경찰도 해결 못하는 미제 사건을 경험도 미천한 형에게 조잡한 협박 편지나 보내는 놈은 사실 개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 했어!” 성민은 폰을 슬쩍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말이야 그 협박한 인간이 형과 나를 잘 알고 있는 놈 아닐까…. 왠지 이상하게 그런 느낌도 들어.”

  동감이다. 일반적이라면 유명하지도 않은 내게 그런 협박을 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확실히 그 아이스크림 여자 원장 가족은 시애틀 카페 쪽에서 죽였다고 생각해. 굳이 한 가지 가능성을 더 들어 보자면 아이스크림 학원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다가 제거 당했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역사적으로도 그런 사건들은 비일비재 하니까.” 성민은 메뉴판을 펼쳤다. “형은 뭐 먹을 거야?”

  일리가 있다. 경쟁 조직에서 죽였건 내분이 발생했건 간에 조직적으로 자행된 사건은 입 단속만 철저히 하면 사건 자체에는 단독 범행보다 빈틈이 없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아이스크림 원장 가족의 죽음은…. 그러기에 의문점이 많다. 

  “유키에!” 성민이 그녀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처음 봤을 때보다 파운데이션이 진해 진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새것처럼 보이는 핑크 색 자켓과 세련된 가방을 살며시 옆에 두고 앉았다. 태민이 유심히 쳐다보자 그녀는 앞머리를 매만지며 하얀 덧니를 살짝 드러냈다. 미용실에 다녀왔는지 헤어스타일에도 멋스러운 변화가 생긴 것 같다.

  “일단 뭐 먹을까?” 성민과 유키에가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리던 순간 태민은 그녀에게 기습 질문을 던질 타이밍을 생각하고 있었다. 유키에는 버섯과 리코타 치즈가 들어간 샐러드와 안초비 오일 파스타, 성민은 토마토 새우 파스타를 골랐고 태민은 매콤한 투움바 파스타와 라따뚜이를 골랐다. 

  “너가 유러피안 스타일 좋아해서 여기 온 거다. 내 맘 알지?”

  “그래. 알아! 나 혼자 있을 땐 비빔밥도 먹고 모듬수육에 치킨까지 푸짐하게 잘 먹고 있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어떻게 만났어? 얼마 전까지도 그 아저씨 찾기 힘들다고 불평을 늘어놓더니만.” 성민이 세 개의 유리잔에 차례대로 물을 따랐다.

  “이건우씨의 아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을 만났는데 운 좋게 번호를 알려줘서 연락이 됐어. 일이 한 번 풀리려고 하니까 술술 이던데.” 그녀가 컵을 받아 물을 마셨다.

  “그 아저씨 아들의 초딩 때 선생님을 만났다고? 오 마이 갓! 재주도 진짜 좋네. 거기까지 어떻게 연락을 했냐? 상당히 집요하네.” 성민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지 않아?” 그녀가 귀밑머리를 만졌다. 작은 벚꽃 모양의 핑크 색 귀걸이가 흔들거렸다.

  사람을 찾기 위해 주변인을 수소문하는 네트워크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다. 태민은 성민에게 그녀의 학교 이름을 물었다. 

  “유키에, 너 히로시마 대학원에 있냐?” 성민이 통역했다.

  태민은 천천히 물을 마시며 기울어진 유리컵 위로 그녀를 관찰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유키에가 잠깐 머뭇거렸다.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미세하게 흔들렸다.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네가 히로시마에 사니까 그냥 물어 본거야. 거기 학교 대학원에 우리 형이 아는 사람이 있거든.” 성민은 난처한 그녀를 안심시켰다. 

  “나는…. 오사카 쪽 대학원에 다녀.” 그녀가 컵이 넘칠 정도로 물을 가득 채웠다. 

거짓말이 입에 발리지 못한 사람이다. 목소리와 행동에서 안타까울 정도로 티가 났다.

  “논문은 잘 끝날 것 같아? 인터뷰 결과는 만족하고?” 성민이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래. 인터뷰는 잘 끝났으니까 이제 논문도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아.” 그녀가 찰랑거리는 물을 테이블에 약간 흘렸다.  

  “그럼 이제부터 유 박사님 되는 거야?” 성민이 분위기를 돌리려 크게 웃었다.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일만 하다 돌아가서 아쉽네.” 

  “다음에 또 놀러 올 게.” 

  “영혼 없는 말인 것 같은데.” 성민이 검지 손가락을 흔들었다. “근데 너 가기 전에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뭐?” 

  “우리 같이 유튜브 영상 하나만 찍자.” 성민이 입술을 적시며 띄엄띄엄 말했다. 

  “무슨 영상?” 그녀의 볼이 빨개졌다.

  “블랙핑크 커버댄스.” 성민이 웃으며 윙크했다. 

  “우리 둘이서? 무슨 곡?” 그녀의 표정이 순식 간에 밝게 펴졌다.

  “곡은 Pink Venom. 우리 댄스 학원 후배 세 명 불러서 찍을 거야. 두 명은 멤버, 한 명은 카메라. 따로 연습 안 해도 되겠지?”

  “그렇기는 하지만….” 

  “고마워. 승낙해 줘서. 의상 같은 거 따로 준비할 건 없어. 내일 오전 열 시 괜찮지? 내가 숙소로 데리러 갈게.” 성민은 그녀가 머뭇거릴 틈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음…. 알겠어.” 유키에는 끌려가 듯 대답했지만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에 하나 씩 놓였다. 입맛에 맞는지 유키에가 오이시라는 일본어를 반복해서 말했다. 성민도 포크로 파스타를 한 번에 크게 말아 입에 넣었다. 

태민은 두 번째 질문을 동생에게 부탁했다. 유키에가 답변 준비라도 하듯 먹는 것을 멈추고 입가를 닦았다. 긴장한 눈빛이 역력하다. 

  “우리 형도 부탁이 하나 있다는데.” 

  유키에가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형이 아는 일본어 번역가가 있는데 너 논문 나오면 한국어로 번역해서 책을 내고 싶다 네. 진해 역사 이해나 한국 일본 간 문화 교류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그건….” 

  유키에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태민이 성민에게 속삭였다. 

  “한국 와서 쇼핑 좀 했어? 뭔가 변한 것 같은데.” 성민이 대화 주제를 틀었다. 

  유키에가 눈웃음을 지었다. 

  “완전 블랙핑크 로제 스타일인데.” 성민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넌 여성 그룹 춤을 어떻게 그렇게 잘 춰?” 그녀가 달아오른 얼굴에 하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역공을 했다.

  “나? 내가 근육 맨도 아니지, 그렇다고 훤칠하고 매끈한 스타일도 아닌데 뭐가 폼이 나겠어? 그냥 꾸준히 하다 보니까 좀 추게 된 거지 뭐.” 성민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야. 내가 여성 댄스 커버하는 남자들 좀 알거든. 너 같은 사람 없어.”

  “야! 야! 됐거든. 돌아갈 때 다돼서 립 서비스라니.” 성민이 포크로 그녀를 찌를 듯한 동작을 취했다.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같이 영상 하나 남기는 거만 해도 감사해. 정말.” 

순간 태민은 그녀의 미소 속에 비친 아기 같은 눈동자에 혼란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23


  성민은 댄스 학원 지하 삼 층에 차를 댄 후 보조석 의자를 여유 있게 뒤로 밀고 등받이를 좀 더 눕혔다. 파란색 차량용 방향제 구멍도 조금 더 열었다. 접이식 이라고 하지만 야외 촬영 용 삼각 거치대와 조명 장비 등을 차에 전부 실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성민은 트렁크를 열고 학원에서 빌린 물건들을 지하로 가지고 내려와 하나 씩 싣기 시작했다. 잘 가다 마지막에 조명 받침 다리 하나가 트렁크 턱에 걸렸지만 다행히 뒷좌석을 움직여 보니 중간 좌석에 스키스루가 있다. 조명 다리 방향을 바꿔 뒷좌석 중간의 네모난 틈 속으로 끼워 넣은 후 유키에를 데리러 이동했다.


  숙소 앞에 도착해보니 예상했던 모습과 달라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전부 나와 같을 거라 착각하고 살았던 자괴감이겠지. 게스트 하우스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 일 것 같은데 혼자 묵기에는 집이 너무 과하게 느껴졌다. 소개 받은 집이 아니라면 혼자 지내는데 굳이 이런 숙소를 잡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언뜻 봐도 대가족이 묵을 만큼 큰 주택이다. 폰을 꺼내 공유 숙박 사이트로 검색해 봤지만 눈 앞의 집을 찾을 수 없다. 휴…. 정말 형의 말이 맞을 지 모른다…. 그녀가 집에서 나왔다. 민트 색 트렌치코트 안에 블랙 탱크 톱과 스커트를 입고 있다. 보컬 실력만 빼면 완전 블랙핑크 로제를 닮았다. 

  성민은 위화감을 멀리 털어내고 차에서 나와 유키에 쪽으로 걸어갔다. “우와. 유키에 멋지다!”

  그녀가 고개를 기울여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기며 팔과 어깨를 좌우로 흔들었다. 눈화장도 스모키로 바뀌었다. 둘이 나란히 자동차로 걸어가다 그녀의 팔이 성민의 팔에 슬쩍 닿았다. 순간 성민이 감전된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의상은 또 언제 준비한 거야?” 성민이 시동을 걸며 유키에의 탱크 톱을 쳐다봤다.

  “여유가 생겨서 쇼핑 좀 했어. 돌아다니다 보니까 예쁜 옷이 너무 많아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니까.” 그녀가 옷에 묻은 먼지를 때며 말했다. 

  “이제부터 논문 끝나면 뭐 할 거야? 쭉 공부 쪽으로 가는 거야?” 

  “글쎄. 아직 잘 모르겠어. 왜?” 

  “한국어 끝내 주지, 한국 관련 논문도 쓰지, 앞으로 이 쪽 방면으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러고 싶긴 하지만….” 

  “아무튼 아쉽다.” 성민은 음악을 틀었다. 뉴진스의 OMG 후렴구가 흘러나왔다. 

  “뉴진스는 기존 K POP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야. 전체적으로 곡들이 빠른 리듬이지만 멜로우 하다고 할까. 뭐, 대단한 프로듀서들이 받쳐줘서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프로듀싱의 혁신이 K-POP의 분위기도 확 바꿔 버린 듯해. 댄스도 칼 군무 보다는 부조화의 조화 속에서 따스한 봄바람 속에 그리움을 싣고 오는 그런 느낌 도 들고. 무엇보다 뉴진스는 말이 필요없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옛 감성을 자극하지.”

  “근데…. 나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뭐?”

  “너희 형….”

  “우리 형이 왜?” 성민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금 무서운 분 같아.” 

  “아 난 또.” 성민이 깔깔거리며 크게 웃었다.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해. 형이 원래 눈치가 없어서 그래. 궁금한 게 있으면 못 참는 편이지. 어쩌면 혼자서 저렇게 탐정놀이 하는 게 딱 적성에 맞는 것일지 몰라. 너도 눈치챘겠지만 사회생활 하기 힘든 성격이야.” 성민은 어린이 보호 구역을 지나며 속력을 줄였다. 

  “혹시 내가 무리한 부탁해서 기분이 나쁜 건 아니겠지?” 그녀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빙빙 돌렸다. 

  “처음에 이건우씨 찾아 달라고 부탁한 거? 전혀! 결국 너 스스로 해결했는데 뭘 그래.” 성민이 좌회전 차선으로 바꿨다. “우리 형이 마음에 걸렸구나. 전혀 신경 쓰지 마.” 성민의 머릿속에 갑자기 그녀가 머무는 큰 숙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렇게 생각 해주니 고마워.” 

  성민은 신호 대기에 차를 멈추고 글로브 박스를 열었다. “딱 좋다. 블랙이네.” 성민이 비닐을 뜯어 그녀에게 건넸다. 

  “이런 것까지 준비 안 해도 되는데….” 

  “야외촬영 할 때는 무릎 보호대 필요할 때가 많더라.”

  피프티 피프티의 큐피트가 흘러나왔다. 유키에가 노래를 따라 부르며 활시위를 당기는 댄스 동작을 했다. 잠시 후 자동차는 중원 로터리로 진입했다. 

  “저기, 후배들 먼저 도착했네.” 성민은 중원 로터리를 반 바퀴 돌아 길가에 차를 세웠다. “구경하는 사람 없는 게 좋지? 부담도 안 되고?” 

  유키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커버댄스 영상을 보면 국가 별로 특징이 있어. 일본 댄스팀들은 야외 촬영 시에 거의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촬영하더라. 사람 많은 데서 찍게 되더라도 이른 아침 아니면 어둑한 밤에 잘 보이지도 않게 멀리서 찍고. 맞지?” 성민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유키에가 박수를 치며 큰 소리로 웃었다. 

  “K-POP 커버 댄스가 많은 중화권이나 동남아, 유럽 같은 경우는 그 반대야. 야외 촬영은 주로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섞여서 하지.” 

  “그런 것 같아.” 

  “그런 것 하나만 봐도 독특한 문화를 느낀다니까.” 성민이 차 문을 열었다. 

  유키에가 차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어? 안 돼?” 

  “한국에서 자동차를 많이 안 타봐서.” 

  “아니 그건 아니고. 차가 좀 문제가 있어서 고쳤는데, 또 말썽이네. 잠깐만 나가서 열어 줄게.”

  “아 됐다.” 유키에가 문을 열었다. 

  성민은 트렁크에서 챙겨온 물건들을 하나 씩 꺼내 들었다. 


  중원 로터리를 중심으로 팔각형의 방사선 도로가 낮은 건물들 사이로 시원하게 뻗어 있다. 간간히 차 들만 다닐 뿐 도로에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캠코더를 든 후배가 다가와 성민이 어깨에 둘러매고 있는 가방 하나를 뺐어 들었다. 

  “날씨 끝내 준다. 잘 나오겠어.” 성민이 말했다. 

  “형! 영상 조회수 폭발해서 유명해지면 나 잊으면 안 돼!”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넌 그게 진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성민은 캠코더 맨을 슬쩍 밀쳤다. 

  로터리 구석에서 여자 후배 두 명이 몸을 풀다 말고 성민과 유키에를 향해 인사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둘 다 블랙 계통의 의상을 입고 있다. “오빠! 리사 랩 파트 연습 많이 했어? 전부 영어인 거 알지?” 

  “내 립싱크 실력 못 믿어?” 성민이 손으로 과장된 제스처를 취했다. “자, 자, 한 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리허설 딱 한 번만 하고 바로 시작하자!” 

  캠코더 맨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조명과 스피커를 점검한 후 정 중앙에 서서 지휘를 준비했다. 잠시 후 음악이 시작되자 네 명의 멤버들은 우물처럼 한 곳으로 합쳐 질 때도, 강물처럼 밖으로 흩어질 때도, 물 흐르듯 조화롭게 리듬을 탔다. 

  “이야, 리허설도 필요 없겠다.” 음악이 끝나자 성민이 박수를 치며 엄지를 치켜 세웠다. 캠코더 맨이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댄스 멤버들에게 하나 씩 나눠줬다. 

  “너가 제일 땀을 많이 흘리는 것 같네.” 성민이 등이 흠뻑 젖은 캠코더 맨에게 생수를 건넸다. 영상을 돌려보니 춤과 노래도 잘 했지만 촬영 각도마다 방사선 모양으로 쭉쭉 뻗은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와 한 편의 잘 찍은 뮤직비디오 느낌이 났다. 성민은 거리에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자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자, 본 게임 시작하자!” 

  촬영이 성공적으로 끝나 갈 무렵 성민은 허리를 돌리다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지만 다행히 내색하지 않았다. 캠코더 맨도 만족한 표정으로 모두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후배들과 유키에가 서로 얼싸안고 격려 인사를 했다. 유키에가 붉게 물든 눈시울로 고개를 돌렸다. 성민이 화장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캠코더 맨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한 쪽 구석에 쌓아놓은 짐들을 멤버 각자가 알아서 챙겨 들고 뿔뿔이 흩어졌다. 

  성민이 트렁크에 짐을 실은 후 운전석으로 들어왔다. “고마워. 좋은 추억이 될 거야.” 

  “미안해. 갑자기 눈물이 나서….” 그녀가 코를 훌쩍거렸다.

  “뭐가 미안해?” 성민은 팬더처럼 변해버린 그녀의 얼굴을 애써 못 본 척했다. “숙소로 바로 갈 거야? 우리 맛있는 브런치 먹으러 갈래?” 

  그녀가 폰을 확인하며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성민은 인터넷에서 평점이 좋았던 브런치 카페로 차를 돌렸다.

  “내가 한국에 올 때 블랙핑크 커버댄스 찍고 싶었던 거 어떻게 알았어?” 

  “너 예전에 버킷 리스트에 한국에서 블핑 커버댄스 찍는 거 들어 있다고 얘기한 적 있어. 사실 나도 너와 한 팀으로 찍어 보길 고대하고 있었지.” 성민이 에어컨 방향을 그녀 쪽으로 돌렸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당연하지. 그런데 넌 숨도 안 차냐? 평소에 운동 꾸준히 하나 보네. 동생들 봤어? 걔 네들 평소에 꾸준히 연습하는 애들인데 막상 실전에 들어가니까 댄스 두 타임에 헉헉 거리는 거. 나도 힘들더라 솔직히.”

  “내가 유연성은 떨어져도 체력은 좋아.” 그녀가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24


  이제 아르바이트도 끝이다. 유키에가 산리오 쿠로미 캐릭터를 닮은 아르바이트 앱을 삭제하자 정확히 삼 분 후에 잔금이 납입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만져보는 목돈! 일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내일 오후 네 시. 기지개를 크게 한번 켠 후 숙소 밖으로 나왔다. 걸어가는데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입가가 저절로 벌어졌다. 사람들만 없으면 길가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다.

  그녀는 대형마트의 식품 코너로 향했다. 부피가 작은 김밥 용 김 열 봉지 묶음 다섯 개에 초콜릿 해바라기 씨 다섯 봉과 홍삼까지 넣으니 바구니가 꽉 찼다. 인삼주 한 병까지 추가한 후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때마침 정류소 앞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가 보였다. 무거운 봉지를 들고 택시 쪽으로 불편한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네모 머리의 어깨가 넓은 남자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말로만 듣던 새치기! 다행히 그녀 앞으로 예약한 것처럼 다른 택시가 다가오더니 정확히 멈췄다. 기분 나쁜 남자를 무시하고 자신을 태우러 온 택시에 얼른 몸을 넣었다. 

  “어디까지 모실까요?” 운전사의 친절한 목소리에 짜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막 이발을 마친 듯 기사의 깔끔한 뒷머리 선이 보였다. 

  유키에가 숙소를 말하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출발했다. 목소리와 달리 운전은 시작부터 거칠었다. 멀미가 날 정도로 급가속과 급정거를 반복해서 불안감이 몰려왔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목소리가 백팔십도 바뀌었다. 

  유키에는 연극배우 같은 기사의 발성 법에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느껴져 서울이라고 짧게 말을 끊었다.

  “김은 왜 그렇게 많이 사셨어? 일본으로 보낼 건가?” 그가 말투를 바꿨다.

  “저기, 이 길로 가도 되나요?” 왔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이야 많지.” 

  유키에가 폰을 열어 위치를 확인하려 했지만 먹통이다. “당장 내려주세요!”  

  “묻는 말에 대답만 잘 한다면.”

  “무슨 말씀 이세요?” 유키에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기 뭐 하러 오셨어?” 운전사가 고개를 돌리며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그런 것까지 얘기해야 하나요? 

  “질문 한 번에 대답 한번! 우린 단답형을 좋아해. 그렇지 않으면 당신 영영 일본에 못 돌아간다.” 

  운전기사가 무엇인가 알고 있다. 돈 때문인가, 하필 아르바이트 잔금이 들어온 날에. 불길한 생각들이 종잡을 수 없이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차가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문은 역시 열리지 않았다.

  “자…, 다시 질문한다. 여기 뭐 하러 오셨어? ”

  “친구 만나러 왔어요.” 유키에는 성민의 얼굴을 떠올렸다. 

  “중원 로터리 안에서 같이 춤 춘 친구 말인가?”

  폰을 쥔 유키에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저에게 왜 그러세요?”

  “일본에서 같이 왔던 남자 친구는 어디 두고 혼자 다녀?”

  “누구 말이예요?” 

  “질문하지 말고 답을 해!” 그가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전 혼자 왔어요.”

  “아가씨, 국적에 상관없이 사람은 다 똑같아. 쳐 맞기 전까지 똑바로 얘기를 안 해! 응?” 그가 핸들을 급히 꺾어 유턴했다. 유키에가 차창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몸 상하기 전에 빨리 말해! 뒤에 트렁크 열면 내 손에 피 안 묻히고 아가씨 입 열게 할 공구들이 가득해.”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아르바이트 대응 매뉴얼을 떠올렸다. 그냥 논문 때문이라고 말하면 되는 걸까. 유키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린 것만 같았다. 갑자기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철로 앞에서 안전 바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 야? 기차 안 다니는 줄 알았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네.” 네모머리가 군시렁거렸다.

  그 때 모터 사이클 한 대가 굉음을 내며 택시 옆에 멈춰 섰다. 검은 헬멧을 쓴 남자가 차 안을 힐끔거리며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제발 도와주세요. 그가 보든 말든 유키에는 그를 향해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기차가 지나가고 안전 바가 거의 다 올라간 순간 검은 헬멧이 전광석화 같은 발차기로 오른쪽 백미러를 부숴버리더니 방향을 돌려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돌았나.” 운전사도 바로 핸들을 꺾어 모터 사이클을 쫓아갔다. 유키에는 창문 위 손잡이를 힘껏 움 켜 잡았다. 기사는 끊임없이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혼자 말을 해대며 곡예 하듯 주택가 골목을 지나더니 작은 뒷산까지 모터 사이클을 추격했다. 유키에는 구토가 올라오는 것을 삼키고 또 삼켰다. 택시가 더 이상 올라갈 길이 없는 막다른 좁은 산길 앞에서 멈춰 섰다. 갑자기 검은 헬멧이 왼쪽에서 나타나 나머지 백미러도 발차기로 부숴버렸다. 기사가 안전벨트를 풀어 던지고 문을 여는 순간 검은 헬멧의 손이 운전사의 목에 스파크 굉음이 나는 전기 충격기를 갖다 댔다. 그가 고목나무처럼 단번에 고꾸라졌다. 바이커가 택시의 블랙박스를 주먹으로 내려친 후 유키에에게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가 선물 봉지를 챙겨 들고 택시에서 내리자 그가 송곳 같은 것을 바퀴마다 돌아가며 꽂았다. 그리고 떨고 있는 그녀를 보며 뒤에 타라는 손짓을 했다. 유키에가 모터 사이클 뒷자리에 놓인 헬멧을 집어 들고 앉았다. 그가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 준 뒤 턱 끈을 조여줬다. 그리고 그녀의 짐을 받아 앞 유리 쪽에 줄로 빠르게 묶었다. 유키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가까스로 목적지를 내뱉았다. 그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주택가 골목을 지나쳐 유키에를 숙소에 내려주고는 어디론 가 사라져버렸다. 


  택시 기사가 사람을 잘못 본건 아니다. 그는 중원 로터리에서 댄스 영상을 찍었을 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다. 유키에는 택시 운전사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는 신발장 문 앞에 세워 둔 캐리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꼭 쥐고 있는 폰 화면에 성민의 이름이 떴다. 저녁을 같이 먹자는 제안에 그녀는 머뭇거리다 데리러 올 수 있냐 고 부탁했다. 눈치 빠른 성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앞에 도착했다며 준비되면 나오라고 라인 메시지를 남겼다.

  “내일 비행기 아냐?” 숙소에서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유키에를 보며 그가 말했다. 

  “그렇기는 한데….” 그녀가 꼬리를 높이 치켜든 길 고양이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래. 알았어. 일단 가자.” 성민이 트렁크에 그녀의 캐리어를 실은 후 이십 분 정도 달려 도착한 곳은 멋진 마당이 펼쳐진 한옥 고깃집이었다. 눈 덮인 동토에서 막 눈썰매를 끌다 왔을 것처럼 보이는 하얀 털의 큰 개 한 마리가 두 사람을 맞아줬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성민이 메뉴판을 펼쳤다.

  유키에는 주변을 살펴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은 오늘 안 좋은 일이 좀 있었어.”

  “안 좋은 일?” 성민이 고개를 돌려 그녀 얼굴 가까이 귀를 붙였다. 

  “택시를 탔는데 납치 당할 뻔했어.” 

  주문을 받으러 다가오는 종업원이 없었다면 성민은 순간적으로 큰소리를 지를 뻔했다. “뭐? 어디서?” 

  “마트 앞에서.” 

  “택시 운전사가 납치범이야?” 

  “확실히 고의적이야. 우리가 중원 로터리에서 커버댄스 함께 춘 것도 알고 있었어.” 유키에가 손톱을 물어 뜯었다. 

  그건…. 계속 감시하고 있었단 얘기다. 성민은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어떻게 빠져나왔어?” 

  “정말 희한하게 철길 앞에서 모터 사이클을 탄 남자가 나타나더니 구해줬어.” 

  성민은 불안정한 숨을 내쉬었다. “너 혹시 여기서 논문 말고 다른 용건도 있어?” 

  유키에가 마당 중앙에 있는 연못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생각에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너 자신이 가장 잘 알 것 같은데….” 성민은 보리차를 단숨에 마셨다. 

  “그래….”

  “곤란한 거는 굳이 말 안 해도 괜찮아. 지금 중요한 건 네 안전이지. 너가 내일 일본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것에만 집중하자.” 성민은 자신도 벤츠 남자에게 추적 당하고 있는 처지라고 말하려다 그만뒀다. “그 캐리어. 너 혹시 무서워서 숙소에서 짐 다 뺀 거야?” 

  유키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밥 먹고 오늘은 우리 집에 가자. 걱정하지 말고. 나는 형 집에서 잘 테니까. 내일 공항에도 데려다 줄게.”  

  “폐를 끼쳐서 미안해.” 유키에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 “일도 잘 끝나고 고대하던 댄스 영상도 찍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 이래….” 

  “자. 먹자, 먹자. 이럴 땐 고민해봐야 소용없다.” 성민은 주문한 음식이 세팅 되자 집게를 들어 능숙하게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노릇 해진 고기는 먹기 좋게 잘라 먼저 유키에의 앞 접시로 옮겼다. “우리 형도 탐정 일 하고 나서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끔 생기거든.” 성민이 참기름 소금 장에 고기 한 점을 찍어 입에 넣었다. “형이 사실 엄청 겁쟁이라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신기한 건 그래도 결국은 이겨내더라. 겁주는 놈들은 굴복하는 사람들에게 더 심하게 굴어. 내일 출국만 아니면 경찰에 신고해버려도 되는데.”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유키에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료조사도 많이 했고 이제 돌아가면 더 이상 엮일 일도 없을 것 같아.” 그녀는 앞 접시에 놓인 고기 한 점을 집었다.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젓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있잖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한 일에는 관여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냥 친구로서. 걱정이 되어서….” 성민은 버섯을 뒤집으며 말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이거 내가 살게.” 

  “여기 한우는 비싸. 손님한테 얻어먹을 순 없지.” 

  “나, 이번에 돈 많이 벌었어.” 

  “야, 대학원생이 재주도 좋다.” 성민은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그녀 말의 진의가 헷갈렸다.

  유키에는 퍼뜩 말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이건 내가 살게.” 그녀는 명이나물 장아찌를 먹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유키에는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성민의 집으로 들어왔다. 좁지만 나름 아늑한 공간이다. 캐리어를 출입문 옆에 세워 뒀다.

  “특별히 청소는 못 했어. 누추하긴 해도 이불은 동네 동전 세탁소에서 자주 프리미엄 세탁을 하니까 뽀송뽀송 할 거야.” 그가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고 나왔다.

  “화장실 좀 써도 될까?” 

  “당연하지. 수건은 이거 써.” 성민이 옷걸이 밑에서 새 수건을 꺼냈다.

  깔끔한 성격이다. 세면대와 변기에 물 때 하나 없다. 희한하게 각기 다른 칫솔과 치약이 일곱 개나 있다. 유키에는 손을 닦고 나왔다. “칫솔 보니 친구가 집에 많이 오나 보네.”

  “아, 그거.” 성민이 이마를 치며 웃었다. “그거 다 내거야. 어릴 때 습관이야. 형이 아파서 인지 머리 좋아 지라고 부모님이 양치질에 진심이었지. 오른손, 왼손 번갈아 시키는 건 기본이고 매일 각기 다른 칫솔과 치약을 썼어. 부모님이 뇌 발달에 관심이 많아서 희한한 습관이 생겼네. 덕분에 충치 하나 없지만 부모님 바램과 달리 머리는 안 좋아지더라.” 

  유키에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푹 자고 내일 아침 일곱 시에 데리러 올 게. 우리 형 집도 여기서 멀지 않아서 무슨 일 있으면 곧바로 연락해. 그리고 문은 이것도 꼭 걸고.” 그가 현관 안전 고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성민이 나간 후 유키에는 침대 옆에 기대고 앉았다. 오늘 밤은 함께 있어 달라 부탁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지만 새벽까지 택시 운전사의 말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며 벽시계 초침 소리가 크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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