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108번뇌 02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머즈 Oct 02. 2024

아이스크림 학원의 비밀

(8~14)

8


  옷깃을 스치는 향기로운 봄 내음을 느끼며 유키에는 팔각으로 뻗어 있는 중원 로터리를 시계 초침처럼 두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고풍스러운 러시아식 우체국 건물 앞으로 다가가 잠시 분위기에 도취되었다가 해군사관학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길가에 이어진 벚나무를 따라 천천히 내려가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편 모퉁이에 운치 있는 이 층 건물이 보였다. 핑크 빛 벚꽃 문양 옆에 체리 베이커리라는 작은 글씨가 유난히 귀여워 보인다. 유키에는 안쪽에서 빵을 굽다 급히 달려 나온 점원에게 주문을 하고 낡은 계단을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일 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테라스까지 나갔다. 알지 못하는 기운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왠지 모를 포근함이 느껴졌다. 장막이 걷히며 거대한 도심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던 히로시마의 단골 빵집과는 전혀 다른 아늑한 느낌이 따스한 바람에 실려왔다. 삐죽 튀어나온 높은 건물이 난잡하게 시선을 가로막지 않은 차분히 정돈된 도시의 수평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 후 찾고 있는 집이 잘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 끝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미팅대상 1호가 알려 준 집은 주변과 오랜 시간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평범한 건물이다. 저 곳에 사는 사람을 만나면 이 싱거운 알바는 끝이 나는 거겠지…. 유키에는 살며시 눈을 감고 팔짱을 꼈다. 

  여자 종업원이 주문했던 음식을 직접 갖다 주고 돌아갔다. 그녀에게 목례하려 살짝 고개를 돌리니 뒤쪽 구석에서 어느새 안 보이던 남자 한 명이 시야에 잡혔다.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꼈지만 유키에의 동물적인 감각은 비껴갈 수 없다. 수상한 느낌은 잠시 머물다 사라지고 그의 멋진 스타일이 눈에 남았다. 음…. 헤이 맨! 언제 여기까지 뒤쫓아온 거야? 여기 우리 둘밖에 없어! 겁먹지 말고 가까이 와서 말을 걸어 봐. 얼른! 연분홍빛 벚꽃 문양 유산지 위에 놓인 소금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사르르 녹는 빵 한 조각에 뭔가 꽉 막힌 듯한 부담감이 조금 누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은근슬쩍 남자에게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요지부동 폰에 얼굴을 묻고 있다. 에 휴…. 유키에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남자 생각을 떨구어 낸 다음 알바 의뢰인이 보내줘 깔았던 애플리케이션이 잘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순간 산리오의 쿠로미 캐릭터처럼 귀엽게 생긴 앱이 입가에 피를 흘리는 악마로 변하는 환영이 보였다. 그리고 불안감이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쓰나미처럼 어두운 감정이 몸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와 정화된 눈물 한 방울을 뚝 떨구어 냈다. 입안 가득 빵을 베어 물고 오물거리는데 파란 하늘에 생전 보이지 않던 아빠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흔든 후 맞은편 집으로 겨우 시선을 돌렸다. 아직 집에 드나드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빨대 소리가 날 때까지 망고쥬스를 빨아 마신 후 각도를 바꿔가며 집 주변의 사진을 세 장 찍었다. 뒤쪽의 멋진 남자는 아직도 폰 삼매경이다. 아쉽지만…. 굿 바이! 우린 인연이 아니야. 유키에는 체리 베이커리를 나와 사진을 찍었던 집 앞에 우두커니 섰다. 연습한 대사를 몇 번 중얼거린 후 현관문을 두드려 봤지만 인기척이 없다. 나무 재질의 작은 소포 함에 고지서 같은 것들이 지저분하게 꽂혀 있다. 

  할 수 없이 거리를 배회하다 서점으로 방향을 틀어 활자와 씨름하며 좀처럼 가지 않는 시간을 죽였다. 미팅대상 2호와의 약속 시간이 삼십 분쯤 남았을 때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썰물처럼 아이들이 빠져나간 초등학교 교정은 적막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황금색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연못 근처의 작은 벤치에 앉았다. 오후 세시 정각이 되자 그가 살갑게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미팅대상 2호 이성준이다. 연하라는 것을 감안해도 윤기나는 갈색머리에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매끈한 피부 덕분인지 그는 기대를 뛰어넘는 동안의 느낌이 났다. 벤치에 나란히 붙어 앉아 있으니 기분 탓인지 타임머신을 타고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기분까지 들었다.

  “미리 말해뒀는데 정문 지킴이 분께 잡히지는 않으셨죠?” 그가 말문을 열었다.

  “네. 덕분에.”

  “여기는 제가 졸업한 학교입니다.”

  “감회가 새롭겠어요. 모교에 선생님으로 다시 돌아오셔서.”

  “그렇죠. 정말이지 꼭 한 번은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여긴 그 녀석과 추억이 많은 곳이죠.” 그가 다리를 꼬며 말했다. 

  “여기에서 근무하시면 가끔 생각나시겠어요?”

  “솔직히 너무 오래전 일이라 무뎌졌습니다. 이젠 기억도 가물거리고요. 그래도 그 녀석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항상 저랑 붙어있었으니까 그 녀석과 추억이 제일 많죠.” 

  “전화로 양해드린 것처럼 제가 논문을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친구 분 아버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연락이 잘 닿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그 녀석 실종되기 전까지 그 집에도 자주 놀러 갔어요. 아직 까지 기억이 생생한 건 아버님이 정말 잘해 주셨어요. 맛있는 경양식 집에서 돈까스도 가끔 사주시고 사이좋게 놀라면서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탱크나 비행기 장난감 같은 것도 사 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재미에 홀랑 빠져서 그 녀석이랑 찰떡같이 붙어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 당시에 저희 집은 경제적으로 형편이 안 좋았거든요. 그래도 저와 붙어 있을 때는 학교에서 누구 하나 그 녀석을 괴롭히진 않았습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상부상조하는 사이였죠.” 그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친구분 아니었으면 괴롭히는 친구도 있었을 것 같네요.” 유키에는 동안 얼굴 남자의 반전 같은 초등학생 시절에 흥미가 느껴졌다.

  “그럼요. 예나 지금이나 인간 세상은 어디를 가나 비슷하지 않을까요? 잘 아시겠지만 학교도 약육강식이 적용되는 작은 사회입니다. 똑똑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 힘이 센 아이와 약한 아이.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 그런 게 학년을 올라갈수록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처럼 명확히 구분되죠. 왜 그런지 저도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그 녀석이 좀 불쌍하더라고요. 왜 가지고 논다는 표현 아시죠? 제가 나서기 전까진 한마디로 못된 아이들이 그 녀석을 가지고 놀곤했죠. 심심풀이 장난감처럼.”

  유키에는 이지메 같은 게 떠올랐다.

  “그 녀석이 강박 증상이 있었어요. 책상 줄 같은 거를 항상 똑바로 맞췄거든요. 그럼 짓궂은 아이들이 그걸 발로 툭 쳐서 비뚤게 만들고 그 녀석이 다시 맞추고 아이들이 그런 걸 반복하며 한바탕 웃으며 노는 거죠.”

  유키에는 무리에서 이탈해 구석에서 빙빙 돌고 있는 황금색 물고기에 시선이 갔다.

  “어느 날 교실에 들어갔더니 그 녀석이 돌아가면서 아이들 엉덩이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고 있는 거예요. 구경하던 아이들도 말리지 않고 전부 자지러지고 있고. 아…. 이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죠. 제가 짓궂은 아이 몇 명을 교실 뒤에 다 한 줄로 세워서 단단히 겁을 줬어요. 그 때부터 저랑 그 녀석이 단짝이 된 겁니다.”

  “그랬었군요.”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녀석하고 친해 진 이후에도 제대로 된 대화는 거의 나누지 못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은 그 녀석이 제법 알아듣는 것 같았는데 그 녀석이 말 하는  건 제가 거의 보지 못했거든요. 머리가 희끗희끗 하신 아버님이 저를 볼 때마다 크게 웃으시며 등을 두드려 주셨어요. 용돈도 주셨던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 하네요. 가끔 씩 생각나서 인사 차 둘러야지 하면서 마음만 앞섭니다.”

  “친구분이 어떻게 하다가 실종되었습니까?” 유키에는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그게….” 그가 한 숨을 크게 내쉰 후 말을 이었다. “5학년 여름방학 때 인 것 같은데 둘이 철길을 따라 걷다가 아지트에 숨어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 아지트는 나무가 우거져 으슥한 데다가 야단치는 어른도 없어서 기차놀이 하기 제격이었거든요. 멀리 기차 소리가 들려오면 재빨리 철로에 올라서서 기차가 올 때가지 가능한 오래 버티다 철로 양옆으로 갈라지는 거죠. 그리고 기차가 지나가면 다시 합쳐지는 그런 놀이요. 스릴 있고 재미있었습니다. 그 날도 평상시처럼 기차가 오길래 철길에 서 있다가 서로 갈라졌는데 기차가 지나간 뒤로 사건이 터져버린 겁니다. 그 녀석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어요. 일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그 뒤로는 못 보셨나요?”

  “그렇죠. 그 뒤로 지금까지 생사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 녀석 말도 제대로 못하니까 누군가 에게 도움도 못 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부디 어딘 가에서 살아나 있으면 좋겠어요.”

  “혹시…. 친구 분은 말을 왜 못했죠? 병명이….” 유키에는 꼬치꼬치 따져 묻는 거 같아 조심스레 머리를 숙였다. 

  “병명은 저도 몰라요. 요즘으로 따지면 자폐증 같은 발달 장애에 해당하겠죠. 겉모습은 멀쩡했으니까요. 그 녀석 아버님은 일본에서 핵 폭탄 맞고도 멀쩡히 사셨다는 데 늦은 나이에 힘들게 키우던 아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얼마나 애통하실지….” 그가 바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슬쩍 한 번 들여다 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먼 길 오셨는데 어떻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사도 안 가셨을 것 같은데 그렇게 오래 집을 비우실 정도면 어디 조용한 시골에서 계신 건 아닐까요?”

  “그렇지만 거동이 불편하시다고 들어서.” 유키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랬군요. 세월에 장사 없다고 생각해보니까 그 녀석 아버님이 저희 아버지보다 훨씬 연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손이 엄청 크고 기력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제 얼굴보다 큰 손으로 대근이와 제 얼굴을 귀엽다며 만졌는데 무서웠던 기억도 나네요.” 그가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볼 때 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유키에가 벤치에서 살며시 일어났다. 

  그는 유키에에게 눈인사를 한 후 폰 밖으로 울리는 날카로운 음성을 귀에 붙인 채 건물 안으로 굽실거리며 뛰어들어갔다. 

  평온한 초등학교 일상을 상상했던 유키에는 어린이 교육이라는 잔잔한 수면 아래에 클레임이라는 거대한 스트레스가 도사리고 있을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유키에는 가방에서 폰을 꺼내 녹음한 대화 내용을 다시 듣고 일본어로 번역해 알바 앱에 등록했다. 


9


  성민은 댄스 아카데미에서 나온 후 축축한 머리칼을 털어내며 폰을 꺼냈다. 열한 시 사십분. 유키에와 약속 시간까지 겨우 이십 분 남았다. 

  “형, 미안한데 나는 여기서 택시 타고 바로 갈 테니까 형도 약속 장소로 지금 출발하면 될 것 같아!” 성민은 길가에 정차 된 택시를 바로 잡아탄 후 창문을 반쯤 내렸다. 시원한 바람을 타고 형과 나눴던 이야기들이 귓가에 스쳐갔다. 형이 들었다는 내용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아무리 듣는 귀가 좋다 지만 도무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형이 거짓말을 지어낼 위인은 아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전적으로 형에게만 의지하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 아이스크림 학원 방문 건만 해도 그렇다. 처음 방문한 곳에서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는데…. 도통 믿을 수가 없다. 다짜고짜 아이스크림 학원 사람들이 죽은 원장과 같은 비밀 조직원이라고 말하는 거는 이건 뭐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수준에 버금가지 않을까…. 형의 정신 상태를 가끔은 챙겨봐야 할 것 같은 위기감이 드는 건 왜일까….  

어느새 택시가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출입문이 마치 유럽의 거대 성문처럼 생긴 카키색 건물 앞에서 형이 갈대처럼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성민은 형에게 다가가 사전에 입을 맞춰 놓은 이야기를 다시 확인한 후 황금색 원형 금속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손을 흔드는 유키에가 보였다.

  “잘 지냈어? 짜잔…. 드디어…. 바로 여기가 우리 태민 형이야.” 태민이 다가와 얼굴을 드러내자 유키에가 태민과 눈을 맞추지 못했다. 

  “너…. 왜 그래?” 성민이 유키에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놀리듯이 말했다.

  유키에가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더워? 손으로 되겠어? 저번에 나하고 만날 때와는 사뭇 다른데. 내가 우리 형 잘 생겼다는 말은 빼먹고 안 했나 보지? 와 너무한다.” 성민이 목젖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 건 아니고….” 유키에가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시간되면 우리 댄스 팀 사람들도 소개하고 싶은데 아쉽네. 거기 우리 형만큼 잘생긴 사람들 많아.” 

  유키에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성민은 형이 유키에랑 마주 앉도록 자리를 조정했다.

  유키에는 치킨 유자 샐러드, 태민과 성민은 토마토와 바질 파스타에 고르곤졸라 피자를 시켰다. 

  “아직 이건우씨 못 찾았지?” 성민이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응. 아직. 어떻게 주소는 알게 돼서 찾아가 봤는데 만나기 힘드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유키에의 시선이 슬쩍 태민 쪽으로 향했다. 

  “논문 쓰기 참 어렵다. 근데….” 성민은 잠깐 뜸을 드렸다. “전에 깜빡하고 못 물어본 게 있는데 그 대화재 사건 말이야, 이건우씨는 누가 찾아가라고 소개해 준거야?”

  “완전 우연이었어. 내가 논문 주제를 고민하고 있으니까 재일교포 친구가 진해 대화재 사건에 대해 써 보라며 제안을 했어. 그 친구 아는 분이 이건우 씨 아버님을 잘 안데. 그렇게 하다가 논문까지 오게 된 거지 뭐.” 그녀가 태민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이건우씨 아버님?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말이야. 딱 깨놓고 말해서 이건우씨는 그 화재 사건의 당사자도 아닌데 네가 원하는 것을 알려 줄 수 있겠어? 그 정도 시대 옛날 아버지들은 자기 아들에게 시시콜콜 과거 얘기를 잘 안 했을 수도 있어. 요즘이야 아버지가 아들 잡아 놓고 미주알고주알 대화 나누는 집도 많겠지만.” 

  “그래? 그 화재 사건은 보통 일이 아닌 데도 그랬을까?” 

  “에이 그게 뭐라고, 위대한 유산도 아닌데. 내 생각에는 그냥 아빠가 젊었을 때 말이야 이런 큰 화재 사건이 있었다. 그 정도로 부자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갔을 수도 있어.” 성민은 양 어깨를 들썩거렸다.

  “나도 그런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야. 하지만 화재 사건의 일본 피해자 조사를 해보니까 생각이 달라졌어. 피해를 당한 가족들은 한 세대에서 발생했던 끔찍한 사건을 세대를 거치면서도 잊지 못하는 것 같았어. 유품들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는 집도 많았는걸. 그래서 도전해 보기로 한 거야. 게다가 나는 진해에 친구까지 있으니 더 용기가 났지!” 유키에는 주먹까지 움켜쥐며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성민은 태민을 힐끔 쳐다봤다. 유키에가 물을 마시다 갑자기 시작된 태민의 외계어에 놀라 기침을 몇 번 했다.

  “그 화재 사건은 피해자 대부분이 진해에 거주하던 일본 어린이들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일본 주요 언론에서 대서특필했어. 그러니 관련 자료도 한국보다 일본에 더 많이 남아있을 것 같은데 굳이 이건우씨를 만나서 논문에 꼭 담고 싶은 내용이 있어?” 형의 외계어를 성민이 통역했다

  “일본 자료는 대부분 조사해봤어. 아는 지 모르겠지만 이건우씨의 아버지는 그 사건의 생존자였으니까 이건우씨도 충분히 인터뷰할 가치가 있어.” 그녀는 외웠던 대로 말했다. 

  “이건우씨 아버지가 생존자였어?” 예상 못했다는 듯 성민의 눈동자가 커졌다. 

  유키에가 세팅 되는 음식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석 테이블에서 주문하고 있는 감색 정장의 남자가 태민의 시야에 들어왔다. 

  “형, 유키에가 그러는데 그 화재가 영사기에 늘어진 필름에 불이 붙어 시작되었데. 그 뒤로 순식간에 다른 필름 스무 통으로 불이 옮겨 붙었고 손쓸 틈도 없이 영사기를 돌리던 좁은 공간에 차 있던 셀룰로이드 가스가 폭발해 버린 거지. 영화관 안에 약 이백 오십 명이 있었는데 대부분 어린이들이니까 중상자도 많이 나왔고. 결과적으로 영사기 담당 군인과 진해 사령관 등 관련자들이 군법 회의에서 처분되었어.” 

  태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키에는 물을 마시며 태민이 파스타 감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파스타를 입에 넣은 태민이 고개를 들자 재빨리 시선을 돌리며 물컵을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입을 오물거리던 태민이 동생에게 외계어를 중얼거리다 갑자기 귀를 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진해에 혼자 왔어?” 성민이 태민의 외계어를 통역했다.

  “한국에 같이 오고 싶어한 친구야 많았지만 놀러 가는 게 아니 라서. 나도 시간만 되면 서울에 가서 블핑 커버 댄스 친구들도 만나면 좋지만 알다시피 여유가 없어.” 

  “숙소는 어디야?” 

  “공유 숙박 사이트에서 잡았어. 여기서 멀지 않아.”

  “그래. 언제든지 필요한 일 있으면 콜 해.”성민의 말이 끝나자 무엇인가 생각난 듯 태민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미행 자가 엿듣고 있어 준비했던 질문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성민은 통역하지 않았다. 태민은 주머니에서 귀마개를 빼서 꽂았다. 

  “귀가 아프세요?” 유키에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불편해하는 태민을 보며 물었다. 

  태민이 손사래를 쳤다. 

  “우리 형이 어릴 때부터 귀가 좀 예민해서 그래.” 성민의 말이 끝나자 마자 도청 전파 소리가 줄어들었는지 태민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성민은 유키에의 선한 눈망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유키에가 냅킨으로 입가를 두어 번 두드린 후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홀로 구석에 앉아있는 남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아우라! 테이블 다리 옆으로 살짝 삐져 나온 그의 회색 신발. 고베 로프트에서 예전 남자 친구에게 선물했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다. 그녀는 화장실을 나와 자리로 돌아오며 슬쩍 구두를 한 번 더 쳐다봤다. 자주 신는 신발이 아닌 듯 주름이 거의 없고 뒤축도 닳지 않았다. 

  “이건우씨 가족들은 없어? 처자식이 있다면 그 분 행방은 제일 잘 알지 않을까?”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초등학생 때 실종되었고 아내와는 오래전에 이혼한 걸로 알고 있어. 안타깝지만 물어볼 만한 가족도 없는 것 같아.” 유키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태민은 구석에 있던 정장 남자가 현금을 지갑에 넣고 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본 후 성민에게 외계어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건우 씨 집 주소 공유해 줄 수 있어?” 성민이 태민의 말을 통역했다.

  유키에가 폰을 내밀자 태민이 주소를 폰에 저장했다. 

  “탐정이라고 들었습니다. 멋진 일을 하시네요.” 유키에가 부끄러운 듯 오른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말했다. 

  태민은 그녀에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부엉이 탐정사무소…. 귀여운 이름이네요. 저도 태민씨처럼 한 분야에 일가견이 있으면 좋겠어요.”

  유키에의 칭찬에 태민이 머리를 긁적였다. 

  “부러워할 것도 많다. 재주도 많은 사람이 더 한다니까. 한국어 잘하지, 댄스 프로 급이지, 얼굴도 몸매도 안 빠지지.” 성민의 맞대응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 올랐다. 

  “사실 이제 시작이라 아직 이렇다 할 성과라는 것도 없어. 또 한국은 일본처럼 사설 탐정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거든.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지. 난 형이 탐정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 성민은 단번에 물을 다 마셨다. 

  태민이 멈출 수 없다는 듯 준비해온 질문을 다시 중얼거렸다. 

  “이건우 씨가 한 손이 특이하게 크다고 들었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손이 커지는 거지증 이란 병이 있더라. 아주 흔한 병은 아니니까 이건우씨가 치료 차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녔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은데 혹시 병원은 확인해 봤어?” 성민이 통역했다.

  “아니, 거기까지는….” 유키에는 아르바이트 미팅 일정표에 병원 관련 인물이 있는 지 떠올려 봤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요즘은 병원에서 개인 진료 기록은 확인하기 어렵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만…. 넌 여기 생면부지 아니냐? 어떻게 이 사람 저 사람 잘 만나고 다녀? 내 도움이 필요 없을 것 같구만.” 성민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럴 리가. 여기 오기 전에 미리 재일교포 친구가 도와줬어. 그래서 도움 될 만한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거지. 최근엔 이건우씨 아들 초등학교 동창생도 만났는 걸.”

  “뭐라고? 이건우씨 아들의 초등학교 동창? 그 사람은…. 또 왜?” 성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태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키에는 진지 해진 태민의 표정에서 자신이 좋아했던 영화배우가 겹쳐 보였다. 


10


  저녁 여덟 시 사십 분. 아직 이른 시간인데 거리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연노랑 파스텔 가로등 불빛이 체리 베이커리 앞을 은은하게 채색하고 있다. 태민은 명란 바게트 하나와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놓인 선반을 조심스럽게 든 채 삐걱거리는 목재 계단을 밟고 이 층 테라스로 나왔다. 남쪽 바다 어딘 가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가만히 어둠 속에 잠긴 집을 내려다봤다. 유키에가 알려 준 이건우씨의 집이다. 귀마개를 빼자 익숙한 단골 소음들이 가장 먼저 귓가에 도착했다. 어느 거리의 웃음들, 어느 집의 울음들, 티격태격 고함 소리부터 텔레비전과 음악 소리까지 일상의 소리가 비빔밥처럼 섞여서 귀속으로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귀속의 혼란한 세상을 잊기 위해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짭조름하게 버무려 진 명란이 입안 가득 퍼져왔다. 목을 축이려 커피 잔을 들었을 때, 가까운 곳에서 현관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건우씨 집 2층으로 연결된 좁고 어두컴컴한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흰 장갑에 난간을 잡고 한 발 씩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귀마개를 살며시 꽂은 후 남은 커피를 단번에 마셨다.  

  남자의 뒷모습은 좀처럼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모양새다. 등이 곧고 힘 있는 걸음걸이 로 보면 삼십 대 같으면서도 간간이 뒤뚱거리는 모습이 균형감이 떨어지는 노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가 제황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태민은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그의 뒤를 밟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365계단을 다 올랐는데 어둠 속으로 그가 사라져 버렸다. 벤치로 이동해 잠시 숨을 고르며 한 쪽 귀마개를 뺐다. 두 시 방향, 풀숲 쪽에서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바로 가지 않고 가로등 불빛을 따라 멀리 돌며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가 가까워졌을 때 다행히 바로 앞에 시선을 가릴 수 있는 큰 나무가 보여 비스듬히 뒤에 서서 폰의 벨 소리부터 무음으로 바꿨다. 

  그가 나무 앞에 쭈그려 앉아 거친 숨을 몇 번 내뱉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태민은 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가 어깨를 몇 번 돌린 후 레슬링 자세로 중심을 낮추고는 갑자기 앞에 있는 나무를 와락 끌어안았다. 

  태민은 눈 앞에 펼쳐진 기괴한 달밤의 체조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소름 보다는 웃음보가 터져 나오려 했기 때문이다. 

끙끙거리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내밀어 보니 그가 나무를 쓰러뜨리려는 듯 용을 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진 한 장 찍어 두면 좋겠지만 이런 상황에선 자칫 발각될 수 있다.

잠시 쉬는가 싶던 그가 다시 똑 같은 동작으로 나무를 힘껏 부둥켜안았다. 끙끙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일, 이, 삼…. 숫자를 세고있다! 백이 넘어가자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백 이십! 그가 마지막 악을 쓴 후 털썩 주저 앉았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 해져 한 발, 한 발, 도둑 걸음으로 조심스레 365계단이 보이는 벤치 근처로 돌아와 몸을 숨기고 그를 기다렸다. 거의 열 시가 다 되었을 때 뒤쪽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눈을 부릅뜨고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사진찍듯 시야에 잡았다. 가로등 불빛에 마스크를 턱에 걸친 뽀얀 피부의 옆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태민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태민이 사람 목소리에 눈을 뜬 것은 새벽 두 시가 넘었을 때였다. 제황산 공원에서 내려온 후 체리 베이커리 근처에 주차 된 차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던 탓이었다. 

  “아들아, 조금만 참아라.” 이건우씨 집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괜찮아 질 거다. 그렇지. 쭉쭉 마셔!” 

  태민은 차창 밖으로 낡은 이 층 집을 살펴봤다. 일 층과 이 층 출입구가 따로 분리된 흔한 건물이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겨우 한 사람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고 경사가 급하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산다면 수시로 병원 신세를 면치 못할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양 옆에도 비슷한 구조의 이 층 건물이 쌍둥이처럼 찰싹 달라 붙어있다. 크게 하품을 하며 핸들을 잡은 순간 귀가 다시 쫑긋거렸다. 

냉장고 문 닫는 소리, 가스레인지에 프라이팬 부딪히는 소리, 달그락거리는 주전자 뚜껑 소리에 삐삐, 삐삐, 알림 음도 들렸다. 이런 깊은 밤에…. 조금 더 기다리다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집으로 돌아갔다. 


  태민은 정오를 훌쩍 넘기고 서야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렸다. 시리얼을 먹으며 동생에게 카톡을 보내고 구글 어스로 새벽에 봤던 집 주변을 자세하게 살폈다. 어둠이 내린 시간에 운동을 하고 집안 일을 하는 야행성 노인이라면 낮에는 당연히 얼굴 보기 쉽지 않겠지…. 커피 포트에 물을 붓고 태민이 화장실에 들어가자 교차하듯 성민이 집으로 들어왔다. 

  성민은 벽에서 너덜거리고 있는 계란 판 모양의 방음지 하나를 꾹 눌렀다. 차음재로 방음벽 공사를 해버리면 집도 깔끔할 텐데…. 하긴 남의 집이니 그럴 수도 없다. 다음에 돈을 벌면 형을 위한 집을 지어주고 싶다. 꿈 같은 얘기지만…. 형은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미지의 언어 탐구를 좋아하는 여자라면 어쩌면 가능할 지 모르겠다. 형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세상에서 하나 뿐인 외계어를 기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는 여자. 단 한 사람과의 소통을 위해 그 지난한 수고를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자가 있다면 이 따위 소꿉놀이 같은 집이라도 문제될 게 없겠지…. 그나저나 누가 동생이고 누가 형인지. 젠장! 내 코가 석 자인데 언제까지 형 걱정이나 하고 살아야 해, 이건 부모님 잘못이다. 어릴 때부터 얼마나 세뇌를 당했으면 이렇게 형의 보호자라는 굴레에 갇혀있을까. 형 잘 챙겨라! 네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무한 반복해 들었던 잔소리. 아…. 생각만 해도 미치도록 지겹구만. 그나마 형이 직업도 갖고 이만큼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 건 한 치 앞도 안보이던 내 인생에 극적으로 광명이 비췄다는 얘기 아닐까…. 하마터면 형의 까마득한 인생이 곧 내 인생이 될 뻔했다. 천만다행이다. 

  태민이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오 마이 갓! 잘생긴 형 어디갔어? 왜 그렇게 퉁퉁 부은거야? 어제 새벽까지 그 집에서 죽치고 있었구나?” 성민이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민이 어젯밤 일들에 대해 봇물 쏟아지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형! 정말 장하다 장해! 탐정 되고 나서 겁도 없이 사람 뒤도 잘 밟네. 흰색 장갑은…. 대단한 거 아니야. 당연히 낄 수 있는 거야. 산에서 야외 기구 같은 걸로 운동하는 사람들 한 번도 못봤어? 코로나가 잠잠해지긴 했어도 여러모로 위생도 그렇고 손도 보호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무를 껴안는 운동은 좀 생뚱맞긴 하네. 씨름 같은 건가?” 

  으슥한 야밤에 산 속에서 큰 나무를 온 힘을 다해 껴안는 행위. 정확하게 백 이십까지 숫자를 세는 행위. 그 동작을 한 시간 동안 반복하는 행위.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이다. 

  “괴기스럽긴 하지만 숫자야 뭐, 별 의미는 없어 보여. 모든 운동은 카운트 하는 거 중요하지. 왜 피트니스센터 기구 들어 올릴 때 횟수 세는 것처럼 자기만의 운동 기준이 있는 거겠지.”

  그리고 그 집의 노인은 아픈 아들을 위해 야밤에 요리를 하고 있었다. 

  “집에 아픈 사람이 있다…. 새벽에 그 난리를 치는 걸 보면 그럴듯한 추측이긴 한데 그 노인이 진짜 아들에게 말한 거 맞아? 혼잣말일 수도 있잖아?”

  태민이 멈칫거렸다. 

  “가만, 형은 운동했다는 그 이 층 남자가 왜 수상해? 유키에가 찾는 이건우씨 집은 그 건물 일층 아니야?”

  이 층 남자의 망치 발걸음 소리가 일 층에서도 똑같이 들렸다. 

  “세상에…. 그럼 형은 지금 그 이 층 남자가 이건우씨 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그 사람 얼굴은 제대로 봤어?” 

  가로등 불빛에 스친 얼굴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젊었다. 칠십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 봐! 아니겠지. 이건우씨는 오랫동안 휠체어를 타고 있다고 했어. 게다가 노인이야. 야밤에 제황산 공원의 365계단을 올라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그 나이에 어디 나무를 부러뜨릴 기세가 있겠어?” 성민은 형의 과대망상이 심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를 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왜곡하는 것은 기억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과거 빌라나 아파트에 살 때 태민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발걸음으로 모두 파악했다. 엄마는 거실에, 아빠는 화장실에, 아들은 자기 방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다. 그런 추측은 식은 죽먹기였다. 학교나 도서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복도에서 미술 선생님이 걸어온다, 체육 선생님이 몽둥이를 두드리며 화장실로 들어간다 등 오로지 소리 만으로 파악한 그런 예측도 예외 없이 맞아 떨어졌다. 달밤에 나무를 부둥켜 안던 이 층 남자와 일층 부엌에서 부산히 움직이던 사람의 발걸음은 100% 동일 선상에 있다. 

  “보통 그렇게 세대가 분리된 이 층 집은 여기저기 널렸어. 한 층은 주인이 살고 다른 층은 세입자가 사는 구조지. 형 말 대로 이 층 남자가 밖에 나오지 않고 일 층에 내려갔다면 그건 뻔하지 뭐. 내부에 계단이 있는 집이겠지. 하나도 이상할 거 없어.”

  그렇다. 이 층에 아들 방이 있고 일 층에 노인의 방이 있는 구조일 것이다. 

  “그럼 아픈 아들은…. 설마 그 아들이 이건우씨 아들이 되는 건가?” 성민은 뒷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태민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와. 형은 단정 지을 수 있겠지만 난…. 솔직히 믿을 수가 없어. 이건우 아들이 오래전에 실종되었다고 형도 유키에에게 들었지 않아? 그런데 어떻게 실종된 아들과 아빠가 버젓이 그 집에서 살고 있어? 공포 영화도 아니고. 황당하네 황당해.” 

  태민은 귀마개 상자를 코트 주머니 속에 넣으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11


  유키에는 매끈한 도어를 닫고 뒷좌석에 살며시 등을 기댔다. 뒷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일본 택시와 달라 한국에서는 택시가 설 때마다 습관적으로 주뼛주뼛 하게 된다. 백발이 성한 기사는 일본 기사들처럼 하얀 장갑을 끼고 있고 뒷좌석의 등받이도 히로시마 택시에서 보던 하얀 꽃무늬 레이스로 덮여 있어 왠지 친근감이 느껴졌다. 유키에는 미팅 대상 3호가 자신을 배려하는 섬세한 베테랑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친구 본 지 한 참 지났네요. 막걸리 한잔하고 싶어도 연락이 되어야 말이지. 요즘 같은 시대에 그 흔한 전화도 없는 것 같고 올해 내가 칠 학년 육 반이니까 만날 시간도 얼마 없어요.”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은 쉬는 시간이니까 괜찮아요. 개인택시가 그런 게 좋지 뭐.” 그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여기라도 괜찮습니까?” 그가 나무 그늘이 있는 한적한 벤치 옆에 차를 세웠다. 

  “좋은 것 같습니다.”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지 모르겠네.” 그가 시동을 끈 후 장갑을 가지런히 운전대 위에 걸어 놓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반 박자 늦게 뒷문을 열었다. 

  “건우와는 가끔 만나 막걸리나 한잔했지 뭐, 사실 서로 아는 것도 별로 없어요.” 그가 자연스럽게 양팔을 벤치 위에 걸쳤다. 

  “1930년 진해에서 발생했던 화재 사건에 대해서는 얘기해 본 적 없으시죠?”

  “에이. 그런 건 몰라!”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손을 가로 저었다. “일본에서 핵폭탄 떨어졌을 때 아슬아슬하게 살아 돌아왔다는 건 들었지.”

  “알고 지내신 지 오래되셨어요?”

  “당연하지. 이 코빼기 만한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요? 솔직히 기억도 잘 안 나네.” 그가 양손을 깍지 낀 채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 친구 별명이 뭔 지 알아요?”

  “글쎄요.”

  “무쇠손이요.” 그가 공작새처럼 손가락에 힘을 주며 손바닥을 활짝 벌려 보였다. 

  “무쇠손….” 유키에는 손을 모으는 댄스 동작이 떠올랐다. 

  “아가씨가 아는 지 모르겠는데 건우가 다리가 불편해요. 그래서 반대급부로 팔 힘은 진짜 좋아. 이 손아귀 힘 하나는 천하장사지. 수박 같은 것도 맨 손으로 팍 깨 버리고 사과는 손 안에 넣고 단번에 으깨버렸다니까.” 

  그의 과장된 몸짓에도 유키에의 머리 속은 여전히 댄스 동작으로 윙윙거렸다. 

  “이런 말까지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사실 그 놈 불쌍한 게 젊을 때 마누라 도망갔지, 애지중지하던 아들 놈까지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요. 풍비박산! 그런 말 들어봤어요? 딱 그 꼴 났지.”

  알바 의뢰인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유키에는 조심스럽게 그와 시선을 다시 맞췄다.

  “아들이라는 놈도 아무리 좋게 봐 줄려고 해도 정상은 아닌데 그렇게 애지중지 아꼈어. 나 같으면 절대 그러게는 못하지.”

  “정상이 아니라는 말씀은….” 유키에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벙어리지 뭐. 말귀는 있는 것 같은데 말도 못하고 혼자서 멍하니 있고. 물건 같은 거 하나 주면 그것 가지고 온 종일 주물럭거리면서 시간을 보내 더라고. 그래도 이 친구가 아들놈 잃어버릴까 봐 얼마나 걱정을 하던지 집 찾는 연습도 수백 번 시키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맹하게 생긴 아들 놈도 나름 길눈은 있는 지 그건 또 잘하더구만. 그런데도….” 그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친구분 상심이 크셨을 것 같아요.”

  “그럼. 지 새끼라고 쉬지 않고 동네방네 헤매고 다녔지. 얼마나 무리했으면 그 때부터 다리도 심하게 절룩거렸어. 아무리 친구지만 잘 생각해봐. 솔직히 말해 그런 애를 누가 데려가겠어? 돈 많은 집 애는 유괴라도 하고 똘망똘망 한 애는 탐이 나서 데려갈 수도 있다고 봐. 그렇지만 그런 쓸모없는 애를 데려가서 어디다 쓸려고? 그냥 까놓고 말하면 어느 섬 같은 곳에 끌려가서 노예처럼 일만 하다가 개처럼 두들겨 맞아서 죽었다고 봐. 나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생각해.”. 

  유키에는 무릎 위 치마 끝을 꽉 움켜 쥐었다. “실례가 안된 다면 이건우씨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무슨 일을 하고 말고 가 어디 있겠어요? 우리같이 배운 거 없고 미천한 사람들은 그저 돈 되는 건 이것저것 다 했지. 애들 키우는 데 돈이 한 두 푼 들어가요? 애 생기는 순간부터 자기 인생은 없는 삶이지. 젊었을 땐 나하고 같이 법인 택시도 했고 노가다도 했을 거고 조선소 현장도 누비고 다녔지. 참. 주유소에서 주유 건도 잡아봤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래도 다재다능해. 빈 몸뚱이 하나로 안 해 본 일이 없어. 하도 많아서 헷갈리네.” 

  유키에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 친구가 은근히 독한 구석이 있었어. 지 자식 키울 때는 험하게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술을 입에도 대지 않더라고. 진짜 그러기 쉽지 않거든. 그때는 그 친구와 듬성듬성 별로 안 친했어. 너무 깐깐하게 느껴졌지. 그런데 애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뻣뻣한 친구가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해. 그 때부터 우리가 진정한 막걸리 친구가 된거야.” 그는 흰 머리칼을 시원하게 쓸어 넘겼다. “요즘 사람들은 나이 들어도 공부를 멈추지 않네. 일본 아가씨가 논문 쓰러 여기까지 와서 고생이 많아.”

  나이…. 유키에는 별안간 가슴이 뜨끔했다. 

  “얘기하다 보니까 예전에 지나가며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화재 사건 말이요.”

  유키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 친구 아버님 덕분에 영화관에서 목숨을 건진 일본 여자가 한 명 있었다고 했어. 그걸 계기로 아마 히로시마로 가게 되었다고 그랬던 것 같네. 그 여자 가족 입장에서 보면 건우 아버지가 생명의 은인이니까 어떻게 든 은혜를 갚고 싶었겠지.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간에 얼마나 고맙겠어. 안 그래?”

  “그렇게 된 거군요….” 

  “그랬던 것 같아. 그렇게 건우 아버님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결혼도 하면서 건우 그 친구가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거지. 원자폭탄만 아니었으면 아마 한국에도 안 돌아왔을 거야. 건우 아버님이 거기서 돈 많이 벌었다고 들었어. 여기 주변에도 보면 일본으로 건너갔다 돌아온 사람이 꽤 있어요. 대부분 거의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거든. 그런 거 보면 건우 아버님이 수완이 대단한 거지.”

  “그런 건 친구 분께서 기억하고 있었나 보네요?”

  “일본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족보라는 걸 소중하게 생각해요. 그리고 명절에 일가친척들이 모이면 집집마다 그런 옛날 이야기들을 너나 할 것 없이 주고받지. 건우도 아버님에게 직접 들었을 수도 있고 오며 가며 다른 친척들에게 들었을 수도 있지.”

  유키에는 위 세대에 대한 예의나 효심이 강조되는 한국 드라마가 떠올랐다. 그녀도 아주 가끔은 증조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삶이 궁금할 때도 있었다. “혹시 언제부터 친구 분과 연락이 안되세요?” 

  “글쎄….” 그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재작년 말부터 인 것 같은데. 알뜰폰 하나 구입하라 노래를 불러도 도통 말을 들어야 말이지. 어쩌면 나하고 연락하고 싶지 않아서 폰이 없다고 했을 수도 있어.”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집에는 찾아 가 보셨나요?” 

  “가끔씩 차로 지나가면서 한 번 씩 보기만 했어.”

  “혹시 이건우씨가 자주 다녔던 곳이 있을까요?”

  “그 자식은 통 택배, 배달 같은 거 몰라서 시장에 직접 장도 보러 다녔던 걸로 알고 있어요. 건강을 챙기는 건지 돈을 아끼는 건지 매번 집에서 밥을 해먹는 것 같더라고.” 

  “자주 다닌다는 시장은 어디에 있나요?”

  “제황산 공원 알죠? 거기 경사 길로 내려가면 큰 시장이 나와요. 중앙 시장이라고 주로 거길 다녔지.”

  “거기라면 거리가 꽤 있을텐데…. 몸도 불편하신 데 먼 데까지 다니셨네요.” 

  “내 말이 그 말이요. 요즘 간편하게 잘 나오잖아요. 반찬 가게도 많고 배달도 잘해 주는데 사서 고생을 해. 나 같은 사람은 귀찮아서 라면 끓여 먹고 말지. 홀 아비가 다 늙어서 무슨 장을 매번 보러 다니겠어요?”

  유키에는 알바 매뉴얼에서 지시한 내용 중 빠진 게 없는 지 빨간 딸기 노트를 뒤적거리며 확인했다.

  “질문을 이것저것 하는 거 보니 아가씨가 꽤 급한 가 보네. 내가 한 번 알아봐 줄 테니까 여기 전화번호 찍어봐요. 생각난 김에 그 친구 연락 되면 나도 막걸리나 한잔해야 지.” 그가 안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닙니다. 이거 일본 폰이라서. 제가 다시 연락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유키에는 손을 휘저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무안한 듯 기지개를 한 번 킨 후 택시로 돌아갔다. 

  유키에는 그와 나눈 대화를 일본어로 번역해 앱에 입력하고 벤치에서 일어섰다.


12


  “한 해 한 해 지나갈수록 수업하는 것도 힘드네. 애들만 보고 사니까 나이 드는 걸 깜빡해서 한 번 씩 거울 보면 깜짝 놀란다니까…. 그나저나 연구소에서 탈출한 녀석 아직도 못 찾았지?” 코 등 중앙에 점이 난 여자가 아이스크림 학원 사무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설렁설렁 하셔. 수업하는 게 우리 본업은 아니잖아? 일본에서 회장님이 사람을 보내서 찾고 있다는 소문만 돌고 있어. 믿거나 말거나지만.” 선글라스를 머리에 걸친 남자가 종이컵을 구겨 탁자 위에 던졌다. 

  “빅터는 열 안 받아? 우리는 뭐 허수아비야? 버젓이 우리가 두 눈 부릅뜨고 이렇게 살아 있는데 왜 멀리 서 사람까지 보내야 돼? 다 돈 받고 하는 일이지만 자존심 상해. 이젠 늙었다고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회장님도 모를 리가 없어. 우리 원장 가족이 몰살당한 상황에서 우리까지 함부로 움직여 봐? 조용한 것 같아도 경찰이 아직 까지 지켜보고 있을 테니 안 좋다고 생각하시겠지. 우리 학원 사람들은 사건이 완전히 수면 아래로 들어갈 때까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잠자코 있는 게 좋을거야. 우리 회장님도 다 계획이 있다니까.” 

  “이야…. 빅터는 충성심 하나는 끝내줘. 회장님 심기 보필을 참 잘 한다니까. 그건 인정! 그런데 그 자식은…. 연구소에서 어떻게 탈출한 거야?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중증 자폐 아냐? 도무지 이해가 안되네.” 그녀가 성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미스터리야. 시냅스 연구소에 있는 내 친구도 잘 모르는 것 같아.”

  “설마? 네 친구가 그 연구소 소장 아니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말이 돼? 아무래도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닐 거야. 친구 말로는 그 탈출한 놈이 연구소 최고의 성공 사례라고 했어. 한마디로 특별 대접 받고 있었던 놈이지.” 

  “그럼 더더욱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난 지금까지도 그 녀석 잡아올 때 기억나. 기차와 함께 사라지다 영화 한 편 찍었잖아? 벌써 이십 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솔직히 그 녀석 멍청하게 생긴 게 머리 수만 채우다 일찍 폐기 처분 된 줄 알았어. 그런데 성공 사례 어쩌고 하길래 영 어이가 없었다니까. 뭐…. 그럴 가능성은 있지. 시간을 끌면서 회장님의 투자를 계속 끌어내기 위한 속임수 라던가.” 

  “말 함부로 하지 마! 회장님이 어떤 분이셔? 사람 보는 눈이 확실하다니까. 마틴은 약속을 목숨과 같이 지켜. 우린 그 친구 걱정할 필요도 없고 우리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거야. 회장님의 지시대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히 108명만 연구소에 공급하면 되는거라고. 마틴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108명 안에서 실험을 끝내야 한다는 걸 잘 아니까 되지도 않는 걸 성공 사례로 꾸며 내서 시간 끌기 하는 짓 따윈 하지 않을 거야. 한 번 잘 생각해 봐! 그 녀석이 성공 사례가 되니까 탈출도 했겠지, 그 오랜 시간 생체 실험 당하고 폐기 처분 될 정도로 자폐증이 심해져 버렸다면 어떻게 거기에서 탈출이 가능했다고 생각해? 그 연구소가 어떤 곳인데. 그래 안 그래?”

  “우리가 연구소에 보낸 애들이 거진 108명 다 되어 가는데 그 놈 못 찾으면 어떻게 되는거지?”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라고 방금 말했잖아? 우린 회장님과의 약속만 지키면 돼.”

  “질문하나 해도 돼?”

  “또 그 질문하려고?”

  “그래. 왜 하필 108명일까? 이상하지 않아?”

  “몇 번을 물어봐도 난 정말 몰라. 그리고 그런 건 애시당초 궁금하지도 않다고!”  

  “너도 참 단순하군…. 그 탈출한 녀석 코드 네임이 뭐야?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당연하지. BP001. Best Practice 001.”

  “연구소에서 그 녀석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걸 보면…. 네 말이 틀리진 않는 것 같네.”

  “그렇다니까! 그 놈만 성공하면 자폐 시장에서 주도권을 휘어잡을 수 있다고 친구가 노래를 불렀어. 사실 나도 기대가 컸고.” 

  “빅터! 너는 가만히 보면 말이야. 일본에 계신 우리 회장님이 총애하는 핵심 브레인도 아니면서 주인 의식이 정말 강한 것 같아. 하지만 그만 착각에서 빠져나와! 엄밀히 말하면 우리와 그 연구소는 완전 별개라고. 어떤 고급 레스토랑에서 미슐랭 별점 다섯 개 받았다고 해서 거기 재료 공급하는 야채장수, 생선 장수한테 뭐 대접하는 경우 봤어? 그 연구소는 자폐 치료제 개발에 성공하면 미슐랭 최고점을 받게 되는 거고 우리 같은 식자재 공급 도매상들에게 콩고물은 안 떨어진다고. 알겠어?”

  “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셔. 너 비유대로 말해보면 우리가 제공하는 식재료가 흔해 빠진 거니? 구하기가 정말 힘든 그야말로 세상에서 하나 뿐인 식재료라고 이 사람아! 우리가 병신 같은 아이들 안 잡아주면, 연구소가 생체 실험은 어떻게 할거야? 당연히 못하지. 그게 핵심이야. 이제야 우리 가치를 알아 보겠어?” 그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말이 청산유수네. 언제 그렇게 똑똑해졌어? 그런데 찜찜한게…. BP001이 연구소에서 탈출하고 얼마 후에 원장 가족들이 몰살당했지 않아? 뭔가 우연 같진 않지?”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까 우리 회장님께서 유능한 사람을 뽑아서 여기로 보내지 않았겠어?”  

  “그렇다고 해도 연구소 실험실에 이십 년 넘게 단절되어 살던 머저리가 갑자기 정상인으로 회복되어 바깥세상으로 나간다. 이건 도무지 상상이 안가. 그리고 말야. 어떻게 아직 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넌 생각이 정말 많구나. 그럼 이것도 한번 생각해 봐. 만약 우리가 여길 배반한다. 그럼 어떻게 될 것 같아?”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여자가 눈알이 튀어 나올 것처럼 부라렸다. 

  “답은 뻔하지. BP001도 마찬가지 운명을 맞게 될거야.” 그가 구겨진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두 번의 노크 소리 후 빨간 테 안경 여자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A반 애들이 학교 단체 행사 때문에 학원에 못 온대요. 오늘은 버스운행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베티! 땡큐!” 그가 엄지를 들어 보였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애들 하고 상담 좀 해봤어?” 코 등에 점이 난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얘기해봤는데 이번에는 잡아올 만한 애가 없을 것 같아요. 요즘은 부모들이 애들 안 잃어버리려 신경을 워낙 많이 써서 연구소에 애들 공급하기 점점 힘들어져요.” 빨간 테 안경 여자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베티! 우리 일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진짜 막바지라고. 사명감을 가지고 좀 더 기운을 내야 해. 넌 부자가 될 거고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도 기나긴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거라니까. 정말 부가가치가 큰 일이지. 요즘 자폐아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알고 있지? 신생아는 줄어들고 있는데 희한하게 자폐아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어. 이건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비즈니스야. 응? 그 힘든 때도 잘 버텨왔는데 뭐가 걱정이야?” 남자가 선글라스를 내리며 치켜 뜬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빨간 테 안경의 여자가 고개를 숙이며 슬며시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빅터는 그녀의 등을 두어 번 토닥거린 후 폰을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빅터는 외롭게 우뚝 솟은 등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주차하고 낚시꾼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천천히 걸어갔다. 낚시꾼들은 선글라스에 바람에 휘날리는 버버리 코트 자락의 남자를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그림처럼 힐끔거렸다. 한 참을 걸어 빅터는 무리에서 홀로 동떨어져 있는 남자 앞에서 멈춰섰다. 벙거지 모자가 낚싯대 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 

“팔자 좋다!” 빅터가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린 후 낚시 대 옆에 놓인 파란 플라스틱 박스를 들춰보며 말했다. 

  “바깥 바람 쐴 때도 있어야지.” 벙거지 모자는 책에서 눈을 때지 않고 말했다. 

  “마틴! 쉴 때도 이런 책 읽냐?” 빅터가 책을 빼았아 뇌 모양 그림의 영어 책 표지를 훑어봤다. “하나만 물어보자. 연구소 보안이 철통 같다고 들었는데 그 자식은 거기서 어떻게 탈출한 거야?”

  “BP001 말이야?”

  “그래, 저번에 네가 흥분해서 성공 사례라고 떠들어댔던 그 놈 말이야.”

  마틴은 책을 플라스틱 통 위에 올려놓고 팔짱을 꼈다. “나도 정말 알고 싶다. 어떻게 탈출했는지….” 

  “이해가 안 되네. 그 자식은 실험실에서 머저리로 살다가 갑자기 정상으로 깨어난 거야? 진짜 자폐 치료제를 개발한 거야?” 

  “모든 게 우연이었지.”.

  “우연이라고?” 

  “우연이라지만 그것도 자연의 섭리지.”

  “또 빙빙 돌리네. 이 애매한 친구! 난 보기보다 머리가 안 좋으니까 초등학생에게 설명하는 것처럼 단순 명쾌하게 얘기해. 응?” 

  “너 애완동물 키워봤어?” 마틴이 윙크 하듯 한 쪽 눈을 찡그린 채 그를 올려다봤다. 

  “그야 안 키워봐도 상식이지. 키우는데 돈 많이 들어, 손 많이 가. 난 그런 거 딱 질색이거든.”

  “사람은 어떨 것 같아?”

  “너나 나나 총각이라도 그런 건 기본 아니야. 애 하나 키우는 것도 보통 일 아니지.”

  “우리 연구소에 그런 애들이 얼마나 많이 거쳐 갔는지는 잘 알지?”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우리가 너희에게 보낼 할당량을 채우고 있으니까 잘 알지.”

  “그러니까 쉽지 않아. 그런 애들 데려다 애지중지 키우면서 기적같이 BP001이 툭 튀어나온 거야. 우연처럼.” 마틴이 벙거지 모자를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력이겠지. 너무 겸손한 거 아니야?”

  “내 좋은 머리와 실력도 우연이고 하늘의 섭리야.”

  “자꾸 그딴 소리 할 거야? 하여간 실험실에 조금만 더 있다 가는 완전히 맛이 갈 것 같은 상태구만.”

  “넌 자폐를 치료할 수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내가 머리 나쁘다 실토했다고 바로 무시를 시현하냐? 너 나를 너무 드문드문 보면 안 돼. 자폐 치료제를 만들면 전세계 자폐 시장을 석권해서 순식간에 돈방석에 앉는다 그 말이지 않아? 당연한 걸 가지고.”

  “아니!” 남자가 벙거지 모자를 쓰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전부 자폐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의미야.”

  “또! 또! 뭔 개 뼈다귀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너 지금 나 놀리냐?” 선글라스 남자가 벙거지 모자를 째려봤다.  

  남자가 다시 벙거지 모자를 벗어 들고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흔들리는 낚싯대를 지켜봤다. 잠시 고요가 찾아왔는가 싶더니 낚싯대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벙거지 모자는 벙거지 모자를 내려놓고 재빨리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거지.” 그가 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3


  “일본에서 건너온 애들 두 명 어떻게 됐어? 찾았어?” 네모머리 남자가 검정 가죽 소파에 몸을 날리며 말했다. 

  “아이스크림 영어학원 근방을 철저히 살펴봤는데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세모머리 남자가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말했다. 

  “이 자식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거야?”

  “그게…. 근데 생뚱맞게 어리버리 탐정과 동생이 그 학원에 나타났었습니다.”

  “저번에 우리 카페에 왔던 그 놈 말이지? 뭐하는 자식 들인데 지네 들이 왜 거기서 나와?” 네모머리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냥 무시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른 곳은 아직 연락 없어? 갈 만한 데야 뻔한 거 아니야?”네모머리는 탁자 위로 발을 뻗었다. 

  “일반인 여자의 정체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남자는? 여자와 동선이 겹친다는 그 자식도 아직 못 찾았다는 얘기야?”

  “그게…. 저희가 출입국 관리 쪽에 심어 놓은 애들에게 받은 정보하고 잘 매치가 안 되서 여러모로 애로가 있습니다.” 

  “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그냥 두 눈으로 딱 보면 알지 않아? 이 조용한 동네에서, 어? 일본에서 물 건너온 애들은 티가 팍팍 나? 안 나? 그렇게 센스가 없어? 딱 삼일 줄 테니 애들 다 풀어서 어떻게 든 찾아내!” 네모머리가 검지와 중지를 세모머리의 눈을 향해 찌르며 말했다. 

  “요즘은 글로벌 시대라 거의 분간하기….” 세모머리는 네모머리의 튀어나올 듯한 눈동자를 보고 말을 얼버무렸다.

  “시애틀 카페 다녀올 테니까 당장 구역 나눠서 움직여!”


  네모머리가 춘하추동 한의원을 통해 시애틀 카페로 들어갔을 때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산했다. 그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폰을 꺼내 중국 대련 시내 고급 식당에서 활짝 웃고 있는 어머니와 아들 사진을 보고 있었다. 

  “어이, 왕 선생! 나도 커피 한잔!” 삼대 칠 가르마의 남자가 들어오며 말했다. 

  네모머리가 카운터에 검지를 들어 올리자 반사적으로 커피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진척이 없지?” 가르마가 왼쪽 다리를 꼬았다. 

네모머리가 임금 면전의 신하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자자 긴장 풀어! 사실 오늘 보자고 한 건 당신 질책하려고 그런 건 아니니까. 나도 알아봤는데 감이 잘 안 와.” 남자가 가르마를 살짝 매만졌다. “왕 선생은 천하의 루시퍼가 정말 일반인을 보냈다고 생각해?”

  “네…. 아무래도 비밀리에 처리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하나 하지. 자넨 일본 루시퍼가 이 도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그거 야…. 저희 조직도 있으니까 당연히 있지 않을까요?”네모남자는 가르마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나도 그런 줄만 알고 있었네. 그런데 말이야 최근에 정보원으로부터 흥미로운 얘기 하나를 들었네.” 

  “어떤 이야기입니까?” 네모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가르마의 입을 주시했다. 

  “루시퍼는 이 도시에 없어! 가까운 곳에 있긴 하지만. 그건 그렇고 왕 선생은 시냅스 연구소라고 들어봤나?” 

  “무슨 연구소요?”

  “좀! 왕 선생은 몸만 굴리지 말고 머리도 빨리 굴려. 사람 말을 빨리 캐치하는 게 자네가 앞으로 성공하는 길이야.” 가르마는 검지로 머리를 두 번 두드렸다. “해안도로를 따라 삼십 분 정도 쭉 가다 보면 왼편 산 중턱에 위치한 오층쯤 되는 갈색 건물들이 보여. 몇 개가 네모처럼 붙어있는 형태인데 규모가 좀 돼. 거기가 시냅스 연구소란 곳이지. 명목 상으로는 뇌 발달 촉진 연구 기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누군 가가 이 곳에서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저도 연수원처럼 생긴 그 건물 본 적 있습니다. 거기가 루시퍼 소굴인가요?”

  “아니! 루시퍼가 아니라니까! 일본에서 온 옐로우도 그 연구소 일과 연관이 있을 거야.” 가르마는 말을 멈추고 두 눈을 잠시 감은 후 떴다. “그래서 말인데 왕 선생은 앞으로 그 연구소 쪽으로 감시 채널을 돌려!” 

  “이사님. 저…. 한 가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네모머리가 뜸을 들이며 말했다. 

  가르마가 양 옆으로 목을 한 번 씩 꺾었다.

  “루시퍼라면 지옥 끝이라도 때려 잡으러 갈 거지만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굳이 왜…. 영어학원도 그렇고 시냅스 연구소도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애틀 카페에 자주 나타났었던 그 여자 알지?” 

  “죽은 영어학원 원장 말씀입니까?” 

  “그래. 그 여자가 우리 카페에 자주 나타나기 전까지 왕 선생은 아이스크림 학원에 관심을 둔 적이 있었나?”

  네모남자는 고장 난 로봇처럼 빠르게 좌우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 영어학원 셔틀버스 기사가 자주 만나는 인물이 있더군. 촉이 오지 않나?”

  “아….”

  “아니나 다를까 시냅스 연구소의 소장이었어. 왠지 구린내가 나지? 애들 영어학원 버스가 주기적으로 그 연구소에 들어갈 일이 있을까 없을까?” 가르마가 검은 상의를 벗었다. 

  “얼핏 보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아무래도 어린이 영어학원과 뇌 연구소라면 연관성이 없을 것 같습니다.” 네모머리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답은 나온 것 아니야? 세상에는 루시퍼만 있는 것이 아니야.” 

  “그렇다면 다른 조직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하기야 그 여자 원장이 루시퍼였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겠지요….” 

  “그 여자 원장이 시애틀 카페에 자주 나타났을 때 왕 선생은 왜 의심을 했지?”

  “그야 나이도 제법 많은 여자가 거의 매일 똑 같은 시간에 우리 카페 창가에 앉아서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더라고요. 처음엔 이상하게 생각 안 했는데 보니까 우리 애들 하고 얘기를 하면 그 여자의 펜이 움직이고 얘기를 멈추면 펜이 움직이지 않더라고요. 그 때, 감청이다. 싶었죠.”

  “그래서 역 정보를 흘렸다?”

  “저희가 장기를 좀 발휘했죠. 손님으로 위장한 우리 애들이 그 여자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 저 여자 돈이 많아 보인다, 미행해서 몇 시에 집을 털자 같은 정보를 역으로 흘린 후에 그 여자 집 현관문을 땄던 겁니다.”

  “그래서 그 여자의 정체를 밝혔다?”

  “처음에 그 여자 집에 들어갔을 때 인기척이 없어 실패인가 생각했지만 직원 하나가 그녀의 감청 사실을 확실히 잡아냈습니다.” 

  “음….”

  “기억하실 지 모르겠지만 그 직원은 일층 원장 부부 침실, 이 층 딸과 손녀 방의 옷장 서랍에 여자 속옷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건 명백히 그녀가 침입자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그럼 하나만 묻지. 그 때 여자 원장은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카페에서 우리 말을 엿들었으니 사전에 몸을 피한 거 아닙니까? 멀리 꽁무니를 빼지 않았을까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카페 구석에서 수상한 사람들이 오늘 밤 나를 미행해서 내 집을 털려고 수군거리고 있다고 생각해봐. 겁에 질려서 경찰에 얼른 신고부터 하고 가족들과 모두 피신했겠지?”

  “그렇습니다!”

  “그 날 밤, 우리 애들이 경찰 코빼기라도 봤어? 못 봤어?” 

  “못봤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 집에 들어갔다 나왔죠.”

  “왕선생은 이상한 점을 못 느꼈나?”

  “사실 저희도 경찰이 잠복하고 있을지 모르니 대비를 하긴 했습니다.”

  “그 여자의 목적은 경찰이 침입자를 잡아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침입자가 누구인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는 거였어.”

  “집 안에 CCTV도 있었는데 굳이….”

  “CCTV는 우리의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는 걸 몰라서 묻는 거야 지금?” 

  “경솔했습니다. CCTV 탐지기로 외부 CCTV 두 대, 내부 CCTV 세 개를 찾아내서 전부 무력화시켰죠.”

  “그 여자도 그래서 현장을 지켰을 거란 얘기야. 지근거리에서.” 

  “우와….” 네모머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지켜보다 사단이 나버린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이사님 말씀은 그 여자가 어딘 가에서 자기 집의 침입자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누군 가에게 살해당했단 말씀이신 가요?” 

  “빙고! 만약 그녀가 다른 곳으로 미리 몸을 피했다면 어떻게 바로 그 날, 가족과 함께 집에서 죽은 채 발견돼? 게다가 우리 선수들이 가지치기를 충실히 해준 덕분에 경찰이 원장 집 CCTV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지.”

  “세상에! 우리 등에 올라탄 그 범인 놈, 진짜 대단한 거 아닙니까? 우리 계획을 사전에 파악하고 그 날에 범행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바로 그거 야. 범인이 기가 막힐 정도로 비범한 놈이야.” 가르마는 상의를 다시 입었다. 

  “아이스크림 학원 쪽에서는 우리가 원장을 죽였다고 의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원장이 우리 카페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네모 머리는 가르마를 힐끔 쳐다봤다.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어.” 

  “그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일본에서 온 놈들을 보면 결코 우리를 노리는 게 아니야. 다른 타깃이 있는 거야.” 

  “다른 타겟?”

  “아무튼 지금부턴 시냅스 연구소를 잘 살펴봐!” 가르마가 일어서며 말했다.  

  네모머리 남자는 뒤돌아서 걸어가는 가르마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구십도 가까이 허리를 숙였다.

  “잠깐만.” 가르마 남자가 멈춰 섰다.

  “잊으신 거라도 있습니까?”

  “예전에 내가 홍콩에 있을 때가 떠올라서 말인데….”  

  “이사님 홍콩에서 활약상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의욕이 넘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가 우리 홍콩 지부에 잠입해 있던 다른 나라 이중 스파이 하나를 죽여 버렸어.” 

  “그런 사건이 있었습니까?”

  “당연히 자네는 모를 거야. 우리 본부에서 철저히 비밀에 붙였거든.” 가르마 남자가 턱에 난 긴 칼 자국을 매만졌다.

  “아….”

  “문제는 그 친구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다는 데 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 지요?” 네모머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무도 피를 묻히기 싫었던 일을 자신이 대신해냈다고 여긴 거야. 본부에서 자신의 충심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그런 일도 있었군요.” 

  “결론은 어떻게 된 것 같나?”

  네모머리는 떨리는 오른편 눈가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내가 죽여버렸네. 물고기 밥으로 저 세상에 갔지.” 가르마 남자는 네모머리의 어깨를 살짝 매만진 후 자리를 떴다. 


14


  성민은 아이스크림 모양의 학원 간판이 잘 보이는 창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어릴 때 형 때문에 겪은 트라우마로 패스트푸드는 아직도 입맛에 썩 맞지 않는다. 그래도 어떡하리. 저 놈의 학원을 지켜보기에 이 만한 명당이 없는데. IVE의 [I AM]에 흥이 나서 눈을 감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감자튀김 하나를 토마토 소스에 찍어 입에 넣었다. 이런 젠장…. 느닷없이 빨간 소스가 잔상에 남아 얼굴이 빨간 피로 범벅이 된 태민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형은 어릴 때 자기 음식과 남의 음식을 구분할 줄 몰랐다. 그날 주말 점심, 롯데리아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차분하게 감자튀김을 먹던 태민형이 갑자기 옆자리 손님의 감자튀김 하나를 재빨리 집어 입에 넣었다. 놀란 엄마와 아빠가 죄송하다는 말을 고장 난 녹음기처럼 반복했다. 그렇게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것 같던 일이 그만 큰 사건으로 번지고 말았다. 옆자리의 껄렁껄렁한 고등학생이 복싱 선수처럼 태민 형의 얼굴에 강 펀치를 날렸고 형은 의자에서 그대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땅이 꺼져라 굽실거렸던 아빠는 사라지고 왕년에 태권도 좀 해 본 아빠가 나타났다. 주저함이라 고는 일도 없는 전광석화 같은 옆 차기를 했는데 배를 맞은 고등학생이 밀려 넘어지며 옆자리의 다른 테이블들과 앉아서 식사를 하는 아이들이 도미노처럼 밀려 쓰러졌다. 같은 패거리로 보이는 비쩍 마른 학생 두 명이 쌍 욕을 하며 아버지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다가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엄마가 중재자로 나섰다.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며 만원 권 여러 장을 손에 쥐어 주었다. 그 때, 바닥에 쓰러졌던 태민 형이 얼굴에 피범벅이 되어 웃기 시작했다. 잡힐 것 같던 불길이 다시 번졌다. 학생 한 명이 돈을 구겨 던지며 태민 형 쪽으로 다가갔다. 아버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본적 없던 광기로 그 학생을 밀쳐 넘어뜨리더니 바닥에 눕혀 놓고 팔꿈치로 학생의 이마와 머리에 종을 치기 시작했다. 그 날 롯데리아는 학생의 머리에서 솟구치는 빨간 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희한하게 그 사건 이후로 태민 형은 패스트푸드를 더 즐겨 먹게 되었고 나는 멀리하게 되었다. 

  어린 아이들이 정신없이 들락날락 거리다 냅킨 한 장을 발 밑에 흘리며 지나갔다. 성민이 허리를 숙여 냅킨을 잡는 순간 옆쪽 귀퉁이 자리의 검정색 남자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여기 이제 별로 야.” 머리에 빨간색 브리지를 한 여학생이 말했다. 키는 커 보이지만 통통한 볼 살에 앳된 중학생 티가 났다. 

  “그래도 여기가 제일 나아. 좀만 있어봐. 학원 마치면 괜찮은 애들 몰려올 거야.” 손 거울을 들고 양 볼을 실룩거리는 체크무늬 교복의 치마 아이가 말했다.  

  “요즘 너희 학교는 재미난 애들 없어?” 빨간 브리지가 두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있지. 그래도 요즘은 조심해야 해. 대놓고 괴롭히다 간 강제로 전학 갈 수 있거든.”

  “예전에는 학교 갈 맛 났는데 요즘은 통 재미가 없어. 찐따들도 있어야 우리도 스트레스 좀 풀고 살 거 아니야.” 빨간 브리지가 머리 몇 가닥을 꼬았다.

  “우리 학원은 옛날부터 찐따들 엄청 챙겼어. 너 기억해? 막 서로 친한 척하며 산에 손잡고 올라가고 운동회 같은 거도 했어. 지금 생각하면 토 나온다. 진짜 철이 없었어.”

  “그 땐 왜 그랬는지 몰라. 찐따들 이랑 어울리고 하니까 착하다고 칭찬도 받고 사실 그게 조금 우쭐하긴 했어. 정말이지 우리 학원에 진해 찐따들 다 모였을 거야 아마. 그 때는 그냥 그런 가 보다 하면서 얼떨결에 휩쓸려 간 거 같아.” 빨간 브리지가 너겟을 머스터드 소스에 찍었다. 

  “그 많던 찐따들 다 어디 갔어? 지금 만나면 더 재미있게 놀아 줄 텐데.” 체크무늬 치마가 다리를 떨며 웃었다. 

  “특수학교 같은 데 갔을 거야.” 

  “그래? 어쩐지 잘 안 보인다 했어.” 

  “야, 야, 저기 저 애 어때?” 빨간 브리지가 눈짓을 했다.

  “오, 딱 내 스타일인데.” 체크무늬 치마가 주먹 쥔 두 손을 양 볼에 갖다 대며 앙증맞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저런 아이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버텨 왔을 까. 성민은 학창 시절 내내 찐따 취급을 받았던 형이 떠올랐다. 

  창 밖을 보니 학원에서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차례대로 노란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먹다 남은 햄버거를 급히 쟁반에 내동댕이치고 일어섰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남 뒤를 밟을 일이 생길 줄이야…. 형의 보호자 역할을 시키려고 고등학생 때부터 운전대를 잡게 해 주신 선견지명이 탁월한 우리 아버지!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노란 버스가 골목골목을 누비며 아이를 내려주고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학생이 많은 학원이지만 승하차 안전을 위한 보조 교사는 따로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빨간 벽돌 집 옆에 한동안 멈춰 서 있자 성민은 대형 SUV 뒷면에 차를 바짝 붙였다. 차의 이동이 많지 않은 주택가라 조금만 방심해도 눈에 띄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십분 정도 지나자 멈춰 있던 버스가 다시 출발하더니 대로 가로 방향을 틀었다. 신호등이 황색으로 바뀌었지만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버스는 대로를 계속 달리다 구불구불 산길이 난 곳으로 좌회전했다. 한적한 산 길이라 서둘러 쫓아갔다 간 발각되기 십상일 것 같다. 템포를 조금 늦췄다. 버스는 좁은 산길을 따라 빠르게 올라갔지만 시야를 확보하며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시선에서 버스가 사라졌다. 할 수 없이 산 중턱에 위치한 갈색 건물 앞에서 차를 세웠다. 폰을 열어 위치를 확인하니 [시냅스 연구소]라고 나온다. 갈색 건물의 이름이다. 화면을 확대하여 주변 지형지물을 살폈다. 예상대로 산 속이라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건물 벽면과 정문 위에 CCTV가 주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머뭇거리다 간 미행이 들통날 가능성이 크다. 슬며시 길을 잘 못 든 것처럼 어설프게 차를 돌려 일단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대로 진입로 근처에서 버스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삼십분 정도 지나자 기다리던 노란 버스 대신 하얀색 포터가 나타났다. 성민은 포터가 대로를 진입한 후, 천천히 열 번을 세었다. 그리고 직감이 이끄는 대로 액셀을 밟았다. 이십 분 정도 지나 포터가 바닷가 방향으로 빠지더니 고기잡이 배들이 정박한 곳 앞에 섰다. 드림 호라고 적힌 배 위에서 두 명의 젊은 남자가 나와 포터 트렁크에서 하얀색 스티로폼 박스 세 개를 내려 배에 싣기 시작했다. 꽤 무거운지 근육질의 젊은 남자들 자세가 엉거주춤하게 보였다. 선글라스를 낀 포터 운전자가 남자들과 악수를 하고는 다시 차에 올랐다. 성민은 포터가 자신의 차를 지나쳐 갈 때 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선글라스 속의 눈과 마주친 기분이 들어 뜨금했다. 

  더 이상 포터를 뒤쫓지 않고 아이스크림 학원 근처로 되돌아왔다. 음악을 틀어놓고 눈을 감으니 예전 스트리트 댄스 팀에서 마음에 뒀던 여자의 찰랑거리던 살짝 감긴 단발머리가 아른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불타오르네, FIRE~~ BTS가 불이 났다고 외치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노란 버스가 학원 앞 도로변에 슬며시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성민은 버스 시간과 동선을 폰에 저장하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이전 01화 자폐 탐정과 K-POP 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