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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08번뇌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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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2. 2024

자폐 탐정과 K-POP 댄서

(1~7)

굳게 닫혀버린 문


  1930년 3월 10일, 이중신은 일본 헌병에게 쫓기는 불령선인처럼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허겁지겁 씻은 후 방으로 돌아와 머리맡에 고이 접어 둔 셔츠와 바지에 조심스레 몸을 넣었다. 거울 앞에서 팔꿈치와 무릎 부분을 번갈아 털고 구겨진 가슴팍 부분을 손바닥으로 힘을 주어 매만졌다. 오늘은 그야말로 운수 대통한 날! 일본인들만 초대되는 영화 상영 회에 들어갈 수 있다니 꿈만 같다. 영화 내용이야 보나 마나 뻔하겠지만 좋아하는 여자와 함께 라면 아무렴 어떤 지겨운 영화라도 상관없다. 극장에 초대 받은 소학생은 총 일백 십 명. 그 중 조선인은 단 두 명. 중신과 선영 뿐이다. 초대권을 셔츠 안 깊숙이 찔러 넣고 중신은 자전거에 올라탔다. 등 뒤에서 엄마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뒤돌아볼 겨를이 없다. 페달을 밟기도 전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더니 초승달 같이 웃음짓는 선영의 환한 눈매가 아른거렸다. 새파란 하늘에 사이좋게 붙어있는 양털 같은 두 개의 구름 덩어리를 올려다본 후 중신은 혼자서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중신은 이마에 알알이 맺힌 땀을 손 등으로 털어내며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장승 같은 바위, [입입금지] 표석앞에서 멈춰섰다. 일본인들이 계획하고 이름까지 붙인 도시. 바다를 진압한다는 진해는 이런 표석을 경계로 엄격하게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주거와 통행을 구분하고 관리했다. 이 표석 건너 편은 일본인 전용 통제 구역으로 특별한 허가 없이 조선인들은 들어갈 수 없다. 초소의 헌병 하나가 중신이 내민 극장 초대권을 요리조리 살펴본 후,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어딘 가로 전화를 돌렸다. 잠시 후 수화기를 든 헌병의 표정이 마치 눈 앞에 상관을 보고 감전된 사람처럼 굳어지더니 몸을 부동자세로 세우며 크게 외쳤다. “하이! 소데 아리마스!” 곧이어 차단기가 헌병의 야마구치현 사투리처럼 절도 있게 올라갔다. 가뭄에 콩 나듯 한 번 씩 들어오는 일본인 동네라 그런지 올 때마다 거리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방사선 모양으로 쭉쭉 뻗어 있는 도로를 따라 구획 별로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집과 건물들. 지나치는 사람들도 모두 기모노를 입고 게다를 신었다. 중신은 있는 힘껏 페달을 굴렸다. 잠시 후, 목적지인 진해 해군 요항사령부 정문이 한 눈에 들어왔다. 중신은 멀찌감치 떨어진 모퉁이를 돌아 작은 정자 옆 팽나무에 자전거를 기대 세웠다. 요항사령부라고 별것 아니다. 일차 초소를 통과했던 그대로만 하면 되겠지. 중신은 심호흡을 가다듬은 후 모퉁이에서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장대 같이 키가 큰 헌병이 모퉁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중신은 재빨리 모퉁이 뒤로 얼굴을 숨겼다. 갑자기 요항사령부 헌병은 피도 눈물도 없다는 친구들의 악담이 귓가에 맴돌아 발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중신은 셔츠 안에서 초대권을 빼어 꼭 쥐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냥 쥐구멍으로 갈까…. 초대권과 상관없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도깨비 같은 헌병에게 억울하게 트집 잡혀 두들겨 맞는 것보다는 친구가 위해 준다고 알려 준 비밀 쥐구멍이 훨씬 안전할 지 모른다. 일본인 앞에서 떳떳하고 용기 있게 행동하라는 엄마의 당부가 귓구멍에서 금방 빠져나갔다. 중신은 결국 손에 쥔 초대장을 셔츠 안에 구겨 넣고 쥐구멍 속으로 몸을 집어 넣었다. 그런데 구멍이 너무 좁아 애지중지 아끼던 옷에 흙이 많이 묻고 말았다. 중신은 무릎을 털며 극장이 있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하지만 사령부 정문만 통과하면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극장 출입문 바로 앞에서 콧수염을 만지던 남자가 찢어진 눈알을 부라리며 중신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기 때문이다. 중신은 쭈뼛거리며 다가가 구겨진 초대장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초대장을 눈 가까이 붙였다 때기를 서너 번 반복한 후, 꿰맨 상처가 있는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중신은 죄를 진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가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역시 오늘은 하늘이 돕는다.


  빨리 왔다고 생각했지만 극장 안에 들어서자 벌써 암흑천지였다. 일 층은 심상 고등 소학교 교복을 입은 일본 학생들이 질서 정연하게 앉아 있다. 쳐다보기는…. 어둠 속에서도 일본 아이들의 시선이 신기한 동물 보듯 중신을 따라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중신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 이 층 맨 뒤쪽 끝 자리로 가서 좌석을 두어 번 확인한 후 앉았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언감생심! 좋은 자리를 줄 턱이 없지. 극장 안에서도 바깥 세상과 다를 바 없이 가장 후미진 자리다. 바로 옆에 비상문이 있고 그 옆쪽 구석으로 검은 커튼이 쳐진 작은 창이 보였다. 선영의 자리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였다. 중신은 선영이 왔는지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봤지만 그녀와 그녀가 돌보는 세 명의 아이들 자리는 아직 비어 있다. 러일전쟁 승전 영상이 시작되려는 지 아이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중신이 초조한 마음으로 출입구를 유심히 살펴보는데 어딘 가에서 스멀스멀 고소한 콩 과자 냄새가 풍겨왔다. 순간 중신은 선영과 함께 먹으려 준비했던 만주를 안 가져왔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오늘 만을 기다리며 아끼고 아꼈던 그 만주를…. 중신은 자신의 머리를 서너 번 쥐어 박고 서야 어찌 된 영문인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며칠 전 선물로 받았던 목각 부엉이 인형 옆에 만주를 두고 온 것이 틀림없다. 중신은 그녀의 빈 자리를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슬그머니 옆에 있는 비상문을 열었다.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오며 들어올 때 만났던 콧수염 남자가 있는지 주변을 살폈는데 다행히 아무도 없다. 중신은 들어왔던 동선대로 쥐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온 후 사령부 정문의 헌병과 마주치지 않도록 팽나무까지 힘껏 달려 자전거에 올라 탔다. 일차 초소의 절도 있는 헌병은 중신의 얼굴을 기억하는 듯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중신은 목각 인형 옆의 만주를 품 안에 챙겨 넣었다. 엄마가 서둘러 나가는 그의 젖은 등을 쓰다듬었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뛰면서 자전거에 올랐다. 일차 초소의 헌병은 중신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대며 차단기를 올렸다. 중신은 같은 방법으로 요항사령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모퉁이 옆 팽나무에 자전거를 기대 세우고 쥐구멍을 통과해 극장 앞에 도착했다. 아…. 늦었다. 갑자기 극장 안에서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중신은 입구에 콧수염 남자가 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 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만주를 보며 기뻐할 선영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중신은 문을 살며시 당겼다. 그런데 열리지 않는다. 다시 당겨봐도 꿈쩍 하지 않는다. 문을 세게 두드려도 봤지만 소용이 없다. 중신이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갑자기 극장 안에서 천둥이 치는 것처럼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문에 귀를 기울였다. 이건…. 비명이다. 극장 안에서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스케떼! 다스케떼! 


1


『1930년 3월 10일, 진해 요항사령부내 극장에서 대 화재 발생, 일본 소학생 107명, 조선인 1명, 사망자 총 108명 발생』

  이메일 내용을 확인하던 성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나 지금이나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는군.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며 뜬금없이 일본인 친구에게 메일이 왔다. 희한한 사람이다. 언제 적 사건을 가지고 이제 와서 뭐가 궁금하다는 거야. BTS ARMY, 블랙핑크 BLINK 활동을 하며 어쩌다 한번 씩 SNS로 대화를 주고받던 친구가 갑자기 훅 들어왔다. 구실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이 참으로 가상하다. 서울도 아니고 진해에 살고 있는 날 만나기 위해 그럴듯한 이유를 찾느라고 애 많이 썼어. 좋아! 그 정도 부탁이야 애교지 뭐. 충분히 들어줄 수 있어! 성민은 벽에 걸린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손가락 총을 한 번 쏜 후, 블랙핑크의 [How you like that] 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지. 따라라 따! 성민은 앞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긴 후 자리로 돌아와 그녀와 함께 갈 카페와 맛집을 폭풍 검색하기 시작했다.

  “오늘? 우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점심을 다 산다고 그래? 살짝 겁이 나는데. 베트남 음식 좋지!” 성민은 오랜만에 걸려온 형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까마귀 소리가 실은 까치 소리가 아닐까. 오늘은 재수 좋은 일이 생기려는 지 여기저기서 찾는 사람이 많다. 변변한 직장도 못 구한 취업준비생 신분을 까마득히 잊게 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맛있는 걸 먹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성민은 노트북을 닫고 오렌지색 점퍼를 입었다. 


  현지 못지 않은 로컬 인테리어가 느껴지는 식당 입구에 들어서자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휴…. 누가 형 못 알아볼까 봐. 창가 끝 자리에 형과 닮은 모양의 마네킹 같은 게 한눈에 들어왔다. 고개라도 좀 돌려보지. 미동도 하지 않는 진짜 형이다. 

  “형, 요즘 한가해? 점심을 다 먹자고 그러고.” 성민은 햇살 좋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로봇 같이 부자연스러운 형의 손이 메뉴판을 넘기다 점심 특선 두 개를 가리켰다. 

  그럴 줄 알았어. 뭐…. 점심 특선도 감지덕지지. 성민은 내심 월남 쌈이 먹고 싶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눈치를 보아하니 형이 무언가 이야기를 꺼낼 심산이다. 기껏해야 말 못하는 자신을 대신해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이나 좀 해달라는 부탁이겠지. 성민은 컵에 물을 가득 따랐다. 

뜸을 들이던 태민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에서 테이블 보를 정리하던 아르바이트생이 태민을 힐끔 쳐다봤다. 눈에 익은 장면이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형의 우주인 같은 언어에 머릿속이 빙빙 돌 것이다. 주변에 널린 외국인들을 떠올려봐야 그녀의 호기심 탐구는 헛수고에 불과하다. 형이 내뱉는 말은 보통 사람들의 언어 체계와 완전히 다르니까. 성민은 아르바이트생의 느린 동작은 개의치 않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형의 외계어에 귀를 기울였다. 

  차분히 형의 얘기를 듣던 성민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한적한 주택가에서 발생한 일가족 살인사건! 사인은 모두 질식사라…. 살벌하군. 성민은 습관처럼 폰을 들어 검색을 시작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답게 관련 내용이 기사, 블로그, 유튜브 등에 줄줄이 끝도 없이 이어져 나왔다. 사건 관련 이미지에 주황색 벽돌로 만든 정원이 넓은 이 층 집 사진까지 선명하게 나타났다. 

  “의뢰인이 있었어?” 성민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다. 이런 큰 사건을 햇병아리 형에게 부탁한 사람이 있다는 게 상식을 벗어난 거다. 이제 막 구색만 갖추고 소꿉놀이 같은 사무소를 개소한 탐정에게 오랜 시간 날고 뛰는 경찰들도 해결 못하는 미제 사건을 의뢰한다? 납득할 수 없지. 게다가 형은 다른 사람과는 의사소통도 어려운 탐정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자폐인이다. 어느 모지리 같은 놈이 장난쳤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성민이 폰을 들여다보다 크게 하품을 했다. 

  태민은 사흘 전 밤, 퇴근할 때를 떠올렸다. 출입문 앞에 놓여있던 작은 택배상자. 무심코 몇 걸음 계단을 내려가다 엉겁결에 다시 돌아와 상자를 집어 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모양인데 찝찝하게 발신인, 수신인 스티커도 붙어있지 않다. 손톱으로 테이프를 뜯어 상자를 열어보니 작은 분홍색 카드 하나만 덩그러니 들어있었다.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일가족 살인사건. 범인을 잡지 못하면 넌 반드시 죽게 된다.] 

태민은 그대로 상자를 떨어뜨렸다.  

  “형!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이렇게 큰 사건을…. 도대체 어이가 없어.” 성민은 형의 굳은 표정을 보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굳이 형을 협박할 이유가 있어? 난 없다고 봐. 그냥 경찰 수사로는 진척이 없으니까 밑져야 본전인 셈 치고 형에게 겁이나 줘 보자 그런 생각 일거야. 왜? 형을 만만하게 생각하니까. 돈도 없고 기댈 구석도 없는 사람들이 이판사판으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지. 손해볼 일 없으니 그냥 한 번 막 나가 보는 거야. 협박한 놈은 여기 근방 지나가다가 탐정 사무소라는 간판 보고 무작정 들이대본거야. 부엉이 탐정사무소! 어딘지 모르게 좀 만만하게 보이잖아? 아마 피해자 친척 정도 되겠지.” 성민은 잔뜩 인상을 쓰며 목을 주물러댔다. 

  집에서 도난당한 귀중품도 없다. 그렇다고 어린 애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 원장이 원한을 살 만한 인물도 아닌 것 같다. 주변인들의 증언도 호평 일색. 수상한 점은 원장과 그녀의 어린 손녀는 이 층 방에서, 원장의 남편은 거실에서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몸을 웅크린 자세로 발견되었다. 오롯한 질식사. 목 졸린 흔적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외상이 전혀 없다. 인터넷에 떠도는 현장 단서는 두가지. 족적과 작은 실 매듭. 물론 믿거나 말거나 가려서 봐야 하는 카더라 정보다. 

첫 번째 단서. 270미리 운동화 족적. 

  “족적이 도장 찍듯 사건 현장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걸 보면 범인이 일부러 바닥에 발을 세게 찧으며 돌아다닌 것 같은데. 왼발로 두 번, 오른발로 두 번. 이런 건 어린이들 율동에 나오는 깨 금발 뛰기 동작 아니야?” 성민은 벽에 붙은 헤르츠 스피커에서 BTS의 MIC DROP Remix 버전이 흘러나오자 반사적으로 팔과 어깨를 흔들어 댔다. 

  댄스를 해서 그런지 발 동작에 대해서 꽤 날카롭다. 왼발 족적 간 간격 뿐만 아니라 오른발 족적 간 간격 또한 매우 좁다. 이건 한 발로 두 번 씩 뛰며 발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층 거실에 남겨진 족적은 신난 어린이의 장난스러운 동작이지 살인자의 걸음걸이가 아니다. 태민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눈 앞에서 흐느적거리는 댄스 대가의 춤을 바라봤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성민은 자신의 쌀국수 위에 올려 진 고수를 태민의 그릇에 옮겨 닮았다. 

두 번째 단서. 피해자 중 한 명, 손녀의 기도에서 발견된 완두콩 크기 만한 실 매듭. 이건 범인의 살인 동기를 보여 주는 메시지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한 유인 장치일 것이다.

  “그 작은 실 매듭을 기도에 어떻게 넣었을까? 손가락으로 튕겨서 콧구멍에 넣는 것도 상상이 안되고 코를 잡고 억지로 밀어 넣지도 못할 것 같은데 말이야.” 성민이 혀를 찼다.

상상력이 부족하다. 어렵게 보이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최대한 숨을 못 쉬게 압박하고 있으면 호흡을 하려는 압력이 최대치로 올라간다. 그 순간, 숨을 터주면서 밀어 넣으면 그 작은 물체는 충분히 콧구멍을 타고 기도로 직행할 수 있다. 

  “정말 그럴까…. 코로나 검사할 때 콧 속에 집어넣는 그런 걸로 밀어 넣은 것 같은데…. 근데 여기 보니까 피해자가 운영하던 학원이 좀 유명한 곳이네. 형, 아이스크림 학원이라고 못 들어봤어? 어렸을 때부터 인기가 많았어. 원장도 좋고 선생님들도 잘 가르치기로 소문이 자자했지.” 성민이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동생답다. 예로부터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언제나 어디 서든 사람이란 그런 존재다. 김을 빼지 않는 압력솥은 오래 못 가기 마련. 표면적으로 사람 좋은 원장은 보이지 않는 이면 어딘 가에서 강력한 압력을 빼냈을 것이다. 그녀의 인간관계 어디에 구멍이 뚫렸는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선생님, 학부모, 임대인, 청소부, 세무사 등 공적 관계부터 사적 관계까지 하나 씩 따져봐야 된다. 끝도 없이 퍼져 나가는 원장의 인간관계 도에 태민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젊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원장 나이가 좀 있어. 하기야 학원이 오래됐으니…. 음…. 원장이 일본에 있다가 귀국했다고 여기 나오네. 요즘 인터넷 대단해. 어…, 근데 이 사람도 히로시마야.” 성민은 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히로시마…. 천재 오펜하이머가 개발한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되었던 도시. 태민은 쌀국수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셨다. 

  “사실 나도 형에게 보고할 일이 하나 생겼는데 오늘 K-POP 좋아하는 일본 친구가 갑자기 진해에 볼 일이 있다고 연락이 왔어. 그 친구 고향이 히로시마야. 희한하게 요즘 막 히로시마가 여기저기 꼬이려고 하네.” 성민은 양념에 찍은 고기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K-POP이라…. 춤 꾼인 동생이야 K-POP은 신성시하는 숭배의 대상이겠지만 몸 치 입장에서 보면 차라리 사물놀이나 탈춤이 훨씬 접근하기 쉬울 것 같다. 태민은 젓가락에 감긴 부드러운 면을 후루룩 입속으로 빨아들였다. 

  “근데 뭐라고 해야하나…. 피해자들의 이 죽은 자세 있지. 사체가 무슨 행위 예술 조형물처럼 이렇게 될 수 있어? 이 웅크린 자세. 이게 괜히 마음에 걸려. 범인이 사람을 죽이고 허둥지둥 도망쳤다면 어떻게 피해자 세 명이 똑같은 자세로 발견되겠어? 이상하게 섬뜩해지거든. 범인이 피해자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냄새가 나는데. 형은 어떻게 생각해?” 성민이 젓가락을 공중에 휘저어 가며 말했다.

  감수성이 뛰어나다. 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몸을 고양이처럼 잔뜩 웅크린 자세. 이건 범인이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행한 자들에게 죽음으로써 석고대죄를 명령한 것이다. 태민은 스멀스멀 몸을 휘감는 그 원한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유키에는 옷깃을 여미며 히로시마역사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출근 전쟁 속에 휘말려 들어가려니 벌써부터 어깨가 묵직하다. 어두운 정장 차림의 동군과 서군이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양 사방으로 크로스 된다. 그녀는 게임 하듯 전사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화장실에 다녀온 후, 플랫폼으로 올라갔다. 이제 서야 한 숨을 돌리며 익숙한 구석 자리, 친구 같은 자판기 옆에 섰다. 히로시마에서 부산으로 가는 직항이 있다면 꼭두새벽부터 서두르지 않아도 될 텐데…. 푸념을 하고 있으려니 칼같이 기차가 들어온다.

그녀는 크게 호흡을 가다듬은 후, 하카타행 신칸센에 발을 올렸다. 지금부터 정확히 한 시간 십분 후면 후쿠오카에 도착한다. 그녀는 창밖 풍경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와치폰 블루투스로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블랙핑크의 Forever Young이 시작된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고 댄스 클럽에서 연습한 동작을 하나 씩 머릿속에 그려봤다. 블랙핑크를 출 때는 평소에 자각하지 못하는 마그마 같은 불끈거리는 힘이 솟아나는 기분이 든다. 그녀의 입가가 살짝 실룩거렸다. 옆 창가 구석에서 조는 줄 알았던 또래로 보이는 정장 남자가 힐끔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개의치 않는다.

  음악이 끝나 갈 무렵 라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100만엔 입금』. 오 마이 갓! 그녀의 히로시마은행 계좌로 마에다라는 사람이 보낸 돈이다. 세상에….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숫자 0의 개수를 다시 한번 확인한 후 마음을 천천히 진정시켰다. 저물어가던 내 인생도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이건 보통 아르바이트로는 엄두도 못내는 액수다. 한국에 들어가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나머지 900만엔도 확실히 입금되겠지…. 유키에는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입술에 호호바 립밤을 몇 번 문질렀다. 

너 이렇게 밖에 못해? 도대체 몇 번째야? 생각만 해도 머릿속에 스트레스 호르몬이 폭발할 것만 같다. 몇 주 전 소품 가게에서 선물 포장이 느리다고 족히 십 년은 어린 매니저에게 야단 맞았던 일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 앞에 빙빙 돌았다. 홧김에 그만둬 버렸지만 정말 잘 한 선택이다. 계속 다녔다면 건방진 매니저의 뺨을 몇 대는 후려쳤을 지도 모른다. 그 날 이후, 넷 카페에서 빈둥거리며 일할 곳을 찾고 있었다. 이력서를 보낸 회사에서 답신이 왔을까 메일도 수시로 확인했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처럼 메일 함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래 이 참에 메일 함도 청소 좀 하자. 그렇게 시작된 오래된 이메일 지우고 쓰레기통 비우기. 계속되는 하품에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아 그만 게임이나 할까 생각했을 때, 우연히 구인 광고 메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 이상하게 손이 멈췄다. 설마…. 헤드헌팅인가…. 

  『한국어 잘하는 분(테스트 통과 조건)』, 『한국여행이 가능한 분(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여기까진 완벽했다. 『숨 참기 2분 이상 가능한 분(테스트 통과 조건)』 이건 뭐지.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니 해녀 체험 같은 걸 시키려는 걸까, 아니면 무슨 제품을 테스트하려는 것인가.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짜봐도 무슨 일인지 도무지 감이 안 왔다. 솔솔 풍기는 사기 냄새에 그냥 패스하기로 했는데 그 밑에『1000만엔』이란 숫자에 감전된 것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얼마 전 그만뒀던 소품 가게에서 삼 년을 꼬박 일해야 버는 돈이다. 이건 한국어를 잘하는 내게 신이 주신 일생일대의 기회다. 잠시 나가버렸던 정신이 돌아온 유키에는 눈에 불을 켜고 지원서를 작성했다. 

  면접 장소는 과거 히로시마 시민 구장 근처의 하얀색 빌딩 삼층이었다. 일 층에 우체국도 있고 나름 대로변에 위치한 번듯한 건물이라 딱히 불안감은 들지 않았다. 지정된 장소로 들어가자 네모반듯한 모양의 사무실 중간에 노트북이 올려 진 긴 테이블과 의자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다. 왼편은 대로변이 보이는 창가, 오른편은 벽 전체가 기다란 붙박이 거울이 있는 구조였다. 면접 방법에 대한 사전 안내는 이미 받았지만 면접 베테랑으로써 묘한 냉기가 느껴졌다. 들어올 때부터 소지품을 캐비닛에 전부 넣는 것도 생소하지만 지정된 자리에 앉기까지 사람 구경조차 못한 경우는 처음이다. 아무리 코로나 시국이라지만…. 유키에의 맥박이 스스로 느껴 질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도망갈 자세로 무게 중심을 뒷발에 둔 채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디디며 의자로 다가갔다. 노트북 앞에 거의 다 왔을 때 횡단보도 보행 음악이 창 밖에서 들려왔다. 그 때, 모니터를 보니 화상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빨간 버튼을 클릭하자 꾸물거릴 틈도 안 주고 면접이 바로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한국어 테스트는 쉬웠지만 화면 속 면접관이 사람이 아니라 빨강머리 앤 인형이라는 점은 기이했다. 다음 테스트가 시작되자 빨강머리 앤이 기계 음성으로 지시를 내렸다. 모니터 화면이 파랗게 바뀌면 숨을 참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희한한 테스트지만 돈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가능한 오래 버티기 위해 화면이 바뀌기 전에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타이밍을 잘못 잡아 숨을 내쉬고 다시 크게 들이마셨다. 갑자기 화면이 바뀌었다. 짙은 파란색 화면 밑에 하얀색 작은 숫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십 초가 넘어갔다. 집에서 연습할 때보다 힘들게 느껴졌다. 일분 삼십 초 정도가 한계였지만 시도도 안 해보고 포기할 순 없는 법이다. 운이 좋으면 성공할 수도 있는 거지. 오십 초가 넘어가자 코로 살짝 숨을 쉬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도대체 이건 어떻게 측정하는 걸까, 양심에 맡기는 건가, 과연 참아낼 수 있을까. 아…. 괴롭다. 일 분이 넘어갔다. 온 몸이 부르르 떨리고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이런, 배까지 아파온다. 제발…. 1000만엔. 시간이 너무 느린 것처럼 느껴진다. 일 분 삼십 초가 다가왔다. 더 이상 무리다. 나는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무슨 아르바이트인지 몰라도 이건 도저히 못 해먹겠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법이지. 쉬운데 돈을 많이 주는 건 없어. 미련 없이 일어나 오른 편 붙박이 거울에서 머리를 살짝 매만진 후 사무실을 나왔다. 입구 캐비닛에서 소지품을 챙기고 폰을 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회전 문으로 들어간 순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건조한 ARS음성. 어이없게 합격통보다. 실감이 나지 않아 회전 문 속에서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 기계음은 생각할 겨를도,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아르바이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후쿠오카 하카타 신칸센 역에 도착했다. 국제공항역까진 지하철로 갈아타고 두 정거장이다. K-POP에 빠져 성적도 영어 점수도 최하위권이었던 내가 한국어도 잘 할 수 있고 또 운 좋게 진해에 친구까지 있으니 이렇게 희한한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는 거겠지. 불안해할 필요는 없어. 난 충분히 자격이 돼. 그런데 숨 참기는 왜 봐줬을까. 그건 아마도…. 에이 모르겠다. 적당한 지원자가 없었기 때문이겠지. 유키에는 와치폰을 한 번 들여다본 후 종착역인 공항역에서 내렸다. 국외선을 타려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때부터 왠지 모를 찜찜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야밤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 어두운 거리에서 느끼는 그런 느낌이랄까. 설마 혹시…. 이 나이에 예뻐서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스크와 선글라스에 모자로 무장까지 했으니 영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헤이 맨! 숨어있지 말고 앞에 떳떳하게 나타나서 커피라도 한 번 권해봐! 내가 한번 보고 판단할 테니까. 유키에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언뜻 스치는 생각에 미소가 순식간에 걷혔다. 혹시 미행인가…. 젠장! 내게 알바를 시킨 게 못 미더워 사람까지 붙였던 거야? 그녀는 비행기 탑승 전까지 출국 게이트 주변 사람들을 안 보는 척, 한 명 씩 관찰했지만 수상한 남자를 찾을 수 없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도착했다. 국내선인 도쿄보다 가까운 곳, 공항 공기에서부터 이국의 냄새가 느껴졌다. 진해라는 곳은 어떤 곳일까….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와 사전에 알아 본대로 리무진 버스가 정차하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진해로 가는 리무진이 잠정 중단되었다는 게시 글이 보였다. 유키에는 맞은편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 머핀과 라떼로 간단히 속을 채웠다. 여전히 수상한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역시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그녀는 진해로 이동할 대안을 고민한 후, 카페에서 나왔다. 대합실 출구 앞에서 서성이는데 아이돌 같이 스타일 좋은 남자가 다가와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어디 있다가 이제 온거야? 길고 하얀 손가락부터 유심히 살펴봤다. 반지도 괴상한 타투도 없는 환상적인 손이다. 유키에는 관광객을 노린 사기꾼만 아니길 빌었다.

  “혹시 진해 가시면 택시로 같이 가실까요?” 

오 마이 갓! 매끈한 피부에 중 저음의 목소리까지. 나의 반쪽이 드디어…. 유키에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3


  “실물로 보니 훨씬 예쁘네. 근데…. 저기…. 나이가 어떻게….” 

성민이 나이라는 말을 하며 머뭇거리자 유키에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아…. 오해는 하지 않으면 좋겠어. 한국은 위아래를 확실히 따져서 호칭을 붙이거든. 나보다 좀 위인 것 같은데 누나라고 부를 게. 아니, 부를 게요.” 성민은 어색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일본에서는 그냥 편하게 이름 부르거든. 갑자기 호칭 바꾸면 이상하니까 이전처럼 편하게 지내는 건 어때?” 그녀가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뭐, 정 그렇다면…. 오케이! 글로벌 하게 우리 나이 같은 거 따지지 말자. 너 보니까 유튜브 구독자도 많이 늘어났더라. 사람들이 드디어 너희 팀 커버댄스 진가를 알아보는 것 같아. 특히 블랙핑크 커버는 두말하면 잔소리야. 내가 보기에 일본에서 너희 팀 아무도 못 따라가.” 성민은 유키에의 달아오른 볼을 보며 자신이 쏜 큐피드 화살이 그녀의 심장에 정확히 박혔음을 확신했다. 뭐 그까짓 나이쯤 이야…. 그녀의 탄탄한 몸매를 슬쩍 흘겨보니 아메리카노가 달달하게 느껴졌다. 

  “사실 김해공항에서 여기 오는 리무진 버스가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도와줘서 편하게 왔어.” 그녀는 친절한 그 남자가 너무 멋있었다, 아니 이상형에 가까워 택시로 오는 내내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같은 솔직한 말은 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눈 앞에 있는 성민을 보니 친구 이상의 인연은 쉽게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진심 궁금해서 그러는데 그 고리타분한 화재 사건은 왜 알아보는 거야? 자그마치 백 년 가까이 된 사건이던데. 도움이 될까 봐 사실 향토 사학자도 찾아갔어. 별반 건진 내용은 없지만….” 성민은 그녀와 시선을 스치며 그녀가 본심을 말하길 기다렸다.

  “논문을 하나 쓰려는 데 필요해서 그래.” 그녀는 거짓말이 체질에 맞지 않았지만 알바 고용주와 약속은 지켜야 했다. 그들도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 고액을 지급하고 자신을 고용까지 한 것이다. 사람 비위는 못 맞춰도 약속 하난 잘 지킨다. 그녀는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 들었다.

  “논문? 오호 대학원까지 다니는 거야? 한국 관련 학과인가 보네. 어쩐지 한국어를 너무 잘한다 싶었어.” 성민은 사전에 찜 해 놨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과 칵테일 바 그리고 전망 좋은 모텔까지 머릿속에서 모조리 지우기 시작했다. 친구로서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딱 거기 까지만 호의를 베풀자. 그는 아메리카노를 마신 후 눈썹을 찌푸렸다. 

  “국제문화학과라고 한국 관련 학과는 아니야. 정말 우연히 친한 친구로부터 그 화재 사건에 대해 듣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빠져 들었지 뭐야. 이렇게 논문까지 와버릴 줄 몰랐어. 한 바퀴 쭉 둘러 보니까 이 도시가 편안한 곳이란 생각이 들어. 솔직히 말해 전혀 낯설지도 않고. 이번 일 빨리 끝나면 구석구석 천천히 구경하고 싶어.” 그녀는 녹차 라떼를 마시며 성민의 눈썹 위에 난 검은 점을 슬쩍 쳐다본 후 입맛을 다셨다. 

  “원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잘 몰라. 조용하고 있을 건 다 있는데 좀 심심해.”

  “그렇구나. 나 사실…. 사람 한 명을 찾아야 해. 도와줄 수 있어?”

  “사람?” 성민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졌다.

  “응. 이름은 이건우. 1945년 일본 히로시마 출생이고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후, 그러니까 한국이 광복되었던 해에 진해로 귀국했다고 그래.” 유키에는 빨간 딸기 무늬가 있는 노트를 몇 장 뒤적였다. 

  “그럼 그 사람이 네가 조사할 화재 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거네. 맞어?”

  “맞아. 성민이가 도와줄 거니까 사막에서 바늘 찾기는 아닐 것 같네.” 유키에의 보조개가 깊게 패였다.

  “1945년생이면 연세가 꽤 있네. 히로시마는 그 해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 아니냐? 한 군데 다른 곳도 떨어진 것 같은데….”   

  “나가사키!”

  “그래.” 성민은 손으로 무릎을 쳤다. 

  “사실 화재 사건은 그 분이 직접 연관된 건 아니고 돌아가신 그 분 아버님이 관련된 거지만 그 분이라도 만나 보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아.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잘 아실 것 같아서.” 

  “그렇게 되는 거군. 난 솔직히 논문 같은 거 안 써봐서 잘 모르겠지만 참 번거롭네.”

  유키에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순간 유키에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우리 형에게 한 번 부탁해 보는 건 어때?” 

  “너, 형이 있어?” 

  “있고 말고. 나 하고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지.”

  “어떻게?” 쌍꺼풀 진 유키에의 동그란 눈매가 더욱 선명해졌다. 

  “일단 키가 크고 잘 생겼어. 그것도 엄청 잘 생겼어. 헤어스타일도 연예인처럼 멋지고. 형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야. 말이 필요 없어. 그냥 보면 알아.”

  “정말?” 유키에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치명적인?” 그녀는 오락가락하는 성민의 이야기가 헷갈렸다.

  “지구인의 말을 못해. 알아들을 수는 있어도.”

  “무슨 말을 못한다고?”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는 이런 말을 거의 못해. 알아듣기 힘든 외계어를 사용하지.”

  “설마….” 유키에는 장난치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 

  “사실이거든. 나는 가족이니까 익숙해서 알아들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정말 듣고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일거야. 그건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될 거고. 재미있는 건 우리 형이 탐정 사무소를 하고 있다는 거야.”

  “에? 탐정? 과학 수사를 같은 데 나오는 명탐정 그런 거?” 유키에는 콧방귀를 꼈다.

  성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멋지다. 내가 완전 주소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아.” 유키에는 겉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만큼 대단한 건 아니야. 직원도 따로 없고 필요할 때마다 내가 조금씩 도와주고 있는 정도. 딱 거기까지지.” 

  “아….” 유키에는 머그잔을 들었다.

  “그래도 난 우리 형의 능력 만큼은 인정해. 틀림없이 그 사람 찾을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자신할 수 있어?”

  “형의 비상한 능력 때문이지.” 

  “비상한 능력? 이를 테면?” 

  “현실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청력을 타고났어. 왜 동물들 보면 시력이 약하면 후각이 발달하지? 비슷한 거야. 우리 형은 인간의 오감을 청력, 그 하나로 승화시켰다고 봐야 돼.”

  유키에는 의자를 바싹 끌어당겼다. 

  “형이 탐정 일을 시작한 계기도 우연히 그 초능력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

  “어떤 일이 있었어?” 

  “예전에 완전 미궁에 빠졌던 사건의 범인을 우리 형이 딱 잡아냈다니까.”

  “과연….” 유키에가 피식 웃었다. 

  “과학수사도 한계가 있다는 반증이지. 우리 형의 감각이 과학수사를 능가해 버렸어.” 성민은 한 손을 둥글게 말아 귀를 감쌌다. 

  “미안하지만 약간 오버하는 거 아니야?” 유키에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오버? 아직 실상을 잘 모르는 것 같군. 너 혹시 자폐증이라고 들어봤어?” 

  유키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어릴 때부터 자폐증을 앓았는데 감각계 이상으로 귀가 고도로 민감해졌어.” 성민은 형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서는 덧붙이지 않았다.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외출도 힘들었으며 심지어 조용한 밤에도 무수히 뒤척거릴 수 밖에 없었던 끔찍한 시간들을…. 

  “그런 경우도 있구나.” 유키에는 반신반의했다. 

  “이건우라는 사람 찾는데 도움 될 만한 정보는 없어? 우주인 형에게 알려 주려고.” 

  “잠깐만….” 그녀는 빨간 딸기그림 노트를 앞뒤로 몇 번 뒤적거렸다. “한 손이 특이하게 크다고 해.”

  “한 손이 크다? 음…. 일단 알았어. 논문 잘 끝내면 한 턱 단단히 쏠 준비하셔. 우린 ARMY와 BLINK. 같은 배를 탄 거야.” 성민은 하트 모양의 두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당연하지!” 그녀는 성민의 하트를 마음 밖으로 무정차 통과시켰다.


4


  태민은 강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목 캔디 하나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인데 오늘은 예상과 달리 목 캔디 두 개가 다 녹고 나서야 맥도날드에 겨우 도착했기 때문이다. 드라이브 스루로 모닝세트를 주문하는데 여자 점원이 주문을 확인하며 태민을 향해 활짝 핀 꽃 같은 미소를 보였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처음 보는 얼굴이다. 기분 좋은 시선이지만 결말은 뻔하겠지. 말을 하기 시작하면 꽃 같은 미소는 찰나의 빛처럼 사라져 버리니까. 입을 열기만 하면 마치 앞니에 끼어있는 빨간 고춧가루나 검은 김을 봐 버린 그런 표정으로 얼굴 표정이 바뀌니까…. 전혀 새로울 것 없는 패턴이다. 태민은 맥도날드 주차장 구석에서 햄버거를 서둘러 먹은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여자고등학교 정문 근처의 한적한 도로 가. 차를 세우고 힘껏 기지개를 켰다. 맞은 편에 액자 같은 하얀 창이 돋보이는 카페가 있다. 오늘의 목적지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넓게 빠진 내부는 시원시원한 느낌이 들었지만 손님이 없는 탓인지 어딘지 모르게 휑한 느낌도 들었다. 키오스크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결제하니 카운터 안에서 야구모자만 보이는 키 작은 여자가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CCTV는 외부 출입문 쪽에 하나, 내부 카운트 쪽에 하나, 총 두 개가 시야에 잡힌다. 빛바랜 상아색 벽면에는 어디 선가 본 듯한 오래된 영화 포스터가 걸려있다. 여배우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카페 이름과 똑같다. 가게 주인이 보고 또 보는 최애 영화인가 보다. 창가에 앉아 보도블록 위에 떨어진 꽃잎을 바라본다. [When I fall in love] 영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의 후렴 구가 끝나가고 있을 때 뒤에서 사뿐사뿐 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야구모자 여자가 앙증맞은 컵 받침대를 깐 후 살며시 머그잔을 내려 놓더니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사람처럼 잔을 잡은 손을 잠시 멈췄다 땠다. 

  태민은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커피 향을 음미하며 이미 저 세상으로 가버린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가 애용한 단골 카페, 그녀의 창가 자리. 지금 이 순간은 내가 그녀가 되고 그녀는 내가 된다.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고 아른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갑자기 뒤쪽에서 분위기를 깨는 큰 박수 소리가 들렸다. 액자 같은 창으로 비친 모습을 보니 편의점 김밥 같은 헤어스타일의 남자 둘이 보였다. 한 명은 네모 머리, 한 명은 세모 머리다. 행동거지가 꼭 제 집 드나들 듯 익숙하다.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 커피 기계가 요란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단 시애틀로 오십시오!” 네모 머리가 걸어가며 말하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평소에도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라면 나이도 지긋한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이 이곳을 단골까페로 애용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똑같은 박수 소리에 창문 쪽으로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네모 머리가 야구모자 여자에게 브이 모양으로 손가락을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번들거리는 팔대 이 가르마 남자 한 명과 대머리에 턱수염을 기른 남자 한 명이 합세했다. 커피 내리는 소리가 훨씬 더 빨라졌다. 주문도 제대로 하지 않고 멀쩡한 출입문을 놔두고 짜고 친 듯 뒤 쪽 어딘 가에서 함께 들어오는 모습이 아무래도 찜찜하다. 태민은 천천히 일어나 화장실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 움직였다. 수상한 남자들이 힐끔거렸지만 그들의 시선을 뒤로 흘리며 모서리를 꺾어 들어갔다. 통로 끝에 보이는 문을 열고 나가니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이 있었고 그 옆에 다른 유리문이 하나 더 보였다. 바람이 통할 만큼만 유리문을 슬쩍 잡아 당겼다. 순간 농밀한 한약재 냄새가 코를 찔렀고 작은 틈새로 개량 한복을 입은 남자와 여자의 날카로운 눈빛이 빛났다. 태민은 실수로 문을 잘 못 열었던 것처럼 슬며시 문을 닫은 후, 똑같은 동선으로 아무렇지 않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수상한 남자들이 나누는 대화가 귀에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수상한 놈들이 후쿠오카에서 진해로 들어왔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네모 머리의 목소리다. 

  “일본? 그 놈들 정체가 뭐야? 몇 명이나 보냈어?” 가르마 목소리다.

  “정체는 아직 파악 중이고 보낸 숫자는 둘입니다. 여자 하나, 남자 하나.” 세모 머리 목소리다.

  “음….” 

  “근데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뭐?” 

  “남자는 아직 추적 중이긴 하지만 냄새가 나는 것 같고…. 여자는 확실히 옐로우 라는 것 같습니다.” 네모 머리다.

  태민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폰을 열어 터치 펜으로 긁적이기 시작했다.

  “옐로우 라면 그냥 일반인이란 뜻인데…. 왕 선생! 지금 자네는 일반인이 들락날락 하는 것까지 신경쓰나?” 테이블을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가르마의 목소리가 커졌다.

  “출입국관리 쪽과 항공사에서 넘어온 우리 애들 정보에 의하면 적색경보가 떴습니다. 그 둘은 반드시 모니터링이 필요합니다. 제 생각에 루시퍼로 짐작이 되긴 합니다.”

  “루시퍼라고? 말이 된다고 생각해? 당신 그 조직에 대해 알고 나 있는거야?”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적인 사설 정보기관입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정보 말고!”

  “군사 정보 수집이 탁월하죠!”

  “야! 인내심 테스트 해?”

  “이사님. 제가 아는 선에서는…. 도대체 어떤 대답을 듣기 원하시는지….” 

  “루시퍼라는 조직은 말이야. 최고의 실력자들로 구성되어 있어. 맨파워가 글로벌적으로 넘사벽이란 말이야. 알아?” 

  “우리보다 더 대단합니까? 러시아나 미국 쪽 애들이면 몰라도 일본 루시퍼를 우리와 비교하는건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비교를 하려는 게 내 말의 핵심이 아니잖아? 루시퍼에는 실력자들이 차고 넘치는데 왜 일반인을 골라 이 곳으로 보냈냐는 거지? 이유가 있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도 이사님, 루시퍼 아니면 이곳으로  그런 애들이 올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런 조무래기들을 루시퍼가…. 그래 좋아. 남자 하나, 여자 하나다 이 말이 지?”

  “그렇습니다!” 네모와 세모 머리가 동시에 합창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나 본데, 왕 선생이 책임지고 알아본 후 보고해!”

가르마의 말이 끝난 후 한꺼번에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화장실 쪽으로 우르르 몰려나가자 태민은 피아노 치듯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드린 후 카페를 나왔다. 바로 옆 건물에 아까 쪽문 틈새로 봤던 [춘하추동 한의원]이 보였다. 입구의 목판 간판에 다가가자 가게 안 쪽에서 삐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출입문을 당기니 텅 빈 신발장 옆으로 카운터가 보였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테이블 중앙에 덩그러니 큼지막한 호출 버튼만 놓여있다. [부재중 눌러주세요] 라고 버튼 아래에 글자가 붙어있다. 태민이 두리번거리자 뒤에서 개량 한복을 입은 남자가 축지법을 쓴 것처럼 나타났다. 

  “잘 안 되세요? 그건 이렇게 누르시면 됩니다.” 그가 친절하게 태민의 집게 손가락을 부드럽게 잡고 호출 버튼을 지장 찍듯 꾹 눌렀다. 그러자 띵 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처음 오신 것 같습니다. 저희 집에 선생님처럼 미남은 처음이라서.” 폐활량이 차고 넘치는 굵은 성악가 목소리다. 

태민은 고개를 숙였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그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태민을 천천히 훑어봤다.

  태민은 배를 만지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시구나. 아픈 곳을 정확하게 가리켜 보세요.” 그는 이해한다는 듯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태민은 얼떨결에 배꼽 주변을 가리켰다. 

  “좋습니다. 일단 저쪽에 가서 뜸하고 침을 한 번 맞아 봅시다.” 그가 커튼이 쳐진 곳을 가리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개량 한복을 입은 여자가 나타나 태민을 안내했다. 

  태민은 화장실 방향을 가리키며 다녀오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녀가 살짝 웃음을 보였다.

  태민은 아까 들여다봤던 쪽문을 나가 카페와 연결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여자들이 많이 귀찮게 하죠?” 개량 한복의 여자가 명치 쪽에 쑥 뜸을 놓으며 말했다.

  태민은 따끔한 통증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귀걸이도 목걸이도 안 한 그녀의 탄탄한 손목 힘줄 위로 검은 티타늄 시계가 보였다. 

  “아무래도 단전에 기가 쇠한 것 같은데요.” 그녀가 배꼽 밑을 살며시 눌렀다.

  처음 닿는 낯선 여자의 손길에 태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잠시 후 개량한복 남자가 침대 옆에 서더니 주술사처럼 앞뒤로 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곤 성의 없다 느낄 만큼 빠른 속도로 배꼽 근처에 침을 몇 개 놓고 사라졌다. 여자도 쉬세요! 라는 말을 흘리며 커튼을 슬며시 치고 사라졌다. 잠시 후 이상하게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태민은 비몽사몽 간에 귀마개를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카운터 뒤쪽 사무실 공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태민이 눈을 떴다.  

  “저 벙어리 지문 딴 거 조회해봐!” 남자 목소리다. 

  “알았어!” 여자가 답했다.

  태민의 배에 꽂혀 있는 침이 지진이 난 것처럼 덜덜덜 흔들리기 시작했다.


5


  엉터리 숨 참기 테스트…. 괴상한 면접 방식이 떠올라 유키에의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아르바이트 내용과 하등 연관이 없는 걸 왜 했을까…. 알바 매뉴얼에는 해녀 체험도 없고 제품 실험에 대한 내용도 없다. 전혀 써먹지도 못할 것을 굳이 면접 항목에 포함 시킨 이유는 뭘까…. 이 분이라는 명확한 합격 기준까지 있었는데 일 분 삼십 초밖에 버티지 못했던 나를 합격시킨 이유는 도대체 뭘까…. 왜 봐 준걸까…. 불쌍해 보여서…. 그럴 리가 없다. 요모조모 따져봐도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내게 원하는 게 뭐든 현재 상황에서는 돈이 필요하다…. 집중할 수 밖에 없다. 이건우를 찾아라! 지명한 사람을 순서대로 찾아가 미팅하라! 매뉴얼대로 질문하고 결과를 번역해서 전용 앱에 올려라! 그걸로 끝이다. 이런 꿀 알바가 어디 있을까. 일의 목적이야 상관할 일이 아니다. 보이스피싱이나 마약운반 같은 불법적이고 위험한 일도 아니다. 돈 많은 의뢰인이 말 못할 속사정이 있을 것이다. 유키에는 핑크 빛 조명으로 가득한 마법 같은 콘서트장에서 블랙핑크와 함께 몸을 흔들며 환호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제황산 공원으로 향하는 모노레일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의 경사면을 타고 올라가자 원형 광장을 중심으로 곧게 뻗어 있는 방사선 모양의 도로가 시야에 선명하게 펼쳐졌다. 무려 백 년 전에 일본이 계획한 도시라…. 도심 중앙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이라 그런지 모노레일은 지루할 틈도 주지 않고 정상에 도착했다. 유키에는 모노레일에서 내린 후 엘리베이터로 갈아타고 전망대로 올라갔다. 따스한 바다 바람들이 환영 인사라도 나온 것처럼 산을 휘감아 불어왔다. 

  “안녕하세요!” 녹색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알바 매뉴얼 미팅 대상 1호 김 고산이다. 

  “일본에서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찾아오셨습니까?” 그가 산불조심 글자가 적혀 있는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앞머리 몇 가닥이 이마에 찰싹 들러 붙어 있었다. 

  “전화로 말씀드린 것처럼 논문도 써야 하고 때마침 여기 친구도 살고 있고 해서요.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요…. 내가 특별히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한국어 참 잘하네요. 말 안 하면 한국 사람인 줄 감쪽같이 속겠어.”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간병하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이건우씨 연락처는 가지고 계신 가요?”

  “얼추 이년 동안 돌봐 드리긴 했죠. 안 그래도 아가씨 연락 받고 한 번 찾아봤는데 폰도 몇 번 바꾸고 너무 오래전 일이라 전화번호가 남아있지 않아. 생각나지도 않고. 집은 저기 보면…. 잠깐만 이리 와 보세요. 저기 저 건물 근처였습니다.” 그가 원형 광장 근처의 콩알 만한 건물을 가리켰다. 

  유키에의 눈에는 모두 다 거기서 거기로 보였다.

  “그 분 다리가 불편하셔서 그렇지, 손아귀 힘이 얼마나 센지. 처음 만나서 악수했을 때 딱 알아봤죠. 이 노인네 젊을 때 한 가닥 했겠구나….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니까요.” 그가 과장되게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죄송하지만 집 주소를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지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여기서 봐선 어디가 어디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유키에가 허리를 굽신거렸다.

  “주소까지는 모르겠고 그냥 같이 걸어 갑시다. 여기서 별로 멀지도 않은데요.” 그가 모자를 쓰며 전망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히로시마에서 왔다고 하셨죠?”

  “맞습니다.”

  “그 노인네도 히로시마에서 태어나서 한국으로 건너왔다고 했던 것 같은데. 뭔가 인연이 있긴 하네요.”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유키에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일제시대 때, 그 노인네 아버님이 히로시마로 건너갔다고 들었어요. 그 힘든 시절에  사업 수완이 좋았는지 돈을 긁어 모았다는 데 재수 없게 자기 공장 근처에 원자폭탄이 떨어져서 꽝 나버렸다고 그러데. 그래도 죽지 않고 사지 멀쩡하게 귀국한 것만 해도 어디야? 얼핏 듣기로 그 때 원폭으로 한국인만 삼만 오천 명인가 죽었다고 하던데. 피폭자들도 부지기수래요. 일단 방사능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니까 그 때 히로시마에서 한국 들어온 사람들 지금까지도 주변에 다 쉬쉬하면서 살고 있을걸?” 

  유키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암만 생각해도 신기해. 그 아수라장에서. 광복 후라 해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그가 한 숨을 내쉬었다.  

  “자, 그럼 내려가면서 얘기할까요?” 그가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키에는 모노레일 쪽을 바라보던 어색한 시선을 거두고 곧바로 그를 뒤따라 갔다. 

  “아가씨는 이 계단이 몇 개인지 아세요?” 앞서 가던 그가 뒤돌아봤다.

  유키에가 머뭇거렸다. 생각보다 급경사라 그런지 순간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어 올랐다.

  “삼백 육십 오계단. 이게 이래 봐도 유서가 깊은 계단입니다.”

  “네….” 유키에는 그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엉거주춤 조심스레 발걸음을 뗐다.

  “여기 어딘 가에서 넘어지면 일 년 중 그 넘어진 숫자 날에 불운이 찾아옵니다.”

  “네?” 유키에가 양 팔을 벌려 중심을 잡으며 멈춰섰다.

  “하하! 아가씨 보기보다 순진하네요. 농담입니다…. 여기 보기보다 경사가 급하죠? 이럴 때는 요렇게 내려가면 됩니다.” 그가 지그재그로 뛰면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키에는 그를 흉내 내며 좌우로 리듬을 탔다. 현기증이 훨씬 덜했다.

  “참 그 양반, 아들이 하나 있다는 데 간병할 때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고. 한 번 씩 물어봐도 노인네가 암 말도 안 하고…. 그 양반 은근히 감추는 게 많았어요.”

  “아들이 있어요?”

  “그래요. 처음에는 나도 독거노인 인줄 알았다니까. 저마다 나름대로 다 사정이야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제대로 거동도 못하는데 간병인에게만 맡겨 놓고 집에 얼굴도 한 번 안 비추고 말이야. 세상에 그런 막되 먹은 불효자가 어디 있어? 국가 지원금 더 타 먹으려 독거노인인 척 악용하는 사람도 가끔 있지만 그건 아주 드문 경우지. 그 아들이란 놈은 어딘가 살아있으면 한창 사회에서 일할 나이일 거 같은데 자식 새끼가 되어 가지고 아버지 건강도 좀 챙기고 그래야 지. 싸가지 없는 놈! 이건 뭐. 돈 받고 하는 일이지만 나도 마음이 좀 안 좋았어요.” 

  “선생님은 그 분의 부인이나 아들은 본 적이 없겠네요?” 

  “그렇지. 내가 모시는 동안은 계속 혼자 계셨다니까. 언제인가 지금처럼 봄이었던 것 같은데…. 병원에 데려다 드리는 길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 지 이 노인네가 딱 한 번 아들 이야기를 꺼내더라고. 당시에는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다고 해야하나. 자기가 버려진 건 생각도 안 하고 지 아들이라고 팔푼이같이 또 자랑질은. 키가 크고 인물이 좋다고 뭐 그랬던 것 같네. 그래봐야 뭐해, 다 소용없지요.” 그가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지갑에서 아들 사진도 보여줬던 것 같아요. 확실히 기억이 나는 게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애가 말을 타고 있는 사진이었어요. 백마!” 

  “말요?” 유키에가 되물었다.

  “그래요. 희한하다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당시에 그 나이 학생들이 말 탈 일이 흔하지 않잖아요? 일본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그랬을 겁니다. 요즘도 돈이 좀 있어야 취미로도 시키지, 그 집 형편 보면 딱 견적이 나오는데.” 그가 다시 지그재그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승마라…. 유키에는 계단을 내려가며 어릴 때의 기억이 망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오려 애쓰는 느낌이 들었다.

  “저기 제황산 정상에 탑 보여요? 저 탑이 말이죠. 나는 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에 걸린다니까.” 그가 뒤돌아보며 하얀 전망대 탑을 가리켰다.

  “왜요?”

  “그냥 저 꼭대기는 비워뒀으면 좋겠어. 건물 같은 거 올리지 말고. 제황산의 기운이 눌려서 답답한 느낌이 들어요.” 

  “풍수지리상 말씀이세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내가 뭐 제대로 아는 것도 없지만…. 그냥 느낌이 그래요. 관광을 생각하면 브라질 리우 예수상처럼 저런 데다 이순신 장군 동상 큰 거 하나 떡 하니 올리면 좋겠지. 그런데 그냥….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요.”

  유키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빛 배경의 하얀 거탑을 다시 한번 올려다봤다. 

  “지금이야 진해에 일본인들 자취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예전 일제 시대엔 이 동네 주변에서만 오만 명 정도 일본인이 집단으로 거주했다고 그래요. 그건 알고 있죠?”

  “해군관련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사업하는 일본 사람도 많이 건너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이 동네는 그만큼 역사적으로 일본하고 연관이 있다니까. 어, 아이고.” 그가 갑자기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괜찮으셔요?”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바지를 털었다. “참. 그 노인네 연락 되면 나도 좀 알려주세요. 예전에 자기가 타던 차를 거저 가져 가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딱히 필요가 없어 거절했거든. 뭐 보험도 없다고 하고 낡은 데다 좀 귀찮더라고…. 근데 요즘 갑자기 막 탈 수 있는 차가 필요하니까 아쉽네.” 그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6


  성민은 형이 탐정 사무소를 열었을 때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자폐증을 가진 형이 직업이라는 것을 가진다는 것은 애시당초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질투심 따위는 나지 않았다. 그래봐야 탐정이라는 직업은 현실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허울 좋은 듣보잡 중의 하나일 뿐이니까.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었다. 엄마와 두 아이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큰 아이의 손을 잡고 뒤따르는 작은 아이에게 서둘러 오라고 매서운 손짓으로 재촉했다. 저건 아니다. 반대가 되어야지. 갑자기 성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초등학교 4학년 가을운동회. 달리기 계주 주자로 뽑혔던 그날, 저녁 밥상에 앉아 입 속의 밥알을 튀겨 가며 성민은 부모님께 자신의 달리기 실력에 대해 쫑알거렸다. 하지만 심장이 쿵쾅거리며 바통을 이어받을 때도, 전력질주를 하며 코너를 돌 때도, 엄마와 아빠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도란도란 모여 앉은 친구 가족들을 피해 건물 뒤편에서 혼자 김밥을 입 속에 욱여넣을 때는 서러움이 복받쳤다. 부모님이 형을 데리고 서울의 병원에 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왜 꼭 운동회 날에 가야 했을까? 아무리 하늘의 별따기 같은 병원 예약이었더라도…. 서운한 마음은 사라진 것 같았다 가도 울컥하며 수시로 부활했다. 

  성민은 뒤 차의 빵 소리에 급히 액셀을 밟아 십분 정도 달려 형 사무실 건물 앞에 도착했다. [부엉이 탐정사무소]. 상호부터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너무 구려서 웃음만 나왔다.

  “형! 문 좀 열고 환기 좀 시켜라. 쿰쿰한 냄새가 진동해. 사무실도 좀 세련되게 꾸미고. 전문가 느낌 나게. 그래야 미친 놈한테 협박 같은 거 안 받고 제대로 대접 받으면서 일할 거 아니야.” 성민은 귀퉁이에서 마른 고목처럼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는 형에게 짜증 섞인 말투를 내뱉았다. 

  태민은 그제야 벌떡 일어서더니 미니 냉장고에서 비타민 음료 한 병을 꺼내 성민에게 건넸다. 

  “날고 뛴다는 경찰들도 해결 못한 사건이야. 시간도 많이 지났어. 왜 이제 와서 형에게 그러느냐고? 만약에 형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쳐도 이건 아니지. 범인 좀 잡아달라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비상식적이게 택배상자 따위나 보내고. 그런 돌아이의 협박 따윈 무시해도 되는 거 아니야?”

  태민은 상담용 쇼파에 앉자마자 사건과 관련해 방문했던 카페와 한의원에 대해 성민에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기가 차네. 그새 거길 진짜 가봤어? 진짜 그 사건 진지하게 생각하는 거야? 정식으로 의뢰 받은 것도 아닌데.”

  태민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겠다. 카페와 한의원이 화장실 같이 쓰는 게 뭐가 이상해? 그런 화장실은 요즘 널렸어. 요즘 상가 건물들 죄다 그렇지. 형이 밖에 돌아다니지 않아서 모르는 거야. 그리고 얼마든지 사람들은 쪽문 같은 곳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어.” 성민은 비꼬는 말투로 답했다. 

  이야기의 본질은 공동 화장실이 아니다. 

  “그 카페와 한의원이 주인장들끼리 서로 친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주인이 같을 수 도 있는거지.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걸 가지고 왜 그렇게 심각해? 거기 카페에서 한방 차 파는 거 아니야?” 

  태민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남자들이 카페 쪽문으로 들락날락 거렸다면 딱 답 나오네. 단골 한의원에서 침이라도 한 대 맞고 카페로 들어온 거구만. 내 생각에 그 놈들 한의원 원장과 친한 것 같은데.” 성민이 단번에 마신 비타민 병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올려 놓았다. 

  그럴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루시퍼 같은 대화를 나눌 리는 없다. 

  “뭐? 일본 루시퍼?” 성민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이고, 배야….” 그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남자들은 카페와 한의원을 본거지로 활동하는 국제 비밀 조직원일 가능성이 크다. 

  “형! 그렇게 안 봤는데 탐정 일을 해서 그런가 상태가 너무 심각해. 진짜 엿들은 내용이 확실해? 아무래도 너무 앞서 나가는 것 같아.” 성민이 눈썹을 찌푸리며 목을 시계방향으로 한 번 반대 방향으로 한 번 씩 돌렸다. 

  태민이 무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내 생각을 여과 없이 말할 게. 편견 없이 한 번 들어봐. 한적한 카페에서 할 일 없는 백수 놈들이 모여서 그저 작당 모의한 걸 형이 오해한거야. 국제 비밀조직이 할 일 없어서 카페나 한의원을 자기네 아지트로 삼을까? 큰 빌딩 사무실 같은데 들어가 있지.”

  선입견이다. 스파이는 보통 사람들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야 더 안전하다. 그들이 사용한 옐로우 란 말도 스파이들이 쓰는 전문용어다.

  “옐로우…. 처음 듣는데. 블랙, 화이트는 들어봤어도. 근데 말이야 우린 지금 이런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닌 것 같아.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보자고. 경찰들도 손 놓고 있지 않았을 거 아니야.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죽고 나서 주변 관계자들 수도 없이 탐문하고 조사하고 다녔을 거 뻔하지? 그 카페가 피해자의 최애 카페라며? 경찰도 형처럼 제일 먼저 거기 달려가서 조사해봤을 거 아니야? 형이 봤다는 그 놈들 지금도 거기 버젓이 돌아 다니는 거 보면 별 문제없다는 반증 아니야?” 성민은 바닥에 기어 다니는 작은 거미 한 마리를 짓밟아 죽여 버렸다. 

  경찰이라 하더라도 그 남자들의 대화를 엿듣지 못했다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그들의 수상한 대화를 명확히 들었다는 것에 있다. 

  “그래도 처음 봤을 때 딱 풍기는 분위기라는 게 있지 않아? 형사들도 눈치 백 단인데 그런 거 하나 모르겠어? 수상한 남자들 네 명이서 이른 아침부터 카페 쪽문으로 들어와 쑥덕거리고 있으면 의심 받았을 거야. 그치?” 

  그런 놈들일수록 시시각각 역할을 바꾸는 연기에 능하다. 카페에 경찰이 왔을 때는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처신했을 것이다. 

  “긴 말 필요 없고 형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의 죽음이 그 카페 수상한 놈들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거야?”

  그렇다. 학원 원장은 그 남자들의 이야기를 엿듣기 위해 카페에 다녔을 것이다. 

  “희한한 발상이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심전심 그 원장이 형처럼 기괴한 청력의 소유자라고 착각하는 건가…. 그 놈들 모여서 노닥거리는 소리를 원장이 어떻게 들었다는 거야?” 성민은 한 손으로 이마를 툭 쳤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원장은 도청용 특수 이어폰을 끼고 창가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을 것이다. 

  “도청?” 성민은 소리 나게 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신망 있는 학원 원장이 왜 그 놈들 말을 도청해야 하지? 그 놈들 비밀 조직원 같다며? 그 원장이 색다른 취미가 있었던 거야? 변태야? 생각만 해도 끔직해.”

  피해자도 학원 원장이라는 탈을 쓰고 있는 비밀스러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이고 두야. 이건 좀. 형이 그런 유의 영화를 좋아하는 건 알지만….” 성민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형 고집 못 꺾는 거 내가 잘 알지. 형이 그렇게 생각 한다면 어쩔 수 없는 거야.” 성민이 포기한 듯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들은 곧 옐로우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옐로우를 찾는다면 그들과 엮여 있는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사건과의 얼개를 맞출 수 있을 지 모른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려고 하네. 옐로우를 우리가 먼저 어떻게 찾아? 무슨 첩보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어?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봐. 일본에서 김해공항으로 입국한 외국인들 중에 진해로 들어온 사람이 뭐 한 둘이겠어?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성민은 몸을 비틀다 멈칫했다. “잠깐만, 그 옐로우가 후쿠오카에서 들어왔다고 그랬지? 일본에서 김해공항으로 들어오려면 후쿠오카, 오사카, 도쿄…. 후쿠오카라면….” 

  텔레파시! 히로시마에서 김해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후쿠오카를 거쳐야 한다. 직항이 없기 때문에…. 형제의 머릿속에 똑 같은 사람이 떠올랐다. 

  “에이 설마….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은데….” 성민은 불퉁한 입술로 폰을 꺼내 유키에에게 라인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7


  태민은 시동을 걸고 목 캔디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계산 상으로 오늘 목적지까진 목 캔디 두 개가 필요하다. 신성한 의식을 행하듯 안 주머니에 들어있는 하얀색 귀마개를 다시 한번 만지작거린 후 액셀을 밟았다.

  두 번째 목 캔디가 거의 다 녹았을 때 사이드브레이크를 밟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낡은 상가 옆에서 손을 흔들며 서 있는 성민이 보인다. 삼층에 외부의 창문 대부분이 아이스크림 모양의 그림으로 도배 되어 있는 유별난 곳이 눈에 띄었다. 얼핏 보면 영어학원이 아니라 아이스크림 가게 같은 느낌마저 드는 곳이다. 삼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복도에서 뛰어다니는 다람쥐 같은 아이들 소란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혼미 해져 얼른 귀마개를 깊숙이 끼운 후 성민을 따라 학원 입구의 자동문으로 들어갔다. 정면에는 새하얀 벽면에 눈이 부신 LED 조명을 받으며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 모양의 장식이 붙어있고 바로 아래에 [Ice Cream English] 영자가 깔끔하게 매치되어 있다. 좌우 벽면 상단에는 원형 CCTV가 하나 씩 보인다. 원장이 불미스러운 사고를 당했음에도 교실에선 선생님들의 과장되게 큰 목소리와 쫑알대는 아이들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빨간 테 안경의 여자가 미소조차 없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상담 좀 받으려 합니다.” 성민이 학부모처럼 말했다.

  “소개받고 오신 건가요?” 그녀의 입꼬리가 활짝 펴졌다 빠르게 오므라들었다. 

  태민이 고개를 가로젓자 그녀가 태민을 보며 말했다.

  “젊으신 것 같은데 자녀 분 나이가 어떻게 돼요? 혹시 해외에서 살다 온 적은 있나요?”

  “조카가 유치원 다니는데 영어는 거의 걸음마 수준입니다.” 성민의 거짓말에 태민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잠깐 상담실로 가셔서 이야기하실 까요?”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 유치원생 정도의 아이 하나가 성민을 지나쳐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그녀는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유연하게 몸을 비틀어 아이를 살짝 피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건 없고 일단 수업 시간대와 담당 선생님만 확인하려고요. 그리고 그 뭐야…. 팸플릿 같은 거 있으면 하나만 받아가고 싶습니다.” 성민의 준비된 말은 막힘이 없었다. 

  “유치원생 같으면 현재 가능한 선생님은 여기 두 분입니다.” 그녀가 팸플릿 속 생머리 여자와 미소 띈 여자를 가리켰다. 가련한 이미지와 달리 그녀의 검지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태민과 성민은 천천히 팸플릿에서 시선을 땐 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생각해보고 연락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편하신데로 하세요.” 

  “그런데…. 여기 원장님 바뀌셨나요?” 성민이 학원 문을 나서다 멈칫거리며 말했다. 

  “저번에 계셨던 부부 원장님들 말씀하시는 거면 바뀐 지 꽤 됐어요. 좀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새로 오신 원장님은 팸플릿 뒷면에 보시면 프로필이 자세히 나와있어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이 일대에서 여기만 한 곳 없죠. 오히려 새 원장님 오시고 아이들이 더 많아진걸요.” 그녀가 안경 테를 고쳐 잡으며 달빛에 깊게 서린 것 같은 으스스한 눈빛으로 성민을 노려봤다. 

  “이전 원장님 소문이 워낙 좋아서 말이죠. 아이들에게 워낙 진심이라고.” 성민은 그녀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아이들은 금방 알죠. 누가 진짜인지 누가 가짜인지…. 그런데 상담은 주로 엄마들이 오시던데 이렇게 남자 두 분이 함께 오신 경우는 또 처음이네요.” 그녀가 얄팍한 웃음을 지으며 태민과 시선을 맞췄다. 

  “형도 저도 영어 조기교육에 관심이 많아 서요. 좀 극성인 편이죠.” 각본에 없던 질문에 성민이 자연스레 대꾸했다. 태민은 그녀의 묘하게 차가운 시선을 피했다. 그 때, 복도 맨 안 쪽 방에서 남자와 여자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태민의 청각 레이더에 잡혔다. 

  “덤 앤 더머 같은 자식들이 왔어.” 남자 목소리다. 

  태민은 그들의 대화를 좀 더 듣기 위해 성민에게 시간을 끌라고 신호를 보냈다. 

  “선생님, 실례가 안된다면 학생들 교재를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성민의 전매특허인 임기응변이 적시에 터져 나왔다. 

  “물론이죠.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그녀가 복도 끝 방 쪽으로 날카로운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그녀가 남긴 어지러운 향기와 떠드는 아이들 소리 에다 또각 거리는 구두 소리까지 태민의 미간 골이 깊게 패이기 시작했다. 

  “경찰은 아니겠지?” 허스키한 여자 목소리다. 

  “엉성하니 별것 아닌 것 같은데.” 남자 목소리다. 

  “잠깐 저기 머리 긴 놈 봤어? 귀에서 뭘 빼서 주머니에 넣는 것 같았는데.” 여자 목소리다. 

  “저 자식은 한 마디도 안 하는 거 보니까 왠지 귀에 문제가 있는 것 같군. 도청기가 의심되는데….” 남자 목소리다. 

  “역시 신은 공평하다는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아. 난 처음에 저 녀석 후광에 연예인 인줄 알았다니까. 어떻해…. 저런 얼굴로 벙어리라니. 안타까워. 정말.” 

  “너는 그래서 아직도 결혼을 못하고 있는 거야. 너 자신을 알라는 말도 몰라?”

  “잠깐만! 그래도 확인해보자. 저렇게 어리숙해 보이는 놈들이 원래 더 무서운 법이야. 도청탐지기 베티에게 줄게.” 여자 목소리다. 

  곧이어 방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베티! 저 놈들 수상하니까 이거 네 주머니에 넣고 확인해 보자.” 여자 목소리다. 

  “약간 이상하지만 그냥 간단한 질문 몇 가지만 했어요.” 방금 상담했던 여자 목소리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번엔 가져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남자 목소리다. 

방 문 닫는 소리가 크게 들린 후 여자의 또각거리는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희는 이 두 종류를 쓰고 있어요. 전부 미국 교과서 기반이죠.” 그녀가 형형색색의 아이들 그림이 그려진 교재를 내밀며 말했다. 

  그녀의 주머니 속에서 어지러울 정도의 전파가 느껴져 태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 애들은 영어 배우기 좋은 환경이네요.” 성민이 교과서를 한 장씩 넘기며 말했다. “선생님들은 주로 어디에서 오세요?” 각본 상 질문이다.

  “그거야 다양하죠. 왜 그러시죠?” 그녀가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그냥 요즘 학원 선생님 채용도 쉽지 않은 것 같아서요. 특히 지방 같은 경우는 선호하지 않잖아요?” 각본 상 답변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방학원이라고 별다른 건 아니에요. 일 편하고 돈 많이 주고 숙식까지 제공된다면 어디든 못 갈 데가 있겠어요?” 그녀가 어설프게 웃었다.

  “혹시 저도 들어갈 수 있을까요?” 성민도 어색하게 웃으며 각본에 없는 애드립을 했다. 

  태민은 그녀의 주머니 속 물건에서 퍼져 나오는 전파 때문에 현기증을 겨우 버티고 있었다. 복도 끝 쪽에서 다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태민의 귀가 쫑긋거렸다. 

  “도청 아냐. 근데 저 미남은 표정이 왜 저렇게 울상이지?” 남자 목소리다. 

  “아까 너가 말했잖아? 귀가 안 좋은 것 맞는 것 같애. 멀쩡하면 내가 대시 한번 해볼 텐데. 아깝다 아까워. 난 아무리 잘생겨도 장애인은 딱 질색이라니까. 하도 많이 봐서 이젠 질린다 질려.” 여자 목소리다.

  “너 자신을 알라 그랬지?” 

  태민은 귀에 피가 날 정도로 귀마개를 세게 욱여넣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오늘 설명 감사드립니다.” 성민이 말을 끝내자 태민은 서둘러 학원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으니 복도 벽을 따라 줄지어 앉아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얘들 아, 너희 여기 오래 다녔어?” 성민이 앞으로 몇 발자국 다가가 쪼그려 앉으며 아이들 눈높이로 시선을 맞췄다. 

  “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다녔고 앞으로도 쭉 다닐 거예요. 진짜 재미있어요!” 두꺼운 안경테의 통통한 남자 아이가 말했다. 

  “옛날 원장님보다 훨씬 좋아요!” 핑크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 아이가 거들었다. 

  “옛날 원장님은 어땠는데?” 성민이 여자 아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무서웠어요!” 핑크색 원피스 여자 아이가 크게 소리쳤다. “완전 마귀 할머니였어요!” 주변 아이들이 일제히 맞장구 쳤다.

  “뭐가 제일 무서웠어?” 성민이 과장되게 팔을 부르르 떨며 유령을 본 것처럼 말했다.

  “발음이 안 좋은 아이들은 비닐 장갑 낀  손으로 혀를 세게 누르고 막 잡아당기고 해서 토할 뻔 한 적도 있어요. 코도 비틀어서 숨도 못 쉰 적도 있고요!” 핑크색 원피스 여자 아이가 억울함을 호소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잠깐 멈추더니 텅 빈 채로 내려갔다. 

  “하늘만큼 땅만큼 무서웠겠구나? 오히려 지금은 선생님들이 재미있어서 정말 다행이네. 근데 너희들 말이야…. 바닥에 앉아 있으면 엉덩이 차갑지 않아?” 

  “시원해요!” 아이들이 신나게 외쳤다.   “그래…. 열심히 해라!” 성민과 태민은 아이들에게 손을 흔든 후 다시 멈춰선 엘리베이터에 탔다. 태민은 그제서야 파킨슨병 환자처럼 떨리는 손으로 귀마개를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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