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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08번뇌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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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머즈 Oct 02. 2024

108번뇌

(71~75)

71


  김 형사를 만난 뒤 태민은 아이스크림 학원 건물 옆 도로 가에서 늦은 저녁까지 노란 버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여덟 시가 다 되어서야 마지막 운행을 마친 버스가 상가 건물 뒤편에 보이는 학원 전용 주차공간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태민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상가 지하주차장 출구에서 흰색 산타페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민은 시동을 걸었다.   


  산타페는 삼십 오분 정도를 달려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것 같은 좁고 어둑한 산길로 방향을 틀었다. 태민은 더 이상 쫓아가지 않고 산길 입구에 폐가처럼 보이는 오골계집 근처에 차를 은폐하고 시동을 껐다. 귀마개를 빼려던 태민은 차창 옆으로 보이는 폐가의 떨어진 문짝 속 캄캄한 공간 속에서 짐승의 울음 소리가 들려와 순간 멈짓거렸다. 산길을 비추던 산타페의 라이트 불빛이 잠시 후 움직임을 멈췄다. 시간은 정지된 것처럼 고요한데 맥박은 터질 듯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귀마개를 상자에 집어 넣었다. 잠시 후 둔탁한 엔진소리를 내며 차 한 대가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 잠금을 확인하고 한 손으로 가스총을 움 켜 쥐었다. 날렵한 자동차 한 대가 빠르게 지나쳐 익숙하게 산타페가 지나간 길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귓가에 침 삼키는 소리까지 크게 울렸다. 


  “선선하니 밤 공기 좋다! 언제와도 여긴 벌레도 없고…. 베티! 축하해! 너 덕분에 내 인생이 활짝 핀다. 펴. 이젠 좀 두 발 뻗고 자겠어!”

  “그 동안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

  “뭘…. 오히려 내가 고맙지.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사건은 완전히 마무리될 것 같더라고. 이번 일을 통해 뭘해도 되는 사람은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 이건우 부자가 자폭을 해버렸으니까…. 퍼펙트야! 휴…. 그동안 얼마나 마음 졸였는 지 모른다. 파티라도 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야.”

  “자폭은 무슨…. 이건우는 죽었어도 이대근은 아직 건재하잖아?” 

  “그렇긴 해도 앞으로 이대근은 멘탈 회복이 어려울거야. 얼마나 충격이 크겠어? 자기 아빠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는 상태일 수 있고 만약에 자신의 죄를 뒤집어 쓰기 위해 세상과 하직한 걸 알게 되었다고 쳐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지 않겠어? 이래서 부자 사이에도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는 게 중요하다니까. 애초에 서로를 믿지 못하니까 이런 코미디 같은 참사가 발생하는 거니까….” 

  남자와 여자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태민은 청각 주파수를 미세조정했다.  

  “넌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당연히 아니겠지. 베티가 누구야? 큰 그림을 그렸을거야. 그치?” 

  “그래. 내가 원장 손녀의 콧구멍 속에 키링 실매듭을 넣었던 것이 신의 한 수였던 거야. 그 작은 아이디어 하나로 이 사건은 이건우 부자에게로 초점이 맞춰 질 수 밖에 없게 돌아간 거라고. 부자간에는 서로 의심하게 만들어, 둘 다 경찰의 용의 선상에서는 한 발짝도 못 벗어나, 완벽한 덫이랄까…. 사람을 죽이려면 적어도 이 정도 디테일은 갖추어야 롱런하는 거야.”

  “맞아. 완전 인정! 근데 키링인지 뭔지 그건 어디서 났어? 왜 그걸 네가 갖고 있었던 거야?”

  “내가 저번에 말 안했어? 아주 옛날에 이건우가 학원에 찾아와서 지 아들 콧구멍에 누가 키링 실매듭을 쑤셔 넣었냐고 난동을 부렸다고 했잖아? 그 때 내가 잘 챙겨놨었지.”

  “너도 보통이 아닌데. 그런 걸 어떻게 보관할 생각을 했어?”

  “우리 일본 회장님이 그러더라고. 바둑에는 수 읽기라는 것이 있는데 내가 그런 방면에 재능이 보인데. 물론 회장님에 비할 바는 안 되지만.”

  “넌 그런 사소한 물건도 쓰임새가 있다는 걸 직감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아. 영업으로 뼈대가 굵은 나도 그 정도까지 멀리 내다보는 건 무리다.”

  “처음에 회장님이 원장 가족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 믿기지 않았어.”

  “나 같아도 그랬을 것 같은데. 원장도 히로시마에 있을 때부터 회장님 심복이었잖아? 쉽지 않았을 것 같아….”

  “그렇지. 하지만 회장님은 나보다 몇 수를 앞서 보셨던 거야.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가장 믿었던 원장이 그녀가 진두지휘했던 장애아들의 납치 신상정보와 연구소에서 행해지는 일까지 절대 누설해서는 안 될 비밀정보를 누군 가에게 건네고 있었지. 시애틀 카페에서 말이야.”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데 원장은 왜 그랬을까? 책임자가 되어 가지고. 그런 짓 따윈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었을텐데.”

  “글쎄…. 이유는 죽은 원장만 알겠지…. 아마 보험이라도 들어 놓으려는 심산 아니었을까? 원래 원장이 심지가 곧은 사람은 아니긴 했어. 약삭빠른 사람들만의 특징이지.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확보해 놓는 거.”

  “원장은 누구에게 정보를 빼돌린거야?”

  “너 오늘 따라 질문이 많은데?”

  “그냥 궁금해서…. 여기 아니면 다른 데서는 입도 벙긋 못하니까 그래.” 

  “평소에는 허겁지겁 바지부터 내리는 사람이 오늘은 이상해…. 아무튼 시애틀 카페의 카운터 여직원하고 내통을 했어. 너 혹시 [만조]라고 들어봤어?”

  “난 그런 거 몰라….”

  “만조가 여기선 작은 카페와 한의원을 거점으로 삼고 있어도 글로벌한 조직이지. 하여튼 시애틀 카페 쪽의 직원들끼리 서로 정보공유를 하지 않는 시스템이 나에겐 천운이었어. 원장과 카운터 여직원과의 밀접한 관계를 알지 못했던 만조의 남자 직원들이 수시로 카페에 나타나는 원장의 정체를 의심했고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집을 기습할 날을 잡게 되었어. 그 사실을 눈치 챈 원장은 내게 SOS를 날렸고 호시탐탐 그녀를 제거할 기회를 살피던 나는 회장님 승인 하에 그 날,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았어. 원장 가족들을 모두 내 자동차에 태웠지. 클리어! 완벽했어!”

  “원장이 학원과 연구소 비밀을 얼마만큼 얘기했을까? 시애틀 카페 여직원이 설마…. 사고치는 건 아니겠지?”

  “직속라인에게 보고되고 비밀 캐비닛에 잘 저장되어 있겠지…. 만조는 얄팍한 조직이 아니거든.”  

  “아닌 건 알지만…. 혹시 우리가 얘기하는 것도 전부 도청되는 것 아니야?”

  “안심해. 그래서 내가 대화를 가려서 하는 거야. 우리가 여기 말고 언제 다른 장소에서 일 얘기 나눈 적 있어?”

  “전혀!”

  “화장실에서 볼 일 안 보고 엉뚱하게 이곳 저곳에서 싸지르다가 금세 탄로 나는 법이야. 특히 나 같은 사람들은 평상시엔 입에 지퍼를 채워야 하거든. 이 곳을 벗어나면 너와 난 평범한 친구 사이야.”

  “그래. 철저하다 못해 강박적이군.”

  “나는 죽은 원장처럼 눈치가 없진 않으니까. 걱정하지마! 원장도 원래 샤프한 사람이었거든. 가정을 꾸리고 평온한 일상에 무덤덤해지다보니까 사람이 그렇게 변해버린 거야. 회장님이 자신에게 전권을 주고 무조건 맡겼다고 자아도취되어 버린거지. 내가 자기 폰을 내 폰 보듯 훤히 들여다보면서 시시각각 회장님과 연락하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지. 어쩌겠어. 다 제 복이야.”  

  “베티! 그래도 두 번이나 계획이 틀어진 건 찝찝해. 생존자가 발생했으니까.”

  “리멤버 카페 여사장하고 회장님이 보냈던 그 일본 여자애는 운이 좋았던 게지.”

  “그건…. 난 절대 운이 아니라고 생각해. 누군 가가 우리 계획을 지켜보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기억 안나? 계획대로라면 거사 당일 리멤버 카페 여사장이 퇴근 후 집 앞에 나타났어야 했어. 그런데 결국 안 나타났잖아? 지금에서야 편하게 얘기하지만 리멤버 카페 사장이 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너가 그녀를 기다리던 원장 가족을 설득해 네 차에 태우고 거사를 치른다는 것은 아주 위험부담이 컸다고 생각해.”

  “위험부담?” 베티가 콧방귀를 꼈다.

  “그래. 원장 딸이 혹여나 의심해서 네 차를 미행했으면 어떻게 할 뻔 했어? 그리고 아직도 소름끼치는게 네 차에서 쓰러진 사람들을 한 명씩 차에서 빼내어 휠체어로 옮기는데 몸이 힘든 것보다도 갑자기 눈이라도 번쩍 뜰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 했다고.”

  “그렇게 겁이 많아 서야 나랑 어떻게 사귀어? 넌 내가 어떻게 원장 가족을 죽였다고 생각해?”

  “사실 궁금하긴 했어. 내가 도착했을 때,  같은 차 안에 있었던 넌 멀쩡한데 원장 가족들은 전부 쓰러져 있었으니까.” 

  “간단해. 이걸로 해결한 거야.”

  “그게 뭐야? 아니…. 탈? 탈은 왜?”

  “왜긴 왜야? 연구소는 보안이 엄격하기 때문에 안전가옥으로 이동하려면 누구든지 이것을 써야 하거든.”

  “아…. 맞아! 그랬던 것 같네. 예전에 우리도 연구소 특정구역으로 짐 볼 배송할 때 무슨 가면 같은 걸 착용했던 것 같다.”

  “한 번 써볼래? 이거 쓰고 하면 색다른 맛이 느껴질텐데….” 

  “오호…. 그래도…. 사양하겠어!” 

  “이 탈을 쓰면 이 분안에 스르르 잠드는 거야. 어때? 쉽지?”  

  “그럼 원장 가족들은 모두 그 탈을 쓰고 잠들어 버린거군….” 

  “그래. 원장 가족은 자기네가 안전한 연구소로 피해있기 위해 순순히 이 탈을 쓰게 된 거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럼 사건 현장에 발자국은 왜 그렇게 깨금발 뛰기 하듯 찍어서 남겨놓고 사체는 왜 큰 절 하듯 웅크린 자세로 만들어 놓은 거야?”

  “그건 회장님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야!”

  “그런 것까지 지시를 내리다니 말문이 막힐 정도구만…. 그리고 그 광화병원 화재 때 그 일본 여자애도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그런데 어떤 놈이 그 여자애를 병원 밖으로 데리고 나간거야. 이 두 가지 경우는 누군가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거든. 그 놈을 꼭 잡아야해!” 

  “네 말의 의미는?”  

  “그래. 이대근이야. 그 자식을 처리해야해! 우리 계획을 자기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면서 농락하고 있다고.”

  “누구 맘대로 처리해?” 

  “회장님도 똑 같은 생각 아니실까?”

  “회장님이라…. 내가 회장님과 일대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건 잘 알고 있지?”

  “알고 말고.”

  “이대근을 연구소에서 탈출시키는 데 네가 일조했다는 사실을 회장님이 아실까?”

  “그거야…. 모르실 것 같은데….”

  “흠…. 그렇겠지…. 겁 안나? 회장님이 만약 이대근을 직접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어. 당연히 너도 가만히 두지 않았을 거고.”

  “살벌한 소리 그만하고…. 그럼 회장님이 일부러 이대근을 내버려 두고 있다는 애기야?”

  “이대근은 말이야…. 시냅스 연구소가 진행한 프로젝트의 총아라고. 이 자폐신약 프로젝트는 정확히 108명의 실험대상 아이들로 마무리 된다고 회장님은 굳게 믿고 있거든! 그 결정체가 이대근이라고. 프로젝트가 끝나기 전까진 이대근이 무슨 짓을 하든 어떻게 함부로 죽일 수가 있겠어? 그치? 마무리를 잘 한 다음에는 당연히 죽여버리겠지. 내 생각엔 처음부터 회장님은 아이스크림 학원 원장 일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이대근이 몰려가도록 설계를 했다고 봐! 굳이 내 손에 피 안 묻혀도 서서히 죽어가는 거지.”

  “그렇게 되는거였군….”

  “그럼! 우리 회장님이 어떤 분인데…. 이대근은 쓸 만큼 다 쓰고 스스로 무너져버리게 되어 있었던 구도지.”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실험대상 아이들은 108명이야?”

  “그건 회장님 만이 아시지….”

  “정말 미스터리한 사람인 것 같아…. 얼굴 본 사람 있어?”

  “아니! 나도 본 적이 없어! 내가 아는 바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한국말도 네이티브처럼 잘한다는 그 정도….”

  “그렇군….”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할까? 피곤할 건데 이거부터 마셔 둬!”  

  “역시 내 건강 챙기는 건 베티밖에 없어. 너도 마셔!” 

  “그래….”

  “그 동안 고마웠어.”

  “자꾸 왜 그래? 우리 만난 지가 벌써 얼마인데…. 내가 너 덕분에 고등학교 동기들 골프모임에서 어깨에 힘도 주고 다녀.”   

  “그래. 어서 마셔!” 

  “오늘따라 왜 자꾸 챙기려고 그래? 밤새도록 달리고 싶은 거야? 그러면 우리 오늘은 급하게 여기서 하지 말고 분위기 좀 바꿔서 다른 데 가볼까? 갑자기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는데.”  

  “그러셔? 좋으실 데로.”

  “딱 한가지만 더 물어보자! 네 학원 선배 빅터도 네가 죽인 거지?”

  “그건 왜?”

  “아니…. 그냥…. 그런 얼굴로 보지마. 갑자기 눈빛에 살기가…. 와…. 소름이 돋네.”

  “사람을 막 죽이니까 연쇄 살인마 같이 보여?”

  “그럴 리가 있겠어? 나한테 너는 인생 최고의 선물이지. 그냥 이제 아이스크림 학원에 사람도 거의 없는데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하나 궁금해서.”

  “아이스크림 학원과 시냅스 연구소는 당연히 사라질거야. 빅터를 왜 죽였냐고?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잖아.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용가치가 다했어.”    

  “역시 그런거…. 어…. 가슴이…. 이거 뭘 탄 거야? 헉! 이…. 나쁜 년…. 아아….”

  “그러게 서로 즐길 만큼 즐기고 상부상조하면 됐지. 왜 자꾸 질문을 해대고 지랄이야? 넌 영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야 친구! 회장님의 명령이니 원망말게….”

  잠시 후 산타페의 헤드라이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민은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산타페가 태민의 차량 옆으로 지나가는 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뒤쪽에서 쾅!하고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민이 뒤돌아 보니 운전석이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찌그러진 산타페가 논길에 나뒹굴고 있었다. 


72


  “형! 소식 들었어?” 성민이 사무실로 뛰어 들어오며 말했다.   

  태민은 우중충한 몰골로 어제 밤 미행했던 사건을 골똘히 반추하고 있었다. 

  “도레미 스포츠 영업과장이 산속에서 음독으로 죽었는데 그 근처에서 아이스크림 학원 여선생이 교통사고로 즉사했어. 근데…. 이상한 게 둘 다 핸드폰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네.”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던 남자 자동차 옆에 다른 자동차 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근처에서 교통사고로 즉사한 학원 선생의 차 바퀴 자국과 일치했대. 두 사람이 거기서 만났다는 얘기 아냐?”

   태민은 어제 밤 아이스크림 학원 베티를  미행했던 이야기 보따리를 기억을 더듬으며 차분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 형이 끈질긴 건 알아줘. 그 여자…. 형과 저번에 학원에 갔을 때 상담 해준 여자. 맞지?” 성민이 말을 끊으며 질문했다.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휴….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다 큰 코 다치겠어. 그 여자가 킬러일 줄 누가 알았겠어? 엄청난 일이 벌어졌네. 김 형사에게 얘긴 했어?”

  태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형 말대로 라면 이건…. 이건우의 죽음으로 종결 처리된 사건의 진짜 범인이 나타났는데…. 그 범인이 또 죽어버렸단 얘기가 되는거야. 종결의 종결 이라고!”

  태민의 눈빛이 반짝였다.

  “와…. 근데 형의 방식에는 명백하게 한계가 있어. 형이 들었다는 말들을 녹음 할 수 있다면 야 자신 있게 제보도 하고 사건 해결의 결정적 증거로도 쓰일 수 있지만 이건 뭐 순전히 형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거니까 아무것도 해결할 수도 없고 정말 답답하다고. 솔직히 너무 믿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는 것 같아서…. 누가 형 말을 쉽게 믿을 수나 있겠어?”

  태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니 냉장고에서 탄산수 한 병을 꺼냈다.

  “그 베티라는 여자 선생을 조종했던 일본 회장이란 사람은 인정사정 없는 살인마 아니야? 자신을 배신했다면 원장만 죽이면 되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녀 가족까지 전부 몰살시켰대? 삼대를 멸족시키려 한 거네. 휴….”

  태민이 탄산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제와서 돌이켜 보면 형이나 나나 지금까지 헛다리 짚었던 거네. 역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어렵다 어려워. 경찰 용의 선상에도 오르지 않았던 거 보면 베티라는 그 여자 선생도 보통 내기가 아닌 게 확실해. 뭐 그러니까 그 살인마 회장이 사냥개로 데리고 있었겠지만…. 어떻게 DNA 흔적도 안 남기고 희한한 발자국 모양에 엉뚱하게 키링 실매듭이나 어린 아이의 기도 속에 달랑 남겨놓을  생각을 했을까…. 감탄이 나온다. 정말!”

  태민이 고개를 숙였다.  

  “이래서 세상엔 미제사건이 많은 건가봐….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 성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영원히 묻힐 뻔 했던 진실은 아주 작은 실마리, 키링의 실매듭을 베티가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드러났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되는거야?” 

  태민은 화이트보드로 다가가 108이라는 숫자를 적었다. 

  “이게 뭐야? 왠 108?”성민이 머리를 긁적였다. 

  납치되어 연구소로 보내졌던 장애아동의 숫자가 108명…. 그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태민은 폰의 메모장을 뒤적였다. 그리고 화면 속을 뚫어지게 보던 태민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마키노 시즈카] 아이스크림 학원과 시냅스 연구소의 실질적 지배자….    

  “그 마키노라는 일본 회장을 추적할 방법이 있어?” 성민은 반쯤 넋이 나가버린 것처럼 보이는 태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태민은 탄산수 병을 쓰레기 통에 던진 후 화이트보드로 다가가 매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108 숫자 밑에 장례식이란 세 글자를 힘을 주어 적은 후 동그라미를 쳤다.   


73


  태민은 성민과 함께 평온병원 지하로 들어섰을 때 여느 장례식장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검은 영혼들이 우루루 몰려다니며 복도를 떠돌아다니는 그런 느낌, 그런 흘러내리는 냄새가 진동했다. 입구에서 사복 경찰로 보이는 30대, 50대 남성 콤비의 날카로운 눈빛을 뒤로하고 태민 형제는 이건우씨의 활짝 웃는 영정사진 앞에서 엉거주춤 조의를 표했다. 희한하게 이대근은 상주가 있어야 할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형! 일단 저 쪽으로 가자.” 성민이 종이가 깔린 테이블이 보이는 옆 방을 가리키며 태민에게 속삭였다.

  태민이 앞장서서 방으로 이동하여 입구 근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중간 테이블에 연세가 지긋한 남자와 여자가 식사를 하고 있고 바로 두 테이블 앞에는 등을 보이고 있는 검은 옷의 남자가 보였다. 

  잠시 후, 친근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테이블 중앙의 탄산음료를 한 쪽으로 치우고 반찬과 육개장을 보기 좋게 내려 놓았다. 

  “형! 일단 든든하게 먹어두자.” 성민이 수저의 종이 포장을 벗기며 태민에게 말했다. 

  태민은 부침개를 하나 입에 집어 넣으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봤지만 특이사항은 느껴지지 않았다. 태민은 성민이 허겁지겁 육개장을 먹는 모습을 쳐다보며 사이다 한 캔을 따서 컵에 부었다. 그 때, 뒤에서 노인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침묵의 공간을 갈랐다. 

  “아이고…. 아이고…. 오라버니!” 노인이 흐느끼는 소리가 한참 동안 반복되었다. “오빠…. 우리 아들 철이도 데리고 왔어요. 오빠…. 이 좋은 세상에….”

  등을 보이던 검은 옷의 남자가 살며시 빈소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의 옆 얼굴이 태민의 눈가에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 이제 그만 가시죠!” 흐느끼는 노인과 함께 온 남자의 초조한 목소리가 태민의 귓가에 경고 등을 울렸다. 

  태민은 마틴 소장이 왔다고 성민에게 사인을 보냈다. 성민은 살며시 숟가락을 내려 놓고 티슈로 입을 닦았다. 

  “아이고, 건우 오빠…. 이게 무슨 경우에요? 이 모진 세월 고생만 하시고…. 돌아가실 때도 챙겨 주는 사람 하나 없고. 이렇게 초라하게 가요….”  

  “어머니 제가 잘 챙겨드리겠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안녕하세요!”이대근이 기다렸다는 듯 그들 뒤에서 나타나 시찰 나온 장군처럼 고개를 빳빳이 들고 우두커니 섰다.    

  고개를 돌려 이대근을 힐긋 본 노인은 어리둥절해하다 왼팔의 완장을 보고서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를 부축하던 마틴은 반사적으로 이대근의 시선을 피했다.   

  “이게…. 이게 누구냐…. 대근이 맞지?” 노인은 이대근을 껴안으려 구부정하게 다가갔지만 이대근이 얼른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이고…. 많이 컸네. 이젠 못 알아 보겠다. 대근아….” 노인의 눈망울이 금세 글썽거렸다. “철아! 넌 대근이 기억 안 나지? 니가 미국 유학가기 전에 한 번 봤을 텐데. 그 때는 대근이가 거의 꼬맹이였으니까….” 

  마틴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참 얄궂은 운명입니다.” 이대근이 고개숙인 마틴의 정수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차갑게 말을 내밭았다. 

  “대근아…. 면목이 없다.” 노인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똑바로 용서도 구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아! 그 비굴한 고개를 들거라!”

  노인이 울먹이다 대근의 말을 듣고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어머니! 이젠 그만 가시죠. 제가 나중에 다시 들르겠다니까요.”마틴이 노인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 했다.

  “니 어미는 천금같이 여기면서, 고혈을 짜내 너를 뒷바라지한 내 선친은 길가에 차이는 돌 같이도 안 보이더냐? 이 호로자식아!”  

  마틴이 이글거리는 눈망울로 이대근을 잡아 먹을 듯이 노려봤다.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도 진작에 알아보지 못했단 말이냐? 연구소에서 얼굴 맞대고 지낸 세월이 도대체 얼마냐 이 말이다. 인간이 얼마나 무심했으면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네가 진짜 은혜를 아는 인간이라면 지금이라도 니 어미 앞에서 모든 것을 이실직고하고 내게 용서를 빌거라!” 

  “어머니!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마틴이 옆으로 고개가 툭 떨어진 어머니를 부둥켜 안았다. “이제 그만하라니까!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마틴! 난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네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허튼 수작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게 좋아. 너의 목숨은 내 말 한마디에 달려있으니까!”   

  마틴이 쓰러진 노인을 들춰 업었다. 

  “니가 천재 소리 들어가며 미국에서 잘 나갈 때, 네 어미에게 없는 돈까지 끌어다 준 내 아비 마음이 조금이라도 이해가 가느냐? 끝도 안 보이는 터널 속에 갇혀있던 장애아를 키우던 내 선친의 찢어진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하느냐 이 말이다! 네 이 놈! 그 상판대기에 배은망덕! 낙인을 찍거라!”   

  마틴은 노인을 업고 나가다 순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분수를 모르는 놈 같으니. 이젠 말 좀 하게 되었다고 어디서 티비 사극에서나 나오는 그 따위 말을 배웠어? 넌 말이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BP001에 불과해. 알아 들었어?”  

  옆 방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태민이 성민에게 눈짓을 보냈다. 성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틴의 뒤를 따라 나갔다.  

  잠시 후 등을 보이고 있던 검은 옷의 남자가 윗옷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뜻 봐도 종교인 같은 엄숙한 아우라가 풍기는 사람이다. 태민은 타이밍을 잡다가 그를 쫓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야외 흡연부스 쪽에 경찰 콤비가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태민이 주위를 살폈지만 검은 옷의 남자는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태민은 자연스럽게 건물 입구 옆 자판기로 걸어가 캔 커피 하나를 뽑아 들고 숨은 바퀴벌레 잡듯 병원 주위를 샅샅이 뒤져봤지만 검은 옷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태민은 화단 앞 벤치에 앉아 남은 캔 커피를 털어 넣으려 고개를 젖혔다. 그 순간 병원 건물 오 층 맨 오른편 창가에 검은 물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태민은 빈 캔을 쓰레기통에 버린 후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 비상계단을 통해 오 층으로 뛰어 올라갔지만 문이 잠겨있어 로비로 다시 내려와 층 별 안내도를 살펴봤다. 오층…. 개인 입원실이다…. 그 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성민이 병원으로 삼십 분 후면 도착할 거라는 카톡이었다. 검은 옷의 남자….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무한궤도처럼 계속 이어졌다.        

  “형!” 성민이 숨을 헐떡이며 멍한 태민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예전에 내가 아이스크림 학원 버스 미행했을 때 바닷가 간 적 있다고 했지? 기억나?”

  태민이 뒷머리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그 있잖아. 학원 버스 기사가 시냅스 연구소로 들어가더니 갑자기 포터 트럭으로 바꿔타고 연구실에서 나와 바닷가로 갔던 거? 내가 이상하다고 했잖아?”

  그제서야 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이 브리즈라는 요양원에 자기 어머니를 모셔다 드린 후 그 때 그 바닷가로 차를 몰았어. 거기 정박 된 배 이름이 드림호인데 미리 입을 맞춘 것처럼 배에서 나온 남자 둘과 무슨 얘기를 나누더라고. 그 남자들 아직도 기억나는 게 PT코치들처럼 엄청 근육맨들이었거든. 내가 형처럼 귀라도 좋았으면 무슨 말이라도 엿들을 수 있었을텐데…. 아무튼 대충 감은 잡았어! 오늘 밤에 출항하니 준비 잘 하자는 그런 신신당부 분위기였어.”   

  출항…. 태민은 장례식장에서 본 검은 옷의 남자에 대해 얘기했다. 

  “음…. 또 뭔가 촉이 오나보네. 형은 보나 마나 검은 옷이 그 일본 회장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솔직히 난 전혀 모르겠던데. 상식적으로 그 살인마가 여기에 직접 행차하셨을까…. 정 궁금하면 저기 가서 오 층 입원환자 중에 일본인 있냐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성민이 접수대 직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민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 

  “아 싫으면 말고. 아니면 오랜만에 유키에에게 연락해 볼까? 같은 일본 사람이니까 검은 옷 회장에게 접근하기에 뭔가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물론 유키에에게 할 짓은 못되지만….”

  유키에…. 태민은 그녀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일본으로 돌아갔으면 연락이라도 줬을 거고 어디 서울이라도 갔으려나…. 형! 지금 이럴 데가 아니야. 잠깐 이대근이랑 만나고는 와야 되지 않을까? 지금 아니면 그 사람 볼 기회도 없어.” 

  태민은 성민과 함께 이건우씨의 빈소로 다시 내려왔다. 이대근은 우두커니 태민 형제를 지켜보며 빈소 한 가운데서 뻣뻣하게 서 있었다. 사복 경찰도 조문객도 아무도 없었다.   

  “뭐하러 다시 왔어?”

  “네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태민의 말을 성민이 통역했다. 

  “무슨 말? 내가 범인 잡아 달라고 네게 협박편지 보낸 것 말이야?”

  태민이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뭐야? 넌 아직까지 내가 범인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내 죄를 다 짊어지고 저렇게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하냐고?” 이대근의 목소리가 떨렸다. 

  태민이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협박편지에 적어 놨던 내용은 허투루 여기지 않는 게 좋아! 넌 아직 범인을 잡지 못했어!” 

  “당신! 우리 형에게 왜 그런 말도 안되는 협박을 합니까?” 따지고 들려는 성민의 팔을 태민이 붙들었다. 

  “정녕 아직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단 말이냐? 이 멍청한 것들아!”

  “멍청한 것들? 웬만하면 불쌍해서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까 사람을 뭐로 보고. 당신 말투가 왜 그 모양이야? 어디서 깔아보고 있어?” 성민이 태민의 팔을 뿌리치고 불끈 쥔 주먹을 들어 올렸다.  

  태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태민이 너는…. 아무리 너에게 못되게 굴었어도, 아무리 네게 아픔을 남겼어도,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초등학교 때 첫사랑이었던 여자를 그렇게 매정하게 내칠 수가 있냐? 그 여자의 부모와 자식이 무참히 살해 당해도 너는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느냐 말이다. 네가 명색이 탐정이라면 제일 먼저 그 범인을 잡아서 복수하고 싶은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 아니야? 그리고 아직도 너를 잊지 못하는 그 여자의 고통을 그렇게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거야? 왜 내가 나서게 만들어! 왜! 내가 나서게 만드냐고? 너 이자식아! 자폐 속에 숨어있지만 말고 현실을 직시하란 말이야! 이 메마른 자식아! 하마터면 박소영의 목숨도 위험했다고!” 이대근이 목에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형! 저 인간 저거 지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과대망상 수준을 보니 연구소에서 약을 잘못 먹은 것 같은데.” 성민이 태민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태민의 눈가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난 아버지 발인하기 전에 할 일이 있어. 내 협박편지를 허투루 여기지 마!” 이대근이 태민의 눈을 찌를 것처럼 삿대질을 하며 지나갔다. 

  “여기 혼자 있으면 네가 위험할 것 같아서 온거야!” 성민이 태민의 말을 재빨리 통역했다. 

  “내 걱정은 하지를 말고 넌 범인이나 제대로 잡아! 내 손에 죽지 않으려면.”

  “그들은 왜 당신을 잡으려고 하지? 당신이 연구소의 비밀을 알고 있어서야?” 성민이 흥분해서 빠른 속도로 말했다. 

  “내가 죽어야 이 프로젝트는 완결되거든! 됐냐? 이 멍청한 것들아!” 이대근이 히죽거리며 도망치듯 밖으로 빠져 나갔다. 


74


  “형! 언제까지 기다릴거야? 형이 잘못 봤을 수도 있잖아?” 성민이 입을 크게 벌리며 몸을 비틀어댔다. “삼십 분만 있으면 벌써 열 두시다! 사람 할 짓이 아니네. 정말.” 

  태민은 검은 옷이 나타났던 오 층의 유리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돌부처가 따로 없네. 형 같은 스타일은 멍 때리기 대회 같은데 나가면 딱 우승할 거야…. 힘들다…. 무슨 소리라도 들으려면 좀 더 건물 가까이 가야 되는 것 아니야? 저기 저 쪽이 좋은 것 같은데.” 성민은 오 층이 잘 올려다 보일 것 같은 도로가 쪽 빈 공간을 가리키자 태민이 금세 차를 옮겨 붙였다.   

  “장례식장에 이대근 혼자 둬도 되겠어? 형사들도 돌아갔잖아? 검은 옷 잡으려다 이대근을 놓칠 것 같은데. 왠지 불안해…. 거 참 내가 왜 이러지…. 그 정신 나간 인간 걱정을 다 하고….” 

  검은 옷의 남자가 일본에서 온 회장이 맞다면 그가 이곳까지 직접 찾아온 불가피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대근을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손을 썼을 것이라는 베티의 말이 떠올라 태민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 또 무슨 생각에 빠져있어? 급 궁금한 게 있는데 그 회장 말이야. 도대체 뭐하는 인간일까…. 아…. 배도 고프고 음악도 고프고…. 안 되겠지?”

  음악은 안 된다. 하얀 도화지 같던 오 층 창에서 갑자기 검은 붓이 움직이듯 그림자가 몇 번 어른거렸다. 순간 졸리던 태민의 눈동자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어디보자…. 드디어 떴어? 왠지 미행한 번 때려야 할 것 같은데 피곤하면 내가 운전 할까?” 

  태민은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병원 앞으로 마이바흐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춰섰다. 

  “차 보니까 회장 맞네! 저기 로비 쪽에 사람 한 명 나온다. 근데…. 어 저 사람 맞아? 검은 옷이 아닌데….” 성민이 병원 로비에서 나오는 사람을 가리켰다.  

  아래 위로 새하얀 개량 한복 같은 것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비장한 표정으로 병원에서 나왔다. 장례식장에서 봤던 검은 옷의 남자와 비슷한 느낌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가 마이바흐에 오르자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듯 차가 스르르 움직였다.   

  태민은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새벽거리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그를 쫓았다.

  마이바흐는 제황산 공원 쪽으로 방향을 틀어 어둑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섭다 형! 좀 천천히 가자.” 성민이 어둑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얼마나 올라 갔을까…. 마이바흐의 엔진 소리가 뚝 끊겼다. 

  “형! 라이트 끄고 일단 여기에 차 대자.” 성민이 도로가 귀퉁이에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만한 움푹 들어간 공간을 가리켰다. 

  태민은 시동을 끄고 귀마개를 빼서 통에 넣었다.

  “이런 적막한 곳에서는 재채기도 못하겠구만.” 성민이 휴지를 뽑아 조심스럽게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 

  마이바흐와의 거리를 예측해 보면 웬만한 소리는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서운 인간들! 한 놈은 바닷가에서 작당을 꾸미고 다른 놈은 산에서 ….”

  열 두시 정각이 되자 어둠의 기운을 타고 남자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태민의 감은 눈이 꿈틀거렸다. 

  “형! 뭐 들려?” 성민이 속삭였다.

  [가시코미, 가시코미, 모모오수….] 이건…. 일본어다.

  “뭐여? 일본어라고? 그럼 무슨 말인지 모르잖아?”

  단조로운 리듬의 비슷한 주문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경이나 기도문을 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저 사람 왜 남의 나라 산에까지 와서 이 밤에 저럴까? 설마 자기들 죄를 용서해 달라는 그런 기도는 아니겠지?” 

  그 때, 태민이 눈살을 찌푸리며 성민을 향해 살며시 손을 들었다. 

  [다카하시 신이치! 와타나베 준! 사토 아야카….] 차분하고 명료한 목소리로 두 단어씩 또박또박 이름 같은 것을 호명하고 있다.   

  “사람 이름?”

  태민은 숨죽인 채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위쪽 숲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야마모토 다이치! 사토 마코토! 고바야시 히카루….]

  “아직도 이름 말하고 있어?” 성민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태민은 검지를 입술에 살며시 붙였다.

  성민은 목을 몇 번 돌린 후 심드렁한 표정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남자는 계속 이름을 호명하다 급격하게 속도가 느려지더니 드문드문 떨리는 발음으로 울먹이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거의 마지막에 다가온 곳 같은 느낌에 태민은 정신을 집중했다.  

  [… 마..키..노 츠..바..사! 마..키..노 유..우..타! 마..키..노 켄..타! 선영상!] 

  태민이 눈을 번쩍 떴다. 선영상…. 한국인 이름이다. 

  “일본인들이 보통 이름 뒤에 상이라는 말을 붙이잖아? 선영….” 

  태민의 귓가에 마지막에 아주 천천히 감정을 실어 호명했던 세 명의 마키노가 윙윙거렸다. 그리고 일본 회장의 이름, 마키노 시즈카가 순간 머릿속에서 겹쳐지며 태민의 등줄기가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 떨려왔다.    

  “그럼 저 인간이 지금 이 시간에 제사 같은 걸 지낸다고 보면 되는 건가?”

  제사…. 제사…. 왜 여기서…. 많은 일본인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며…. 왜 여기서…. 순간 뒤통수를 둔기로 맞은 것처럼 태민의 머리가 하얀 빛으로 가득찼다.  

  “일단 내려가자. 여기 계속 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성민이 불안한 듯 어둑한 차창 밖을 두리번거렸다.

  태민은 조심스럽게 시동 버튼을 눌렀다. 


75


  [유키에! 늦은 시간에 미안! 급하니까 연락 부탁해!] 성민은 통화가 안되는 유키에에게 라인 메시지를 남겼다.

  “형! 이대근에게 먼저 가 볼까?”  

  태민은 제황산을 내려와 평온병원 방향으로 핸들을 꺽었다. 

  “저 마이바흐 독종들 동 틀 때까지 제황산에서 저러고 있을지 몰라. 꼭 여길 떠돌고 있는 한 맺힌 영혼들을 불러내는 것 같이 들렸다니까. 내 혼까지 빠져나가는 줄 알았네.”

  태민은 평온병원 앞 도로 가에 차를 세우고 성민과 함께 서둘러 이건우씨의 빈소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이 빈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대근은 온데 간데 없었다.

  “한 발 늦은 거 아니야?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네….” 성민은 빈소 주변과 통로 끝의 화장실까지 뛰어다니며 이대근이 있는 지 확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태민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때, 성민이 폰을 들었다.  

  “유키에 살아있냐? 지금 어디야?”

  “나…. 진해….” 

  “아직까지 진해에 있다고? 어딘데? 물어볼게 좀 있어! 급해!”

  “여기는…. 그동안 무서워서 혼자 있었어. 너무 무서워서….”

  “그래. 알았어.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혹시 진해 대화재 사건 당시 조선인 사망자도 한 명 있었지?”

  “그래…. 이건우씨 아버님이 좋아했다는 여자였던 것 같아.”  

  “이름 기억나? 혹시…. 선영상 맞어?”

  “선영상…. 아마도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러면 그 때 일본 어린이 사망자 중에 마키노 라는 사람이 세 명이나 있던데 이건 같은 집 형제 자매야?”

  “마키노? 음…. 내 기억에 당시 야마구치현에서 건너와 진해에서 여관을 경영하던 마키노가의 자식들로 알고 있어. 자식이 네 명 있었는데 그 중 세 명이 영화를 보러 갔다가 화마에 휩쓸렸다고 들었어. 선영상은 마키노가의 보모이고.”

  “아…. 역시 그렇게 돌아갔구나. 혹시 마키노가에 대해 좀 더 알고 있어?”

  “내가 아는 바로는 영화관 화재로 아이 셋을 잃은 후, 여관을 접고 일본으로 돌아간 것으로 들었어. 살아남았던 남자 아이 하나가 마키노가를 크게 일으켜 세웠데. 그 지역에선 꽤 유명한 가문이야.”

  “그렇군. 너…. 마키노 시즈카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봤어?”

  “아니! 처음 들어. 왜?” 

  “그 사람이 진해의 유명한 영어 학원과 뇌 연구소의 실질적 주인이야.”

  “일본 사람이 왜 여기서 그런 사업을 하는 거지?”

  “그야 장애아들을 납치하고 생체실험까지 진행할 목적으로 운영한 곳들이지. 그 마키노라는 살인마를 잡아야 해!”

  “난…. 지금 성민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잘 안 돼.”

  “그렇겠지. 얘기하자면 길고. 아무튼 마키노 그 사람 때문에 희생된 애들만 108명이나 되는 큰 사건이야.” 

  “108명? 너무 끔찍한 일이…. 어떡해 불쌍한 애들을…. 108명…. 잠깐! 잠깐만!”

  “왜 그래?”

  “그…. 진해 대화재 사건 당시 죽은 아이들도 전부 108명이잖아? 일본인 107명, 조선인 1명.”

  “그래? 우연 치곤 너무 오싹한데….”

  “그런 것 같아….”

  “유키에! 일단 전화 끊고 내일 얘기하자! 우리 급히 가볼 데가 있어!”

  “잠깐만! 어딘데?”

  “속천 바닷가로 갈거야. 거기로 이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이 모일 것 같아. 얘기해줘서 고마워!”

  “나도 같이 가면 안될까?”

  “안 무서워?”

  “그냥…. 같이 있고 싶어…. 일본인이 관련된 일이니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우리야 땡큐지!”

  태민과 성민은 병원에서 뛰쳐나와 유키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태민의 차가 유키에를 태우고 속천 앞바다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두시가 가까운 때였다. 

  “형! 저기 정박한 배들 보이지? 저기 끝에 제일 큰 배가 드림호야. 다른 배보다 훨씬 커!”  

  태민이 눈에 띄지 않게 파란 트럭 뒤에 차를 바짝 붙였다.    

  “그동안 속여서 미안해!” 유키에가 뒷좌석에서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제라도 솔직히 얘기해줘서 고마워. 그러면 됐지. 혼자서 어떻게 그런 일들을 감당하고 있었어? 무서워서 혼났겠다. 알바 업체에서 나머지 돈은 받았어?” 성민이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줄 리가 없지….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알바 의뢰인이 날 찾아내 죽일 것 같아. 무서워 죽겠어.”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키노 시즈카라는 사람이 이 모든 짓을 벌였던 거야. 그 사람은 처음부터 네 패밀리 히스토리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네게 알바를 제안했던 모든 것이 전부 의도 된 작업이었어. 네가 말해준 대로 너의 할머니와 이대근의 할아버지의 관계도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는 얘기지. 이건 우리 형이 내린 결론이고 나도 형의 생각에 동의해.”  

  “그렇지만…. 아무리 내 가족사가 진해 대화재 사건과 엮여있다 해도 나 같은 사람이 뭘 할 수 있다고 그런 큰 일을 시켰을까…. 지금까지 제대로 한 것도 없어…. 난 아직까지 이해가 안 돼.”  

  “이건 그냥 우리 형의 상상인데….”   

  “상상?”

  “그래. 마키노가 벌이고 있는 짓은 죽은 자를 억울한 죽음에서 해방시키고 산 자의 영혼으로 뒤바꾸는 종교의식이라고 생각해!”

  “영혼을 체인지 한다고?”

  “마키노는 스스로가 대화재 당시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영혼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해. 반면에 유키에와 이대근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살인자의 영혼을 의미한다고 믿고 있을 거야. 물론 너도 알다시피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 이미 눈이 뒤집힌 거지. 그러니까 방화범의 자손인 이대근과 그가 살려낸 일본인의 자손 유키에를 죽임으로써 마키노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억울함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거야.” 

  “그러면 108명의 장애 아동들을 죽였던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죽은 자의 영혼이 산 자의 영혼으로 바뀌기 위한 하나의 의식이지. 굳게 닫힌 영혼의 이승과 저승의 문을 열어 108명을 바꿔치기 하는 거지. 쉽게 말해 죽은 108명의 어린 영혼들을 산 자의 영혼으로 부활시키기 위해 죄도 없는 108명의 장애 아동들을 죽음의 자리로 대체 시키는 작업을 해왔던 거야.”

  “어떻게…. 그런 짓을….” 유키에의 눈망울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유키에! 우리 형의 상상이야! 뚜껑은 끝까지 열어봐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만….” 유키에는 목이 매어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 우리 형이 극단적 무신론자인데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 같거든. 극과 극은 통한 다나 뭐라나.” 성민은 태민의 긴장한 눈빛을 힐긋 쳐다보며 말했다. 

  그 때, 마이바흐가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듯 태민의 차 앞으로 지나갔다.

  태민이 차창을 조금 열었다.  

  “유키에! 미안한데 지금부터 좀 조용히 해줄래? 우리 형이 집중할 수 있게.”

  유키에가 손으로 입을 가렸고 태민은 청각 주파수를 드림호가 정박해 있는 방향으로 맞췄다.      


  “회장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마틴 소장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네! 자네 덕분에 전세계 자폐시장이 크게 활성화 될 것으로 보여.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말이야.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이제껏 잘해왔으니 마무리도 잘해 주길 바라네.”

  “저…. 죄송하지만 지금부터 제게 딱 한 시간만 주실 수 있습니까?”  

  “한 시간…. 하하하. 이십 년을 해도 안 되는 것을 한 시간이라…. 연구에 대한 열정은 인정하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네. 자폐 신약은 그 정도면 충분하네.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회장님! 저를 믿어주십시오! 제가 준비한 마지막 실험을 마치고 싶습니다.”

  “마틴 소장! 자네는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내가 일본에서 이 새벽에 왜 여기에 왔다고 생각하나? 그 똑똑한 머리로 가늠이 안되는가?”   

  “전….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이대근을 지금 이 시간에, 여기로 잡아왔겠나? 자네에게 미진한 자폐 실험 결과를 보완하라고?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회장님….”

  “누구에게 시간은 덧없는 찰나에 불과하지만 또 다른 이에겐 영겁의 기다림일세. 자네 눈에는 일백 년 가까이 고향을 그리며 타국에서 떠돌고 있는 108명의 어린 영혼이 보이지 않겠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과 뼈가 타들어가며 괴로움에 울부짖었던 내 조상들의 어린 영혼이 보이지 않겠지. 이제 그들을 보내 드려야 할 시간이네.”    

  “회장님…. 무슨 말씀이신지….”

  “잠시 후면 유키에라는 일본 여자가 이 곳으로 올걸세. 이대근과 유키에를 배에 태우고 떠나게!”


  그 때, 태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뒷좌석의 유키에는 텔레그램 메시지를 확인한 후 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회장님! 이야기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저도…. 가는 겁니까?”

  “그럼. 당신과 이대근, 유키에 셋만 가는 거야. 배는 자율운행 프로그램으로 세팅 되어 있으니 아무것도 손댈 필요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유키에라는 여자는….”

  “상세히 알 필요 없네. 곧 나타날 걸세. 태우고 떠나게! 자네의 마지막 임무네. 이대근 꺼내서 와!” 

  “회장님! 왜 이렇게까지 해야 됩니까?”

  “자네가 실험했던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과정을 거쳤어. 왜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그래! 이게 마지막 의식이라고!”       

  “마지막 의식요?” 

  “자네 생각보다 스마트하지 못하군!”

  “회장님….”


  “유키에 왜 그래?” 성민이 넋이 나간 듯한 유키에를 돌아보며 물었다.    

  태민이 들었던 내용을 성민에게 빠른 속도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게 뭐야? 유키에! 절대 가지마! 메시지 무시해!” 성민이 태민의 말을 듣고 유키에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유키에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메시지가 뭐라고 왔는데 그래? 설명해 봐! 얼른!” 성민이 바닥에 떨어진 유키에의 폰을 낚아챘다. 

  태민의 목 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형! 김 형사에게 연락할까?”

  태민이 핸들 위에 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형! 너무 급박해!” 성민이 김 형사가 보내 준 신변안전 앱을 열고 비상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 때, 갑자기 뒷문이 열렸다.

  “유키에! 가지 마!”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는 유키에의 뒷 모습을 본 성민이 차 문을 열려고 하자 태민이 성민의 팔을 붙잡았다. 

  “형….” 

  태민은 아무 일도 아닌 듯 침착하게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유키에! 잘 왔어!”

  “사장님…. 처음부터 저를 알고 계셨던 건가요?”

  “역시 잘 뽑았어. 한국어가 나보다 더 자연스럽네.”

  “사장님…. 제게 원하는 것이 뭡니까? 왜 제게 그러세요?” 

  “군말말고 저기 휠체어 잘 밀고 배에 타서 마틴의 지시를 따르면 되는거야! 이대근 떨어지지 않게 휠체어 조심하고!”

  “왜 나야? 왜 나냐고? 말을 해 줘! 여기로 오면 말해 준다고 약속했잖아! 말하지 않으면 배에 타지 않겠어.”

  “당돌하군. 좋아! 그냥 자그마한 불씨가 보였다고 해두지! 완전히 꺼진 줄 알았던 족속들이 살아날 기미가 보이더라 이 말이야. 찌그러지고 사그라져서 세상에 티끌 만한 흔적도 남기지 못할 줄 알았는데 끈질기게 살아남을지도 모를 불씨가 보이더라 이 말이야. 너와 이대근을 완전히 밟아서 끄지 않으면 머지않아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 응? 이젠 갈증이 해소됐어?”

  “배에 못 타겠다면?”

  “유키에! 다른 사람들 기다리잖아?”

  “당신은…. 조상의 혼을 욕되게 하는 자손이다. 망상에서 깨어나라!”

  “마틴! 이대근 대리고 출발해!” 

  “회장님…. 전….”

  “마지막 경고다! 얼른 배에 오르란 말이야!”

  “기…다려! 흑흑…. 기다리란 말이야!”

  “유키에…. 진작부터 그래야지.” 


  태민과 성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드림호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잠시 후, 마이바흐가 거친 맹수처럼 굉음을 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굳게 닫혀버린 문


  “미안하다. BP001. 아니 이대근….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어.” 마틴은 갑판 위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며 휠체어 손잡이를 힘껏 움켜쥐었다.   

  “왜 그래요? 마키노 회장이 이대근을 죽이라고 하던가요?” 유키에가 퉁퉁 부은 눈으로 머리칼을 휘날리며 그의 뒤에서 외쳤다. 

  “아가씨! 참견 하지마! 나도 이러고 싶지 않다고!” 마틴은 손목시계를 힐긋 쳐다봤다. 

  “여기 보는 사람도 없는데 이야기 좀 해요!” 유키에가 떨리는 손을 주머니 속에 감추며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오지 마! 시간이 없어!” 마틴이 휠체어를 안전바 가까이 붙혔다.

  “도대체 이유가 뭐에요? 왜 그 사람을 죽이려 하죠?”

  “나도 모른다고!”

  “이 배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나도 몰라!”

  유키에가 그의 옆쪽으로 다가가 안전바를 잡고 나란히 섰다. 아주 오래전 어디 선가 불어왔던 그 바다의 새벽 바람이 온 몸을 감싸듯 스치고 지나갔다. 한 번도 본적 없는 조선인 소년과 일본인 소녀가 갑판 위에 나란히 서서 이 바람을 맞고 있는 환영이 나타났다. 소녀가 다가가 소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구해줘서 고마워.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 소년이 바다를 보며 밝게 웃었다.    

  “아가씨 조심해!” 마틴이 휘청거리는 유키에를 향해 소리쳤다.

  “어짜피 다음에는 내 차례 아닌가요?” 소년 소녀의 환영을 본 후 더 이상 유키에의 손이 떨리지 않았다.    

  마틴의 눈빛이 빛과 어둠을 오가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배가 자동으로 속력을 천천히 늦추며 멈춰섰다.

  “달빛이 참 아름답네요.”

  “아가씨…. 이젠 시간이 되었어!” 

  “그거, 이리 주세요! 제가 밀면서 같이 뛰어 내릴게요! 그러면 선생님은 아무 짓도 안한 게 되는 겁니다. 좋죠?” 유키에가 이대근이 쓰러져 있는 휠체어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마틴이 놀란 눈으로 주춤거리더니 휠체어 손잡이를 놓고 뒤로 물러섰다. 

  유키에는 휠체어 손잡이를 꼭 쥔 채 살며시 수동 브레이크를 올렸다.  

  “아가씨는 왜 이곳에 왔어?” 마틴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 봅니다.” 유키에가 소녀처럼 밝은 미소를 지었다. 

  “운명이라니? 무슨 소리야?” 마틴이 손목시계를 다시 한번 힐긋거렸다.  

  유키에의 밝은 미소 속에 슬픔이 번졌다.  

  “이상하네요. 오늘 따라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요. 오카…상….”유키에가 나지막이 엄마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순식간에 블랙핑크 댄스로 단련된 몸을 힘껏 날렸다.   

  마틴은 피할 틈도 없이 그녀에 떠밀려 달빛에 반짝이는 심연 속으로 추락했다. 


  “후회 안해?”

  “….”

  “만약 상황을 되돌릴 수 있다면 네가 좋아하는 여자를 꼭 구해줘!”

  “….”

  “다신 네 발목을 붙들지 않을 테니까….”

  “….”


  “아리가또….”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일본 사람이라 그런지 예의가 몸에 베였네. 베였어. 고맙고 말고!” 김 형사는 물에 빠진 남녀를 모두 구했다고 태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대근은 아직 곤히 잠들어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아리가또….”

  “한 번만 하면 됐어. 이젠 그만 일어나! 아가씨! 어여 일어나! 감기 걸려!” 김 형사는 유키에의 뺨을 세게 후려치려다 멈췄다.

  유키에의 감은 눈가에 이슬 같은 눈물 한 방울이 맺히더니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김 형사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후배가 보낸 마이바흐를 체포했다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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