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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심 Jul 04. 2024

D+153 그런 날

엄마의 일기

그런 날이 있다.

나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굉장히 예민해져 있는 날. 작은 일에 짜증이 솟구쳐 오르는 날.


하루가 가득 담겨있는 설거지통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며 자연스레 고무장갑을 끼고 누군가 직접 떠준 수세미에 세제를 꾹 짰다. 푸쉭 소리와 함께 작은 거품만 나고 세제는 나오지 않았다. 순간 심장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띵하게 울린다. 가슴 깊이부터 올라오는 비명을 목구멍에서 삼키느라 싱크대를 부여잡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지난밤 설거지하면서 세제를 채워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나에게 미룬 어제의 내가 미워진다. 식기건조대에 세워둔 핸드폰 화면 속 아이는 감았던 눈을 다시 말똥말똥 뜨고선 옆에 있는 인형을 못살게 군다. 그러다 카메라를 빤히 바라본다.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너무나 사랑하는 아이.


아, 어쩌면 나의 짜증이 아이를 향하고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빨래를 개키던 남편이 어느새 와서 세제를 채워주고 있었다. 통이 다시 채워지는 걸 보며 내 안에 사랑이 다시 채워지는 게 느껴진다.


오늘도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듣던 튤립 사운드 노래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다시 시작한다.

“싹트네 싹터요 내 마음에 사랑이~”

아이도 작은 배를 조용히 씰룩거리며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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