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지식보다 깊은 질문(3)
우리는 대체로 무언가를 묻으며 살아간다. 살다 보면 우리의 입을 떠난 언어의 대부분은 물음표가 붙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잘 잤어?”, “밥 먹었어?”, “오늘은 어땠어?” 같은 애정이 담긴 물음도 있고,
“저번에 요청한 서류는 준비되었나요?”,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죠?”와 같은 공적인 질문일 수도 있다.
질문이란 위대하다. 그러나 물음표가 붙었다고 해서 모든 질문이 우리를 배움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질문은 선택과도 같다. 세상의 수많은 길 중 어느 쪽으로 나아갈지를 정하는 첫걸음이다. 그 질문이 사소할 수도, 거대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밟는 땅과 마주하는 풍경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러므로 질문 그 자체만큼이나, 질문의 방향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다시 질문한다.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
이제는 이 물음을 살펴볼 차례인 듯하다.
질문은 항상 존재보다 앞선다. 무엇을 알기 전에, 우리는 먼저 묻는다.
“왜?”
이 짧은 질문 하나가 문명을 뒤흔들기도 했고, 인류를 새로운 시대의 문턱으로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가장 적게 질문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질문은 생각의 시작이자 배움의 불씨다. 하지만 오늘날의 배움은, 때로 질문 없는 암기에 가까워지고 있다.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하면, 질문은 곧바로 ‘정답’이라는 데이터로 바뀌고, 그 순간 질문은 사라진다.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 무언가를 묻기도 전에 자동완성이 먼저 답을 보여주는 시대이다.
우리는 정말 ‘묻고’ 있는 걸까?
아니면 묻는 흉내만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인공지능이 대답을 대신해 주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즉각적인 대답’이 아니라, 더 나은 질문이다.
질문의 질은 존재의 깊이와 닮아 있다. 더 깊은 존재만이 더 나은 질문을 할 수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로 성립된다. 더 나은 질문이 더 깊은 존재를 만들어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질문해야 할까?
좋은 질문이란 어떤 것일까?
대개 우리는 질문을 단지 ‘정보를 얻기 위한 도구’로만 여겨왔지만, 질문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자,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이다.
'내가 세상에서 무엇을 보고자 하느냐', '나는 나 자신에게서 무엇을 알고자 하느냐', 그 시선의 방향이 질문을 만든다.
그러니 질문은 세계를 향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내면을 겨누는 화살이다.
다시 말해, 질문이 향하는 방향은 정보가 아닌 성찰을 향해야 한다.
성찰을 향한 질문은 ‘무엇을 아는가’보다, ‘내가 왜 그것을 알고자 하는가’를 묻는 질문이다. 이는 단순히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그 지식이 나와 세계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되묻는 질문이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정보적 질문이다.
하지만,
“나는 왜 기후위기에 대해 무감각한가?”,
“내가 소비하는 삶은 어떤 세계를 지지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성찰의 질문에 속한다.
성찰을 향한 질문은 지식의 수단화를 멈추고, 지식과 나, 그리고 세계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답’을 얻기보다, ‘나’를 다시 쓰기 위한 물음이 된다.
즉, 변화를 향한 물음이라는 말이다.
성찰적 질문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성찰적 질문은 관계적이다. 타자와 나, 사회와 나, 자연과 나의 관계를 묻는다.
그리고 성찰적 질문은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든다. 익숙한 신념을 흔들고, 나의 책임을 직면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개개인의 정체성을 흔들기도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되묻는다.
이 모든 단계는 질문자로 하여금 행동을 요구하며, 실천을 이끌어내게 된다. 단순한 인식이 아닌, 직접적인 변화와 실천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힘을 품고 있는 질문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뇌는 정보를 수용하고 분석하는 데에는 최적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답이 입력되는 순간, 우리의 뇌는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성찰적 질문을 하기 위해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본래 메타인지(metacognition) 능력(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훈련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간주된다.
실제로 많은 학습자는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 모르는’ 상태, 즉 무지의 무지(unconscious incompetence)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 성찰적 질문이 일어나지 않는다.
뇌는 본질적으로 ‘에너지 절약형’ 장치다.
인간의 뇌는 에너지를 많이 쓰는 기관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기존의 패턴과 빠른 결정을 선호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우리가 특별한 의식적 노력을 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고는 빠르고 즉각적인 정답에 만족해 버리게 된다.
성찰은 느리고 의식적인 작동을 요구하므로, 뇌 입장에선 ‘귀찮고 피곤한 일’로 느껴지게 된다.
또한 ‘정답’은 뇌의 보상회로를 자극한다.
새로운 정보를 얻거나 문제를 풀었을 때, '도파민(dopamine)'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면서 뇌에 쾌감을 준다. 이때의 쾌감은 문제를 해결했다는 확실성에서 오고, 이는 반복적으로 ‘정답’ 추구 성향을 강화하게 된다.
반면, 성찰적 질문은 확정된 보상을 주지 않기 때문에 쾌감을 얻기 어렵고, 오히려 뇌에게는 ‘모호함’이라는 불편함을 준다.
하지만 본래 변화란 불편하다.
불편한 현재 상황이 변화를 야기하기도 하며, 변화를 위해 불편함 속으로 몸을 던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 불편함을 감수할 수 없는 삶은 변화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왜 이 사회에서는 어떤 목소리가 늘 침묵당하는가?”
“이 기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가 만든 이 문명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내가 믿는 옳음은 누구에게 고통이 되는가?”
이런 질문을 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은 우리의 뇌가 불편한 작동절차를 밟게 만든다. 또한, 이러한 질문자체가 체제를 불편하게 만들고,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로 그 질문이 우리의 뇌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며,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그러므로 진짜 질문은 ‘불편’에서 시작된다.
익숙함을 깨뜨리고, 타성을 흔들고, 나를 어지럽힌다.
그리고 그 불편을 견디는 사람이야말로, '변화'라는 배움의 가장 깊은 강을 건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라는 존재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질문하기 어렵고, 답을 내기 어려운 질문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검색창엔 단어가 아닌 현상이 질문되어야 하고,
찾고자 하는 답은 지식이 아닌, 또 다른 물음을 이끌어내는 타인의 의견과 사유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질문이 인간을 다시 만든다.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보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짜 배움에 다가간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기술이 너무 빠르고, 선택은 너무 많으며, 사유할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이 시대에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묻는 질문이다.
정보가 아니라 의미를 묻는 질문이다.
권위가 아니라 책임을 묻는 질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가?”를 묻는,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도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 질문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여전히 배우는 존재이고,
여전히 깨어 있는 존재이며,
여전히 ‘인간’이다.
질문은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질문이 세상을 재편해 왔다.
그리고 이제, 질문은 나를 다시 만든다.
배움의 존재가
배움을 향한, 변화를 향한 질문을 계속해 나간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질문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존재로 묻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