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거리로 배가 아픈 누이들이 배를 움켜쥐고, 멀리 어두운 하늘을 본다. 누이의 몸에는 사그라진 생명의 붉은 꽃이 만개하여 뚝뚝 흘러내리고 있다. 고요한 하늘이 달빛의 물결로 가득 찼다. 중추의 달은 쳐다보는 사람을 홀려서 기억의 밤으로 이끈다. 이런 날 영혼은 유독 먼 길을 걷는다.
나는 중추절의 보름달을 순진하게 보지 않는다. 달은 제 몸에 연모의 마음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달은 물의 마음을 잠시 머금었다 내뿜으며 밀당을 한다. 흠뻑 빨아들여 물길을 적신 뒤, 다시 뿜는다. 이런 운행의 질서는 달이 부리는 수작 같은 것이다. 달은 물과 바람이 났는데, 하루 두 번 내뱉는 자연의 이치를 따라 밀물로 차고 썰물로 물러간다.
달빛에 홀린 기억은 나를 어릴 적 살던 고향으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시간의 퇴적층에 쌓인 익숙한 풍경이었다. 장롱 바닥 어딘가에 굴러 잃어버린 구슬이나 종이 인형처럼, 한때 소중하던 것들이 추억의 문턱을 넘어온다. 반질반질 윤기 나던 마루는 동그랗게 옹이를 빠트렸다. 옹이구멍 사이로 본 마루 밑의 세상은, 거미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보듯 흥미진진했다.
그런 소소한 것들에 손뼉 치는 날이 다시 오지 않는다. 다만 추억 속에 비어있는 허전함을 그대로 간직할 뿐이다. 나의 살던 고향을 떠올릴 때면 오만 것들을 제치고, 선명한 풍경처럼 남아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거대한 무엇이 아니라 미안하고 고맙고, 헐거운 마음들이다.
어린 딸에게 예쁜 블라우스와 멜빵 치마를 입히고 싶었던 가난한 어머니의 마음을 기억한다.
"어머니, 올 추석에 애기한테 꼭 입히고 싶은 옷이 있는디요.. 그게 한 이 만원 하는갑더라고요."
"그라믄 우리가 한 사 날 밭 매러 가면 되겄는가?"
할머니와 어머니가 의기투합하여 남의 집 밭일로 받은 일당은 1,500원이었다. 꼬박 닷새를 모아 사주신 추석빔을 기억한다. 레이스가 달린 솔양말의 팽팽하던 끼임까지 말이다. 서울서 내려오는 아이들에게 기죽이고 싶지 않았을 그 사랑은, 경쾌한 레이스처럼 하늘거리며 낡은 사진 속에 남아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내리쏟아주신 사랑은, 미안함이며 깊은 고마움이다.
어머니가 남의 집 품을 팔러 갈 때, 멀찍이 앉아 땅을 파며 놀던 날. 호미가 건드린 구멍에서 도망친 작은 것들을 기억한다. 공벌레가 땅 위를 뒹굴고, 흙을 털고 아장아장 걸어 나오는 땅강아지들. 이런 작은 것들은 제 몸에 연약한 갑옷을 두르고 강한 볕의 세상으로 도망 나왔다. 땅강아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면 이제 막 태어난 강아지를 닮았다. 눈도 뜨지 못한 애기들처럼 허둥대는 것이 꼭 같다. 공벌레는 급히 달음질하다가 슬쩍 건드리는 자극에는 온몸을 도르르 말아서 숨을 꼭 참는다. 밭고랑으로 도망치던 미물들도 오늘 같은 날엔 손톱만 한 창으로 밤하늘의 빛을 가늠하고 있겠지...
감나무마다 단맛이 들어가고 나무 아래 달팽이는 예전처럼 그대로다. 민달팽이는 느리게 느리게 기어간다. 진액을 흙길에 묻히며 눌어붙은 콧물 같은 흔적을 남기며 간다. 지나간 길에는 붓으로 쓰다만 상형문자가 쓰여있어서, 머뭇거리는 시인의 망설임이 생각난다. 제 몸을 통째로 끌어서 이어가는 고달픈 삶. 그 지향이 어디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들이 남긴 상형문은 시인의 걸음을 붙들리게 한다. 민달팽이의 느림에, 마음 한 편의 번민이 스르르 멈춘다.
밭고랑마다 총총하게 줄지어 섰던 참깨며 가을배추는 이제 없다. 걸어 나갈 기력조차 없는 어머니의 밭에는, 푸른 무 청 같은 생명은 없고, 쌓아둔 씨앗 봉지만 그득하다. 밭은 약맞아 죽은 풀들로 누렇게 떠서 시들해졌다. 오직 울타리의 가시나무 사이마다 연노랑 탱자만 풍년이었다. 나의 젊음이 어머니의 늙음을 대신한 것이라면, 그것이 세상의 순리이고 법도라면, 곧이어 올 나의 늙음은 딸의 젊음으로 환원되겠지. 아이에게 기억될 고향이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의 오랜 뜨내기 생활은 뿌리가 들든 가뭄의 풀처럼 푸석하기만 하다.
올 음력 8월의 보름달은 두꺼운 구름 뒤에서 농간을 부렸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달은 제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은밀하게 더듬고 사라진 밤이었다. 내가 물려받은 고향은 아이에게 닿지 못하고, 내년 추석에 노모를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마음은, 멋쩍은 웃음 뒤로 감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