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그리고

by 이채이

구월은 햇살의 양탄자를 타고 온다. 무방비로 떠밀려서 온다. 그 위에 잘 웃는 여자가 앉아 있다.

구월의 볕은 변덕스러운 아녀자처럼 제멋대로다. 그 종잡을 수 없음에 나는 투덜대기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정원에서는 한 무더기 잡초를 제거하는 것으로, 뒤섞인 생각들을 뿌리째 털어버릴 수 있다. 긴 여름을 지나, 까맣게 말라버린 잎을 단 여름의 꽃들을 망설임 없이 뽑아내 버린다.

화끈거리던 여름날은 낙천적이던 수국에게도 화상을 입혔다. 주근깨가 까맣게 엉겨 붙은 얼굴을 한 수국 가지를 잘라주려다, 화상 흉터를 덕지덕지 묻힌 채 성급히 늙어버린 잎들을 보았다.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을 여름이라는 이름으로 허덕였던가. 더위에 버둥거리는 꽃들에게 얼음물을 먹이면서, 얼마나 자주 갈증을 다독였던가.

손가위로 가지를 잘라낼 때 그 줄기의 텅 빔에 놀란다. 물기를 머금던 시절에는 푸르고 유연하던 것이 물기를 말리고 누렇게 떴다. 골수가 빠져나간 뼈처럼 가볍게 툭 부러졌다.

여름내 정원 더부살이를 하던 장대 같은 코스모스를 뽑아낸다. 아래 줄기를 잡고 쑤욱 당기면 남의 땅에 붙어살던 꽃들은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잔뿌리마다 흙을 잔뜩 끌어안고 끝끝내 매달고 있다. 사라진 것들의 자리에는 그들이 꾸려가던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다.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봉숭아의 씨앗은 참을 수 없던 여름의 유혹을 견딘 결실이다. 그들은 스프링처럼 반발하며 중력을 거슬러서, 멀리 하늘로 날아오르는 꿈을 가지고 있다. 봉숭아는 뿌리째 뽑지 말고 줄기째 잘라야 한다. 아우성이 터지지 않도록 달래다 싹둑 동강을 내야 한다.

날아 들어온 씨앗은 떨어진 자리에서 볕을 받고 빗물을 마셨다. 한숨 쉬지 않고 불평도 없이 온전히 받아들였다. 저 자신에게 내린 하늘의 축복만큼 딱 그만큼 덩치를 키워냈다.

잡초는 한 발로 서서, 어린 해바라기가 태양 볕에 고꾸라지고, 한련화가 녹아내리는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한 모금의 물을 아껴 마시고, 온몸으로 빛줄기를 받으며 긴 단식을 해온 수도승 같은 모습이다. 검게 그을린 채 묵상하는 들풀을 끊어낸 자리마다, 지난 삶의 기록이 얼기설기 감겨있다. 입적한 승려의 두루마리 경전처럼 느슨하다.

이렇듯 사람도 저마다의 생이 있다. 발꿈치 하나로 버티고 서서 세상을 구경하던 초화들처럼 말이다.

한 자리에 살아도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할 수 있음을. 공평하게 하늘의 별빛을 나누어 먹고 자란다는 것을. 달빛 아래서도 꽃을 피우고, 제 발아래 씨앗을 떨굴 수 있음을. 평생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동경하다 인생을 낭비한 나는, 9월의 꽃들에게 한 수 배운다. 헤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의 고결한 것이란, 숨 막히는 계절을 잘 살아내서 순리대로 가는 것임을 이제는 알겠다. 잘 웃는 여자가 자연의 법도대로 10월을 기다리고 있다. 수국의 텅 빈 가지를 단호하게 잘라내고, 뿌리의 흙을 털어내는 지금은, 9월의 어느 오후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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