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초록물이 빠지겠던데요."
그녀가 남긴 편지 속 한 줄이 마음을 흔든다.
미련처럼 또 비가 내린다. 아직 단호히 끊어내지 못한 것들이 찬물에 씻겨 내려온다. 도시의 숲길은 온전히 젖었고, 듬성한 가지마다 눈물이 고여있다. 이 비는 계절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계절의 깊어짐을 은근히 독촉하는 듯하다.
빛을 삼키고 생명을 키우는 식물의 본능은, 봄여름 내내 이어졌다. 곧 색이 빠질 것이 자명한 잎들은, 초록 수혈이 끊기면, 그들의 원초적 생명도 그대로 탈진할 것이다. 잎맥은 쪼그라들고, 누렇게 떠서 열을 앓듯 누울 것이다.
비는 예고장을 보내고 있다. 밤이 오면 물길이 갈라지듯 떠나보내야 하고, 정신이 아득해져서 이별마저 수긍해 버릴 거라고 소곤댄다. 나는 모든 조짐을 받아들인다. 다행인 것은, 예고가 아직 ‘작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고편은 닥쳐올 미래를 안심시킨다.
검은 아스팔트 위의 차들은 빛을 밝힌 채 달린다. 가로등은 어스름 속에서도 충실히 꺼지면서, 이 어스름이 아침에 속한 것임을 알린다.
이별이라는 단어는 기억 속에는 없는 말로 여기고, 헤어짐이나 아픔 같은 말은 뚜껑을 닫힌 상자에 넣어둔 걸로 하자. 오래 기억할 것은 사랑이니 연애 같은 말랑한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후로도 오랜 시간 견뎌야 할 외로움과 연민 같은 마음이다. 한동안은 가슴이 뭉클거리고 간질간질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편지 한켠에는, 무던히 피어나던 들꽃을 험담할 수 없을 것이다. 섭생을 거부한 생명을 애써 지키려는 손길처럼, 투명한 잎맥을 따라 흘러드는 수액이 간신히 생기를 이어 넣는다.
그녀의 자전거는 빗속을 거부하지 않고, 물결처럼 유영하며 지나간다. "세상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다면, 미래도 완전히 예측할 수 있다"라는 라플라스의 계산은, 이 흠뻑 내리는 비 앞에서는 무용하다. 계산도 필요 없다. 그녀는 젖고, 시간은 계절을 끌어당기며 예고장에 침착하게 대응하도록 속삭인다.
나는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침착하게 예고장을 읽는다. 자유낙하의 빗물 사이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한 줄 한 줄 행간을 읽는다.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멀리 사는 벗이 수확하는 고구마가 빗물에 얼고 터졌다. 덜 말린 호박오가리가 썩어간다. 엄마 잃은 새끼 고양이는 새 보금자리를 찾았고, 살쾡이는 닭 모가지를 따서 가져갔다. 사소한 일상이 번잡한 하루에 더해지는 변주처럼 여겨지면, 아직은 우리의 삶이 다행으로 느껴진다.
비탈길을 천천히 걷고, 처마 밑에서 먹구름을 피하는 지혜가 있다면, 두려움으로 파고들 만한 해괴한 일들은 없을 것이다. 가을은 그저 깊어지기를 소망할 뿐이라 여기면 된다. 감나무에 오른 수탉이 홰를 치면, 살아남은 암탉들이 알을 낳는다. 열매들이 가을의 고열과 서리를 견디고 나면, 가지마다 빼곡하게 단맛이 박힐 것이다. 이것이 비가 전하는 전부일 터이다.